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넬슨 만델라 주요 수훈과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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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Nelson Mandela'''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제8대 대통령'''
'''본명'''
Nelson Rolihlahla Mandela
넬슨 롤리랄라[1] 만델라
'''국적'''
남아프리카 공화국 [image]
'''출생'''
1918년 7월 18일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 주 음베조
'''사망'''
2013년 12월 5일 (95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텡 주 요하네스버그
'''신체'''
185cm
'''직업'''
정치인, 변호사
'''정당'''
아프리카 민족회의
'''대통령 임기'''
1994년 5월 10일 ~ 1999년 6월 14일
'''학력'''
포트 헤어 대학교
런던 대학교 시스템 인터내셔널 프로그램
남아프리카 대학교
비츠바터스란트 대학교
'''배우자'''
에블린 은토코 메이즈(1944년 결혼, 1957년 이혼)
위니 마디키젤라(1958년 결혼, 1996년 이혼)
그라사 마셸(1998년 결혼)
'''종교'''
개신교(감리회)
'''서명'''
[image]
'''링크'''
Biography NobelPrize
1. 개요
2. 생애
2.1. '투사' 만델라
2.2. 대통령 만델라
3. 사망
4. 기타
5. 어록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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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절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보통선거 실시 이후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국부(國父)'''이며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을 가리지 않고 존경받는 인물이며, '''현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자 평화의 화신'''[2]이라고 평가받는다. 아프리카 대륙의 수많은 흑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높이 기리고 있으며 '''현대사의 위대한 위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애칭이자 존칭으로 '마디바(Madiba-말 그대로 '어른')'[3]라고 많이 불린다. '아버지'를 뜻하는 타타(Tata)로도 가끔 불리며, 혹은 '훌륭하다',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쿨루(Khulu)'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투사'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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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대통령 재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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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모습
1918년 7월 18일 목요일에 남아프리카연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코사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 라는 뜻이다. 나쁘게 보면 문제아)' 는 뜻의 롤리흘라흘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았다. 넬슨(Nelson)은 초등학생 때 교사가 지어준 영국식 이름인데 이후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그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16세 때 성인식을 치른 뒤 얻은 이름 달리붕가(Dalibhunga)는 '새로운 권력자' 를 뜻했다. 16세 때 치른 이 성인식은 할례, 즉 포경수술인데, 마취없이 성인식을 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만델라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참을 수 있어야 된다"면서 포경수술을 찬성하였다. 남아공의 원주민에게 포경수술은 성인식으로 행해지는 풍습이다.
학교에 가게 된 만델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내용들(백인 이야기만 있으며 흑인들은 노예강도로 나오는 얘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며, 축구와 복싱, 장거리 달리기 등의 운동도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대신 그를 돌봐주던 후견인이자 족장이였던 욘긴타바 달린드예보(Jongintaba Dalindyebo)에게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 후 흑인들을 위해 일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땐 막연히 후견인인 달린드예보가 추장으로서 재판을 집행[4]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부족을 위해 일하는 법 상담자가 되기 원했으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고 나서는 넓은 세계를 보고 감명 받으면서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을 꾸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그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으며 특히 강제 결혼을 시키려는 후견인을 피해 친구 올리버 탐보(만델라의 동료이며 남아공 정치인 겸 민주화 운동가)와 함께 도망가 위장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확한 내막은 만델라가 법대에서 주는 학식에 불만[5]을 가지고 투쟁을 벌였다가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후견인 달린드예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여 투쟁을 중단하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했지만 만델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 결혼을 시키게 된 것. 강제 결혼에 만델라는 도망갔지만 끝내 사람을 보내 수소문한 달린드예보에 의해 그들의 행방도 알려지게 되었고 탐보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만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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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후엔 훗날 남아공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게 될 동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절친 올리버 탐보까지 재회, 합세하여 셋이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일으켜 나가게 된다.[6] 아프리카 민족회의(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7] 맞선 투쟁활동을 벌이게 된 만델라와 ANC는 처음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방법을 모색하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남아공 정권이 친영국파인 연합당에서 반영국파인 국민당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연합당보다 몇배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백인 우월주의에 꽉찬 놈들이라 원래 있던 암묵적인 사회적인 차별까지 법으로 확실히 새기는건 물론이고 거주지 이전법안까지 통과시키며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정식적으로 열고, 게리맨더링의 일환으로 컬러드의 투표권을 박탈하며 일당체제를 구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프리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경찰을 보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국민당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만들기 위한 책임자가 된 만델라는 이 조직의 이름을 '민족의 창(Unmkhonto we Sizwe)'이라고 한다. 줄인 이름은 'MK'.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진보계열의 백인들[8]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사보타주와 테러를 행하다 결국 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9]을 선고받고 무려 27년 동안 투옥되었다.[10] 총 27년의 기간 중 로벤 섬에서 18년을 생활하였고, 이후 일정 기간은 국제 여론에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에 의해 감옥이 아닌 교도관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11] 이러한 장기간의 수감생활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모친과 맏아들이 사망했을때에도 장례식에 참석을 할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수감생활 속에서도 남아공 대통령들에게 편지를 쓰고 ANC 회원들과 연락을 하는 등 할것은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된 시간이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투쟁을 통해 교도소의 환경을 개선시킨다거나 하는 일을 벌였다. 