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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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풀네임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Ἀ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영어식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더 유명하다. 한국에선 영어 발음인 알렉산더 대왕으로 통용된다.[4] 아랍어권에서는 이를 음역한 페르시아 어형인 이스칸다르(الإسكندر)라고 부른다.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그저 신이라고 불러주는 수밖에.
스파르타 사람 다미스(Δάμις)의 말. 알렉산드로스가 도시국가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명령문을 내리자 한 말이다.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의 26대 왕이자 제2대 코린토스 동맹 의장이다.
고대사 정복 군주의 아이콘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즉위하기 이전부터 군사적인 능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그가 즉위한 그해에 아버지였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코린토스 동맹을 맺은 고대 그리스 국가 중 하나였던 테베가 이러한 어린 왕의 즉위를 틈타 마케도니아에 어린 아이가 올랐으니 혼란스러울 거라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음은 물론 테베를 소멸시켜 버렸다. 이후 동쪽으로 오랫동안 그리스 영토를 칩입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가 된 것도 모자라,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 왕의 호칭인 파라오가 되었고, 나아가 지금의 인도 부근까지 정벌하여 고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인물이다. 게다가 알렉산더의 정복은 단지 군사적인 업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수학,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의 정복전쟁으로 인한 동, 서양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와 이민족들에 대한 포용정책으로 인해 탄생한 세계시민 사상으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해 유럽은 물론 아시아까지도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 그 자신의 군사적 업적을 능가하는 그의 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석굴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준 간다라양식도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산드로스의 업적과 관련된 것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지만, 그가 짧은 인생 동안 남긴 업적은 매우 거대하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아리스토텔레스도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알렉산드로스 3세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 7월 20일경[5]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나는 날 일뤼리아 인과의 전쟁에서 마케도니아가 승리하고 올림피아 제전에서 아버지 필리포스의 말이 우승하는 소식이 같이 들어왔고 이를 두고 아버지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불패의 인물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소년 시절의 유명한 일화로 부케팔로스를 길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아버지 필리포스가 스승으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붙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3년 동안 각종 학문들을 전수받았고,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정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고귀한 삶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친아버지 필리포스 2세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더욱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말까지 자주할 정도였으나, 훗날 그리스 우윌주의를 시종일관 고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과 알렉산드로스 본인의 왕권 강화 차원에서 알렉산드로스 본인에게 사사건건 직언을 올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를 처형한 일들로 인해서 둘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류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가 16세이던 시절 아버지 필리포스가 비잔티온(오늘날 이스탄불)으로 원정을 떠나자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섭정을 맡았는데 그때 마이도이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마이도이족을 추방한 다음 다른 민족들을 데려와 이곳에 알렉산드로폴리스를 건설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군사적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338년 카에로네이아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의 전투에도 참여해 좌익의 부대를 이끌고 테베의 최정예 부대인 신성부대를 선두에서 격파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보면 그가 이런 왕자 시절의 업적들로 인해 당시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왕이고 필리포스는 장군이다.''' 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포스 2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기뻐했다고 한다.[6]
2.2. 즉위
비록 알렉산드로스의 전공은 높았지만 같은 시기 아버지 필리포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아버지 필리포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7] 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는데 게다가 여기에 결혼식날 클레오파트라의 큰아버지 아탈로스가 클레오파트라가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을 적법한 아들을 낳기를 기원한다는 실언을 했고,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격분해 아탈로스에게 술잔을 던졌다. 이 광경을 본 필리포스가 칼을 빼들고 분노하다가 취기 때문에 넘어지자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아버지를 비꼬며 "이분(필리포스 2세)은 에우로페에서 아시아로 건너갈 준비[8] 를 한다면서 긴 의자에서 긴 의자로 넘어가다가 넘어져 누워 있군요."라고 조롱했고 이에 필리포스는 제대로 분노해서 다음 날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에페이로스로 사실상 추방시켜 버렸다. 이후 테마라토스라는 사람이 간신히 설득해서 수도 일뤼리콘으로 두 사람은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9]
기원전 336년 이 소동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카리아 지역의 페르시아 사트라프 픽소다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인 아리다이오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아리다이오스가 이 결혼을 통해 자신을 제치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될 것을 두려워했고 이를 막기 위해 역으로 자신이 픽소다로스와 사돈이 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배우였던 텟살로스를 카리아로 보내 사생아에 정신박약이던 이복형 아리다이오스 대신 알렉산드로스 자신이 픽소다로스와 사돈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했고 픽소다로스는 이 제안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필리포스는 이 결혼 소식을 알게 되었고 분노해서 알렉산드로스를 찾아가 질책한 뒤 (이 결혼 계획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을 전부 추방시켜 버렸다.
그런데 얼마 뒤 아버지 필리포스가 호위병인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주변인을 조사해본 결과 공식적인 암살 배후는 필리포스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백부 아탈로스였다로 나왔지만 암살 시기와 전후의 이해득실 관계가 너무 절묘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당대에도 제기되긴 했다. 특히 올림피아스가 가장 많이 비난받았다. 필리포스 2세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 거란 소문이 나돌았지만, 증거가 없는 관계로 알렉산드로스 3세가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했다.[10] 하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암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다.
군부 최선임자 파르메니온 장군이 군부를 대표해 알렉산드로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이복 동생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필리포스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조용히 살고 있었던 사촌 형 아민타스 4세 등을 비롯한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특히 클레오파트라를 붙여준 데다 추방의 계기가 되었던 축사를 해서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던 장군 아탈로스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가족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 아탈로스는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박살난 뒤 힘에 눌려 코린토스 동맹으로 묶여 있었는데,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겨우 20세에 불과한 애송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폴리스들의 반란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기병 3,000기만 이끌고 신속히 남하한다. 이러한 전격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테살리아가 가장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모두 죄를 묻지 않는 선처를 베풀었다.
1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 이전 우선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자 지금의 이스탄불 북서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했다. 이후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 부족을 격파했다. 그때 일리리아(그리스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지역, 현재의 크로아티아, 알바니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지역에도 가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했다.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근거없는 엉뚱한 소문이 그리스에서 퍼졌고, 이를 들은 평소에도 마케도니아를 야만인이라면서 무시하던 테베가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복귀시키고, 반대로 친 마케도니아 인사인 티몰라오와 아민타스를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케도니아 군대가 주둔하던 카드메이아 요새를 포위하여 본격적으로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도 반란에 참여했다. 이를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33,0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신속히 남하했다. 그가 군대와 함께 테베에 도착하자 테베인들은 처음엔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왔다고 믿지 않았는데,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는 2주 전만 해도 무려 4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에 테베의 반란에 동참한 다른 폴리스들은 군사 행동을 멈춘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 성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군을 배치하고 반란의 주모자만 넘기고 항복하면 테베인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테베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젊기만한 애송이 취급하면서 상황파악을 못하고 오히려 알렉산드로스의 군사령관 두 명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큰소리친 뒤 완강히 거부했다. 3일간의 준비 후 알렉산드로스군과 테베군은 교전을 개시한다. 양측 군대는 성벽 사이에 두고 넓게 퍼져 사방에서 싸웠는데 이 와중 한 성문에 생긴 빈틈을 파악한 알렉산드로스가 예비대를 투입해 차지하게 한 뒤 군을 성내로 진입시킨다. 이것이 싸움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뒤이어 벌어진 시가전 끝에 테베는 점령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의 반란에 가담한 폴리스들에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은 모두 학살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으며, 테베는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 이 패턴은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 계속해서 재현되었다. 자신에게 극렬하게 저항하는 모든 도시들을 상대로. 각설하고 이로써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었던 강력한 도시 국가인 테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만 시인 핀다로스의 집은 부하들에게 절대로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에 아테네가 진심으로 투항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의 안전과 문화와 재산을 보장해주는 너그러운 조치를 베풀었다.
