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카르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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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현대의 튀니지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 과거에는 기원전 860년에서 기원전 814년 사이에 건국했다고 추측했지만, 고고학 발굴 결과 때문에 현대에는 기원전 750년 무렵 건국했다고 추정한다.옛 도시가 있었다. 튀리아 이주민들이 정착한
맞선 땅, 물산이 넘치고 전쟁에는 되우 굳센
도시, 여기를 유노는 어느 땅보다 오직 아껴
사모스를 떠났다 한다. 여기에 여신은 무기를,
여기 전차를 두었다. 이 땅이 만방의 맹주이길,
운명이 승낙한다면 그리 꾀하려 공들였건만,
헌데 여신은 트로야 혈통의 후손이 생겨 나와
이로 광활한 지배자, 전쟁에 억척스런 백성이
리뷔아를 없이 한다, 그리 운명은 짜놓았더라.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822년 엘리사 여왕이 카르타고를 세웠다. 동쪽 페니키아(현 레바논) 티레의 공주 엘리사는 부왕이 죽자 동생과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했다고 한다. 엘리사가 곧 결혼하는데 동생이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서 매형을 암살하자, 엘리사는 티레를 떠나 서쪽 땅에서 신도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 엘리사 여왕이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리비아의 어느 왕이 결혼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엘리사는 로마의 건국신화 아이네이스에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 '카르트 하다쉬트'를 고대 그리스어로 음역한 단어를 다시 라틴어로 옮긴 것이다. 카르트 하다쉬트란 '새로운 도시'라는 뜻인데,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 지배층들이 팔레스타인의 도시 티레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에는 2층~5층 정도 되는 건축물이 많았는데, 이것을 최초의 아파트로 간주[3] 하기도 한다.
2. 상세
페니키아인들은 바다 통상에 의존하는 자들이었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장기간 원양항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안 곳곳에 1천 명 남짓 사람들을 남겨 보급기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페니키아인들처럼 해안가에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 경쟁하는 동안 이런 일은 더욱 잦아졌고, 그 결과 지중해 전역에 두 민족이 건설한 소규모 해안정착지들이 많이 자리잡았다. 이들 중 몇몇 정착지들은 번영을 누리며 인구가 증가하여 도시국가로 발전했는데, 카르타고도 그러한 도시였다.
이들 페니키아 도시들은 모두 이들의 어머니 도시 티레에 속하였고, 어느 정도 상납금을 티레에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티레 본국은 페르시아와 같은 강력한 중동의 제국들과 싸우면서 쇠퇴했고, 마침내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당했다.
티레가 멸망하자 그 역할을 시돈이라는 페니키아 도시가 대신했지만, 중동에 위치한 시돈 역시 티레와 마찬가지 이유로 외적의 침입을 자주 받아 쇠퇴하고 곧 카르타고가 그 뒤를 이었다.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서부와 동부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지중해 서부에 집중된 광산과 동부의 높은 문화생산품들을 교환하기에 적합하였다. 그리하여 카르타고는 번영을 누렸고,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 역할을 하면서 이들로부터 받는 상납금도 국고에 들어오자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로마가 지중해에 관심을 두기 직전까지 지중해 일대에서 최강의 해상국가는 카르타고였다. 당시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심지어는 대서양 연안으로 진출해 남쪽으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북쪽으로는 영국의 도버 해협까지 이동하며 교역했다는 설이 있다. 기원전 218년에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의 발레아레스 제도,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의 서부, 북아프리카의 해상과 해안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에 로마와 포에니 전쟁으로 싸우느라 많은 해군과 영토를 상실하여 영향력을 잃자, 누미디아인들조차 카르타고를 무시하고 공격했다. 이후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을 거치면서 로마에게 완전히 패배하여 카르타고는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로마 등 각지에 노예로 팔려갔다. 후에 로마가 제정시대에 접어들어 도시가 재건되자, 로마는 카르타고인들을 모아서 한곳에 거주하도록 했다. 훗날 로마의 20대 황제로 등극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카르타고인의 혈통이 섞였다.
