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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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τολεμαῖος [1]
(BC 367년 ~ BC 283년)
1. 개요
2. 생애
2.1. 알렉산드로스 생전
2.2. 알렉산드로스 사후
2.3. 평가
2.4. 미디어에서


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알렉산드로스 대왕휘하의 장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을 분할통치한 디아도코이의 한 사람이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왕.

2. 생애



2.1. 알렉산드로스 생전


마케도니아 귀족 태생으로, 가계 전설에 의하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아르시노에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기록되지 않아서, 일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라는 이야기도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와 이복형제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을 나눠가진 디아도코이 중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바빌론에서 그리스로 운반되던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탈취하여 자기의 영역인 이집트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를 신격화하며 떠받을었고, 프톨레마이오스 본인이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대한 긴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2]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필리포스 2세 때 카리아의 총독인 픽소다로스가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기 위해 아르히다에우스에게 자신의 딸인 아다를 바쳤는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람을 보내 자신이 아다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일이 필리포스 2세에게 보고되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친구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하르팔로스, 네아르코스, 에리기우스 등과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추방되었다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즉위한 후에 귀국했고 왕실 근무대로 임명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종군해 기원전 333년의 이소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인도 원정까지 참전했다. 하지만 인도 원정은 보급 곤란 및 군대 반란, 게다가 인도 토착 세력의 강력한 저항으로 대체로 실패로 끝났고, 마케도니아 원정군은 바빌로니아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2. 알렉산드로스 사후


바빌로니아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가 후사를 명시하지 않고 급사하자[3],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은 협의 끝에 알렉산드로스가 남긴 제국을 분할통치하기로 결정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리비아를 차지했고 그리스로 운송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탈취하여 자기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관을 멤피스로 옮겨 석관을 안치하면서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나는데, 페르디카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에 군사를 이끌고 갔지만 그 전에 페르디카스가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페르디카스가 죽자 페이톤, 셀레우코스 1세, 안티게네스,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등과 트리파라디소스 협약을 맺으면서 페이톤, 부하인 아리다이오스에게 섭정을 맡기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반대로 안티파트로스가 섭정이 되었다.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안티고노스가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셀레우코스 1세가 안티고노스의 부관 1명을 처형한 일로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 1세에게 바빌론에서 걷는 세금의 일부를 요구했고 셀레우코스 1세는 이를 거절했다가 후환이 두려워 바빌론에서 탈출해 이집트로 피신하자 받아들였다.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314년 봄에 안티고노스가 남부 시리아로 선제 공격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자신의 군사를 티레까지 후퇴시켜 1년간 막았지만 결국 빼앗겼으며, 셀레우코스 1세를 시켜 티레를 되찾도록 하면서 셀레우코스 1세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주고 로도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안티고노스에게서 지원을 약속받고 협박을 받았기에 로도스에 거절당했다.
소아시아 남서부 해안의 카리아로부터는 협력받는 것에 성공했고 기원전 313년에 동생 메넬라오스를 시켜 해군과 전함으로 셀레우코스 1세를 돕게 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12년에 남부 시리아를 공격해 가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1세를 이기고 시돈을 점령해 남부 시리아를 되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셀레우코스 1세가 바빌론을 되찾을 수 있도록 군사를 제공했으며,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 1세와의 싸움으로 약해지면서 안티고노스와 화의를 맺었다가 기원전 309년에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 1세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간 사이에 안티고노스의 킬리기아, 리키아, 카리아를 공격해 리키아, 카리아를 점령했다.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는 기원전 308년에 코린토스, 시키온, 메가라 등을 점령했고 기원전 305년에 왕을 칭했고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도스를 공격하자 지원군을 보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도스로부터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 '''소테르'''라고 불릴 정도로 존경받았다.
제5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는 기원전 295년에 마케도니아에서 키프로스에서 가던 도중이었던 데메트리오스 1세의 부인인 필라를 사로잡았다가 잘 대해준 후에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냈으며, 기원전 288년에는 그리스 쪽에 함대를 보내 폴리스들에게 데메트리오스 1세로부터 독립하라고 독려했고 리시마코스, 피로스와 협공하면서 데메트리오스 1세를 마케도니아에서 쫓아냈다.
기원전 285년부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기원전 283년에 사망했다.