알렉산드로스 사망 후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주장한 카산드로스가 뿔뿔이 흩어진 테베인을 불러 테베를 재건케 했다. 이들은 파괴된 테베의 성벽과 건물을 재건축하여 옛 모습을 갖추게 하였으나 한번 크게 손실된 국력까지 회복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테베는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2.3. 페르시아 원정의 시작
기원전 334년 저런 바쁜 군사활동을 단 1년 만에 마무리 지은 알렉산드로스는 다음해에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넜다. 사실 비잔티움 쪽으로 가는 게 더 나은 방법이긴 했으나 이 지역은 독립된 도시국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대군을 이끌고 건넜던 바로 그곳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륙하자 그 지방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지방관)였던 스피트리다테스와 아르시테스가 방어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젤레리아에서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장수 멤논은[11] 청야작전을 주장했지만 아르시테스 등 사트라프들이 반대해 무산되고 전면전이 준비되었다. 두 군대는 그라니코스 강이라는 곳에서 조우하였다. 페르시아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포진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장수들은 밤에 강의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건너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허를 찌르기 위해 자신의 기병대로 즉각 도강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대담하게 강을 건너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격파되었고, 스피트리다테스의 도끼가 알렉산드로스의 투구를 쪼개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지만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사령관인 스피트리다테스와 주요 지위층을 포로로 잡으며 페르시아와의 첫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그라니코스 강 전투'''의 승리로 인해 페르시아인들이 죽거나 도망가면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 지역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보단 그리스와 친한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12] 하며 거침없이 남하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선을 따라 쭉 돌면서 항구도시들을 점령하며 내려왔는데 이는 항구도시들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케도니아군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출신의 멤논이라는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마케도니아군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으나 거의 성공할 무렵 멤논이 갑자기 병으로 죽은 데다 항구도시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되면서 해체되었다.
이렇게 점령하는 동안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관련된 일화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2.4. 이소스 전투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를 제압한 뒤 겨울을 나고 2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시리아 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에 진입하기 위한 관문인 이소스라는 곳에서 그는 다리우스 3세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 두었던 페르시아의 대군과 조우했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고 총 병력은 11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4만여 병력이었기 때문에 병력상으론 알렉산드로스가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소스는 의외로 좁은 평야였고 따라서 적은 병력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다리우스가 굳이 이런 곳에서 싸우기로 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다리우스가 병력의 우세에 우쭐했을 수도 있고 다리우스가 터키 지역의 침략을 1년간이나 방관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조급하게 싸움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에 따르면 페니키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접근으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고 했는데 이는 즉 다리우스가 늑장을 부린 것 때문에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소스 전투 초기에 다리우스 자신의 병력을 강 북쪽으로 포진시킨 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소스에 포진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터키 지역과 그의 본대의 길목을 차단하였으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주문대로 강건너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초기엔 다리우스가 유리한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숫적으로나 전황으로나 불리한 상황을 보고 다리우스를 직접 노리기로 하였고 이 전술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노리기 위해 보병의 우익에게 명령하여 페르시아군을 최대한 밀어내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장창을 이용해 잘 밀어내자 페르시아 좌익과 중앙에 약간의 틈이 생겼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정예기병인 헤타이로이를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지점에 위치한 뒤 그대로 그 틈을 통과하여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최고 사령관이 도주한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격파당하고 만다.
[13]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 후 다리우스의 활과, 전차를 전리품으로 빼앗았고,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두 공주를 모두 사로잡았는데 그는 이들 가족을 매우 정중하게 대우하였다고 한다. 특히 다리우스의 아내는 역사서에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기록이 남겨진 여인이었는데 생포된 지 1년 뒤 사산으로 목숨을 잃는다. 기록에 누구의 아이인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감히 누가 일국의 왕비한테 접근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알렉산드로스만이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포된 다리우스의 두 딸 중 한 명은 그대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알렉산드로스의 동성애 상대로 알려진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원정 내내 뚜까맞은 이미지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지만 그래도 용감히 분전한 명장이 있었으니, 바로 킬리키아 사트라프(총독) 마자이오스였다. 다리우스 이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절에 이미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라는 꿀땅의 샤트라프를 역임한 베테랑이었던 마자이오스는, 아마 상당히 신뢰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치세 당시 제국 서방에서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할 때 활약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다리우스 3세 치하에서 그는 마케도니아군에 맞서 이소스 전투에 참전했지만, 이소스 전투에서 활약을 했다는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트롤링을 하진 않았어도 별 힘은 쓰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그는 이소스 참패 이후 시리아의 페르시아 제국령이 와르르 무너질 때도 내륙의 시리아군들을 수습하여 다리우스 3세 측으로 합류시키는 공을 세웠는데, 이로 보아 인망이 상당히 있었던 총독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그 후, 다리우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간단하게 '''"대체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켜서 어쩌자는 거요?"'''...였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답장은 '''"옛날부터 마케도니아를 수차례 먼저 공격했던 것은 당신들이잖소. 이제 당신과 나 중에 누가 진짜 왕인지 따져볼 때가 된 것 같으니, 당신이 먼저 덤비시오."''' 라는 내용이었고, 답장을 보낸 직후 지중해 연안과 그 부근도 모두 정복한 후, 이집트에 방문했다가 돌아온다.
이소스의 패배 뒤 다리우스 3세는 강화를 제의하는데 내용은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0,000 탈렌트를 지불하고 유프라테스 강부터 그 서쪽 지방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양도하며, 거기다 자기 딸까지 얹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000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덧붙여 "와서 항복한다면 용서해 주겠지만 오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벨 수밖에 없소"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마음 속엔 이미 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 이때 부하 장군인 파르메니온과의 대화도 유명한데 노장 파르메니온은 '''"제가 왕이라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면 그랬을 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2.5.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
이소스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는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을 휩쓸었다. 다음 해에 24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티레와 가자와 같은 도시들은 격렬하게 농성을 하였으나 모두 격파되고 이들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고 만다. 도시 '''티레 공성전'''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공성전을 직접 지휘하면서 그가 회전뿐만 아니라 공성전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지닌 무결점 지휘관임을 입증하였다. 티레는 섬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공략하기 위해 인공 길을 바다 위에 만들고, 50m에 해당되는 공성탑을 건설하며, 배에 공성충차를 실어 성벽을 타격하는 등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14]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분풀이로 항복한 티레 사령관을 전차에 매달고 죽을 때까지 자갈밭 위로 끌고 다니기도 했다. 이때 또 다른 대도시인 예루살렘은 성문을 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즉각 항복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 때문에 그리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어릴 적 향로에 향을 잔뜩 쏟아붓다가 스승 레오니다스[15] 에게 "향료가 특산물인 나라의 지배자가 되시기 전에는 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라는 꾸중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에서 얻은 향료를 마케도니아에 보내며 스승에게 "향료를 많이 보내니 걱정 마시고 제사에 사용하십시오"라고 편지를 동봉해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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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인들에게 '해방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또 시와의 아문 신전에서 그가 필리포스의 아들이 아닌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는 이 신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자신이 제우스 신의 아들(그리스 인들에게 제우스 신은 아문과 동일 신으로 여겨졌다)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16] 까지 발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각은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곤혹스럽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기원전 331년, 마자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유프라테스 강 도하를 타프사코스에서 저지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주어진 병력이 너무 적어 다리를 놓는 마케도니아 군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유프라테스 강 도하에 성공하자, 마자이오스는 퇴각하여 티그리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던 다리우스 3세의 본군에 합류했다.
2.6. 가우가멜라 전투
다음 해에 25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 나와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짜내 모은 90,000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섰다.[17] 그런데 전 항목에서 서술했던 교섭 제안이 결렬되고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으로 출격한 직후, 포로였던 다리우스의 왕비가 사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장례를 아주 성대하게 치러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는 신에게 기도를 올린 후 진격 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이소스 때처럼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에게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부대의 정예기병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도록 한 뒤 자신의 우세한 병력으로 마케도니아군을 짜부라뜨리는 전술을 짰다.신이시여, 이 늙은이가 이 전투에서 혹 이긴다면 알렉산드로스에게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또한 혹 제가 패한다면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의 왕좌에 앉게 해 주소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헤타이로이 부대가 견제당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우익 끝까지 이동하여 페르시아의 별동대를 중앙에서 멀어지게끔 유인했다. 중앙군을 남기고 우측이 떨어져 나가자 중앙군의 옆에 틈이 생겼고, 필연적으로 다리우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이때 우익으로 유인된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페르시아 기병은 우익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 보병의 공격에 붙들리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그 견제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소스 때처럼 다리우스는 또 다시 공황에 빠져 달아났는데 이로 인해 승부가 또 결정되고 말았다.
