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산당
1. 소개
현존하는 프랑스의 공산주의 정당. 이탈리아 공산당과 더불어 서유럽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으며, 무엇보다 합법적 정당+교섭단체 지위에 만족하던 다른 서유럽 지역 공산당과 달리 4차례에 걸쳐 공동여당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냉전 이 후 당세가 쇠퇴, 지금은 독자적 대통령 후보도 내지 못하고 좌파당의 장 뤽 멜랑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다.
냉전 시대의 멸칭은 '''크렘린의 장녀'''.
2. 역사
2.1. 창당~2차 세계대전 이전
1920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약칭 SFIO)의 맑시스트 당원들이 탈당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으로 창당, 이듬해 공산당으로 개칭한다. 창당 초기만 해도 코민테른의 지령에 충실, 극우파들보다 한 술 더떠 SFIO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 정권이 수립되면서 SFIO와의 공투 노선으로 선회, 1936년 총선에서 좌파 인민전선 내각 수립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웃 반공 국가들의 반발과 나치의 대항마를 자처했지만 사민당과 대립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 결국 반나치전선을 짜내는데 실패하고 분쇄당한 독일 공산당에서 교훈을 얻어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고, 국회에서 공동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키는 형태로 레옹 블룸 총리의 내각에 협력한다. 그러나 이 인민전선 내각은 스페인 내전 참전 문제, 대 소련 정책 등을 놓고 허구헌날 갈등을 일으키다가 출범한 지 1년도 안돼서 급진당에 다시 주도권을 내어주었고, 급진당이 뮌헨 조약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을 때 원내정당 중 유일하게 이를 거부하면서 인민전선은 완전히 붕괴되고 공산당은 다시 프랑스 국회의 왕따로 전락한다.(...)
2.2. 2차 세계대전~과도내각 시대
1939년 스탈린과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 공산당은 크렘린의 장녀라는 멸칭에 걸맞게 이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정부의 국방예산 증액에 반대했고, 심지어는 방위산업체 내부의 공산당원 노동자들이 고의로 무기를 고장내고, 파업을 시전하는 등 나치군의 파리 함락 및 비시 프랑스 정부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 후 페탱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고, 지하조직으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당계, 드골계 레지스탕스와의 공동투쟁을 거부했고(...), 히틀러가 스탈린의 뒷통수를 친 1941년에야 뒤늦게 레지스탕스 운동에 합류한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때 규모있게 참여해서 활약한 덕택에[3] 프랑스 대중들로부터 종소, 극좌 정당이라는 음침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데 성공했고, 연합군의 파리 함락 이 후 결성된 과도내각에서 모리스 토레스 서기장이 부총리로 입각하고, 제4공화국 제헌의회 선거에서 '''원내 1당'''에 올라서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된다.
2.3. 냉전시대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1947년 내각에서 추방되었고, 이 후 제4공화국 내내 총선에서 원내 1당의 지위는 유지했으나, 매번 내각 구성에서 왕따를 당하면서 야당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후 샤를 드 골 주도의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원내 2당으로 추락했고, 이 후 무비판적 친소 노선과[4] 68운동 당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것 등이 누적되면서 좌파 진영의 주도권을 SFIO 후신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영도하는 프랑스 사회당에게 내주게 된다. 1971년 조르주 마르셰가 서기장에 취임, 당 노선을 기존의 스탈린주의에서 유럽공산주의로 변경하고, 사회당과 선거연대, 정책연대를 추진하는 등 대중정당으로의 변신을 시도했으나 사후약방문.
그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1981년 대선에서 공산당이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곧이어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범좌파 진영이 5공화국 출범 이 후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로랑 파비우스 내각에서 4명의 장관을 배출하는 데 성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싶었으나... 인민전선 내각 때와 마찬가지로 파비우스 내각에서도 사회당과의 불협화음은 끊기지 않았고, 결국 1984년에 사회당-공산당 연정이 붕괴되면서 다시 야당으로 전락한다. 이후로 신임과 보완 형태로 각료직을 내기도 했지만 국민전선의 대두와 소련의 해체로 다시 암흑기에 접어든다.
2.4. 냉전 이후
1994년 제28차 전당대회에서 조르주 마르셰 서기장이 은퇴하고, 로베르 위가 그 자리를 잇는다. 1997년 총선에서 당 역사상 마지막으로 두자릿수 득표율을 기록하며[5] 하면서 35석을 획득, 255석을 획득한 사회당과 연립내각 구성에 합의, 리오넬 조스팽 내각에 2명의 장관을 배출한다. 공산당은 지금까지와 달리 조스팽 총리의 제3의 길 노선에 적극적으로 협력,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공기업 민영화, FTA 정책 등을 묵인하고, 공산당계 노조의 파업 역시 "장관으로 국정운영에 헌신하는 동지들을 배신하는 행위"라면서 자제시키는 등 '반대만 하는 극좌정당'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2002년 대선에 출마한 로베르 위 서기장이 트로츠키주의 정당, 녹색당 후보보다도 낮은 3.3%의 득표율에 그치며 참패했고, 덤으로 조스팽 총리가 어떤 네오나치 후보에게 불과 1% 차이로 결선투표행 티켓을 내주고 낙선하면서 본의아니게 조스팽 낙선의 주범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써 사실상 전국정당으로써의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6]
이 후 2007년 대선에서 마리 조르주 뷔페 후보가 1.9%의 득표율에 그친 것을 마지막으로 급진좌파 정당과의 공동투쟁 노선으로 선회, 2012년 대선과 2017년 대선에서는 좌파당 장뤽 멜랑숑 후보를 지지했다. 2017년 총선에서는 7석 → 10석으로 의석수를 늘리기는 했지만 불복하는 프랑스와 연합해도 30석 안팎이라 여전히 전성기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한 수준이다.
2018년 11월 새 서기장으로 파비앙 루셀(Fabien Roussel)이 취임했다.
2019년 유럽의회 총선거에서는 선거가 시작된 1979년 이후 최초로 단 한 석도 못 건졌다.
3. 기타
- 당사 건물이 매우 크고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당사 건물은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의 작품이다.[7]
- 국제 정당 연합체 중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에 참여해온 바 있다. 자주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가끔 가다 참여하는 정도.
- 유명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다.[8][9] 이외에도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후일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탈당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베르 카뮈 등 당대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 출처: #[2] 공산당답게 반EU적 색채가 있다[3] 당시 전체 레지스탕스 조직 가운데서 절반 가량이 공산당 계열이라는 분석이 나올정도다.[4] 열성 당원이었던 이브 몽땅이 언론 인터뷰에서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무력 침공을 비판했다가 당에서 쫓겨날 정도였다(...)[5] 정확하게는 9.96%.[6] 이 선거에서 좌파는 1차투표에서 후보 난립 때문에 아무도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했다. 결국 인기가 바닥을 기던 우파의 자크 시라크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7] 오스카 니마이어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총설계한 사람으로, 브라질 건축의 아버지라 불린다.[8]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헬렌 켈러 등과 함께 한국인들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에 가장 놀라는 사람 중 하나다.[9] 피카소는 평생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유지하며 살아간 것으로 보이지만,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1957년 제명당했다. 그런데 제명 사유란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스탈린의 초상화를 피카소 화풍으로 그린 그림이 서기장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