그가 갇혀 있는 동안 남아공의 흑인들과 해외 재야인사들이 석방운동을 줄기차게 벌였고, 1988년에는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에릭 클랩튼스티비 원더 등 유명 뮤지션 83명이 그의 7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열어 석방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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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1990년,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못이긴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의 석방과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합법화를 발표하여 그를 석방한다. 이후에 당시 남아공 정부와 국민당, 민주당, 인도계 정당, 컬러드계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서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만듬으로써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협상 후반기엔 극우정당인 보수당[12]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이 협상에 반발하고 잉카타 자유당은 협상에 나섰다가 파기하다를 반복하고 ANC와 갈등을 벌여 한때 남아공에 내전으로 갈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반투스탄내 기득권층은 반투스탄 내 흑인들의 반발에 결국 굴복했고, 보수당은 자멸함에 따라 대다수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ANC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252/400 62.7%)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잉카타 자유당과의 분쟁도 진정되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2.2. 대통령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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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있던 모든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혔지만 그들을 '''사면했다'''.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란 슬로건 아래 단 한 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덕분에 남아공 백인들이 남게 되어 그들의 경제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만델라가 사망하였을 때 백인들이 대거 떠나 남아공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만델라의 수감생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보타'''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터르 빌럼 보타(1916년 ~ 2006년)는 본래 보어인으로, 백인이다. 1948년 남아프리카 국민당에 입당 후 국회의원, 총리 등 승진을 계속하다가 대통령이 된 양반이다. 이 사람의 재임기간(1984년~ 1989년) 동안 남아공은 막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1984년, 만델라는 코에체 장관에게 보타 대통령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온 만델라에게 보타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되려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폭동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석방을 허락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는데,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남아공이 받는 비난 여론을 무마할 계획에 그런 말을 꺼냈겠지만, 만델라가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보타와 만델라 두 사람 간에는 찬 바람만이 오가게 되었다. 이후 1998년, 만델라가 재임 중이던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보타를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했는데 보타는 거절을 해버렸다.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당하다." 라는 소리를 지껄이다가 2006년 노환으로 죽었다.
훗날 만델라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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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 선수권 일화도 유명한데 당시 전형적인 백인 스포츠[13]로 흑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정도로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럭비를 만델라는 흑백이 하나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대표팀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격려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열었다. 대회 직전에는 대표팀이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를 직접 가르쳐주는 행사까지 마련했다.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주장 등번호 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뉴질랜드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고 그 날은 남아공 전체의 축제일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백인 주장에게 전달한 것 역시 만델라였다. 이후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인빅터스에서 영화화되었다. 만델라 역은 모건 프리먼, 럭비팀 주장 프랑수아 역은 맷 데이먼이 맡았다.
다만 이처럼 흑백 간의 갈등을 아우르고 남아공의 분열을 막은 성과를 낸 만델라였지만 그의 집권 시기에 남아공의 경제 문제[14]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있다. 흑인 경제력 강화(BEE) 프로그램이라 해서 수탈당하던 흑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줌으로써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 계획으로 일부 흑인들만 혜택을 입었으며,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1980년대 경제 제재 당시부터 경제는 이미 어려워지고 있었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흑인에게도 부의 재분배와 공평한 사회진출의 기회가 주어져야 했다. 1960년대부터 인종 차별이 약화되는 추세에서도 1990년대까지 흑백분리 정책을 유지한 이전 정부들의 바보 같은 짓이 화를 자초한 셈이라는 것이다.[15] 또 서구의 경제적 자원을 잃지 않은 것도 그의 공로 중 하나로 꼽힌다.
정치적인 수완으로 봤을때는 의회 구성문제로 당시 지리해져가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맺었으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반대한 극우 백인들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의 반발, 잉타카 자유당과의 또다른 분쟁으로 남아공이 거의 내전 상태까지 갈 뻔 했던 것을 진화시켜 남아공을 안정시켰다. 허나 후에 그의 후배들이 일으킨 부정부패나 추문이 일어나는걸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대학살이 나지 않은건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는 백인들도 많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벌어졌던 만행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처분했고 재산몰수같은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넬슨 만델라가 백인들한테도 엄청나게 존경받는다.
1999년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16][17] 존경받다 권력자가 된 후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수많은 사례에서 볼 때 단임으로 깔끔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훌륭한 업적이라면 업적.
국내에는 1995년과 2001년 두 번 방한했으며 첫 방한 시에는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18] 두 번째 방한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김 대통령 사망 당시 만델라 재단에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 방한 당시 모 방송사에서 만델라 부부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를 틀어주었는데 그때는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 출마하자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함께 한 낡은 시계를 선물하였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 탄압을 받으며 20년간 사용한 낡은 가방을 선물하였다. 또한 만델라의 자서전을 번역한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19]