이소스 때와 마찬가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다리우스가 도망치기 전까진 페르시아군이 꽤 우세하였는데, 특히 마케도니아의 좌익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돌진에 과감히 대항하였으면 그토록 어이없게 패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겁이 많아졌는지 조금만 위협을 받으면 바로 도망쳤는데, 그로써 알렉산드로스에게 손쉬운 승리를 선사한다. 다리우스 3세는 즉위 전 장군이었을 때는 적장과 일기토를 벌여 죽이기도 했고, 왕위에 오른 후 권신 바고아스를 손수 독주를 먹여 죽이는 등 전혀 겁 많은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미스테리한 일이다.
이렇게 다리우스의 겁이 많은 성격은 전투 시 가장 선두에 서는 알렉산드로스와 대조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한 술 더 떠 이소스나 가우가멜라 전투에선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지점의 끝에 자리잡고 적진을 항해 돌격하였다. 쐐기 대형의 꼭지점 끝은 당연하게도 사망할 확률이 제일 높은 위험한 자리이다. 또다른 예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침공 첫 전투였던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도 도강 직후 앞장서서 돌격해 들어가다 본대와 분리된 채로 포위당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휘하의 장군 클레이토스가 제때 달려들어 도와주지 않았다면 페르시아 원정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험한 행동은 마케도니아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는데 특히 직접 지휘받는 헤타이로이의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왕이 가장 선두 끝에서 돌격을 이끄는데 누가 용기를 얻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헤타이로이 기병은 전투시 대단히 용맹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이 이소스,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우가멜라의 패배로 다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재기불능이 되고 말았다. 가우가멜라에서 동원한 병력은 다리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꼭 사로잡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맹추격한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달아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지 단숨에 자그로스 산맥을 돌파한 뒤 동쪽으로 자취를 감춘다. 다리우스를 놓친 알렉산드로스는 대신 남하하여 바빌론에 입성했다.
한편, 가우가멜라의 결전에서, 페르시아의 명장 마자이오스는 페르시아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우익의 제국 북부 중앙아시아 출신 중기병들을 지휘하여 마케도니아의 좌익을 타격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다리우스 3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 날의 전투에서 가장 분전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좌익을 지휘하던 백전노장 파르메니온은 이소스에서 싸웠던 페르시아군과는 병력의 질도 지휘관의 실력도 차원이 다른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전선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 스키타이와 인도 기병대가 마케도니아군 진영을 점령하고 그 곳에 있는 다리우스의 가족을 구출하라는 마자이오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약탈에 정신이 팔려 개판을 치는 트롤링을 벌이는 동안에도 마자이오스는 마케도니아군 정면에 꼬라박아 날린 스키타이 전차대를 밀집대형을 이룬 중기병대와의 합동공격에 잘 활용해, 마케도니아군 좌익의 파르메니온의 팔랑크스와 테살리아 기병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파르메니온은 다리우스 3세를 잡기 직전이던 알렉산드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내야 했고 이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퇴물이 다 된 무능한 늙은이가 눈앞에 다가온 완벽한 승리를 망쳤다는 억울한 욕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이 날 마케도니아군의 승리는, 오히려 마자이오스의 맹공을 받고도 그만큼 버텨낸 파르메니온의 굳셈과 마자이오스를 지원하러 와 적들에게 쐐기를 박는 대신 약탈에 눈이 멀었던 이민족 기병대의 탐욕이 결합된 결과였다.
페르시아의 구국영웅이 될 수 있을 만큼 잘 싸웠음에도 알렉산드로스에게 중앙을 급습당한 다리우스가 빤스런을 하면서 전군에 모랄빵이 나 억울하게 패장이 되고 만 마자이오스는 다리우스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졌던지, 아니면 페르시아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여겼던지 바빌론에서 저항하는 대신 도시를 넘기고 명예로운 항복을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 그 보답으로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임명된 그는, 다리우스의 가족들 다음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후한 대접을 받은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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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스탄불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알렉산드로스 석관에는[18] 마자이오스의 용맹한 저항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투 장면과, 마자이오스가 항복 이후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사자 사냥을 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 당시 그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기원전 328년에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알렉산드로스를 새로운 왕으로서 충실하게 섬겼다.
2.7. 다리우스 추격
바빌론을 방문한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 입성한 뒤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페르세폴리스에 진입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거대한 석상을 때려부셨다. 뒤이어 페르세폴리스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방화를 했다는 기록과 실수로 그랬다는 기록이 모두 있다. 영국 BBC에서 만든 알렉산드로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화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적어도 우발적인 방화는 아니라는 것. 방화에 대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로 고의로 방화했다는 설.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마케도니아군 부사령관 파르메니온은 '이미 알렉산드로스의 재산이 된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을 파괴하는 것은 현명치 않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왕으로서 아시아를 안전하게 다스리기보다 정복하고 지가나는데 급급한 인상을 보인다면 아시아인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방화를 반대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침략했던 페르시아인들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1-3]
- 알렉산드로스가 만취 상태에서 객기로 왕궁에 불을 지른것이 도시 전체로 옮겨 붙었다는 설.[19] 알렉산드로스는 술에 취하면 인사불성이 되기로 유명했고, 자신의 부하들을 여럿 죽이는 큰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충신 클레이토스는 술김에 직접 창으로 찔러죽이는 황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왕궁에서 창녀들을 데리고 파티를 벌이던 중, 타이스라는 이름의 한 창녀와 내기를 벌이다 불을 놓는 바람에 페르세폴리스가 전소되어 괴멸했다는 설.
-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애인을 유혹할 속셈으로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놨다는 설.
- 바빌론을 수도로 삼기 위해 다른 세력이 페르세폴리스를 거점으로 삼기 전에 방화해 없애버렸다는 전략적 판단이라는 설.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 다리우스를 따르던 바기스타네스(바빌론의 귀족)와 안티벨루스(바빌론 총독 마자이오스의 아들)가 알렉산드로스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베수스[20] 를 중심으로 바르사엔테스(아라코시아&드랑기아나의 지방관), 나바르자네스(기병대 지휘관)가 반란을 일으켜 다리우스를 억류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다시 출병시켜 반란군과 억류된 다리우스를 1주일 동안 쉬지않고 추적했고, 반란군을 추적하는데 성공했다. 반란군은 가볍게 진압했지만 다리우스는 이미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상황이었고, 다리우스의 시신을 발견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선왕들의 왕릉에 묻었다.[출처1-3] 일설에는 다리우스가 죽기 직전, 알렉산드로스의 군사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있던 그를 발견하고 물을 주자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나를 대신해 그대에게 상을 줄 것이다. 그에게 나의 감사 인사를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뒤이어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발견하였을 때 다리우스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따라서 꼭 생포하고 싶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대단히 실망하며 옷을 벗어 시신을 덮어주었다고 한다.[출처]
2.8.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으로
이때야말로 진정으로 페르시아 정복 전쟁을 했던 기간이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가우가멜라 전투 한 번 이긴 걸로 페르시아 땅 전부를 차지했다고 오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 반란군을 잡으려고 동쪽 히르카니아 지역을 시작으로 마드리아를 거쳐 아리아 지역으로 진군하며 반란군과 기타 반군들을 진압하고 나바르자네스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아리아 지역의 수시아에서 반란군 수장 베수스가 박트리아(혹은 자리아스파로 불렸다) 지역으로 도망친 뒤 왕중왕(샤한샤)을 자칭하며 이름까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로 개명하고 자신의 박트리아 군대와 스키타이의 지원군까지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군대를 모은 뒤 아리아 지역의 아르타코아나로 진군해 먼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에게 회유된 아리아의 지방관 사티바르자네스를 축출하고, 다음으로 드랑기아나(자랑기아)로 진군해 다리우스를 살해했던 지방관 바르사엔테스를 공격했다. 이때 바르사엔테스는 인더스강 서쪽까지 도망갔지만 현지인들이 오히려 바르사엔테스를 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압송해버렸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살해죄를 물어 바르사엔테스를 처형했다. 자랑기아에서 필로타스의 반란 음모 사건을 겪은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지휘관을 바꾸고, 달아났던 사티바르자네스가 반란 세력을 이끌고 아리아 지역을 침공하자 진압하여 죽이는 등 군대와 지역을 재정비한 뒤 인도 캅카스(지금의 힌두쿠시 산맥)를 넘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가 다스리던 박트리아로 향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청야작전을 벌이며 진군을 방해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박트리아 지역으로 진군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는 옥수스 강(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도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없는 박트리아 지역의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한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추적해서 옥수스 강을 건넜다. 이때 배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다 태워버리고 척박한 지역이라 땟목을 만들 나무도 부족했지만 가죽에 짚을 채운 배로 도하에 성공했다. 그렇게 추적하던 중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의 부하인 스피타메네스와 다타페르네스가 베수스를 억류했고, 이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주겠다는 전갈을 받고 이 제안을 따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잡은 베수스를 발가벗긴 뒤 목줄을 매어 끌고다니면서 모욕한 뒤 다리우스 살해를 추궁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자신은 공모한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고 다리우스를 살해한 이유도 알렉산드로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변호했지만 다리우스 살해 후 도주한 시점부터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를 채찍질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를 사로잡은 뒤 타나이스 강(또는 약사르테스 강, 지금의 시르다리야 강) 지역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의 부하들과 동맹세력이던 지역부족들과 스키타이를 진압했다. 그렇게 가자를 시작으로 키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스키타이군까지 패퇴시킨 뒤 스키타이 왕과 휴전을 맺었다. 그 직후 스피타메네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배반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준 사람)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격퇴시킨 뒤 자리아스파(박트리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끌고와 다리우스 처형을 질타한 뒤 코와 귀를 잘라버린 뒤 오체분시로 공개처형을 시켜버렸다(기원전 329년)(출처-아리아노스, 알레산드로스 원정기, 3-4권).
