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제21대 대통령
프랑수아 모리스 아드리앵 마리 미테랑
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출생'''
1916년 10월 26일
프랑스 누벨아키텐 자냑
'''사망'''
1996년 1월 8일 (향년 79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image]
'''신체'''
170cm[1]
'''학력'''
생폴 앙굴렘 고등학교[2] (졸업) (-1934년)
소르본 대학교 (법학 / B.A.) (1934-1937년)
시앙스포 (법학[3] / DESS[4]) (1937년)
'''정당'''
'''사회당''']] (1971년-1996년)'''
'''직업'''
정치인, 변호사, 언론인
'''가족'''
父: 요셉 미테랑
母: 이븐 로랭
배우자: 다니엘 미테랑 (1944년 결혼)
슬하: 3남 1녀
'''종교'''
가톨릭무종교(불가지론)
'''재임기간'''
'''1981년 5월 21일1995년 5월 17일'''
1. 개요
2. 생애
2.1. 정치인이 되기 전
2.2. 사회당의 기린아
2.3. 집권 전
3. 1981년: 집권 성공
4. 1988년: 재선
5. 사망
6. 종합적 평가
6.1. 긍정적
6.2. 부정적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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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정치가, 제21대 대통령.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상 사회당이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이자 역대 프랑스 대통령 중 '''최장기간 재임'''한 대통령이기도 하다.[5]

2. 생애



2.1. 정치인이 되기 전


샤랑트 주에서 철도기관사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였는데, 학창 시절에는 유대인 추방을 주장하는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극우 단체 크루아 드 푀 (불의 십자단)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던 흑역사가 있다.[6] 이에 대해 미테랑은 말년 인터뷰에서 멋모르고 가입했다가 15일만에 환멸을 느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비시 프랑스 정부 초기에 하급 관료로서 협력했다. 그러나 후에 전향하여 좌파 계열 레지스탕스에 합류하여 활동하게 된다.

2.2. 사회당의 기린아


자유 프랑스파리 탈환 이후 사회당의 전신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에 입당, 1946년 11월 총선에서 부르고뉴 지역에서 하원의원에 출마, 2위로 당선된다. 이후 1958년까지 계속된 제4공화국 내각에서 제대군인부, 해외영토부, 내무부, 법무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며 대중들에게 젊은 행정전문가로 인정받았고, 윈스턴 처칠, 콘라트 아데나워, 엘리자베스 2세 등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미테랑의 정치적 성공과 별개로 제4공화국은 각 정파의 난립, 식민지 정책에서의 혼선, 군부의 쿠데타 협박 등으로 민심을 잃고 있었고, 그 틈을 타 샤를 드 골이 정치에 복귀하면서 4공화국 체제는 막을 내리고 5공화국 시대가 막을 올린다.

2.3. 집권 전


1965년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 가능성이 희박한 가운데 좌파 단일화를 주장하며 출마, 1차 투표에서 31%의 득표를 얻어 돌풍을 일으켰고 2차 투표에서는 무려 45%의 득표를 올리며 선전하였다. 덕분에 좌파의 대표주자로 우뚝서게 되었고, 이어 1967년 총선에서 미테랑이 이끈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는 드골이 이끄는 여당이 1차투표에서 압승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2차투표까지 끌고 가는 등 선전했다.
전후 내재되어 있던 각종 사회문제가 폭발하면서 68운동이 터지자, 드골은 이를 정치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여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당초 68운동으로 좌파가 선전할 것이 예상되었으나, 좌파의 분열과 드골의 반공주의 정서 자극으로 오히려 좌파는 의석이 대폭 줄어드는 참패를 겪었고, 미테랑은 1969년 대선에 불출마한다. 미테랑 대신 출마한 가스통 뒤페르는 5%의 득표율로 탈락하는 수모를 겪고 공산당 등 다른 좌파 후보들도 중도성향의 알랭 포에르에게 패배하며 1차 투표에서 모두 낙선했다. 2차 투표에서도 공산당이 중도파인 알랭 포에르를 지지하지 않은 결과 드골파의 조르주 퐁피두가 당선되면서, 프랑스 좌파는 급속히 침체되었다.
대선 참패 후 미테랑은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좌파를 재조직하는 데 나섰다. 미테랑의 사회당은 1973년 총선에서 우파의 과반수 확보를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선전하면서 세를 회복했다. 1974년 퐁피두가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미테랑은 좌파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43%의 득표율을 기록, 1위로 결선에 진출하였지만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밀려 49.1%로 석패하고 말았다.
1977년 지방선거에서 좌파가 압승을 거두었고, 여세를 몰아 1978년 총선에서도 20년 만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실제로는 예상을 뒤엎고 우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사회당은 선전하였지만, 좌파 연합을 구성한 공산당이 부진했던 탓. 1979년에는 소련아프간 침공으로 의견 대립이 발생하면서 공산당과의 연합이 깨지는 이중고를 겪었다. 그러나 미테랑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80년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여 또다시 압승을 거두었다.

