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유
夏侯儒
생몰년 불명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 자는 준림(俊林). 하후상의 집안 동생이다.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이지만 따로 열전을 남기지는 못했고 기록은 장기전과 하후연전에서 조금씩 찾아볼 수 있다. 연의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언릉후 조창(曹彰)의 효기사마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황초 연간에 정촉호군을 역임하였고 이어서 정남(征南)장군, 도독형예주(都督荊豫州)가 되었다.
조창의 효기사마로 처음 관직에 입문했으며, 이 시기가 대략 216~218년으로 추측된다. 조창의 군 경력의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오환족 토벌(216년 ~ 218년)인데 이 시기 조창의 토벌군은 언릉후 조창, 익양태수 전예, 참군 하후상 등이 참전했으며, 하후유 또한 친척 형인 하후상 등과 함께 오환 정벌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221년에 조비가 조조를 계승하여 왕이 되자 양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조비는 장기를 책임자로 삼고 비요, 하후유 등에게 군을 이끌고 호응하도록 했다. 장기 등은 현미까지 진군해 큰 공을 세웠고 이 반란은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제기에 따르면 " 221년 11월 신미일, 진서장군 조진이 여러 장수와 주, 군의 병사들에게 명하여 모반한 호(胡)를 공격해 노수, 봉상 등을 토벌하고, 5만여 급을 참했으며, 10만의 포로와 양 111만 마리, 소 8만 마리를 얻으니, 하서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라고 나와 꽤나 큰 반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후유는 장기의 후속 부대로 함께 종군했고 장기전에 따르면 이 때의 직위는 단지 '호군(護軍)'이라고 나와 정촉호군인지 아니면 중호군인지는 확실치 않다.
또 정촉호군이 되어 진서장군[1] 의 관하에 속했으며, 하후유가 정촉호군이 된 것은 220년 즈음으로 보이는데 전임 정촉호군이었던 조진이 220년 진서장군 가절 도독옹량주제군사[2] 가 되면서 그에 속하며 정촉호군을 이어받은 것으로 예상된다. 하후유가 정촉호군을 맡은 시기는 조진 때와 같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조위에서 '정촉'이라는 이름 값은 상당하기에 진서장군을 보좌하는 3,4 인자 정도의 위치는 가진 것으로 예상된다. [3]
221년 이후에는 주천의 소형(蘇衡)이 모반해 강족(羌族)의 호족 인대 및 정령의 오랑캐 만여 기병과 함께 국경 지대의 현을 공격했는데, 하후유는 장기와 함께 그들을 격파해 소형, 인대 등이 투항했다. 장기가 상소를 올려 하후유와 함께 좌성(左成)을 수리하고 요새를 구축하면서 봉화대와 군량 물자를 쌓아둘 곳을 설치해 오랑캐의 침입에 방비할 것을 청했으며, 서강족(西羌族)은 두려워해 2만여 명의 백성들을 인솔해서 투항했다.
240년 전후를 기점으로 정남장군, 형주, 예주 도독으로 부임하였다. 이후의 정촉호군은 하후패가 이어받았다. 241년에는 오나라의 장수 주연(朱然)이 번성을 포위해 성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乙修)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4] 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鄧塞)에 주둔해 병력이 적어[5]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해 주연으로부터 6, 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으며, 한 달여 만에 태부(사마의)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훗날 번성전투의 결과에 대해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한편에서는 오의 대군을 적은 수의 병력으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잡아놨다는 의견과 다른 한편에서는 적은 병력임에도 적과 싸우지 않았기에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앙으로 소환되어 태복으로 직위가 바뀌었다. 후임 정남장군 직위는 왕창이 되었다.
