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딸이자 과학자인 이렌 졸리오퀴리의 남편이다. 결혼 전 본명은 장 프레데리크 졸리오(Jean Frédéric Joliot). 본인이 마리 퀴리의 제자였고, 그의 딸인 이렌과 결혼하면서 스승을 존경해 그의 성을 후대에도 남기고 싶다는 이유로 아내가 남편 성을 붙이는 프랑스의 일반적인 관습과는 달리 자신도 아내의 성을 붙였다.
결혼 후에도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935년에 인공 방사성 원소의 연구로 부인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탔다. 마리가 노벨상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 언론은 "남편 잘 둬서 노벨상을 받았다"며 이렌을 깠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에는 이렌과 함께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이때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훌륭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정계에 몸 담으면서 구설에도 오른 사람이다. 2차대전 이후에는 핵의 군사적 사용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고,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도 중요한 서명자 중 하나로 참여했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고 스탈린 정권의 실체가 알려진 이후 탈당하였지만, 어쨌든 공산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미국에서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당시 핵의 무기화로 인한 위험(특히 장기간에 걸친 방사능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풍자적 표현으로써 '(핵무기의 피해를 입은 사람 중에서) 운이 좋은 소수는 즉사할 것이고, 그보다 운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오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 대해 '어찌됐건 사람의 죽음을 행운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고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보면, 풍자나 비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진지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
퀴리 일가에 대한 상당한 팬이어서 퀴리 연구소로 들어왔고, 거기서 이렌을 만났다. 얼굴이 잘생겨서 퀴리 연구소에서도 미남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전후에는 프랑스 원자력청 장관까지 지냈으며, 이렌이 죽은 후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1] 러셀의 자서전 기록에 따르면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불쾌감을 표시한 정도가 아니라 해당 표현을 문제삼아 서명을 거절했다가 그 표현이 삭제되자 서명했다고 할 정도로 매우 강력한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