3. 1981년: 집권 성공


[image]
1981년 5월 대통령 당선 직후의 모습.[7] 사진 속에서 들고 있는 장미꽃은 사회당의 상징이기도 하다.
1981년 대선을 앞두고, 미테랑의 지지율은 현직 대통령인 데스탱에게 지속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데스탱이 자크 시라크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면서 미테랑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탄다. 미테랑은 공산당과의 선거연합이 해소된 상황에서 28%의 득표를 얻어 2위로 결선에 다시 진출하였다. 미테랑은 7년전과 달리 토론회에서 데스탱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 결과 결선에서 51.7%의 득표율을 얻어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미테랑의 선거운동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자크 아탈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통령 선거운동의 요소를 모두 갖춘 현대적 대통령 선거운동이 바로 이때 시작되었다." 라고 말했다.
미테랑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의회를 해산한 가운데서 치러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었고, 공산당은 각료자리를 얻기 위해서 반쯤 울며 겨자먹기로 사회당과의 연정에 합의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미테랑은 의욕있게 개혁정책을 펼치며 사형제도를 폐지하였고, 주 39시간 노동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국유화 정책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민영방송도 개국하였으며[8], 정보화 사회 구축을 위해서 미니텔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작업에도 착수하였다.[9]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기업들이 기술경쟁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라 국유화 정책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각종 개혁정책도 생각보다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재정적자만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미테랑은 연립정당인 공산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긴축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경기침체는 계속되었고 긴축정책의 부작용으로 실업률이 늘어나면서, 지방선거에 연이어 참패하는 상황이 되었다. 1985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핵실험을 강행하고 그린피스 선박을 폭파(...)하는 상황이 널리 보도되면서 사회주의자로써의 미테랑의 이미지도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결국 1986년 총선에서는 우파에게 원내 다수를 내주면서[10] 자크 시라크를 총리에 임명해야 했다. 미테랑은 시라크에게 군사, 외교 분야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겨주면서 실권을 잃었다.[11]
그러나 자크 시라크는 무리한 민영화와 긴축정책을 밀어붙인 결과 노조의 총파업을 불러오면서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미테랑은 이 틈을 타서 외교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이며 1기 집권 당시의 실책을 만회하고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이는 미테랑이 의도한 바라고도 할 수 있다. 시라크를 총리에 임명하면서 내정에 관한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그만큼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진 것이다. 반대로 시라크는 많은 권한을 넘겨받았지만 그만큼 욕도 바가지로 얻어먹으면서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4. 1988년: 재선


그리하여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1차 투표에서 무려 '''34%'''를 얻는 저력을 과시했고 결선투표에서도 '''54.02%'''의 여유있는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다.[12] 그리고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렀는데, 사회당은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다른 좌파정당과의 연정을 통해 안정적인 정국운영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1기 집권 초기와 다르게 민영화된 기업을 다시 국유화 시키지 않는 등 비교적 보수적인 정책을 집행하였다.[13] 이후에는 유럽통합에 매진하였으며 걸프전에 프랑스군을 파병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 들어 각료들의 비리와 경기침체로 미테랑 대통령의 지지율도 다시 떨어졌고 결국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단 53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아 미테랑은 다시 실권을 잃게 되었다.[14][15] 거기다 총선 몇 달 뒤에 피에르 베레고부아[16]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켜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93년 총선 이후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총리로 한 동거정부가 형성되었지만 발라뒤르가 시라크의 선례를 거울 삼은 덕분에 큰 마찰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다가 1995년에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image]
(1995년 퇴임 당시의 모습. 후임자 자크 시라크와 함께)

