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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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
(Piero di Lorenzo de' Medici)
'''출생'''
1472년 2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
1503년 12월 28일 (31세)
교황령 가리길리아노 강
'''재위'''
피렌체 공화국의 군주
1492년 4월 9일 ~ 1494년 11월 9일
'''배우자'''
알폰시나 오르시니
'''자녀'''
로렌초 2세, 클라리체
'''아버지'''
로렌초 데 메디치
'''어머니'''
클라리체 오르시니
'''형제'''
루크레치아, 마달레나, 콘테시나 베아트리체, 레오 10세, 루이사, 콘테시나, 줄리아노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뒤를 계승했으며, 소년 시절부터 붙은 별명인 불행한 피에로는 그가 무슨 시합을 하던 간에 그가 속하는 팀은 번번이 패했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에 대한 외모와 성격 묘사로는 운동 선수처럼 힘이 세고 건장하면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밝은 갈색 머리에 앞머리를 살짝 이마까지 드리운 외모였으며, 인상과 태도가 남에게 친밀감을 주지 못했다. 아버지처럼 무자비했지만 기교가 없었으며, 적을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와 달리 친구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7살에 라틴어를 쓸 정도로 재능이 있었지만 버릇이 없으면서 성질이 급해 5살 때 무화과 열매를 좋아하니 할머니에게 부탁하거나 아버지에게 최고의 경기용 개를 부탁했다가 개가 도착하자 조랑말을 달라고 짜증을 내면서 요구했다. 나이가 들자 더욱 난폭해지면서 오만 불손해졌다고 한다. 사업이나 공적인 업무를 피했다고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 로렌초의 문체를 흉내내는 어설픈 시를 썼다고 한다.
17살 때 오르시니 가문 출신인 알폰시나 오르시니와 결혼했으며, 피에로의 평판은 최악이라 사촌인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조반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와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1494년 9월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자 샤를 8세가 토스카나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요구하자 사절을 닷새 동안 머물게 한다. 나폴리 왕에게는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하면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가 중립을 용인하지 않아 진군하자 용병들을 국경에 배치하면서 피에트라 산타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사촌인 로렌초, 조반니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사를 포함해 피렌체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독단적으로 10월 26일에 샤를 8세가 있는 산 스테파노로 향해 출발해 11월 8일에 항복하러 가서 엄청난 액수의 차관과 사르자나, 피에트라산타, 사르차넬로, 리브라프라타 요새, 피사, 리보르노를 점령하겠다면서 협박으로 요구하자 모두 받아들였다. 11월 9일에 시뇨리아 궁으로 향했지만 항복 조건을 알고 있던 피렌체에서 들여보내주지 않자 밤에 귀중품을 챙겨 산 갈로 항을 통해 볼로나를 거쳐 베네치아로 도망쳤는데, 그 목에 현상금이 4,000플로린이 걸렸다고 한다.
베니스 공화국과 프랑스 대사 필리프 드 코미네스의 도움을 받아 도망가는데 성공했으며, 유럽을 떠돌아다니다가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공화국의 적들에게 봉사하거나 체사레 보르자와 힘을 합쳤다. 1497년에 군사를 인솔해 피렌체를 기습하지만 반 사보나롤라파의 호응을 얻지 못해 퇴각했다.
이후에 프랑스군에 봉사하면서 그 보답으로 원조를 얻으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으며, 1503년 12월 28일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패해 가릴리아노를 거쳐 가에타로 도망가다가 가리아노 강에 빠져 익사한다. 그 시신은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에 묻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