동 시대의 하후씨, 조씨를 통틀어서 꽤나 성공적인 관직 생활을 했고 위나라의 황실 일족이라고도 볼 수있는 하후씨족 중에서도 나름의 위치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유망주였던 하후패[7] 보다 훨씬 앞선 커리어로 당시 최고의 상종가였던 하후현과 거의 동일한 직급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8]
이러한 승진이 조조 시기부터 이어진 단순한 친족 우선의 승진인지 혹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정남장군을 역임하고 있을 시기가 조상의 집권기이기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게다가 당시 조,하후씨 중 사정장군을 맡을 만한 숙장은 하후유가 유일하였다.[9]
낙곡대전을 제외하면 군사 경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하후현과는 달리 하후유의 경우 오환 정벌, 강족 토벌, 번성 전투 등 여러 전쟁에 참여한 정황상 기록이 있고, 약간의 논란이 있는 번성 전투를 제외하면 나름의 성과도 거두었다. 문관 임에도 정서장군에 오른 하후현과는 다르게 꾸준히 무장으로서의 관직 생활을 밟아온 것은 확실해 보이며, 조창의 효기교위 시절인 219년부터 번성 전투가 일어난 241년까지 계속 전쟁에 참여한 위나라의 숙장이었다.
하후씨족에 정남장군, 도독을 역임한 인물이지만 기록이 매우 적으며, 249년을 전후로 정남장군이 왕창으로 바뀌며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태복으로 승진하였다. 단, 이 태복의 직위가 의미심장한 것이 태복은 비록 최고위직인 삼공구경 중 하나인 구경에 속하지만 군사적 실권이 전무한 자리였다. 이는 정서장군 하후현이 태상[10] 의 직위를 받고 중앙으로 소환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조치이며 조위 황실이 가진 무력 기반인 정남, 정서 장군을 교체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고평릉사변 이후 조조 이래 조,하후씨가 거의 독점하다시피한 사정장군에서 조,하후씨의 이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11]
거기에 비록 '번성 전투'가 이유가 되었다고는 하나 이 전쟁은 오히려 조위측의 승리였고 진서 선제기의 경우 이 전투의 결과를 매우 부풀렸을 정도로 전투의 경과 또한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으로 불려가 실권이 없는 태복에 임명된 것은 하후현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후임 정남장군인 왕창이 사마의에게 추천받아 정후가 된 인물인 것은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14에서 최초로 등장하였다. 능력치는 통솔력 68, 무력 53, 지력 67, 정치력 68, 매력 58이며 일러스트는 무관복을 한 채 검을 위로 들며 소리치고 있다. 유일한 개성은 단점 개성인 '우유'. 노년기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전방에서 보낸 장수인데 능력치가 장군보다는 통솔형 문관에 가까우며, 유일한 개성 또한 단점 개성이라서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유일한 장점은 삼고초려 시기부터 등장하여 출사표 이후 시기까지 생존하는 것 말고는 없다.
주의는 패도, 정책은 시설개발 Lv 2, 진형은 방원, 장사, 전법은 견제, 업화,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생년은 191년, 몰년은 250년까지 되어 있다.
삼국지 시리즈에 구현된 하후일족은 하후무, 하후영#s-2을 제외하면 최소 한 가지 능력치는 70대를 챙겨주었는데 하후유의 경우 능력치의 합계로는 나름 우수하나(총합: 314) 어느 능력치 하나 70을 넘지 못하여 시스템상으로 버림받았다.
인지도가 매우 떨어지기에 기타 미디어믹스 등에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삼국군영전 시리즈에 전형적인 문관의 일러스트로 등장하였다.
생몰년 불명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 자는 준림(俊林). 하후상의 집안 동생이다.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이지만 따로 열전을 남기지는 못했고 기록은 장기전과 하후연전에서 조금씩 찾아볼 수 있다. 연의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언릉후 조창(曹彰)의 효기사마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황초 연간에 정촉호군을 역임하였고 이어서 정남(征南)장군, 도독형예주(都督荊豫州)가 되었다.