3. 사망


2009년 쯤부터 병세가 나타나다 2013년 12월 5일 요하네스버그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 고난했던 행보에도 불구하고 장수했다. BBC/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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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
만델라가 타계한 후 전세계에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구글은 메인 페이지에 만델라를 추모하며 그의 인생을 돌아보는 만델라 재단의 페이지로 링크를 걸어놨다. 한국어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7월 18일 넬슨 만델라 두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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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홈페이지 아카이브

Amazing human being. Champion of freedom and human dignity. He set an example for all of the world. RIP Nelson Mandela. We miss you al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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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타계 다음날 올라온 팀 쿡의 트윗

애플의 CEO 팀 쿡은 "위인.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대변자. 그는 세계 모든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평안히 쉬소서, 넬슨 만델라. 우리는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라는 트윗을 올렸고 애플 홈페이지스티브 잡스의 사망 직후 스티브 잡스를 추모했던 것처럼 그의 사진, 이름, 출생년도 및 사망년도를 띄워 그를 추모하였다.
12월 10일 열린 추모식에는 미국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20],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나루히토 일본 황태자[21] 등 세계 91개국 정상급 인사, 왕족들이 참석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표로 참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서거에 유가족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고인은 오랜 세월 남아공을 분열시킨 인종 차별정책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킨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그 위대한 뜻이 세계평화의 기틀이 되고, 남아공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의 가슴에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저와 한국 국민들도 그 숭고한 뜻을 기리면서 만델라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합니다."라는 조의를 표했다. 출처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남아공은 영웅이자 아버지를 잃었고, 세계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을 잃었다."며 애도했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만델라의 투쟁은 당신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당신의 승리였다"면서 "만델라는 한 국가를 정의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역사의 거인"이라고 그의 삶을 평가했다.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프리, 락그룹 U2의 보컬 보노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도 참가했으며 추모식이 열린 요하네스 FNB 경기장[22]에는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만델라를 추모했다.
헌데 이 추도식에서 수화 통역을 담당하던 한 사기꾼이 아무 의미 없는 손동작을 한 걸로 밝혀졌다. 정신분열을 앓고 있던 자신이 갑자기 어쩔 줄 몰라했다는 듯. AP 인터뷰, CNN, BBC, ITN 남아공의 국가기간방송인 SABC에서 이를 알아챘는지 추도식을 중계하던 도중 자체 수화통역사를 급히 투하해 화면에 띄웠다. 당사자와의 인터뷰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장례식은 12월 15일 국장으로 열렸다. ''''Hamba Kahle, Madiba!!'(함바 칼레, 마디바!/잘 가요, 어르신!)'''
남아공 정부는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청사 앞에 만델라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동상을 건립한 후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동상의 귀 안에 작은 토끼(...) 동상이 만들어져 있던 것. 동상을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동상 제작 시간이 촉박해 어려움을 겪은데다 동상에 서명도 남기지 못하게 한 점에 불만을 가져서 이런 행위를 했다고. (아프리칸스어로 토끼는 '서두르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 장난을 해도 만델라 동상에 하냐'는 여론의 비난을 받고 토끼를 제거하기로 했다.