5. 사망


[image]
미테랑의 타계를 보도한 1996년 1월 22일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퇴임한지 불과 8개월 후인 1996년 1월 8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전립선암이었는데, 대통령 시절부터 이미 증상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재임 중에는 비밀에 부쳐졌다.[17]
죽음을 불과 며칠 앞두고서 주치의에게 "항암제 투약을 중지하면 난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고 묻자, "곧 돌아가실 겁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에 미테랑은 "그럼 투약을 중지해 주시오"라고 요청했다. 의연하게 자신의 최후를 맞이한 셈.[18]
타계하기 며칠 전에 마지막 만찬을 즐겼는데, 일반 빈티지 와인과 소테른 귀부 와인,[19] 대서양 생, 푸아그라, 닭고기,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평소에 즐겨먹던 오르톨랑 요리까지 포함된 성대한 만찬이었다.#

6. 종합적 평가


'''프랑스 좌파와 사회당을 상징하는 인물'''들 중 첫 손에 꼽히는 인사로, 프랑스 정치사 특히 제5공화국 이후의 현대 정치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의미로든 매우 크다. 미테랑은 1958년 10월 제5공화국 성립 이후 20여년간 좌파가 정권을 잡지 못했던 상황을 타개하고, 선거를 통해 실권이 있는 대통령제에선 '수평적 정권교체'를 처음 실현해냈다.

6.1. 긍정적


지금도 프랑스 사회당을 비롯한 프랑스 진보 세력의 정치적 대부 격으로[20] 많은 프랑스인들이 기리는 대통령이다. 특히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프랑스에서 최초로 그것도 장기집권한 좌파 지도자였고,[21] 이후 프랑스 좌파와 우파가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진행하는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 되었다.
내치 부분에서도 임기 초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진보적 아젠다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외에도 반시위법 및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등 인권 문제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수십 억 유로를 들여 미테랑 도서관을 만들고 영화 산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문화 사업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6.2. 부정적


집권 직후 그가 펼치고자 했던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이 재정 문제로 실현되지 못하고, 되레 그 이후론 신자유주의적 긴축정책을 시행하면서 지지자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실제 아탈리에 의하면 미테랑은 초기에 단행했던 개혁들에 대해 상당히 만족감을 보였으나, 이후 추가적인 개혁을 원치 않아보였다고 한다. 때문에 88년도에 좌파가 다시 승리하며 실권을 되찾았을 때도 경제 등 내치 분야는 총리에게 거의 전적으로 일임한 채 거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권 후반부부터는 냉전 종식 관련해서 동유럽 자본주의화와 독일통일, 소련 붕괴 등 워낙에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격변기여서 아예 내정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었다.
사후 르완다 내전에서 정부군의 학살에 무기를 지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비판받기도 했다. 다만 이건 르완다 내전이 발생한게 1994년인데, 이때 프랑스는 여당이었던 사회당이 하원선거에서 대참패를 겪으며 우파들이 대거 당선되어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중심으로 2차 동거정부가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만 책임을 묻기도 뭐하다. 실제 훗날 르완다 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에두아르와 다른 프랑스 공직자들이 연루되어있었다고 한다. 물론 미테랑의 실권 여부를 떠나서, 본인이 프랑스 대통령으로써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건 비판받을 여지는 있겠지만. 특히 국방, 외교 분야는 외치에 관한 것으로 본인 소관이다.
1985년 7월 1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 항에 정박해 있던 민간환경운동 단체 그린피스 선박 "레인보우 워리어(Rainbow Warrior)" 격침 명령을 내린 것으로도 비판을 받는다. 좌파 정권의 수장이란 사람이 핵실험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우파 정권에서도 함부로 안 할 군사작전을, 그것도 우방국인 뉴질랜드에서 저질렀다는 것. 덕분에 1명은 사망까지 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시라크 시대까지 프랑스 대통령들은 좌우 가리지 않고 핵에 관한 마인드가 "프랑스의 핵전력은 신성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강경하긴 했다.