3. 발전
기원전 8-7세기에 걸쳐 카르타고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기원전 650년에는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600년에는 그리스와 충돌하여 전쟁을 벌였고, 기원전 585년에 티레가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포위공격을 받자 티레로부터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여전히 명목상으로 티레에게 종속되어 꾸준히 상납금을 바쳐야 했다.[4]
이렇게 다른 도시국가에 상납금을 보내는 것은 그리스와 페니키아, 북아프리카 일대 연안 도시국가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이들 도시국가들은 그 규모가 매우 작아 어느 정도 도시가 성장하고 나면 태어난 후손들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당시의 기술로는 인구가 일정 이상 늘어나버리면 한정된 경작지와 무역 수입으로 부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주라고 해서 무작정 쫓아낸 것이 아니다. 새 정착지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때까지 부모 도시국가에선 식량과 자원, 인적지원을 해줬으며 군사적 보호도 담당했다. 그리고 정착지가 자립할 정도로 성장하면 반대로 부모 도시국가에게 상납금을 지불했다.
어째서 카르타고가 티레를 대신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카르타고 옆 우티카는 카르타고보다 더 오래된 데다가 카르타고와 지형적 조건도 비슷했다. 하지만 우티카는 카르타고와 같은 영향력을 얻지 못했고, 맹주 역할도 카르타고가 했다. 티레와 시돈과 같은 대륙 페니키아 도시들이 동방 제국들의 공격을 받을 때 거주민들이 카르타고에 망명하여 카르타고가 다른 도시들을 뛰어넘는 규모로 팽창했다는 설이 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이주민들이 다수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였다. 원주민들보다 수가 적은 페니키아인들은 노예를 부려 산업화된 농업과 상업으로, 특히 해양활동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서지중해 각지에 식민도시들을 세웠지만 이는 본토의 인구압력을 줄이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무역 및 해군 거점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
전성기에는 북아프리카 해안가와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 대부분을 세력권 아래 두었지만 시라쿠사를 필두로 한 서부 지중해의 그리스인들과 끊임없이 항쟁해왔다. 시칠리아 전쟁에서는 밀고 밀리는 기나긴 전쟁 끝에 시칠리아의 서부 1/3 가량을 차지했다. 기원전 277년 피로스의 시칠리아 원정 때 시칠리아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기도 했으나, 피로스가 시칠리아에서 철수한 이후 영토를 되찾았다.
4. 몰락
그러다가 결국 로마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3전 전패하여 몰락해버렸다.
기원전 264년 일어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주 무대로 싸웠으며,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참전했다.
기원전 218년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의 여러 군단을 패퇴시켜 전쟁을 승리 직전까지 이끌었으나, 카르타고 본국과 한니발의 동생들이 운영하던 이베리아 식민지가 로마군에 함락되어 결국 패배했다.
기원전 149년 발발한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화평을 위해서 성안의 무기란 무기는 죄다 버리고 투항했지만, 자비심 없는 로마군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대로 쓸어버리겠다고 선언하자 맨주먹으로 수년을 버티었으나 결국 패배하여 멸망하였다. 맨주먹으로 수년을 버틴 것을 기적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당시 공성무기가 마땅치 않아 농성 상태의 적을 상대로 장기전이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과장된 면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이 결정되자 공장을 다시 돌려 매일 검 300개, 창 500개, 방패 140개 투사무기류 약 1000개를 생산했다는 말이 있으므로 확실히 과장. 그 정도 되는 도시 국가가 무기공장 하나 없었을까. 하지만 전쟁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포위당한 후에 농성전을 하면서 더 이상 재료를 조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다시 재무장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확실한 것은 공성전이 시작되자, 입구가 요새 형태로 만들어져있던 카르타고 항구를 로마군이 배를 침몰시켜 막았기 때문에 해상보급이 막혔으며 로마군은 도시 자체를 완전히 포위해버렸다.
방어전은 굉장히 치열했으며 성벽이 뚫린 이후에도 로마군과 카르타고 시민들은 시가전을 벌였다. 카르타고군과 카르타고인 40만 정도가 대부분 무장한 채 로마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거나 자살하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함락했지만, 학을 단단히 뗐는지 살아남은 5만 명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리고 도시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재건하기 전까지는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르타고 시를 함락한 직후 지휘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라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글귀를 읊으며 조국인 로마도 언젠가는 그러한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침통해 했단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스키피오는 로마 최대의 라이벌인 카르타고가 완전히 멸망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이를 로마와 빗대어서 소회를 나타낸 듯. 결국 로마의 최후도 스키피오의 말대로 비슷한 결말로 끝났다.