4. 기타


  •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 위니와 1996년 황혼 이혼을 해서 말이 많았는데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외도까지 했다는 게 사유였다고. 민족회의 시절에도 위니가 남편과 달리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들에 대한 보복행위를 허락하고 특히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을 살인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폭력적 행위로 인해 평화적 해결책을 강구하던 만델라와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한다.[23] 참고로 만델라는 총 3번 결혼했다. 위니는 2번째 아내였고 저 때 이혼하고 2년 뒤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1933-1986)의 아내였던 그라사 마셸 여사와 삼혼을 했다. 그때 연세가 무려 만으로 80세.
  •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당일에 증손녀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개막식에 불참하였다. 그런데 만델라의 조카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만델라가 FIFA의 지속적인 경기장 참석 요청을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조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협박 수준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매일 주치의로부터 만델라의 컨디션을 보고받아야 했고 가족들은 혹여 의사가 경기장 참석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내릴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사실 FIFA는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엄청난 상징성을 팔아먹기 위해 바로 얼마 전 증손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91세 노인을 축구장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이다. 이후 폐막식에도 불참하리란 예상을 깨고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였다. FIFA의 더러운 속내와는 별개로 관중들은 비록 10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부부젤라를 불면서 만델라를 환영하였다.
  •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등이 있다. 국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어번역해 1995년 처음 출판했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 에이즈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출소 당시까지만 해도 에이즈가 남아공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9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에이즈가 갈수록 퍼져 에이즈 환자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고 남아공의 성장잠재력과 평균수명을 갉아먹는 수준에 다달았다. 재임 당시에 흑백화합 및 인프라 건설, 경제성장같은 여타 현황에 밀려 에이즈 문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24] 퇴임 직후에 본격적으로 에이즈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금을 모금하여 에이즈 고아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에이즈가 문화질병이라며 약을 처방하는 제대로 된 대책대신 주스섭취를 권하는 등 삽질을 거듭하던 타보 음베키에게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라며 격렬하게 비판했으며 자신부터 전처 소생인 큰 아들을 에이즈로 잃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에이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고, 비싸게 약을 팔던 다국적 제약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까지도 했다. 큰 아들은 2005년도에 사망했다.
  • 2016년 수능완성 영어책에 일화가 실리기도 했다.
  • 1996년 헌법 2조 9항의 인권선언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기하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은 헌법에서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을 명시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는 결국 2006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이자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넬슨 만델라는 90년대에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델라가 옥살이를 하던 80년대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대중들 사이에서 거짓 기억이 공유된 것. 여기서 만델라 효과라는 말이 생겨났다.
  • 2018년 5월 16일, 스페인의 축구 클럽 FC 바르셀로나가 넬슨 만델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공 리그의 챔피언인 마멜로디 선다운즈와 친선경기를 가졌다.# 문제는 바르샤가 비록 리그 우승을 확정짓기는 했으나 영광스러운 무패 우승까지는 2경기가 남아있었다는 것. 더군다나 만델라의 생일은 7월 18일이라서 굳이 시즌 중에 친선전을 치룰 필요가 없었다. 이 친선전 때문에 37라운드 레반테 UD 원정은 메시, 피케 등 주요 선수들이 벤치에 앉거나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는 로테이션을 돌려야 했고, 결국 5:4로 패배하면서 무패 우승이 물건너가고 말았다. 이후 바르샤는 만델라컵에서 가볍게 승리했지만# 돌아온 것은 "친선경기에 불과한 만델라컵을 무패우승과 맞바꿨다"는 팬들의 분노와 안티팬들의 조롱 뿐.
  • 짐바브웨의 악랄한 독재자였던 로버트 무가베와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무가베도 백인들에 맞서 싸우던 영웅이었기에 오히려 독재자이자 극단적 흑인우월주의 성향으로 타락한 무가베에 대해 만델라는 살아 생전 안타깝게 여겼다. 나라가 막장인 상황에서 독재와 사치를 누리던 무가베는 만델라와 평가가 정반대다.
  • 정작 남아공 현지에서는 만델라를 가리켜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벽보가 그려지는 일도 있다고 한다. 만델라가 비록 흑인 차별을 철폐하기는 했으나, 백인들에 비해 더욱 가난에 시달리는 흑인들의 현실은 해결하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예전보다 흑인들의 빈곤율이 더욱 늘어나는 바람에 만델라에 대한 반발 여론도 있다. 기사를 작성한 손호철 교수는 한국에서 민주화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강행하는 바람에 빈부격차와 실업률이 증가하여 해당 정권에 대한 반감이 생긴 현상과 같다고 밝혔다. 기사 링크[25]
  •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장녀인 제나니 노시츠웨 들라미니가 2019년 주한 남아공 대사로 부임하여 근무하고 있다.
  • 막내 딸이자 주 덴마크 대사를 지낸 진지 만델라가 향년 59세로 사망했다. # 코로나19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유족들이 공개했다. #