사고디안 부족을 격파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하였는데 박트리아는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지역으로 인도와 꽤나 가까운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록사나라는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첫 번째 아내였다.
2.8.1. 부하들에 의한 암살시도
이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음모를 주도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교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 뒤 페르시아 식의 궁중예법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예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면 시종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만나서는 우선 반지에 입맞춰야 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있어 이러한 짓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중복을 입으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게다가 논공행상을 할 때도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입장에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그들과 동등한 직책을 맡은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21][22]
2.8.1.1. 파르메니온의 경우
이때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자 알렉산드로스 다음 가는 사령관인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 암살 음모를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아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를 고문한 다음 죽였는데, 파르메니온의 군인들에게서 받고 있는 높은 신뢰는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그를 매우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암살한 것이었다.
2.8.1.2. 클레이토스의 경우
일찍이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로 건너온 뒤 벌인 첫 번째 전투인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생명을 구한 바가 있었던 클레이토스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면서 사적으로도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접근을 거의 허가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모처럼 그들을 모아 놓고 술자리를 벌였다. 그는 모인 장군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인 필리포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 출신의 악사가 페르시아의 승리와 마케도니아의 패배를 뜻하는 노래를 불러 그것을 알렉산드로스가 좋게 듣자[23]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불편해하다가 갑자기 클레이토스가 "우리가 운이 없어 패한 걸 왜 들먹이냐"며 화를 내면서 분위기를 제대로 망친다. 알렉산드로스는 "운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라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사태가 점점 나빠졌는데 클레이토스가 '''"그럼 그라니코스에서 제가 용기가 없어 폐하를 구해드렸단 말입니까?"'''[24] 라는 말로 화를 돋웠고 클레이토스나 알렉산드로스 모두 이 때 매우 취한 상태였는데 클레이토스는 멈추지 않고 알렉산드로스와 악사에게 맹비난을 퍼부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덕택이며 이것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는 필리포스를 생까며 자신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자화자찬에 도취된 알렉산드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주변 사람들도 '이 인간이 미쳤나' 하고 생각하여 그만하라고 했지만 단단히 화가 나 있던 클레이토스는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으니, 폐하께서 자유가 싫으시다면 우리를 모두 쫓아내시고 노예들만 데려다가 잔치를 하시든지 하십시오"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불을 질렀고, 하마터면 알렉산드로스는 칼을 뽑을 뻔 했다.
신하들은 왕을 진정시키며 클레이토스를 내쫒으라고 명령하였으나 원래부터 거칠어서 술 취하면 더 심해지는 클레이토스는 근위병들한테 끌려가면서도 계속 불평을 토로하여 화를 자초했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나 싶을 때 다른 문으로 도로 들어온 클레이토스가 '''"우리 수많은 용사들이 세운 공적을 왕이라는 한 사람이 빼앗아갔다!"'''고 소리를 질렀고 가뜩이나 술 취한 데다 불평과 폭언에 정신이 나간 알렉산드로스는 호위병의 창을 빼앗아[25] 클레이토스를 꿰뚫어 죽였다. 당연히 현장의 사람들은 멘붕했고 창을 들고 있던 왕 역시 패닉에 휩싸여 "날 용서하라"라는 말을 하고는 클레이토스를 찌른 창으로 목을 찌르려 했고, 놀란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제지해서 방으로 끌고 갔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음날 술에 깬 상태에서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3일간 죄책감과 슬픔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되는 바람에 신하들이 설득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26] 그렇게 마케도니아인 장교들과 알렉산드로스간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다.[27]
2.9. 인도 정벌의 착수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원정을 희망하였고 우선 인더스 강 서쪽, 지금의 파키스탄 서쪽 지역에 있던 지방 영주들을 소환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영주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 영주들은 반항하며 거부하였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해 군대로 공격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는 동안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그에게 반항하고 부상을 입힌 영주들은 일족까지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영주들 휘하의 도시 시민들도 모두 학살당했으며 건물 기초까지 부숴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그제서야 지방 영주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하여 알아서 기어들어왔다.
알렉산드로스는 파키스탄 지역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지역까지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 대륙의 끝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남쪽에 위치한 파우라바라는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히다스페스 강 전투'''가 벌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대략 4만여 병력이었고 포루스는 5만여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의 일부를 본 진영에 남겨 대군이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밤에 몰래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넜다. 포루스는 이에 주력을 이끌고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와 싸웠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우세한 기병(7천 대 4천)으로 포루스의 기병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고[28] 배후로 돌아가 포루스의 보병을 팔랑크스와 협공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포루스의 파우라바군은 전투 코끼리를 통제하는데 실패하여[29]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에 폭주한 코끼리들이 되려 아군을 짓밟고 피해를 주었기에 공격하기가 더 쉬웠다.[30]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파우라바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포루스는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항복하였고 포루스의 용맹함을 높이 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위에 그대로 앉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선에서 그를 풀어주었다.
포루스를 격파하여 인더스 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자신의 죽은 애마인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딴 부케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이번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본토에 침입할 계획을 세웠다.
