자크 시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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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2대 프랑스 대통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995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2년 재선에 성공하여 2007년까지 임기를 수행했다. 특이사항으로 재선 당시 프랑스 역사상 최다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사정은 후술.
그랑제콜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 (프랑스어:Institut d'Etudes Politiques de Paris)와 국립행정학교(에나 ENA) (프랑스어: 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을 졸업하고 고급공무원을 거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1] 이후 농림부장관, 총리, 파리시장 등 다양한 요직을 거쳐 마침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2019년 9월 26일 목요일에 프랑스 파리 6구에서 사망했다.
2. 생애
파리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나 1954년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를 졸업하였다.
정치인 시절에 그는 드골주의 우파의 후계자를 자처하였는데, 특이하게도 대학 시절엔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의''' 가두홍보원으로 일한 전력이 있었다.[2] 하지만 본인은 딱히 콤플렉스라고 느끼지 않는지 오히려 이러한 경력을 숨기지 않고 내세우며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하였다.[3]
1974년부터 1976년까지, 1986년부터 1988년까지의 두 차례의 총리를 지냈고, 1977년부터 1995년까지 파리 시장을 지냈다.
드골 사후의 1974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으로 출마했는데 이때는 4위에 그쳤다. 이후 1986년 총선 승리로 프랑스 제5공화국 최초로 동거정부 총리가 되어 처음으로 내정에 실권을 가진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무려 민영화성애자였던 마가렛 대처도 못한 공영방송을 민영화하는 등 극단적인 우파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와[4] 지지율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1988년 대선에서 좌파 후보 프랑수아 미테랑한테 대패하였다.[5] 이후 와신상담을 노리다가 1995년 대선에서 같은 우파였던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를 제치고 2위(1위는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를 차지하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였고, 2차 선거에서 예상보다는 득표차가 적게 나왔지만 좌파의 대표 조스팽 후보를 꺽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지지율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샤를 드 골처럼 분위기 반전을 위해 1997년에 조기총선를 실시했으나 망했어요. 좌파가 대거 승리하면서 죠스팽이 총리가 되었고 시라크는 실권을 잃게 되었다.[6] 그리고 5년간 외교에만 전념하다 2002년 대선에서 총리 시절의 경제정책에 힘 입은 죠스팽과 접전을 벌였다. 예상대로 시라크는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했는데, 좌파 후보들의 난립으로 좌파성향 유권자들의 표가 분산되면서 죠스팽이 3위로 밀려나고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 펜이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벌어졌다. 결국 결선투표에선 중도파와 좌파들까지 오로지 르 펜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시라크에 '''몰표'''를 던지면서(...) 압도적인 득표율(역대 최다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더 자세한건 2002 프랑스 대선 참고.)
여기에 여세를 몰아 3선까지 도전하고자 했으나 너무 많은 나이가 걸림돌로 작용하였고 특히나 2005년에 야심차게 밀어붙였던 유럽헌법안이 부결되면서 레임덕이 극심하게와 결국 2007년도에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후 니콜라 사르코지 당선자에게[7] 대통령직을 넘기면서 재임 12년만에 퇴임하였다.
퇴임 후 4년만에 과거 파리 시장으로 재직 당시 측근 28명을 시청 직원인 것처럼 위장해 월급을 준 혐의로 기소돼 파리 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TF1과 유착 의혹을 받기도 했다. 1987년 TF1을 기업 부이그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민영화한 장본인이 바로 당시 총리였던 자크 시라크 본인이었기 때문. 그래서인지 TF1은 한동안 자크 시라크를 적극 지지하는 논조를 펼쳤다고 한다.
2014년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2014년도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건강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2.1. 사망
2019년 9월 26일 목요일에 프랑스 파리 6구에서 사망했다고 부인이 밝혔다. 프랑스 상하원에서는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시라크 전 대통령을 '자유롭고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추모하였다. 이외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장 뤽 멜랑숑 등 생전 그의 정적이었던 정치인들 역시 애도를 보탰다.
30일.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에서 국장으로 치뤄졌다. 원래는 노트르담 성당에서 이뤄지나 노트르담 성당 대화재 이후 아직 복구 중인 상황이라 시라크 전 대통령의 자택 근처인 생 쉴피스 성당에서 국장이 치뤄지게 됐다.
이 날을 '국가애도의 날'로 선포했고 학교나 공공시설에서도 1분간의 추모 묵념이 진행됐다.
이날 장례식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등 전현직 세계 정상들도 참석했다.