7. 기타


1980년대 유럽을 함께 이끌었던 영국의 마가렛 대처(왼쪽), 서독의 헬무트 콜(가운데) 총리와 함께. 이들 가운데 미테랑 대통령이 1996년 가장 먼저 타계했고, 대처 수상은 2013년, 콜 수상은 2017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탈냉전이란 역사적 전환기 시절 유럽을 대표했던 세 지도자는 모두 역사의 일부로만 남게 되었다.
  •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한 프랑스 대통령이다. 1993년 9월에 방한했는데 이때 유명 여배우 소피 마르소와 함께 오는 바람에 한국인들이 소피 마르소한테만 관심을 가졌다고.(...) 그래도 병인양요 당시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했으며, 이를 반대하던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과 대판 싸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미테랑이 반환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문화재 반환의 물꼬를 터주었다. 여담으로 이때 TGV를 사는 조건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는다는 빅딜을 제시했다니 어쩌니 하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무근. 당시 대통령 성격상 그런 빅딜을 제시했다간 싸가지없는 불란서넘들(...)이라고 엄청 까였을지도 모른다.
  • 그의 보좌관이었으며 세계적인 석학으로 불린 자크 아탈리가 미테랑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쓴 '미테랑 평전'이 있다. 한국어 번역이 급하게 한거라 좀 어색하다는 평도 있으나 읽는데 그리 문제는 없다. EU의 탄생 과정이나 독일 통일에 대한 자세한 에피소드들도 많으니 유럽, 국제 문제에 관해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볼만 하다.
  • 1960년대부터 안 팽조와 만나면서 두 집 살림을 시작했고, 마자린이라는 혼외딸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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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랑의 장례식에 참석한 혼외 딸 마자린(가운데). 뒤쪽에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마자린의 어머니(즉, 미테랑의 내연녀) 안 팽조. 그리고 사진 맨 왼쪽의 여인은 미테랑의 영부인 다니엘 여사다.
이 스캔들은 1994년에 <파리 마치>지를 통해 폭로되면서 드러나게 된다. 영미권 같았으면 엄청난 공격거리가 되었겠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좌우가릴것 없이 대통령 정무와 관계도 없는 사생활 문제를 끄집어내서 선정적 보도나 하고 있다고 <파리마치>를 실컷 까댔고, 당시 프랑스 여론도 <파리마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테랑 이전에 지스카르 데스탱도 여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접촉사고가 난적이 있었는데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보도되지 않는 일도 있었으며, 미테랑의 후임인 자크 시라크도 마찬가지로 불륜을 저질렀는데 보도가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뇌물을 받아챙긴다거나 누구를 폭행했다든가, 공금을 횡령했다거나 하는 등의 공적으로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가벼운(?) 수준의 성 일탈(?)행위의 경우에는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사생활 보호법에 따른 벌금액이 상당하기도 하고, 프랑스 성문화가 개방적인 면도 있고 국민정서상 정치인의 사생활이 관심대상이 아니라서 굳이 사생활을 기사로 써도 별 가치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한 몫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언론의 기조는 사르코지 초기 때까지 이어져왔다가 2010년대 들어서 확 달라졌다. 물론 이러한 보도는 메이저 언론사가 아닌 단순 가십지가 한 것이고 이 스캔들이 커진 이유는 그가 바람을 피우면서 탄 오토바이가 프랑스에서 만든 오토바이가 아닌 이탈리아제 오토바이라는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1982년, 우파는 그와 좌파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좌파는 이에 대해 크게 반격하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미테랑은 정치소설을 쓴 유머 작가 앙드레 베르코프에게 "우파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에 대해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해인 83년 베르코프는 ‘카통’ 이라는 가명으로 우파를 비판하는 책 《탈환》을 출간했고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 카통이 누군지에 대해 한참 화제가 되었다. 미테랑의 측근인 자크 아탈리는 이것을 “가면무도회” 라고 표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카통은 목소리를 변조해서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22]
