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퀴리

 


'''< 190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image]
1902 - 헨드릭 A.로렌츠,
피에터 제만

'''앙투안 앙리 베크렐''',
'''피에르 퀴리''',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1904 - J.W.S 레일리
[image]
'''이름'''
'''피에르 퀴리'''
(Pierre Curie)
'''출생'''
1859년 5월 15일
[image] 프랑스 제2제국, 파리
'''사망'''
1906년 4월 19일 (향년 47세)
'''국적'''
프랑스 [image]
'''학력'''
소르본 대학교
'''직업'''
물리학자, 화학자
'''배우자'''
마리 퀴리 (1867년 ~ 1934년)
'''자녀'''
이렌 졸리오퀴리,
이브 퀴리
'''묘역'''
팡테옹
'''신체'''

'''종교'''

'''서명'''
[image]
1. 개요
2. 일생
3. 업적
4.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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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부인인 마리 퀴리와 함께 찍힌 피에르 퀴리의 사진
프랑스의 물리학자. 그 유명한 마리 퀴리의 남편. 그러나 그냥 단순히 유명인의 남편이 아닌 그 스스로도 훌륭한 과학자였다. 후술하겠지만 학자로서의 경력 또한 피에르가 선배였고, 생전에는 오히려 아내 마리가 남편의 명성으로 덕을 보는 입장이었다. 단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더 오래 활동한 아내의 명성에 가려졌을 뿐.

라듐은 범죄자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 190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식에서


2. 일생


파리에서 태어난 피에르 퀴리는 16세에 소르본대학교에 입학,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9살 때 연인을 잃은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35세의 늦은 나이에[1] 마리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폴란드 출신 이민자였고 여성이었던 그녀를 프랑스 과학계의 기득권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때 그녀의 곁을 지켰다. 노벨물리학상도 애초에는 피에르 퀴리에게만(?) 줄 계획이었는데, 이를 안 피에르 퀴리가 끈질기게 청원을 내서 부부 공동 수상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1895년 마리와 결혼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마리 퀴리가 남긴 '내 사람 피에르 퀴리'에 따르면 피에르 퀴리는 자상한 남편인 동시에 자연과 과학의 꿈을 사랑하며 연구에 정진했던 성실하고 독창적인 과학자였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후 소르본대학 교수에 위촉되었으나, 1906년 4월 19일 아침에 대학으로 출근하던 중 교통사고로 급사하였다. 당시 비가 와서 앞이 잘 안 보였는데, 술이 덜 깬 마부가 마차 바퀴로 그를 깔고 지나가서 현장에서 즉사한 것.
이후 마부는 '어느 미친 놈이 자살하려고 뛰어들었다.'고 횡설수설했는데, 사고현장에 있던 어느 사람이 "신문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를 닮았다"고 증언하면서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보고 피에르 퀴리임을 확인하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마부를 두들겨팼다고 한다. 경찰들이 막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라고. 이 마부는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를 죽인 살인죄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음주운전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과응보이지만.
남편을 잃은 후 마리 퀴리가 쓴 일기장에는 "당신 없는 삶은 잔인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번민이자, 바닥없는 고뇌이며, 끝없는 비탄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1년만에 비극적으로 끝난 것이었다.

3. 업적


소르본느대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소르본대학교 교수와 과학 아카데미 회원을 역임하였다. 상술한 1903년 노벨물리학상 외에 1901년 루카스상, 1895년 프란테상을 수상하였다.
결정물리학계에서는 광물학을 전공한 형 자크 퀴리와 함께 결정 연구를 하여 1880년 '''압전 현상'''[2]을 발견하였고, 이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전기계인 '퀴리전기계'를 고안하였다.
이후 물질의 자기적 성질의 연구를 하여, 상온에서 1400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기 감수율이 온도에 반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하고 퀴리온도[3]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마리 퀴리와 결혼 후, 방사능 연구에 흥미를 느껴 아내와 공동으로 우라늄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탐구에 노력하여 라듐폴로늄을 발견하여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정리하자면 피에르 퀴리도 결정학과 전자기학, 방사선 연구의 선구자로, 아내의 후광에 빛이 바랬을 뿐이지 역사에 남을만한 과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피에르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였고, 외국인이었으며, 아직 여성에게 덜 개방적이었던 당대 과학계에서 아내 마리를 학자로서나 인격적으로나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만약 피에르가 충분히 장수하며 계속 활동했다면, 마리 퀴리 못지 않게 기억됐을 수도 있다.
요컨대 오늘날 세계 과학계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과학자 마리 퀴리 부인의 존재는 선배이자 남편 피에르의 진심어린 도움,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학자로서도, 남편으로서도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4. 자녀들


피에르 퀴리는 그 가족들의 능력자 기질로도 유명하다. 특히 피에르의 딸들 역시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다. 장녀 이렌 졸리오퀴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과학자가 되었고, 차녀 이브 퀴리는 피아니스트 겸 저널리스트 겸 작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피에르 퀴리의 장녀와 첫째 사위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역시 노벨상을 받았고, 둘째 사위 헨리 라부아스 주니어도 그와 아내 이브가 창립한 UNICEF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UNICEF 대표 자격으로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했다. 퀴리 부부까지 합치면 '''한 집안에 노벨상 수상자만 5명!''' 진정한 노벨상 집안이라 하겠다. 엄친딸 엄친아 가족들에 비해 유일하게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차녀 이브가 자신은 가문의 수치라며 드립을 칠 정도. 물론 이브도 절대 못나거나 평범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니다. 이들 못지 않게 많은 상과 명예를 누리며 자기 분야에서 업적을 쌓았다.

[1]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노총각이었다.[2] 특정 물질의 결정에 일정한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면 그 압력에 비례하여 전기가 발생하는 현상. 압력을 뜻하는 그리스어 piezein에서 유래하여 영어로는 piezoelectricity라고 한다. 20세기 전기전자공학의 발전에 기반이 되는 효과로 이 효과를 응용한 압전소자전화기 부터 RPG-7의 전기신관까지 굉장히 널리 쓰이고 있다. 피에르 퀴리는 이 발견만으로도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을 세운 셈.[3] 물질 내의 자기모멘트가 자발적으로 정렬하기 시작하는 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