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르 빌럼 보타
[image]
피터르 빌럼 보타 (Pieter Willem Botha)
약칭: P. W. Botha
- 생애: 1916년 1월 12일 ~ 2006년 10월 31일(90세)
- 총리[1] : 1978년 10월 9일 ~ 1984년 9월 14일
- 대통령: 1984년 9월 3일 ~ 1989년 8월 15일
[clearfix]
1. 개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대통령과 총리[2] 를 지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질적으로 고수한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물러나는 순간까지 인종차별을 고수하고 만델라 등 흑인 저항세력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지금도 흑인들에게는 막장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백인들 입장에서조차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를 받는다.[3]
2. 생애
1916년 네덜란드 출신 백인 아프리카너의 후손으로 출생했다. 1948년 국회의원이 된 이후 무려 40여년 간 실세를 잡고 있던 인물이다.
당시 시대가 그랬듯이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몰락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 총리가 된 보타는 아파르트헤이트를 고수하였고, 1979년 핵무기 6기를 제조하여 남아공의 핵무장을 강화하였다. 1980년대에 냉전의 종식이 가까워져가자 보타는 국민투표를 통해[4] 총리제를 폐지하고 실권 있는 대통령이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흑인들의 반발이 본격적으로 표출된 시기에 집권한 보타는 집권초기에 인종간 결혼금지 폐지정책과 컬러드와 아시아계 의회 개설 등의 조치를 취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려고 했던 정치인으로 보였고 덕택에 백인 자유주의자의 표를 일정 부분 얻기도 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핵심부분을 폐지하지 않고 또한 이전 총리들과 마찬가지로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는건 매한가지였으며, 투표권을 요구하는 흑인들에게 잔혹하게 대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1986년 6월 12일, 보타 대통령은 국영방송 SABC 텔레비전에서 연설을 통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당시 흑인들의 집회에 무력으로 대응했다. 결국 남아공의 혼란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고 경제도 나락으로 떨어져나갔다.
1986년 6월 12일, 보타 대통령이 의회에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연설 방송.[5]
이 와중에 감옥에 수감중이던 '46664[6] ' 넬슨 만델라에게 '''작은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제안에 대한 대답은 간결했다.만약 만델라가 더 이상 폭동과 무력행위를 하지 않겠다면, 만델라의 석방을 고려해 볼 것이다.
그러다가 1988년 들어 건강이 나빠진 보타는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고 '늙은 악어'라는 비난을 받았고, 결국 1989년 8월 15일 사임한다. 후임은 개방적인 성격의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를 석방시켜 아프리카민족회의를 합법화시켜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7]싫소(No).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취임한 이후, 보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웨스턴케이프 주의 와일더네스라는 도시에 거주하며 살았다. 1998년 남아공 정부가 보타에게 '청문회에 출석하라.' 는 통보를 했지만 그는 거절을 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2006년 10월 31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항년 90세. 유산은 그의 아내와 다섯 자녀들이 물려받게 되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유가족은 이를 거절하였다 한다. 넬슨 만델라는 대인배답게 '비록 숙적이지만 좋은 공로도 있었고, 평화적 협상에도 협조해주었다.'[8] 며 보타를 용서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의 피해자였던 흑인과 컬러드 대부분은 보타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거나 왜 이렇게 늦게 죽었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상술한 것처럼 극우가 아닌 백인들에게도 평가가 좋지 않기 때문에, 백인들 중에서도 소수의 극우파들만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1] 1984년에 폐지되었다. [2] 1984년 이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총리에게 실권이 있었고,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의원내각제 국가였다.[3] 그의 집권기에 남아공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을 연상하게 하는 인권 탄압국이었다. 언론과 대중 문화는 모조리 검열대상에 들어갔고 사회적으로 아주 극우적인 정책을 견지했기에 극우 성향이 아니라면 백인들도 피터르 빌럼 보타는 좋아하지 않는 편.[4] 대통령제 도입과 비백인 의회 개설 등의 내용이 담긴 새 헌법의 도입 찬반 투표였다.[5] 국영방송 SABC의 방송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6] 넬슨 만델라의 수감 번호. 64년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7] 이 때문에 데 클레르크는 일부 극우 백인들 사이에서 매국노란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 물론 흑인, 컬러드, 극우가 아닌 백인들에겐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양대 국부로 추앙받지만...[8] 사실 표면적으로나마 아파르트헤이트를 완화하긴 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이 국내외로 절정에 달한 시기도 보타 정권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