  • 후임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1988년 대선후보 토론방송을 할 당시에 시라크가 미테랑에게 지금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가 아니오. 당신과 나는 대등한 후보로 이 자리에 나왔소.라고 선빵을 날리자, 미테랑이 당신 말이 맞소, 총리!(Vous avez tout à fait raison M. le Premier Ministre)라며 단숨에 반격했다. 이 대화로 선거의 승부가 정해졌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있을 정도.[23]
  • 1994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맞아 독일군 부대를 열병식에 초청해서 파리 시내를 행진하게 한 적이 있다.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50년 만에 독일군이 그것도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에 파리 시내에서 행진한 역사적인 사건. 이 일은 프랑스와 독일이 완전한 협력 관계를 맺었음을 상징하게 되었다.[24]
  • 1984년 스위스 국빈방문 당시 스위스 발레 주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란 마을에서 미테랑 대통령에게 1800년 당시 나폴레옹나폴레옹 전쟁 중에 마을 물자를 징발한 것에 대한 보상을 청구한 적이 있는데 이 금액을 갚아줬다. 하지만 전부 갚아준 것은 아니고 원래는 184년 동안의 이자를 포함해 약 200억 원 정도를 보상해야 하지만 원금에 해당되는 6억 정도만 갚았다. 링크된 게시글의 정보는 잘못된 정보.
  • 한국에서 90년대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가 높을 당시 YS는 잘맞춰 라는 게임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YS가 일명 YS파를 쏘며 세계 각국 지도자와 대결을 펼치는(...) 게임이었다. 여기엔 빌 클린턴, 마가렛 대처, 덩샤오핑과 함께 미테랑 대통령도 나왔다.[25]
  • 프랑스는 미테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국에서 발행하는 2유로 동전에 그의 초상을 넣었다.
  • 미테랑 집권 시기에 단행한 은행 국유화로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은 300억 프랑 이상의 손실을 보았는데 당시 1프랑은 요즘 기준으로 200원 정도의 가치였고 아무리 못해도 6조 이상의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1] 젊은 시절의 신장은 173cm이라고 한다.[2] Saint Paul Angouleme.[3] 공법.[4] 전문고등연구학위. DEA처럼 석사박사 사이라고 보면된다.[5] 2008년 개헌 전까지 프랑스 대통령은 임기 7년에 중임이 가능했는데, 유일하게 미테랑만 '''14년 간''' 재임에 성공했다. 재선에 성공했던 샤를 드골은 중도 사임했고 자크 시라크는 중간에 임기를 5년으로 단축해 12년간 재임했다.[6] 재밌는 건 동시대의 우파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젊었을 시절에는 공산당원으로 親 공산당 성향의 신문인 뤼마니테 홍보원으로 일한적이 있다. 나중에 조르주 퐁피두의 눈에 들어 정계에 입문하고나서는 쭈욱 우익 노선을 걸었지만 공산당원이었다는것을 딱히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자랑하고 다녔기는 했다.[7] 사진 속의 문구는 "왜 미테랑은 승리했는가".[8]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에서 방송의 공영화를 진행하면서 프랑스 방송은 여러번 재편과정을 거쳤지만 기본적으로 공영독점체제였었다. 그러다가 70년대 말을 전후해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자유라디오(물론 해적방송이었다.)가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프랑수아 미테랑도 방송의 친정부 편향을 이유로 대선 기간에 해적방송을 운영하기도 하였다.(다만 TF1은 좌우연정 당시에 우파인 자크 시라크가 민영화를 단행)[9] 90년대 말, 한국에서 국민PC보급 사업을 벌였던 것과 비슷한 아이디어. 