5. 어록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를 치러 왔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 1962년 11월, 노동자들의 파업을 유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중 발언.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일들을 끝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히 영면할 수 있다. 나 스스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의 시간 속에 잠들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섬에 있다. (The greatest glory in living lie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

- 1994년에 출판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면 남에게 나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때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나는 주춤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도중에 발을 잘못 내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커다란 언덕을 올라간 뒤에야 올라가야 할 언덕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감히 꾸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누구도 피부색, 배경 또는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나지 않는다. 미워하게끔 배운다. 미워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랑하는 것도 가르칠 수 있지 않은가.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레 사람 가슴에 다가온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대로 살 자유를 (사회에 의해) 빼앗겼을 때, 그는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다. (when a man is denied the right to live the life he believes in, he has no choice but to become an outlaw.)'''"

"'''여러분이 '성자' 에 대해서 '끝없이 노력하는 죄인' 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이상, 나는 성자가 아닙니다.'''"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만약 ANC가 여러분에게 아파르트헤이트정부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한다면, 여러분은 아파르트헤이트에 싸웠던 것처럼 ANC와 싸워야 합니다.[26]

'''"


"'''나는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노력하는 한 노인일 뿐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할 것이다.'''"

[27]


6. 대중매체


[image]
《굿바이 만델라》의 한 장면. 데니스 헤이스버트 분. [28]
[image]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의 한 장면. 모건 프리먼 분.
당연히 할리우드에서 그의 생을 영화화한 적이 몇 번 있다. 대니 글로버(영화 《2012》에서 미 대통령으로 출연)는 만델라가 아직 옥고를 치르고 있던 1987년 HBO에서 제작한 TV 영화에서, 시드니 포이티어는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인 1997년, 데니스 헤이스버트는 2007년작 《굿바이 만델라》(원제 Goodbye Bafana)에서[29], 그리고 모건 프리먼은 2009년작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30]에서 각각 만델라로 열연했다. 모건 프리먼의 경우 만델라 본인이 자신을 연기한 최고의 배우라고 극찬한 적도 있었고, 만델라의 사망 이후 만델라를 추모하는 인파들이 만델라가 아닌 프리먼의 사진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만델라 사진 보여주면 모건 프리먼?이라고 하거나 모건 프리먼 사진을 보고 만델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2013년 영국에서도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에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 주연으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런던에서 만델라의 딸 등이 참석하여 시사회가 진행되던 도중 만델라의 부고가 전해졌다고 한다.
소설 《세계대전Z》에서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레데커 플랜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로 하고 레데커 플랜을 계획한 '''인종차별주의자'''인 폴 레데커를 불러와 도움을 요청한다.
본인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맬컴 엑스를 다룬 동명의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깜짝 출연. 흑인 어린이들에게 엑스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교사 역으로 등장한다.