하지만 카르타고 시민들만 몰락했을 뿐, 우티카를 필두로 카르타고의 지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페니키아계 도시주민들은 살아남아서 여전히 북아프리카 부의 핵심지역인 과거 페니키아 식민지 해안도시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푼인(Punics)이라고 불리며 로마 치하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다가 아랍의 정복 이후로 봇물처럼 밀려오는 아랍인에게 동화돼서 사라졌다.
한편 카르타고와 3차례 전쟁을 하는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만을 차지한 지역맹주에서 지중해의 여러 섬들과 히스파니아, 갈리아 남부,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서부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카르타고군에게 털리기도 하고, 털기도 하면서 전쟁기계로 탈바꿈한 로마군은 동방 및 북방으로 진출, 이후 수백 년 동안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삼은 세계제국 로마의 건설에 앞장서는 첨병이 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으로도 명성을 떨쳐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하며 과학적인 영농법으로 생산량을 크게 늘리는 플랜테이션 농법을 발명했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후, 이 농법은 로마 제국의 부유층들에게 이어졌고(라티푼디움 참고)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 그리고 로마 군대의 중추를 이루는 로마의 자작농들은 카르타고의 농업기술로 만든 북아프리카 플랜테이션 농장과 벌인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결국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의 자작농 병사들이 카르타고의 농업기술에 몰락하고 마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5.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이유
고대 카르타고 군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카르타고와 로마 간 군사의 질적, 양적 차이가 컸다는 점이다. 포에니 전쟁 시점에는 양국의 인구수 자체가 거의 100만 명 이상 차이났다고 추정한다. 카르타고는 용병에 주로 의존했지만, 로마는 사실상 국민개병제나 다름없는 시민군 제도였다. 물론 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이 있었지만, 페니키아인은 이주민족이었으므로 인구가 원주민에 비해 적어서 시민군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용병을 써야 했다. 포에니 전쟁 이전 시라쿠사의 그리스인 참주들과 벌인 전쟁에서 시민군을 대거 동원했다가 큰 손실을 입은 후로 시민군은 거의 본토 방위에만 동원되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40만 정도, 피지배 민족이 그 6~7배 정도 되었다고 추정한다. 로마는 일단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되, 배신 안 하고 보조병만 일정 수 제공해주면 참정권만 없을 뿐 나머지는 로마 시민권과 똑같은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또한 지방토착세력의 특권은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고 서서히 동화하는 방식을 이용했으므로, 카르타고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칸나이에서 병력 7만 명을 잃긴 했지만, 다소 무리를 해서 또다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고, 결국은 한니발을 이탈리아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반면에 카르타고는 기본적인 인구도 열세인 데다가 원주민 통제력도 약했다.
다만 카르타고가 선민사상이 특별히 심해서 병력 동원 능력이 떨어진 건 아니다. 포에니 전쟁 시점에선 이미 카르타고의 지역 통치가 수백 년 지속되면서 많은 원주민들이 동화되어 카르타고에 충성했다. 이들은 주로 리비아인, 리비아-페니키아인, 혹은 아프리카인으로 불렸고, 주로 북아프리카 및 남이베리아 해안가에 거주했다. 이들은 당시 기준으론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다. 카르타고 정치에 참여 못하는 대신 군대에 징집되고, 높은 자치권, 그리고 카르타고 시민들과 거의 비슷한 혜택을 누렸다. 편견과는 달리 카르타고군의 주력은 용병이 아니라 이들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이민족들이었는데, 이들은 카르타고의 완전한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이들을 완전히 정복할 의지가 없었고, 대신 군사와 조공을 뜯어내는 관계로 만족했다.[5] 이는 결과적으로 카르타고에 큰 재앙이 되었는데, 이들은 카르타고의 세력이 약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에 붙어 카르타고가 패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육전도 육전이거니와 카르타고 해군은 주로 페니키아인들로 구성되었다. 카르타고가 해전에 능했다는 인식과 달리 실제론 해전에서도 로마에 열세였는데 1차 포에니 전쟁이고 2차 포에니 전쟁이고 로마와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 결국 피 같은 페니키아 시민들이 물귀신으로 전락하는 꼴인데[6] 그걸 감당 못해서인지 2차 포에니 전쟁 때는 카르타고가 해전을 회피했다. 특히 카르타고는 인구에서도 로마보다 열세였는데 말 잘 안 듣는 피지배 민족까지 다 합친다해도 로마보다 인구가 100~200만은 적었다. 그래서 여러 동맹국들을 잔뜩 끌어들여 숫적 열세를 극복하려 했으나 문제는 이래도 로마에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농업국가 로마의 인구와 동원능력은 지중해 각지에 흩어진 교역도시들의 연합체인 카르타고에 비해 한참 우위에 있었다. 