2. 정사
조창의 효기사마로 처음 관직에 입문했으며, 이 시기가 대략 216~218년으로 추측된다. 조창의 군 경력의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오환족 토벌(216년 ~ 218년)인데 이 시기 조창의 토벌군은 언릉후 조창, 익양태수 전예, 참군 하후상 등이 참전했으며, 하후유 또한 친척 형인 하후상 등과 함께 오환 정벌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221년에 조비가 조조를 계승하여 왕이 되자 양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조비는 장기를 책임자로 삼고 비요, 하후유 등에게 군을 이끌고 호응하도록 했다. 장기 등은 현미까지 진군해 큰 공을 세웠고 이 반란은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제기에 따르면 " 221년 11월 신미일, 진서장군 조진이 여러 장수와 주, 군의 병사들에게 명하여 모반한 호(胡)를 공격해 노수, 봉상 등을 토벌하고, 5만여 급을 참했으며, 10만의 포로와 양 111만 마리, 소 8만 마리를 얻으니, 하서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라고 나와 꽤나 큰 반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후유는 장기의 후속 부대로 함께 종군했고 장기전에 따르면 이 때의 직위는 단지 '호군(護軍)'이라고 나와 정촉호군인지 아니면 중호군인지는 확실치 않다.
또 정촉호군이 되어 진서장군[1] 의 관하에 속했으며, 하후유가 정촉호군이 된 것은 220년 즈음으로 보이는데 전임 정촉호군이었던 조진이 220년 진서장군 가절 도독옹량주제군사[2] 가 되면서 그에 속하며 정촉호군을 이어받은 것으로 예상된다. 하후유가 정촉호군을 맡은 시기는 조진 때와 같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조위에서 '정촉'이라는 이름 값은 상당하기에 진서장군을 보좌하는 3,4 인자 정도의 위치는 가진 것으로 예상된다. [3]
221년 이후에는 주천의 소형(蘇衡)이 모반해 강족(羌族)의 호족 인대 및 정령의 오랑캐 만여 기병과 함께 국경 지대의 현을 공격했는데, 하후유는 장기와 함께 그들을 격파해 소형, 인대 등이 투항했다. 장기가 상소를 올려 하후유와 함께 좌성(左成)을 수리하고 요새를 구축하면서 봉화대와 군량 물자를 쌓아둘 곳을 설치해 오랑캐의 침입에 방비할 것을 청했으며, 서강족(西羌族)은 두려워해 2만여 명의 백성들을 인솔해서 투항했다.
240년 전후를 기점으로 정남장군, 형주, 예주 도독으로 부임하였다. 이후의 정촉호군은 하후패가 이어받았다. 241년에는 오나라의 장수 주연(朱然)이 번성을 포위해 성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乙修)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4] 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鄧塞)에 주둔해 병력이 적어[5]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해 주연으로부터 6, 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으며, 한 달여 만에 태부(사마의)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훗날 번성전투의 결과에 대해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한편에서는 오의 대군을 적은 수의 병력으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잡아놨다는 의견과 다른 한편에서는 적은 병력임에도 적과 싸우지 않았기에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앙으로 소환되어 태복으로 직위가 바뀌었다. 후임 정남장군 직위는 왕창이 되었다.
3. 평가
동 시대의 하후씨, 조씨를 통틀어서 꽤나 성공적인 관직 생활을 했고 위나라의 황실 일족이라고도 볼 수있는 하후씨족 중에서도 나름의 위치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유망주였던 하후패[7] 보다 훨씬 앞선 커리어로 당시 최고의 상종가였던 하후현과 거의 동일한 직급과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8]
이러한 승진이 조조 시기부터 이어진 단순한 친족 우선의 승진인지 혹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정남장군을 역임하고 있을 시기가 조상의 집권기이기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게다가 당시 조,하후씨 중 사정장군을 맡을 만한 숙장은 하후유가 유일하였다.[9]
낙곡대전을 제외하면 군사 경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하후현과는 달리 하후유의 경우 오환 정벌, 강족 토벌, 번성 전투 등 여러 전쟁에 참여한 정황상 기록이 있고, 약간의 논란이 있는 번성 전투를 제외하면 나름의 성과도 거두었다. 문관 임에도 정서장군에 오른 하후현과는 다르게 꾸준히 무장으로서의 관직 생활을 밟아온 것은 확실해 보이며, 조창의 효기교위 시절인 219년부터 번성 전투가 일어난 241년까지 계속 전쟁에 참여한 위나라의 숙장이었다.