다만 사업 자체는 이전 지스카르데스탱 정부때 시작된 것이기는 하다.[10] 다만 이때 원내 1당은 계속해서 사회당이었으나 반드골주의파였던 UDF와 드골주의를 계승했던 RPR 두 우파정당이 다수를 점했다.[11]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은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과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가 '''공동으로 정부를 책임지는 구조'''인데, 미테랑 이전까지는 항상 우파가 대통령,총리를 배출해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이렇게 좌파 대통령과 우파 총리가 동거하는 정부가 만들어진 것은 이것이 처음.[12] 다만 프랑스 결선투표제 에서는 2명만 대결하기 때문에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당장 미테랑만 해도 1965년도에 드골과의 대결에서 10% 이상 차이나게 졌다.[13] TF1이 현재까지도 민영방송으로 남아있는데 이런 이유가 있다.(미테랑과 부이그사와 사이가 나쁜 편도 아니었다)[14] 얼마나 심각했던 수준이냐면 당시 국민의회(하원) 총의석수가 577석 이었는데 즉 '''집권여당 의석수가 10%에도 못 미치는 수준''' 이었다.... 후에 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가 4년뒤 의회를 해산 하며 치뤄진 선거에서 리오넬 조스팽대표가 선거를 지휘하며 다시 원내1당으로 복귀하며 부활했다.[15] 여기서 놀라운 점은 1990년 봄부터 미테랑은 사회당이 하원에서 100석도 못 건질꺼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흠좀무.[16] 프랑스 제162대 총리이자 제5공화국의 13대 총리이다 자신이 총리였던 시절엔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지만 거꾸로 퇴임 후엔 비리혐의로 곤욕을 겪었다.[17] 한번은 전립선암 수술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EU통합 문제에 관해 몇 시간이나 열렬히 토론하고 곧바로 수술을 받기도 했다.[18] 다만 이에 대해 미테랑의 내연녀였던 안 팽소는 미테랑의 죽음이 단순한 '연명치료 중단'이 아니라, 암 후유증으로 인한 뇌사 가능성을 두려워한 미테랑이 자청한 '안락사'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연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건 마찬가지.[19] 안그래도 미식가였던 미테랑이지만, 고향 자르낙은 '''보르도'''가 포함된 누벨아키텐 지역이라서 와인에 더 유별난 편이었다. 하기야 지도를 보면 자르낙 바로 옆이 '''코냑'''이니까.[20] 물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진보적 인물들은 미테랑 외에도 제법 있지만, 전업 정치인 중에선 미테랑이 대부라 할만하다.[21] 의외라면 의외지만 유럽에서 사민주의 열풍이 불던 당시에도 프랑스는 좌파적 이미지가 강한데 비해 의외로 실제 좌파 집권기는 길지 않았다. 제5공화국 이전으로 돌아가도 리버럴 정당을 제외하면 사회주의 세력은 19세기엔 반란을 일으켜 잠시 위세를 떨치다가 털렸고, 20세기 초중반은 겨우 집권 좀 해보나 했더니 뜬금없이 옆동네에서 쳐들어오는(...) 등 다사다난했다. 결국 제4공화국 연정 시절 정도를 빼면 연속된 집권기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사회당(프랑스) 항목도 참조.[22] 당시에는 엘리제궁 비서관이었고 이때 한 때 여자친구였던 세골렌 루아얄도 이때 만났다(결혼을 안해서 여자친구라 부르는거지 둘이서 아이를 넷이나 가졌고 2007 프랑스 대선때까지 계속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거의 정실부인이었다). [23]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재치를 정치인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미테랑 본인도 과거 지스카르 데스탱과의 토론에서 'Vous n'avez pas le monopole du cœur.' (사람의 마음을 독점할 수는 없소.') 라는 재치있는 한 방을 먹기도 했다.[24] 이를 놓고 미테랑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정작 그의 재임 시절에도 독일군(당시 서독군)을 파리 행진에 초청했던 사실이 발굴되어 역관광당했다.[25] 참고로 좀 진지하게 얘기하자면 YS야 항상 아침조깅을 뛸 정도로 건강한 상태였지만, 이때 미테랑은 전립선 암 휴유증으로 방한 할 당시에 몸이 엄청 쇠약해진 상태라(그저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 구토까지 했을 정도였다) 저렇게 그림처럼 상태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