전 근대의 국가에서 인구수는 국력과 직결되는 수치이고, 제아무리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농업의 인구부양력은 상업 '''따위'''와는 비교가 무의미할 격차를 형성한다. 카르타고 외에도 후세의 베네치아 공화국, 네덜란드처럼 상업으로 패권을 형성하는 국가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결국엔 주변국의 압도적인 인구와 생산력을 못 이겨 패하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장에 천조국이라는 미국도 겉으로 보기엔 상업으로만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나, 미국은 현대의 강대국들 중에서 식량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나라이며 식량 자급율이 세계 제일이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상업이 굉장히 발달했고 이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와 비교가 안 되는 농업기술을 바탕으로 인구와 시장이 뒷받쳐주기 때문이다. 농업이 무너지고 대다수 인구가 굶주리는 사태가 온다면 상업 역시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만다. 카르타고도 농업으로 유명했으며 이를 통한 플랜테이션 농법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지만, 어디까지나 해상무역을 위한 상품작물 생산에 쓰였지 인구부양을 위한 식량 생산과는 상관없었던것이 문제였다.[7]
카르타고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 스페인 식민지는 규모는 컸지만, 카르타고에게 복속된 지 수십 년밖에 안 되어 반(反)카르타고 감정이 강했다. 게다가 현지 상황도 지극히 불안정하여 여러 번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상당수 병력이 여기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또 정예병인 한니발의 부대는 이탈리아에 고립되어 로마군이 식민지를 공격하러 왔을 때 다른 카르타고 군대가 이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카르타고는 연합체의 특성상 유사시 다른 교역도시들에게 강제징병이나 강제징수를 하기 어려운데다가, 평소 이들에게 인심을 못 얻은 탓도 커서 우티카 같은 만만치 않은 경쟁세력이 나중에 전세가 더 악화되자 오히려 로마를 편드는 악재까지 발생해 안 그래도 부족한 전쟁동원능력이 더 떨어졌다.
전략전술 측면에서도 로마는 북방 켈트족과의 전쟁, 이탈리아 통일전쟁, 에피로스의 피로스의 침공 등으로 단련된 베테랑 장교들이 많았던 반면, 카르타고는 하밀카르나 한니발 등 몇몇 특출난 인물을 제외하면 미숙한 페니키아인 상류층이 전쟁을 지휘했다.
또한 카르타고는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를 사형에 처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패전으로 인한 전술적 교훈을 활용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패전의 처벌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 결정적인 승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카르타고인들도 한 번 졌다고 바로 죽였다가는 전투지휘관이 기피 직업이 되어 군대를 지휘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 제도를 무조건 적용하지는 않았다. 한니발만 해도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후퇴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르타고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는 이 관행도 사실은 카르타고의 시민 인구가 적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카르타고는 시민 인구가 적다보니 큰 전투에서 패배하면 그 인구 타격의 '슬픔'이 로마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고 그만큼 시민들의 분노도 맹렬했던 것이다.[8] 한편 로마는 거의 해마다 크고 작은 전쟁을 수행하던 나라답게 귀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온 시민이 사실상 전사였고, 그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런 크고 작은 전쟁에서 평민만 피를 흘린 것이 아니고 귀족들 역시 많은 피를 흘렸다. 칸나이 전투 당시 군단병 보병 장교로 참전한 원로원 의원들 역시 다수 전사했다는 사실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전투에서 대패해 많은 사상자가 생겨도 그 사상자엔 귀족, 평민이 가리지 않고 포함되었기 때문에, 평민들 입장에서는 '우리만 생고생하는 게 아니고 위의 귀족 나으리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고 있구나.' 하고 느껴서 신분갈등으로 비화하지는 않았다.
해군은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카르타고가 로마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카르타고가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국가이기도 했고, 시민들이 육군은 용병에게 주로 맡기고 해군 지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카르타고는 해전에서 연전연패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대체로 제해권을 로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해전에서 열세인 원인이 우선 카르타고는 노잡이와 같은 선원 숫자가 부족하여 함대 규모가 로마에 비해 작았고, 로마는 전함에 더 많은 수병들을 실었기 때문이다. 수병을 적게 싣고 주로 충각으로 들이받는 전법을 쓰던 카르타고 함대는 함상 백병전이 벌어지면 답이 없었다.
