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렌 졸리오퀴리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장녀이다. 결혼 전 이름은 이렌 퀴리 (Irène Curie).
이렌 퀴리는 어머니 마리의 제자이자 퀴리 일가의 추종자였던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결혼했는데 프레데리크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그리고 퀴리라는 성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자신의 성 졸리오에 퀴리를 이어붙였다. 결혼 후에도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935년에 인공 방사성 원소의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탔다.[1] 그녀는 핵분열 현상을 관측하기도 했는데, 검출된 원소들이 핵분열 생성물이 아니라 초우라늄원소라고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2번째 노벨상을 놓치고 말았다.[2]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 오토 프리슈[3] 로 구성된 베를린팀이 핵분열을 발견하자 땅을 쳤다고. 이를 통해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렌이 활동한 파리 연구팀과는 달리 베를린팀은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이 각각 방사화학 및 분석화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는 핵분열 후 검출한 원소의 화학 분석에 도움이 되었다. 이를 다룬 한국물리학회 사이트의 연재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그녀와 남편은 프랑스에 남았으며, 퀴리 연구소에서 종전까지 머물렀다. 이 연구소에는 나치 관계자들도 드나들었지만, '''나치는 연구소 지하에 레지스탕스의 무기고가 있다는 사실을 전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단 한 순간도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한 것처럼 이렌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여러 번 입후보했지만, 그때마다 떨어졌다.[4] 그러나 이렌은 포기하지 않았으며, 여성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했다.
1946년 연구소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인해 폴로늄이 이렌의 몸에 침투하여, 그녀는 이로 인한 건강 악화에 이어 백혈병에 걸렸고,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 프레데리크와의 슬하에 딸인 엘렌 (Hélène Joliot-Curie, Hélène Langevin-Joliot) 과 아들인 피에르 (Pierre Joliot-Curie, Pierre Joliot) 를 두었으며 (나이 순), 두 사람 모두 집안의 전통대로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 엘렌은 파리 대학교 핵물리학과의 교수이자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센터 (CNRS) 의 연구 디렉터이다. 위에서도 나온 그녀의 남편 미셸 랑주뱅[5] 도 핵물리학자이며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브 랑주뱅은 천체물리학자이다. 피에르 퀴리는 광합성의 산소발생 및 전자전달계 연구를 혁신하여 생물에너지론(bioenergetics)를 개척한 생물물리학자(biophysicist)[6] 이며 그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를 수훈받은 CNRS 소속 과학자이다. 피에르의 아내인 안네도 생물물리학자로 많은 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1] 최초의 모녀 수상. 마찬가지로 부자 수상도 있는데 바로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오게 보어다. 둘 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여담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피에르 퀴리 역시 아내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에 부녀 수상이기도 하다.[2] 참고로, 엔리코 페르미도 같은 실수를 했다.[3] (Otto Robert Frisch,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4] 당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여성의 회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과학계에 성차별이 만연했기 때문.[5] 재미있는게, 이 사람의 할아버지인 폴 랑주뱅은 마리 퀴리와 불륜 의혹이 있던 그 사람이다. 참고로 폴 랑주뱅은 그 불륜 스캔들 이후에도 이렌 퀴리의 지도교수를 맡았고, 마리를 비롯한 퀴리 가문과의 친분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6] 당시 광합성 연구는 물리학의 주요 분야였다 - 제임스 프랑크, 유진 라비노비치 등 유명 물리학자들도 광합성 연구에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