2.10.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
이때 겐지스 강 남쪽에는 난다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포루스의 파우라바와는 달리 인도 북부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거대 국가였다. 포루스의 부하들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난다 왕조는 갠지스 강 건너편에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대, 6천 코끼리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라고 말하였고,[31] 이런 사실을 들은 데다 너비가 6km에 달하는 거대한 강인 베아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도 있어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파업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 서쪽으로 철군 명령을 내렸으나, 이 회군 과정 또한 험난하여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는 남은 병력이 인도에서 출발한 병력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보급을 담당한 함대가 인도양의 몬순에 의해 바다 멀리 밀려가 버린 사고 때문이었는데,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대는 게드로시아(현대의 발루치스탄) 사막을 지나고 있었으며, 병사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떠다준 물을 "나만 마실 수 없다"고 쏟아버린 일화가 바로 이 사막 행군 중의 일이었다. 아무튼 이 사람이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 어디까지 갔을지에 대한 건 역사에서 유명한 얘깃거리 중 하나이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거쳐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는 원대한 중년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을 보면 회군한 게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는 '''코딱지만 한 땅인데''' 지금 정복 안 하면 언제 정복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가 엄청나게 넓은 것은 물론이며, 지금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해온 중동이나 페르시아 같은 땅은 넓어도 인구는 적었던 곳들과는 달리 예나 지금이나 인구밀도도 매우 높은 땅이었다. 게다가 몹시 덥고, 습하며, 정글 지형까지 있어서 저 멀리서부터 몰려온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싸움이 아니더라도 전염병이나 풍토병에 병력뿐만 아니라 자신도 걸릴 확률이 높아서 그만두었을 것이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단기간에 빠르게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페르시아가 아케메네스 왕조라는 하나의 통치체제하에서 통일된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정치체제도 문화도 서로 다른 각각의 독립된 국가들이 통치하고 있고 지형상으로도 습지와 삼림이 널린 인도를 단기간에 통일한다는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불가능한 얘기다.[32][33]
2.11. 원정의 끝과 사망
인도 원정에서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관료들이 부정 축재를 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 관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볼 때 이토록 빨리 원정을 중단해 귀국할 줄은 예상 못했고, 또한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전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음껏 부정 축재를 한 것인데 갑자기 돌아온 알렉산더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처형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군에게 보상으로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34] 그래서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거부하며 오피우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 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겼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했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소스 전투 때 사로잡은 다리우스 3세의 큰 딸과 결혼했다. 재미난 사실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혼도 많았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다면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35]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일평생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자 심복이었던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헤파이스티온의 갑작스러운 급사 때 자리를 비운 담당 의사를 태만죄를 물어 십자가에 못 박아죽이고, 이후 콧사이오이 부족을 정벌했을 때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그 부족의 청장년 장정들을 모조리 목베어 학살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지기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젊었기 때문에 아랍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36]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쓰러지기 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1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37] 그 다음 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에우메네스가 기록한 <왕의 일지>(Royal Journals)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독살의 징후는 없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사람을 서서히 죽어나가게 하는 독은 현대에도 드물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실려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암살설[39] 을 제기하기도 하고, 너무 젊은 시절에 이룰 걸 다 이뤄서 의욕 상실로 병에 걸려 죽은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학설에서는 죽기 전에 포도주를 '''6.5리터가량(그것도 원액)'''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40] 헤파이스티온도 과음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빙성이 거의 없는 야사이긴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 때부터 독을 먹여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다이시우스 달 18일.[38]
왕은 심한 열 때문에 목욕실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왕은 침실로 돌아와서 메디우스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왕은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심했다.
20일. 평소와 같이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목욕탕에 누워 네아르코스의 항해담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21일. 전날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만 열이 심해져서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다음 날은 열이 더욱 심해졌다. 왕은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나 목욕통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장군들과 의논을 하여 적당한 사람으로 군대에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로 했다.
24일. 병세가 더욱 나빠졌지만 왕은 일어나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장군들은 곁을 떠나지 말고, 하급 장교들은 문 밖을 지키며 밤을 새우라고 명령했다.
25일. 강 건너편에 있는 궁궐로 자리를 옮긴 뒤 잠을 조금 잤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장군들이 침실에 들어갔을 때는 혼수 상태에 있었다. 다음날도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돌아가신 줄 알고 모두 몰려와 소란을 일으키며 왕의 막료들을 협박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무장을 벗은 뒤 차례로 왕의 침상 곁을 지나며 쾌유를 빌었다. 같은 날 피톤과 셀레우코스를 세라피스의 신전으로 보내, 왕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나 옮기지 말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28일. 저녁에 마침내 왕이 돌아가셨다.
현대 학자들에게 제일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이다. 말라리아는 혼수 상태와 구토와 심한 발열 증상을 나타내며, 특히 발열 증세가 일정한 주기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 기록 상의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묘사와 일치한다. 발열 증세의 주기로 보아 알렉산드로스가 감염된 말라리아 원충은 P. ovale 혹은 P. vivax 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열대 풍토병이 많은 인도 원정에서 귀환한 뒤에 사망한 점도 심증을 더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원정 도중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3. 사후, 분열
그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난폭한 방식으로 '풀어서' 세상을 정복했던 탓일까, 그의 적통 후계자들은 난폭한 방식으로 몰락하고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41][42]
알렉산드로스는 죽으면 시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장군들 간에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진다. 대왕의 시신은 정통성을 확보할 좋은 먹잇감이었다. 페르디카스는 시신을 마케도니아에 보내서 마케도니아 방식대로 화장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시신을 중간에 시리아에서 빼돌려 이집트로 가져간다. 처음에는 맴피스에 묻혔다가 훗날 알렉산드리아가 완성된 후 이장된다. 후대에 폼페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의 로마 권력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무덤을 방문했고, 칼리굴라는 알렉산드로스의 흉갑을 사용하려고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한다. 기원후 200년경 셉티무스 황제는 알렉산드로스의 무덤 공개를 금지했다. 셉티무스의 후계자는 재임기간 무덤을 방문했지만, 그 후 무덤이 어떻게 됐는지는 묘연하다. 고고학자들에게 그의 무덤이 어디있는지는 징기스칸의 무덤과 더불어 아직도 미스터리다.
록사나는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뱃속의 유복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아이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이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왕으로 삼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그들이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이 합의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동생으로 간질에다가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필리포스 3세)를 왕으로 추대한다.[43] 나중에 록사나가 결국 사내아이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양측은 합의하여 이 아기와 아리다이오스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지적장애인과 갓난아기였던 이 둘은 허수아비, 꼭두각시, 괴뢰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분열과 이합집산 과정은 디아도코이 항목과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는 책을 참고하는 것을 권한다.
4. 사상과 사생활
4.1. 인품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이다. 고대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 1세와는 동명이인이다. 좀 더 컸을 때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서구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더불어 쌍벽으로 예우받는 대철학자이다. 그야말로 만능의 천재. 단 왕자 신분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아 학자로 활동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의 정복 전쟁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44][45] 단, 그리스식 영웅주의에 아주 빠져 있어서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넣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일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렉산드로스가 항상 갖고 다닌 일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성해 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 이처럼 둘의 사제 관계는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처음에는 매우 좋았던 모양인데, 나중에 가면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동문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를 죽게 만들기도 했고...[46]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죽을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와 계속 교류는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야심이 매우 커서, 부왕인 필리포스의 승전 소식을 들을 때면 매우 울적해 하며 친구들에게 '''"부친께서 이렇게 나라들을 계속 정복하신다면 나와 너희들이 자라서 펼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작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큰 영광과 명성만을 탐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평생을 가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자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
부케팔로스의 일화에서 보이듯, 배짱도 강했다. 자신감이 늘 넘쳐났고, 죽음에 두려움을 보이는 일 없이 용감하였다. 모든 전투에서 황금 빛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선 것은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을 입었다. 가장 극적인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때에는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기가 찬 파르메니온이 가서 직접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우리가 이미 이기지 않았소? 도망다니던 다리우스를 쫓아다니느라 우리가 기진맥진하였을 정도니 말이오." 라고 했다. 카파도키아 반도를 넘어가던 중,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얼음장 같은 온도에, 폐렴이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는데, 어의들은 혹 자기에게 책임이 물어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필리포스라는 한 의사만이 대왕에 대한 애정으로 나서서, 그를 간호하고 약을 지어줬는데 며칠 후, 정신이 좀 든 알렉산드로스에게 파르메니온이 쓴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인즉 "그 의사는 사실 다리우스의 사위가 될 욕심으로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전하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약을 통해 독살을 하려 한다"인 것.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가 약을 들고 천막으로 들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사발을 받고 쭈욱 들이키며 의사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편지를 읽은 의사는 바로 사색이 되어 땅에 엎드렸다. 의사는 자신은 절대 이러한 의도가 없다며 살려달라 외쳤고[47] 알렉산드로스는 남은 약을 들이킨 뒤,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일으켜 세웠다. 군의 2인자인 파르메니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 것이고 이는 들어맞았다.
하지만 부하들의 불평을 흘려듣지 않고 간언을 듣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하나, 이건 인도 원정을 중간에 그만두고 회군한 것처럼 예외의 경우들이다. 파르메니온과 클레이투스와 칼리스테네스가 괜히 죽은 것이 아니다.
자신감이 높은 만큼, 자존감도 높았는데, 술을 마시면 자기자랑을 거하게 하는 편이기도 했다.[48]
이집트에서 신탁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신이라 믿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회군하던 때, 화살을 맞은 그가 피를 흘리며 "이것은 신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구나."라고 슬프게 말하기도 했다.