즉 카르타고는 시민들의 인구가 적었던 데다가 그나마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어려워서 로마에 패배했다.
6. 제도 및 사회
초기에는 왕정이었다가 기원전 480년 하밀카르 1세가 사망한 후 실권이 장로회로 넘어갔다. 보밀카르가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공화정이 되었다.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정으로 공화정 시기의 로마와 유사하게 해마다 집정관 2명[9] 을 선출했다. 의회는 장로들로 구성된 원로원, 고관 104명으로 구성된 백인회,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회가 존재했다.
가죽으로 만든 통화를 썼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다만 카르타고에서 발행한 동전들이 현존하고, 대영박물관도 일부를 소장했다.
유달리 동명이인이 많아 역사서에서 이름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잦다(한니발, 하스드루발, 마고 등). 당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만 한정해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지휘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럿 등장한다. 왜냐하면 카르타고에서는 이름을 이어받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인데, 주로 한 가문의 후계자가 가문을 이어받을 때 이전 가주가 쓰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가주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것은 그 어떤 상속문서보다도 확실하게 가문의 다음 주인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0]
문화 쪽에서는 로마나 그리스와 달리 페니키아 문화의 영향이 강해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대 카르타고 서적 중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항해일지나 농장경영서 등 실용서적들이다.
어린아이를 산채로 불에 태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의식이 유명하다.[11] 카르타고 유적지에는 희생된 아이들의 유골을 매장한 묘지인 토펫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토펫에 매장된 유골이 인신공양이 아니라 질병 등으로 자연사한 아이들의 유해라는 견해도 일부 존재하지만, 학계 주류는 실제로 인신공양을 했다고 본다.
7. 역대 국왕 목록
- <디도 왕조>
- 디도: 기원전 814 ~ 760
- (미상)
- 한노 1세: 기원전 580 ~ 556
- 말쿠스 1세: 기원전 556 ~ 550
- <마고 왕조>
- 마고 1세: 기원전 550 ~ 530
- 하스드루발 1세: 기원전 530 ~ 510
- 하밀카르 1세: 기원전 510 ~ 480
- 한노 2세: 기원전 480 ~ 440
- 히밀코 1세: 기원전 460 ~ 410 (시칠리아 왕)
- 한니발 1세: 기원전 440 ~ 406
- 히밀코 2세: 기원전 406 ~ 396
- 마고 2세: 기원전 396 ~ 375
- 마고 3세: 기원전 375 ~ 344
- 한노 3세: 기원전 344 ~ 340
- <한노 왕조>
- 한노 대왕: 기원전 340 ~ 337
- 기스코: 기원전 337 ~ 330
- 하밀카르 2세: 기원전 330 ~ 309
- 보밀카르: 기원전 309 ~ 308
8. 로마-동로마 시대와 그 이후
로마 제국에서 옛 카르타고가 있던 자리에 재건한 도시. 원조(?)인 페니키아인의 도시 카르타고는 로마군이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카르타고의 유적은 거의 로마 제국 시절의 것들뿐이다. 다만 옛 카르타고 항구의 일부 흔적과 비르사 언덕의 주거지, 인신공양의식에 처해진 아이들의 유해가 묻힌 토펫 등 원래의 카르타고 유적이 약간은 남아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병사들은 어린아이들의 영혼이 자신들에게 저주를 내릴까 두려워하여 다른 건 다 불태우고 부쉈지만 토펫만큼은 손대지 않았다고...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해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워낙 항구도시로서 입지가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도 카르타고의 공포가 희미해져가자 재건논의가 자주 있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암살당하면서 중지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재건된 카르타고가 옛 카르타고와 어떤 공통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도시의 위치와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다.
새롭게 건설된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 시대에 아프리카 속주(지금의 튀니지 북부)의 중심도시로 부와 번영을 누렸다.[12] 특히 로마 제국이 동, 서로 분열되고 부유한 마케도니아, 소아시아, 이집트 속주들이 모두 동로마로 넘어갔을 때,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남프랑스) 지역, 히스파니아 지방과 더불어서 서로마의 몇 안되는 중요한 세수원 지역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화한 이후 카르타고의 일반 시민들과 그 일대의 소작농들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던 도나투스파[13] 를 믿으면서 정통 교리를 믿던 지주 & 대상인 계급과 반목했다.