하후씨족에 정남장군, 도독을 역임한 인물이지만 기록이 매우 적으며, 249년을 전후로 정남장군이 왕창으로 바뀌며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태복으로 승진하였다. 단, 이 태복의 직위가 의미심장한 것이 태복은 비록 최고위직인 삼공구경 중 하나인 구경에 속하지만 군사적 실권이 전무한 자리였다. 이는 정서장군 하후현이 태상[10] 의 직위를 받고 중앙으로 소환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조치이며 조위 황실이 가진 무력 기반인 정남, 정서 장군을 교체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고평릉사변 이후 조조 이래 조,하후씨가 거의 독점하다시피한 사정장군에서 조,하후씨의 이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11]
거기에 비록 '번성 전투'가 이유가 되었다고는 하나 이 전쟁은 오히려 조위측의 승리였고 진서 선제기의 경우 이 전투의 결과를 매우 부풀렸을 정도로 전투의 경과 또한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으로 불려가 실권이 없는 태복에 임명된 것은 하후현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후임 정남장군인 왕창이 사마의에게 추천받아 정후가 된 인물인 것은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4. 미디어믹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14에서 최초로 등장하였다. 능력치는 통솔력 68, 무력 53, 지력 67, 정치력 68, 매력 58이며 일러스트는 무관복을 한 채 검을 위로 들며 소리치고 있다. 유일한 개성은 단점 개성인 '우유'. 노년기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전방에서 보낸 장수인데 능력치가 장군보다는 통솔형 문관에 가까우며, 유일한 개성 또한 단점 개성이라서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유일한 장점은 삼고초려 시기부터 등장하여 출사표 이후 시기까지 생존하는 것 말고는 없다.
주의는 패도, 정책은 시설개발 Lv 2, 진형은 방원, 장사, 전법은 견제, 업화,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생년은 191년, 몰년은 250년까지 되어 있다.
삼국지 시리즈에 구현된 하후일족은 하후무, 하후영#s-2을 제외하면 최소 한 가지 능력치는 70대를 챙겨주었는데 하후유의 경우 능력치의 합계로는 나름 우수하나(총합: 314) 어느 능력치 하나 70을 넘지 못하여 시스템상으로 버림받았다.
인지도가 매우 떨어지기에 기타 미디어믹스 등에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삼국군영전 시리즈에 전형적인 문관의 일러스트로 등장하였다.
[1] 이후의 정촉호군은 정서장군의 지휘 하에 속하지만 당시 정서장군은 존재하지 않았고 진서장군 조진의 휘하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2] 하후연 사후 이미 거의 모든 권한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 현재의 안습한 인지도와는 달리 당시에는 나름 지명도가 있는 장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주연전에 따르면 242년.[5] 조방전에 따르면 오군은 약 5만.[6] 이 시기 조씨, 하후씨의 장수는 고위층, 중진 중에서 거의 보이질 않는다.[7] 후임 정촉호군인 하후패가 당시 우장군이었던 것을 보면 하후유의 당시 위치는 사방장군급 이거나 혹은 더 높을 가능성도 있다.[8] 당시 하후현은 정서장군, 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 하후유는 정남장군, 도독형예주제군사.[9] 조휴, 조진을 위시한 무장 출신 2세대 방계황족는 이미 사망했으며, 조예 시기 좌천 이후 문관직에서 바로 정서장군으로 오른 하후현의 경우, 누가 봐도 낙하산 인사였다.[10] 마찬가지로 구경의 하나.[11] 조상은 조조 이후부터 지속되었던 하후연-조인-하후돈, 조진-하후상-조휴, 하후현-하후유 체재의 황실친족 위주의 군권을 재확립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