물욕, 육욕에 대한 자제심이 매우 강했다. 이소스 전투 이후,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리우스의 아내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그녀의 미모를 나에게 말하지도, 상기시키지도 말 것이다."라고 부하들에게 말하기도 했으며,[49] "페르시아의 여자들은 눈이 아플만큼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라면서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식욕 또한 필요한 만큼만 먹고, 그 이상의 낭비는 하지 않았는데, "저는 레오니다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식사법을 배웠으니 훌륭한 요리사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침을 맛있게 먹으려면 야간 행군을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으려면 아침을 적게 먹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원정 중반을 넘어가며, 재화가 숙영지에 넘쳐흐르던 때부터는 식사가 사치스러워졌으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늘 군인다운 검소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는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50]
물욕이 없는 만큼, 베푸는 것의 기쁨을 잘 아는 이가 알렉산드로스였는데, 그는 주위의 인물들에게 지나치리만큼 후한 대접을 하여, 친구들이나 동료 장군들의 부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페르시아의 한 고관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왕께서 오시기 전에 페르시아에는 다리우스 왕 하나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여럿입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장군도 아닌 서기관 에우메네스가 자기 막사에 숨겨놓은 돈이 금과 은 1000탈렌트 이상이었을 정도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부유했던 아테네의 1년 예산이 400탈렌트 정도였으니 그의 제장들은 모두 재벌급의 부호였다고 볼 수 있다.[51] 페르시아 겨울수도인 수사에 있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고에서 5만 탈렌트를, 종교적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국고에서 12만 탈렌트를 전리품으로 얻는 데 성공했는데 이 중 군비를 제외한 상당한 액수를 제장들에게 나눠 주었을 것이다. 일개 병사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여서, 어느날 나귀가 지나치게 무거운 보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을 본 병사가 보물을 나눠 짊어지자, 대왕이 몸소 그 옆으로 다가가 "힘을 내거라. 캠프까지 너가 그 보물을 들고 간다면 그것은 모두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인정도 깊어, 한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거짓되게 진술하고 전역하려 한 것이 걸렸는데, 그 사유가 고향에 두고 온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게 되자, 대왕이 이를 용서하며 그를 전역시켜 준 적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점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도 융화정책을 펴서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철학에 감화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집트에 갔을 때도 굳이 파라오 칭호를 받은 것도 이집트인을 포용하기 위한 것. 사실 페르시아에 쳐들어갔을 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복수하자고 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다. 문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랑 휴전을 했던 것.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의 지배를 받는 걸 못마땅해하자 시선을 밖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 이후에도 그 "야만인"들을 잘 구슬려서 충성을 받은 걸 보면 정치적인 융화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제력이 매우 강한 편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충동적 행동도 많이 하였다. 자제력이 강한 모습들도 이러한 충동적 천성 때문에 생겨난 태도가 아닐까 싶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 후회한 것,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회한 것, 술에 취해 자신의 은인이자 신뢰받던 장군이던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 등이 그것이다.
수많은 정부 중 하나인 판카스테와의 일화는 그의 자제력을 알아주는 좋은 일화. 판카스테를 모델로 한 여신그림을 그려달라고 화가에게 부탁했는데 판카스테가 그 화가와 사랑에 빠져 연인으로 발전했고 이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판카스테와 화가의 결혼식을 도와주었다.
4.2. 사생활
아내를 여럿(아시아 계통) 두었다. 첫번째 왕비는 박트리아 부족장의 딸인 록사나였는데, 록사나와 결혼한 이유는 아마 다리우스 3세의 장녀 스타테이라 2세(또다른 이름은 바르시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막내딸 파리사티스 2세와 결혼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록사나와 관계를 맺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두었으나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원정에 쏟아부었고, 아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요절했으니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적장이었던 로도스의 멤논의 아내였던 바르시네를 후궁으로 삼아 또 다른 아들도 두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 하지만 헤라클레스 역시 그가 죽은 뒤 등장한 디아도코이 간의 내전 중에 카산드로스에게 독살당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이자 최측근이던 헤파이스티온은 흔히 알렉산더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고 오히려 헤파이스티온이 더 키도 키고 잘생겨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막사에 들어왔을 때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그외 일가는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인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얘기가 있다. 헤파이스티온이 정말로 그의 연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그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할 당시에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슬픔과 좌절감에 사로잡혀서 헤파이스티온의 건강을 돌본 의원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죽은 헤파이스티온을 기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거대한 기념물들을 건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또다른 동성 연인으로 유력한 인물은 페르시아 출신의 미소년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였다. 그는 외모가 아름답고 가무에 능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총애를 받았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떠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한 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용 경연이 열었는데, 당시에 바고아스가 아름다운 춤을 추어 우승하고 덤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고아스는 관련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렉드로스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심지어 바고아스를 주인공으로 한 <Persian Boy>라는 소설도 있다.
가장 좋아한 작가는 호메로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리아스’를 “모든 군사적 덕성과 지식을 담고 있는 완벽한 보물”이라며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간직했다고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전장에 나가면서도 호메로스의 책을 지참했으며 배개 밑에 '일리아스'를 놓고 함께 잤다고 한다. 아시아 원정중에도 일리아스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원정과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4.3. 외모 문제
고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로스를 꽃미남으로 묘사하고, 남아 있는 조각상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준수한 미청년의 모습을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각가 리시포스가 남긴 흉상의 레플리카가 가장 신뢰할 만한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실물을 보면 꽃미남이라기보다는 그 아버지 필리포스를 닮은 터프한 모습에 가깝다. 어쨌든 추남은 아니라는 데에 유의.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20세기에 들면서부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남아 있는 전신상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에게 골격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나타났던 어떤 미적인 규칙을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한쪽 눈은 검푸르고 다른쪽 눈은 하늘색, 그러니까 오드아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떤 유전적인 장애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52]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다시피 한 사람이 영국의 역사가 피터 그린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평균적인 마케도니아 남자의 키에도 못미치고 몸은 뒤틀려있고, 목소리는 쉿쉿거리는데다 수염도 성기게 나기 때문에 뽀대가 안 나서 일부러 면도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53]
다만 혹자들이 제기하곤 하는 필리포스 왕이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외모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택하는 것을 망설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은, 일단 알렉산드로스의 외모가 당시 기준으로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알렉산드로스가 지닌 여러 외모상의 문제점, 그러니까 뒤틀어진 골격이나 오드아이, 거친 목소리 등을 부왕 필리포스로부터의 유전, 나아가서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실의 유전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서출 형제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의 장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추측되는 부분이 있는 바, 때문에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외모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하다.
게다가 아직도 알렉산드로스의 외모에 대해서는 꽃남설이 다수설이다. 불확실한 점이 많다는 것.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부각되었는데, 그의 외모에 대한 논쟁은 그에 대한 논쟁들 중 메이저는 아닐지라도 2천년은 족히 지속되어온 장기 떡밥이다. 섣불리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일단 정설로 취급받는 학설은 "역사에 획을 그을 정도의 추남은 아니라는 것." 즉 미남이 아닐 수는 있어도 보자마자 혐오감을 느낄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을 거란 것이다. 만약 역사에 회자될 정도의 추남이었다면 그에 관련된 루머나 역사책이 상당 수 남아 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의 절반을 흽쓴 양반이 보자마자 토할 정도의 얼굴인데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도 소소한 장애는 보유하고 있을 수 있어도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장애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일화 중에 날뛰는 난폭한 말에 올라탔다는 일화, 무용담, 또 왕에게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을 경우 왕이 되기 힘든 그 당시 사회상, 언제나 전쟁터에 군대와 함께 섰었다는 걸 생각했을 때 장애설은 신빙성이 낮다. 발을 절뚝거리며 몸이 뒤틀린 사람이 전쟁터에서 선봉에 서고도 살아 돌아오는 걸 반복할 가능성은 낮다. 물론 신체 장애가 있음에도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사례도 상당히 있는 편이며, 한 예로 영국의 리처드 3세는 심한 척추측만증으로 별명이 곱추왕이었지만 전쟁터에서 뛰어난 기사로 이름을 남겼다. 절름발이였던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왕이 되려 하자 불구인 왕이 나라를 몰락시킨다는 신탁이 나왔다. 그러나 리산드로스가 신탁에 대해 부정한 태생의 사람이 왕이 되면 왕국이 절름발이가 된다는 의미로 주장하여 사생아로 의심을 받던 조카를 제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애시당초 위에 나온 추남설은 대다수가 근대에 와서 제시되기 시작한 의견으로 '클레오파트라'는 미녀가 아니었다 등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 당시의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 확실하게 미남인지, 평범한지, 추남인지는 유해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유해가 있을 곳으로 보이는 지역이 알렉산드리아이고 유력한 곳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궁전 단지인데, 바닷 속인데다가 추정만 할 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5. 후대의 평가
알렉산드로스의 행보는 사실 냉철한 현실주의에 기반한 합리적 행적들이라기보다는, 야망에 불타오르는 청년의 겁없는 모험담에 가까운 면모가 많다. 이를테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된 그의 왕자 시절 모습과, 군주 시절의 원정 준비 작업을 살짝 들여다보자.