흑인 패션모델인 나오미 캠벨이 친할아버지로 여기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만델라 역시 그녀를 친손녀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1] 코사어로는 정확히는 "Rholihlahla"라고 적고, /xoˈliːɬaɬa/로 발음한다. /ɬ/ 발음을 굳이 한글 표기로 옮기면 '홀리흘라흘라' 정도에 가깝다. 장난꾸러기라는 뜻이라고 한다.[2] 해당 자료 단 해당자료에서 선정된 인물 중 헨리 키신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3] 한자 단어 중의 '대로(大老: 국가의 큰 원로, 큰 어르신)'와 어감이 비슷하다.[4] 영국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긴 했지만 소도시에서는 추장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5] 사실 만델라의 이유도 정당한 것이 그가 다니는 포트헤어 대학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흑인을 받는 대학'''이었으나 학식이 너무 형편없었다.[6] 물론, 투쟁 과정에서 인도 및 여러 유색인들을 대변하는 당들과도 같이 일한다. 또 공산당과도 손을 잡았는데 자서전에서 만델라는 공산당이랑 손 잡는건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7] 근데 이는 1948년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실시 된 정책이다. 정식적으로 초기에 대항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사회일 뿐, 아파르트헤이트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겹쳐서 애매하긴 하다. 다만 아파르트헤이트의 전신격인 되는 정책들은 그때에도 있었으며 이 당시에도 대다수 흑인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소수의 부자나 토호같은 기득권층이나 투표권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다만 컬러드 계층이나 아시아인들도 투표권을 가지기는 했기에 그나마 막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뿐이었다.[8] 대표적으로 남아공 공산당 서기장이 된 조 슬로보(Joe Slovo)가 있는데, 그는 MK의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다.[9] 본래는 사형을 언도하려고 했으나, 만델라가 이를 잘 간파하여 은연중에 정치적인 재판으로 끌고가서 살 수 있었다. 만델라의 변호사 경험이 빛을 발한 것이다.[10] 세계 최장기수 1위는 1995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옹(총 45년).[11] 영화 '굿바이 만델라'에서는 이 시기 만델라를 지켜보던 백인 교도관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참고로 이 교도관하고는 꽤 친하게 지내서 대통령 관저로 초대해올 정도였다고 한다.[12]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일부 과격파들이 탈당하여 만들었다.[13] 반대로 흑인들은 축구에 열광했다.[14] 다만 경제성장률 자체는 1980년대에 비해 상당히 상승하긴 했다.(1980년대 1%->90년대 중반 4%)[15] 사실 이게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공에게 남긴 가장 큰 폐해라고 할 수도 있다.[16] 타보 음베키는 만델라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서 그가 재임하던 시기 남아공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맹주로 급부상하였지만, 그 과실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고(이 시기에 남아공내에서 흑인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아무리 넓게 잡아봐도 전체 흑인의 20%가 채 안되는 수준이고, 나머지 흑인들은 여전히 실업과 저임금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공공서비스 질 향상이나 범죄문제 대처에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결국 권력다툼에 밀려 2009년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결국 불명예스럽게 중도 퇴진하게 된다. 또 재임 초기 만델라와 대립하면서까지 에이즈에 대해 이뭐병스러운 대응을 했다가, ANC내에서도 욕을 먹는 등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퇴임 이후에는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크게 욕은 안 먹는선에서 평가가 좀 나은 편.[17] 그렇지만 이후에 취임한 주마에 비하면 평가가 나은편인데 이후 과도기를 거친 뒤 대통령에 취임한 주마는 성추문 문제가 있었음에도 분배정책을 내세워 흑인들한테 인기를 얻어 집권했지만, 정작 집권 뒤에는 부정부패로 말썽을 일으키는 데다가 공약도 지키지 않았고 더군다나 만델라가 잠깐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언플질을 시도하는 망발을 저질러 흑인들에게도 인기가 푹 떨어지게 된다. 그나마 2014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건 남아공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라서 그렇지 직선제였으면 진작에 나가 떨어졌을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더군다나 재선 이후에 남아공의 실업률은 여전히 20%대를 기록하고 있고 다수 흑인들은 빈곤에 허덕이든데다가 사저건축에 세금을 유융했다는 의혹까지 곂치고 경제까지 침체되면서 지지율은 20%대에 머물고 있다. [18] 원래 외국 정상이 방한하면 서울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게 관행이다.[19]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 언론 및 외신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고도 한다.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징역살이, 해외 망명, 정적 포용, 반대측의 극심한 저항, 노벨 평화상 수상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참고[20] 여담으로 이날 오바마가 추모 연설을 할 때 남아공 청중들로 부터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21] 일본 황실 인사가 황족이 아닌 주요 인사 추모식에 직접 참석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2019년 5월 1일을 기하여 덴노에 등극한다.