이후 북아프리카 속주를 수비하던 로마군들이 내전에 투입되어 사막 유목민들의 약탈에 노출되면서 로마의 지배력이 취약해졌다. 429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 서부에 상륙하였고 도나투스파 신도들의 지지를 받으며 몇 년 뒤 반달족들은 카르타고를 위시로 한 북서 아프리카 대부분을 순조롭게 점령하고 반달 왕국을 세우게 된다. 부유한 카르타고 지방의 상실은 이민족들의 침략에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었던 서로마 제국에 치명타로 작용하였으며 결국 잦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한 서로마는 훈족의 침입을 격퇴한 유능한 장군 아에티우스가 암살당한 이후로 급격하게 무너지게 된다.[14]
흔히 로마 제국 말기 반달족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고 몰락한 것으로 여겨지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카르타고는 반달 왕국의 통치하에 오히려 고대 로마 시대보다 더한 번영을 누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북아프리카 지방에서 많은 토지가 버려진 사실인데,[15] 이는 로마 제국시기 제국에서도 가장 대규모 농장이 발달한 아프리카 속주의 특성상[16] 상당수의 자영농이 몰락하여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로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되며 구질서가 완전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무너지며[17] 농민들에게 쓸만한 토지들을 분배할 여유가 생겼고, 그 반동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들이 대거 버려진 것이다. 굳이 농지면적만을 번영의 기준으로 잡는다면 반달 왕국이 통치하던 시기 카르타고가 쪼그라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번영의 기준을 잡는 사람을 없을 테니. 그러나 카르타고가 극심한 타격을 받은 시기가 한 번 있긴 했는데, 바로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수복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에 편입된 직후. 막 통치자가 뒤바뀌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둔군의 반란, 무어인들의 침입, 급작스런 선 페스트의 발흥까지 여러 악재들이 겹치는 바람에 카르타고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재정복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속주들에 상당한 금액을 써야했던 동로마 제국은 심각한 자금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카르타고 수복은 제국에게 큰 이득이 되었는데, 훗날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레반트와 소아시아 지방을 대거 상실한 동로마 제국이 이라클리오스(=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절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이나,[18]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대반격 시절 중요한 재원을 담당했던 것만 보아도 여전히 제국의 손꼽히는 중요도시이자 부를 축적한 번영하는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한 이후 로마에 복속되어 재건된 후 지배자가 여러번 바뀌는 중에도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으나, 역사의 중심에서 빗겨나간 탓에 유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최종 소멸은 698년 아랍인의 침략이다.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극적인 반격과 호스로 2세의 암살로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경선은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중동의 두 거대 거대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아라비아 지방의 아랍인들, 즉 이슬람 세력이 크게 발흥하게 된다. 7세기 중반 아라비아를 통일한 이슬람 왕국은 바로 칼끝을 약화된 두 제국에게 돌리며 시리아로 쇄도해왔고 결국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 동방야전군의 주력부대가 소멸하면서 로마 제국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속주들을 포기하고 소아시아까지 밀려나게 된다. 이 결과 동로마 본토와 육상으로 단절되게 된 아프리카 속주들은 방위가 극도로 취약해졌고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중앙군을 소아시아에 붙들어 놓는데 성공한 아랍인들은 이집트 속주를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아프리카 지방을 점령해나가기 시작한다. 북서아프리카 및 카르타고 지역의 도시들은 이집트와는 달리 20여 년을 더 버텼으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 이후 동로마 제국의 내란을 틈타 지속적으로 침입해온 아랍인들에 의해 도시가 결국 함락되었다. 후계 황제인 레온티오스가 구원단을 파견했지만 결국 격파되었고 이는 황제 자신의 실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후 동로마 제국에서 해군을 보내 재탈환하는 바람에 다시 공성전을 벌여야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예를 떠올려 역습의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카르타고 성벽을 허물고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후 근처에 튀니스를 건설했다. 1400년에 이르는 도시의 최후였다.