또한 그는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전을 내팽개치고는, 전투 대형의 맨앞에서 보통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위험을 무릅썼다. 특히 적들은 복장을 통해 알렉산드로스가 국왕임을 알아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유사시 그가 사망하여 발생할 정국의 불안정을 막기 위해 혼인해서 자식을 낳을 때까지 정복을 멈춰달라는 조언들마저도 무시했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일화이기는 하지만 그는 후계자에 대해서 "가장 강한 자(κράτιστος)!"라는 말만 남기고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당연히 이러한 행동들은 후대의 군주들이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될 무모함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사나이의 피가 끓지 않는가? 바로 이 때문에, 따라해서는 안 되는데 뭔가 멋있는 사람으로 후대인들에게 길이길이 회자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군주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대왕병을 앓게 된다. 대표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들 수 있는데, 카이사르가 33살의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내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죽었지만, 나는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개탄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54]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하고 말겠어."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군대는 보병 3만 명과 기병 4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보병 4만 3천 명 그리고 기병 3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설에 의하면 그는 70탈렌트 정도의 군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두리스의 설로는 군량미 30일 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오네시크리토스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에게 2백 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쨌든 대규모적인 계획의 준비로서는 변변치 못한 준비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일이 염려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 자에게는 많은 토지를 주고, 어떤 자에게는 한 마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구를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에 맞도록 각각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야 군비를 수송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라고 그는 대부분의 왕실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그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다. '''"희망".'''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말했다.
"그럼 대왕을 모시고 떠나는 저희들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열전』 中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물론 헬레니즘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에다가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합쳐놓은 정도의 판도이기에, 넓기는 하지만 몽골 제국이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후대의 거대 제국들에 비하면 "의외로 작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대 그리스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유서깊은 문명 지역이란, 그리스,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 인도였으며, 이러한 꿀땅들 중 인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했다.[55] 게다가 대영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형성된 거대 제국이기에, 개인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비견될 만큼 땅을 팍팍 정복한 군주는 칭기즈 칸 등 정말 몇 안된다.[56][57]
친구 헤파이스티온과의 뜨거운 관계로 다른 방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또한 부하 장병들에게 현지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하였는데, 이 역시 그리스와 동양을 혈통적으로 결합하여 이상적인 세계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정된다. 이런 동서 문화 융합 정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해서 반역 음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융합 정책 때문인지 로마 때는 폭군으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지만 소아시아의 왕들 중에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로 부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한 영웅시되는 일이 더 많았다. 일례로 티무르의 생애를 다룬 열전에서 그 지역의 위대한 왕들의 이름을 얘기할 때 알렉산드로스도 언급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 있어서 책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58]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터키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한 우월감을 상징하는 인물로 쓰이기도 하며 이 인물 때문에 과거의 마케도니아와 관련없는 현재의 북마케도니아[59] 도 그리스와 관계가 복잡해진다. 아이러니한 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지방을 어르느라 동방 문화를 받아들여서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욕을 단단히 먹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는 역사서들은 옹호와 비판의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옹호 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예찬하는 경향이 지나쳐서 <창천항로>의 조조급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판 쪽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잔인함과 '''술주정'''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60]
그 인기 때문인지 이슬람권에서는 침략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거쳐 서아시아 세계에 전파되어 그의 정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플라톤의 비중도 굉장히 큰 편이다. 한편 무슬림이나 크리스천이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을 성전이라 믿는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근거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선 정도는 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쪽에서는 역사적으론 침략자인 만큼 별로 취급이 좋지 않다. 전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는 딸에게 대놓고 야만족의 우두머리라고 가르쳤다.
중국 쪽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직접적으로 침범한 일이 없어 인기가 좋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가 오래 살았다면 세계 제국과 과학의 발전이 일찌감치 성공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거꾸로 그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남아 있던 헬레니즘 문화의 바탕인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인들의 무지에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사실상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제국을 그대로 계승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현실을 볼 때 설득력 없는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성격이 어쨌든 상관없이 말이다. 앞에서 말한 계획대로 로마로 진공했다고 해도 한니발이나 피로스의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원본은 로마 장군이 연설하면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우리 로마에 쳐들어왔으면 깨졌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주장은 당대에서부터 제기되었는데,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로마로 왔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당시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국력 차이와 인재풀을 생각하면 설사 원정을 실패해도 한니발과 피로스의 신세가 될 확률은 낮다.[61][62][63]
기독교 성경에서는 저자였던 유대인들의 땅을 침략한 인물이다 보니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고 있다.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땅끝까지 진격하여 많은 민족에게서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세상이 그 앞에서 평온해지니 그는 마음이 우쭐하고 오만해졌다. 그가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지방과 민족과 통치자를 굴복시키자, 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앓아 눕게 되자 죽음이 닥친 것을 알고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 자란 대장군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나라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 그의 장군들은 저마다 자기 영토를 다스렸다. 그들은 그가 죽은 뒤에 모두 왕관을 쓰고, 그들의 자손들도 그 뒤를 이어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
5.1. 이란의 평가
한편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전근대 이란인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사산 왕조 시대 유행하던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관점이며, 둘째는 사산 왕조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등장한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역사에 존재한 그냥 유명한 영웅 중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의 견해는 주로 조로아스터교 경전이나 사산 왕조 당대의 기록에 의거한다. 이에 따르면 '로마인' 알레크산다르는[64][65] 성스러운 경전들을 없애고, 성스러운 불꽃들을 꺼뜨렸으며, 이란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이 악의 화신이란 말이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라 악신인 아흐리만, 악룡 아지다하카, 투란[66] 의 왕 아프라시압 등과 함께 당당히 실제(?) 악의 화신으로 쓰여져 있다. 이렇게 사악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 이란에 혼란과 분열의 시대가 찾아왔으나, 이를 수습하여 이란에 질서와 정의, 종교와 신앙을 되돌려 놓은 것이 바로 아르다시르 1세라는 것이 사산 왕조의 공식 입장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구체적으로는 10세기 이후 피르다우시의 샤나메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저술된 에스칸다르나메 등에 등장하는 에스칸다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에스칸다르가 사실 이란 혈통이라는 주장도 있고,[67] 이란을 정복한 후에도 특별히 뭘 파괴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패배자인 다라 왕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자기 딸을 에스칸다르에게 결혼시켜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란의 왕이 된 에스칸다르는 세계 각지를 정복하며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된다. 나중 가서는 정복왕이 아니라 현자, 예언자라고 쓸 지경이다.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에스칸다르 전설 자체가 유럽의 알렉산드로스 전설들이 수입/번안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이슬람적/이란적 색채로 변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란이 타국 세력에 정복된 이후이고, 이란의 지배 세력이자 독자 정체성의 근간이던 조로아스터교 세력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외국 침략자에 대한 혐오가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산 왕조 시대에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증오가 상당히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났음은 전술한 대로다.
현대 이란의 일반적인 평가는 "비록 적이었지만 솔직히 대단했다는 건 인정함" 정도이다. 워낙 오래된 일인데다가,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산나와 결혼하는 등 동서 화합을 모색했고, 키루스 2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는 등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대 이란의 평가는 꽤 좋은 편이다. 때로는 그냥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중세 이후에는 신화적인 존재나 위대한 왕으로 묘사한 경우가 굉장히 많으며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가 지은 '이스칸다르의 서'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매우 긍정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이 동네도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 (칭기즈 칸과 함께)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악마'적인 이미지도 물론 있으며[68] '영웅'적인 이미지와 양립하는 중이다.