[22] 구 사커시티 스타디움.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주경기장이었다.[23] 이에서 비롯된 말이 명언/결혼 항목에 하나 있다. "결혼은 진짜 빡쎈거야. 결혼이 얼마나 빡쎈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남아공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는 27년 간 매일같이 당하는 고문과 매질도 참아냈고 40도가 넘는 남아공 사막에서의 강제노동도 견뎌냈어. 그 지옥 같은 27년 간을 참아내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부인하고 겨우 6개월 지내고 이혼했다고." - 크리스 록...당연히 웃자고 하는 소리. 6개월만에 이혼하지 않았고 고문과 매질을 매일 당하지도 않았다. 만약 만델라가 진짜로 가혹한 고문이나 매질을 당했다면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은 진작에 흑인들의 폭동이나 내전으로 개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만큼 만델라가 흑인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자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24] 이와 별개로, 당시 에이즈 운동가이자 가장 장수한 에이즈 환자인 은코시 존슨의 연설에는 찬사를 보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에이즈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25] 다만 한국과 비슷하게 이를 통해 남아공의 다수가 만델라를 비난하고 있다고 볼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위에서 언급하는 민주화 정부의 실책성 정책으로 반발을 입고, 반대급부로 독재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 군사정권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오히려 더 고평가하는 의견이 있듯이 남아공도 같은 처지이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남아공이 지닌 경제적 문제를 만델라가 대표격으로 비난받는 셈인데, 만델라는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5년의 재임기간만 거쳤기에 그에게 현재 남아공의 책임을 묻는 것은 상당히 부당한 면이 있다. 한국에서 누군가는 군사정권을 지지한다고 한국 전체의 의견이 그렇지 않듯이 남아공 역시 마찬가지다.[26] ANC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야당에서는 이 말을 자주 인용한다.[27] 넬슨 만델라가 죽은 이후 영미권에 퍼져 그 외 세계에도 만델라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나, 실제로는 만델라의 삶을 연구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봤음에도 언제 어디서 했는지 아무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아 만델라의 어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단지,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은 이룰 수 있는 것이라는, 짧으면서도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의미가 있어 좋은 문장이다보니, 만델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과 무관하게 수많은 미국인을 포함한 영미권 사람들이나 그 외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상당히 많이 회자되는 말이다.[28] 만델라는 젊은 시절 복싱을 했던 경력도 있어서 사진 속의 덩치 깨나 있는 모습이 굳이 고증오류라고 하긴 어렵다. 다만 흑인이라고 다 외모가 같은 게 아니라, 만델라의 경우 약간 동아시아인 같은 쌍꺼풀이 안 드러나는 눈매에 엷은 피부를 가졌는데, 이 배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흑인의 외모에 가까워서 실제 인물과 차이가 더 커보인다. 사실 남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부시맨으로 유명한 코이산족 등 작은 이목구비의, 동양인 혼혈 같은 외모가 제법 많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흑인의 경우 서아프리카 출신들이 많은데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흑인 외모라고 여기는 많은 특징(낮고 펑퍼짐한 코, 짙은 쌍커풀, 두툼한 입술, 여성의 경우 풍만한 몸매.)들은 사실 서아프리카인의 이미지가 더 강한 편이다. 동아프리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이목구비 역시 백인처럼 얄쌍하고 날렵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외모에 보는 눈이 좀 익숙하다면 소말리아, 지부티,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같은 동아프리카 나라들의 흑인들과 나이지리아코트디부아르, 가나, 기니비사우, 세네갈 등 서아프리카 국가 흑인들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짐바브웨, 레소토, 나미비아, 보츠와나 등 남아프리카 국가 흑인들의 차이점을 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29] 만델라가 약 30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할 때 그를 전담했던 백인 간수와의 우정이 주 이야기. 2007년에 토요명화가 폐지된 이후 편성된 KBS 프리미어에서 방영했고 이후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KBS2에서 방송했고, 만델라의 사망 직후 KBS1에서 다시 방송했다.[30] 만델라의 취임 이듬해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선수권 우승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