흔히 알려진 오해로 아랍인의 북아프리카 정복이 관개시설의 파괴와 방치를 일으켜 지나치게 관개농업이 발달하여 큰 생산성을 누리던 북아프리카 지방이 쇠퇴했다는 오해가 있다. 그 주장의 얼개는 이렇다: ''태생이 사막 유목민족이었던 베두인 출신의 아랍인이 들어오자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모르는 지배자들에 의해 토착민들은 기술을 전달할 틈도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고, 사람 손을 타지 못한 밭과 과수원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힘이 없었고, 결국 급속한 사막화로 북아프리카 지방 대부분은 현재의 사막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랍인의 대정복시대 당시 아랍 측 인적자원의 중심 핵이던 헤자즈 지방의 주민들은 농업 따윈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도 오아시스 농업으로 아득바득 생계를 이어 오아시스 도시들을 건설했던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아랍인들은 방치되었던 페르시아-로마의 낙후된 관개시설을 보수하고 기존의 낙후되어 있었던 동로마의 관개시설을 신기술로 만든 새로 발명된 기계장치들로 광활한 이슬람 신문명권 지역의 농업에 혁신을 불러왔다. 기존에 방치되었던 강, 시내, 오아시스, 하천, 지하 깊숙히 자리잡은 지하수 등 이용되지 않던 수원이 없어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기존에 재배되지 않거나 일부 지역에서나 재배되던 쌀, 수수, 경질소맥, 사탕수수, 수박, 시금치, 겅퀴, 토란, 광귤, 레몬, 목화, 가지, 코코스 야자, 망고, 플랜테인, 바나나, 라임에 더불어서 섬유식물, 약초, 조미료, 미용, 의약, 염료, 조경 작물들이 아랍인들의 통합한 대서양부터 인더스 강까지 널리 퍼졌다. 이와 같은 농업적 혁명은 수원부족으로 방치된 농업 가능 토지들을 개간해 뺴곡히 경작지가 들어섰으며 심지어 기존에 농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황무지 사막들조차 개간해 신 작물을 재배해서 놀랄 정도의 수확량을 기록했다.
그러면 왜 북아프리카는 황폐화되었을까? 이미 지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북아프리카-이집트-레반트 지역이 지나친 토지개발과 소빙기로 인한 토지염화와 지력쇠퇴로 인해 나날이 수확량이 감소해 나가 버려지고 방치되어 유적으로밖에 남지 않은 도시 폐허들이 속속 생기기 시작하던 때가 고대 로마 말기의 시기였다.[19] 오히려 이런 로마 시대의 점진적인 쇠퇴가 아랍 시대 들어 단숨에 뒤집혀, 수확량 폭등을 바탕으로 영광이 빛에 바랜 기존의 로마 도시들을 능가하는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들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북아프리카의 농업의 쇠퇴와 사막화의 원인은 후에 11세기에 수니파 반란으로 일어선, 종교적인 광신으로 유명한 파티마 왕조에 있다. 파티마 조는 매우 극단적인 이스마일파 광신도로 악명이 높았던 베두인인 바누 하이랄, 바누 수랍 부족을 반란지인 북아프리카 동부로 이주시켜서 보복으로 마그레브의 거주지와 농경지를 철저하게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이들은 심지어 마그레브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카이르완까지 점령했다. 이들 베두인으로 인해 아포칼립스가 펼쳐지게 되었던 것.
베두인 부족은 철저하게 농경지와 관개시설을 황폐화하고 박살내는 동시에 보이는 족족 대학살을 벌여, 북아프리카 동부 지역인 알제리 동부, 리비아와 튀니지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살아남은 베르베르인들은 서쪽과 남쪽의 산지로 도망쳤으며, 덕분에 기층 민중의 교체마저 이루어졌다. 베두인들은 순수 유목민으로 농업을 멸시해서, 황폐화된 도심과 농경지를 목축지로 사용하였다. 뒤이어 다른 베두인 부족들이 물밀듯이 들어와서 이들 지역의 사막화와 베두인화는 돌이킬 수 없게 되버린다.
결국 중세를 지나 현대에 와서 석유가 발견될 때까지 이 지역은 어업 외에 별다른 산업이라곤 해적들과 노예상만이 있을 정도로 군사력말고는 별 볼일 없는 동네가 된다. 현재도 마찬가지.