6. 대중문화에서
일본 SF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주인공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주요 모델로 꼽힌다. 과감한 원정을 통한 정복 군주, 아름다운 외모, 동성애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했던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 등. 무엇보다 최후도 대원정을 거의 마친 뒤 고열을 동반한 병으로 급속도로 체력이 떨어지며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까지 충실히 반영되었다.
범용 TRPG 시스템인 겁스에 샘플로 등장하는 대체역사 평행세계중 하나인 '이스칸다르-2'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이 12세기까지 건재한 세계라는 설정으로, 현실세계에서는 근미래 수준의 과학수준을 자랑한다. 이 세계의 전쟁은 완전한 기계화가 이루어져서 대부분 로봇들이 싸워준다. 다만 알렉산드로스 제국 1극체제는 아니고, 아시아를 거의 다 먹은 중국 기반의 아시아 제국과의 양극체제 세계.
한, 미, 일 합작 애니메이션인 알렉산더 전기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성우는 세키 토시히코/전광주. 장차 세계를 멸망시킬 파괴신이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태어났지만, 알렉산더 본인은 세계정복이나 멸망엔 큰 관심이 없고 그리스가 아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강자들과 싸우고 싶어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헤파이스티온, 크레이토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알렉산더의 비전을 보고 평생 주군으로 모실 것을 맹세하고, 아버지 필리포스 왕이 고집하던 전술이 아닌 기병을 이용해 '속도'를 강조한 새로운 전술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필리포스 왕의 견제를 받기도 한다.
2004년에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알렉산더》로 재조명되었다. 콜린 파렐, 안젤리나 졸리,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이 영화에서는 필리포스 2세의 암살을 올림피아스가 사주한 것으로 그리고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헤파이스티온의 뜨거운 관계도 그려내서 영화 개봉 당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근데 이 영화는 학자들에게도 지뢰급의 취급을 받고 있다. 안습. 그러나 전투 고증 면에 있어서 영화는 모든 역사/군사학자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역사상 이렇게 '아름다운' 전투 고증은 흔하지 않다. 한 장면은 위의 벽화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이 부분은 칭찬은 받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방황하는 10대'''마냥 그려진 것이 학자들의 불만을 샀다.
이탈리아 소설가 발레리오 마시모 만프레디의 소설 <알렉산드로스>(전 3권)는 알렉산드로스의 일생을 사료를 참고하여 재구성한 수작으로, 아버지 필리포스 3세의 암살이나 장군들의 반항 등 정치적 사건들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하게 서술하긴 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일생을 잘 서술한 소설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의 모델이 된 왕이 바로 그라고 전해진다.[69] 사실 진짜 원전인 그리스 신화 쪽에서는 그 이야기의 모델이 미다스 왕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정복 과정에서 해당 신화가 전해지면서 그 주인공도 알렉산드로스로 변했다.
아이언 메이든의 Alexander The Great는 곡 제목 그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고 있는데 8분 30초라는 긴 러닝타임에 서사적인 곡 전개가 일품이다.
히스토리에에서는 헤파이스티온이 동성연애의 대상이 아닌 알렉산드로스의 제2의 인격이란 설정으로 나온다. 거기에 페이지 맨 위의 벽화의 모습과 닮은 사람이 올림피아스의 정부이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친부로 의심되는 상황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 기록된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처럼 격의 없고 털털한 면이 있지만 실제 역사에 비해 유약하고 자신감없어하는 면이 보인다. 그의 유약한 성격이 공포에 몰릴 때 무감정하고 짓궂은 헤파이스티온의 인격으로 교체되어 실제 역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가끔 충동적이거나 폭력적인 경향을 보였던 성격을 보여줬던 면을 묘사하는 전개로 나아갈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의 유약한 성격과는 별개로 전장에서의 전투력은 엄청나다. 필리포스나 에우메네스가 갖추지 못한 흐름을 파악하며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으며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 능력을 선보였다.
Fate/Zero에서 '이스칸달'이라는 이름으로 서번트 라이더로 출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여기서는 위에서 대립하는 꽃미남설과 추남 루저설 토대로 하면서 결국 무지막지한 떡대의 거구 중년남으로 그려놔 화제가 되었다. F/GO에서는 어린 시절의 면모를 간직한 채 라이더로 등장했다. 설정에 따르면, 어렸을 때는 미소년이었지만 제우스의 축복을 받으며 점점 떡대가 된 거라고... 여담이지만 알렉산드로스보다 상대적으로 거구였던 것으로 알려진 다리우스 3세는 이스칸달의 벌크가 강화된 덕분에 이 세계관에서는 신장 3미터짜리 광전사가 되었다.
영웅전희에서도 정복왕으로 나오긴 하는데, 이상하게도 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동정녀로 나온다.
그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만든 13화짜리 애니메이션 알렉산더가 있다. 캐릭터 디자인은 피터 정.
디오게네스와의 만남이 꽤 유명하다. 해당 문서 참조.
탈무드에서도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믿는 정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에게 쓰레기 속에 있던 금덩이의 일화를 듣고는 '''"나라면 그 둘을 모두 죽이고 내가 그 금덩이를 차지하겠다. 그게 나의 정의다"'''라 말했다고 한다.
어느 일화에 따르면 소규모의 병사로 협상을 할 때 본인의 군대들에게 낭떠러지로 행진하라고 하자 군사들이 그 명령에 따랐고 그걸 보고 적장이 두려워해서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화 하이큐의 오이카와 토오루와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생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일/사망일은 같다. 별거 아니게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두 캐릭터 사이의 신뢰 관계 등을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 아동 교육 소설 오딧셈의 수학 대모험에서 신의 아이 중 한 명 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전대 신의 아이로, 주인공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고박봉성 화백의 만화 알렉산더 1~3권에서는 붉은 머리카락의 미아동 미소년 미청년으로 나오고 전체관람가 만화라 동성애관련 술주정 등은 나오지 않는다.
샨샤의 알렉산더의 연인에서는 록산느와 만나기 전 헤파에스티온과 관계를 맺고 아버지와도 관계를 가지는 등 사랑과 상처를 받는 역할로 나온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여러 차례 그리스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문명 5에 등장했을 때는 위 벽화의 복장과 애마를 그대로 재현.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군주상을 반영해서 엄청나게 호전적이면서도 다른 정복 문명들과는 달리 종특[70] 때문인지 도시국가에게 공물요구나 정복을 좀처럼 하지 않으며 게임 중반만 지나도 세계 도국의 절반정도가 알렉산더의 동맹이 되어갈 정도로 골치아픈 문명. 문명 6에서는 그리스의 지도자가 페리클레스와 고르고로 변경되어서 안 나올거 같았지만, 마케도니아 문명에서 따로 등장하였다.
모바일게임 크루세이더 퀘스트에서도 팔라딘 용사로 등장한다. 전형적인 탱커로서 탱킹만은 손에 꼽을 수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템플러의 일원으로 등장하며 일타니라는 암살자에게 독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 그의 무덤이 알렉산드리아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신비한 지팡이가 등장한다. 알렉산더가 아문 신의 아들로 인정받은 까닭은 시와의 아문 신전에 보관된 2번 선악과를 통해 이수족 아문과 동기-연결하여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갓 오브 하이스쿨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차력으로 나오며 사용자인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아들 호세 나타샤 비욜레타 알렉산더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직계후손이다. 참고로 호세의 차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올랜덤 인물전에서 SS급 영웅으로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정복 군주답게 정복에 매우 특화되어있는 능력치를 지녔다. 유닛은 저글링이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싱글 캠페인에서 알렉산더의 정복 루트와 전투들이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과 알렉산더의 검이 유물로 등장한다.
7. 어록
가장 강한 자![71]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내가 죽거든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게 하라.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드로스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할 뿐.
내가 파르메니온이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오.[72]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73]
희망.[74]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75]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76]
우리의 가장 큰 승리는 패자들과 다르게 처신하는 것임을 그대들은 모르는가![77]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할 수 있는 한, 연기를 계속하리라.[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