유해는 지난 2016년 사망한 딸 로랑스가 묻혀 있는 파리 남부 몽파르나스 묘지에 가족장 형식으로 안장된다.
3. 기타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적 위치가 우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본인의 말처럼 나름 반성하는 모습을 꽤 보여주었다. 물론 알제리 전쟁에 대한 사죄는 없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무려 '''100년만에 공식적으로 당시 정부와 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또한 비시 정부에서 일했던 과거가 있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2차 대전 시기 비시 정부의 홀로코스트 사건이었던 '벨디브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사과를 거부했던데 반해, 시라크는 집권하자마자 바로 '벨디브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규장각 문제에서도 반환에 회의적이던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한국 측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50주년을 태평양 핵실험으로 기념해 1996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고 알려져있는데, 특히 스모를 굉장히 좋아하는걸로 유명하다고 한다.
전 NATO 사무총장인 영국의 조지 로버트슨(George Robertson)의 권유로 해기스를 먹었고 이후 2005년 G8 정상회의에 앞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난 러.독.프 정상회담에서 "영국이 유럽 농업에 기여한 것은 광우병 밖에 없다. 음식이 형편없는 나라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면서 영국 요리와 영국인들을 싸잡아 비난해 버리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른 바 있다.[8] 이 당시 영국이 유럽연합(EU) 헌법, 예산안, 공동 농업정책, 이라크 전쟁, 2012 올림픽 유치 등 주요 현안에서 사사건건 프랑스의 발목을 잡고 있어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당연히 영국인들과 영국 언론은 그의 발언을 크게 비난했다. 이것도 모자라 동시에 "핀란드 다음으로 영국 음식이 형편없다"고 발언해 가만히 있던 핀란드의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1]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코스이다. 그랑제콜 인맥들의 고위직 독점과 엘리트주의는 프랑스 내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2] 반대로 전임 대통령(이자 시라크가 총리 시절 상관)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젋었을 적엔 극우였다가 후에 좌파로 전향하였다.[3] 하기야 미테랑의 경우도 좌파 정치인이었지만, 핵실험을 반대하는 그린피스 선단을 공격시켜 사망자까지 나오게 하는 등 우파적인 면모도 있었다. [4] 미테랑은 본인은 (상대적으로 사고 날 일이 적고 본인의 권한 내에 있는) 외정 관련에만 집중하면서 이미지를 관리했고, 내정 관련으로는 시라크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두어서 안 좋은 건 시라크에게 죄다 떠민 측면도 있었다. [5] 시라크도 산전수전 다 겪은 구렁이과 정치인이었다지만, 미테랑에겐 유독 약했다. 1988년 대선 당시에도 TV 토론장에서 기선 제압을 하겠다고 "지금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가 아닙니다. 당신과 나는 대등한 후보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라고 선빵을 날렸다가 미테랑이 '''당신 말이 맞소, 총리!(Vous avez tout à fait raison M. le Premier Ministre)'''라고 반격하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은 게 대표적.[6] 이런 상황은 프랑수아 미테랑 시절부터 문제가 되어왔는데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때까지만 해도 항상 보수쪽에서 대통령과 의석과반을 동시에 차지해 문제가 없었으나, 1986년에 처음으로 좌파 대통령 미테랑과 우파 총리 시라크로 이루어진 좌우동거 정부가 탄생하게 되면서 정치계의 고민이 깊어졌다. 미테랑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당 중진을 총리로 임명하려 했지만, 문제는 여소야대라는 특성상 범우파가 불신임안을 던지면 삼일천하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테랑은 우파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했고, 각료 선임을 비롯한 내치의 전권을 시라크에게 넘겨주었지만, 핵발사권 등 군사, 외교 분야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 선언하면서 국방장관와 외무장관의 임명권을 행사했다. 이후 이것이 일종의 규칙이 되었다. [7] 원래는 시라크의 정치적 제자였으나, 1995년 대선에서 에두아르 발라뒤르 후보를 지지하면서 시라크의 눈밖에 났고, 1997년 총선에서 낙선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시라크의 영원한 오른팔 알랭 쥐페 전 총리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선거권을 박탈당하면서 어부지리로 UDF 후보 자리를 따냈지만, 시라크는 1995년의 배신감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후에도 2012년에는 올랑드, 2017년에는 마크롱 지지를 선언하며 대놓고 사르코지를 골탕먹였다(...).[8] 물론 이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마이크가 꺼진 줄알고 저지른 일종의 뒷담화(...)였으나 마이크가 켜져있는 바람에 그대로 언론에 노출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