하지만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은 고대 유적이 현재 별볼일 없는 상태로 남아주는 것을 더욱 반긴다. 이유는 고대 유적 위에 도시, 특히 층수가 높이 올라가고 그만큼 그걸 받쳐주기 위해 땅을 깊게 파려면 개발 등으로 인해 발굴 및 조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역사를 조사하는 역사학자들 입장에서는 유럽에서 조사하는 것보다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조사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9. 둘러보기
[A] 최대 전성기 [B] 1, 2차 포에니 전쟁 후 면적 [C] 3차 포에니 전쟁 때 면적 [1] 그리스의 지명 Χαλκηδών(칼케돈)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2] ''Karthago, Italiam contra'': 포에니 전쟁을 암시하는 표현이다.[3] 복층 주택 자체는 로마의 인술라 등 고대에도 이미 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특이한 것은 아니다. 로마의 인술라를 최초의 아파트라고 하기도 하는 등 복층 주택에 흔하게 붙는 수식이다. 제대로 된 현대적인 아파트는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것이 최초이다.[4] 심지어 포에니 전쟁 때도 한 번도 안 거르고 상납금을 꼬박꼬박 티레로 보냈다고 한다.[5] 사실 완전히 정복할 능력도 부족했다.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정복이 안된 누미디아인들은 거의 모두 유목민들이있는데, 여러 역사적 사례가 알려주듯 이런 이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훗날 지중해 최강국이 된 로마 조차 이들을 1차로 굴복시키기 위해 유구르타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뤘다. 이것도 모자라서 여러번의 전쟁 끝에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완전히 정복한다.[6]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꾼들이 노예로 대체됨은 기술이 발전해 노꾼에게 숙련도가 필요없어진 중세 이야기고, 고대에는 노꾼들은 쉽게 대체하기 힘든 고급 인력이었기에 주로 자국의 시민 계층이 맡았다. 그래서 대규모 해전에서 완패하면 시민 계층에 막대한 손실이 온다.[7] 카르타고 주변의 영토도 식량 생산력도 높아서 로마에 정복된 후에는 주요 식량 생산지가 되었다. 단지 동시기 라틴 지역과 비교하면 훨씬 모자랐을 뿐이다.[8] 사실 이 부분은 카르타고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당시 공존하던 동방의 왕국과 제국들이나 후대에 출현하게 될 왕국이나 제국들보다 인구가 적었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소모품이라고 보지 않았다. 특히 그들에게 병역은 의무이기 이전에 시민이라는 자질을 갖게 하는 사명이었다. 그렇기에 전투에서 크게 패해 이런 소중한 시민들을 많이 잃으면 그 분노 역시 엄청났다. 일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는 해군이 후퇴하면서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하여 해군 제독을 처형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9] 로마의 콘술과 유사한 직책으로 카르타고에서는 수페트라고 호칭했다.[10] 실제로 이러한 풍습은 전혀 다른 지방인 중앙아시아의 돌궐, 요, 몽골에서도 나타나며 현재의 사하라 북쪽 일대의 유목민들에게도 이러한 풍습을 관찰할 수 있다. 아일랜드나 러시아도 이러한 문화가 아직 남아있다.[11] 몰렉 문서에서 보듯 페니키아인들은 대개 이런 풍습이 있었다.[12] 로마 제국의 3대 도시가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였는데 이 3대 도시 바로 다음 가는 대도시가 카르타고였으며, 이후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이후 시점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기존 3대 도시 다음 가는 5번째 대도시였다.[13] 성령이 강림하지 않은 미사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다른 기독교 교파의 예배를 무효 처리하고 아예 이교도 취급하던 극단주의 성향의 교파였다.[14] 원래 아에티우스가 활약하던 당시 북아프리카를 수비하던 사령관은 보니파키우스였는데, 아에티우스보다 더 뛰어난 장군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내전 중 북아프리카 수비병력을 긁어모아와서 아에티우스와 전투를 벌여 이겨가던 도중 아에티우스의 일기토 신청을 수락하고 그와 일대일 대결을 하다가 전사했다고 한다.[15] 정확히 따지자면 반달리즘으로 유명한 반달족이 통치했다는 게 가장 클 것이다. 대략 "반달족? 걔네 때문에 북아프리카 막장됨!"의 느낌.[16] 한창 때는 아프리카 속주 영지의 절반 가까이가 황제의 개인 영지였고, 이후 북아프리카 속주 농토의 1/6을 개인소유로 보유한 원로원 의원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니 북아프리카 속주의 자영농자들이 죽어날 수 밖에.[17] 영지고 뭐고 다 버리고 로마로 도망친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18] 황제 즉위 이전의 이라클리오스가 가졌던 직함이 바로 카르타고 총독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자신의 옛 본거지로 천도하려 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과거 자신들이 멸망시킨 도시를 새 수도로 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참고로 중국의 금나라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만주-요동에서 북중국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면서 정강의 변으로 멸망시킨 북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천도했다.[19] 특히 리비아의 도시들과 시리아 내륙도시들이 유달리 심했다. 덕분에(?) 로마 시대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