2.3. 평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 중에서는 가장 복받은 인물이다. 즉,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인 '''디아도코이들 중에서 자연사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디아도코이 중 자연사한 인물은 그와 안티파트로스, 카산드로스 부자, 폴리페르콘 밖에 없다. 그보다 훨씬 큰 영토를 지배한 안티고노스나 셀레우코스도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장자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한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30살 조금 넘어 사망했으니 프톨레마이오스의 장수는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알렉산드로스를 따라서 온갖 전쟁터를 누볐음에도 80년이 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서나 군주로서나 모두 성공했다. 여기에 학식도 출중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헬레니즘 문화권의 중심의 하나로 육성했고, 본인 자신이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회고록도 남겼다. 이 회고록은 로마 시대에 아리아노스가 자신이 편찬하던 역사서에 인용했다. 이렇게 디아도코이들 중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다른 디아도코이의 왕국이 얼마 못가 망하거나 혹은 반란에 시달렸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통치는 대체로 안정적이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집트의 전통을 따르면서도[4] 헬레니즘의 문화를 꽃피웠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일군 기초가 매우 튼튼했기 때문에, 로마제국,고대 카르타고,셀레우코스 제국,마케도니아 같은 강대국들의 배틀필드이자 개판 5분전으로 돌아가던 지중해의 패권을 이후 아우구스투스안토니우스가 벌인 로마제국의 내전에 휘말려 멸망할 때까지 300년 넘게 휘어잡으며 지속될 수 있었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명언인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이 사람한테 한 말이라고 한다. 에우클레이데스로부터 기하학을 배우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좀 쉽게 하는 법이 없냐는 물음에 한 대답이다. 에우클레이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동시대에 같은 도시에 살았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믿을 만한 이야기다.

2.4. 미디어에서


올리버 스톤 감독의 2004년 영화 알렉산더에서는 이집트를 무난하게 다스리는 파라오로서 생의 만년에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자기가 보았던 알렉산더의 인생 전반을 서기들에게 받아적게 하는 화자이자 해설 역으로 나온다. 명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노년의 프톨레마이오스를 맡았다. (젊을 때 역은 엘리어트 코원이 맡았다) 이렇게 기록된 회고록이 바로 로마시대의 역사가들이 보았다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렉산더 원정기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를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칭송하며 페르시아 정복을 신화화한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인도원정의 참패 (영화에는 그냥 병사들의 파업정도로 묘사되지만) 및 역모를 꾸몄다가 발각된 음모가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학살하는 잔인성, 말다툼 끝에 총애하던 장군까지도 살해하는 다혈질, 그리고 지나치게 영토를 확장하여 알렉산더의 사후 몇년간 내전상태가 계속되어 난세가 벌어졌다는 것을 언급하며, 계속 무작정 꿈을 좇기만 하는 그의 행동이 이기적이고 무모했다는 비판을 한다.[5]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알렉산더의 야망때문에 자신이 파라오에 오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을 상기한 듯, 알렉산더의 위대성을 다시 상기하며 마무리를 한다.
[1] 영어식으로는 Ptolemy라고 알려져 있다. [2] 이 회고록은 나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기독교도 혹은 이슬람교도에게 불살라졌을 때, 없어졌다고 추정되지만, 로마시대의 역사가들이 이 회고록을 보고 역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에 대강의 내용은 현재까지 알려져 있다. [3] 정확히는 사경을 헤매다가 잠깐 정신이 돌아왔을때 후사가 누구냐고 질문하는 장군들에게 '''가장 강한자''' 라는 밑도 끝도 없는 에매한 말을 남기는 바람에 '''디아도코이들이 단체로 멘탈이 나가는 대참사가 일어났었다.'''[4] 왕실의 근친결혼 같은 것은 당대 이집트 풍속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근친상간은 금기였다.[5] 더불어 이 부분에서 그리스인과 아시아인의 차별을 두지 않는 보편 제국을 추구하던 알렉산더의 계획과 이상을 평가절하하며, 당대 그리스인 엘리트로 운영되던 전형적인 헬레니즘 왕국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알렉산더를 이해하지 못한 프톨레마이오스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계 왕국들은 현지 토착민들의 반발 및 로마의 침공으로 모조리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