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상

 


夏侯尙/夏侯尚
(? ~ 225년)


1. 개요


삼국시대 의 장수. 는 백인(伯仁). 시호는 도후(悼侯).
하후연의 조카, 하후유의 사촌형, 아내는 덕양향주 조씨,[1] 아들로 하후현, 딸로 하후휘,[2] 손자로 하후후가 있다.

2. 정사


어릴 때는 조비의 절친이었고 200년에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해 오관중랑장 조비의 문학이 되었다. 216년에 조조가 위왕이 되자 황문시랑이 되고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의 참군으로 수행해 적을 토벌하고 돌아온다.
220년에 조조가 죽자 평릉정후, 산기상시, 중령군이 되고 조비가 즉위하자 평릉향후, 정남장군, 형주자사, 가절 도독남방제군사가 된다.
문제(조비)에게 상용을 기습할 것을 건의해 서황과 함께 출진하여 맹달, 신의의 도움으로 유봉을 몰아내고 상용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3군 9현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정남대장군이 되었다.
이릉대전에서 촉이 패하자 장강 북쪽에서 제군을 감독하며 위나라의 형주쪽을 견제하던 촉한의 진북장군 황권은 유비 본대와 연락이 끊어져 길이 막혔고 결국 위에 항복하는데 문제기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위나라 형주자사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당시 위나라 형주자사는 하후상이었으므로 황권은 그에게 항복했을 것이다.
222년 조비의 1차 남정장합, 조진, 서황, 문빙과 함께 강릉을 공격해 강릉성을 구원하러 온 제갈근의 군대를 기름 실은 배로 화공을 펼쳐 무찌르지만 주연의 분전으로 인해 시간이 끌고 오히려 전염병이 돌 정도가 되자 삼각주를 거쳐 부교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려 하였고, 강릉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때 동소가 갑자기 상소를 올려 삼각주로부터 물러나게 하자 모두 욕하면서 퇴각하고 반장이 부교를 전소시킬 작정으로 떼를 만들어 띄우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하후상 등의 군대는 삼각주를 빠져나왔다. 열흘 후 동소의 상소대로 물이 불어나 삼각지에 들어간 군대는 물에 잠기고 고립될 뻔하였다. 강릉현령 요태가 위나라와 내통하려 했으나 들통나 주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제갈근이 부교를 띄워 공격해 오니, 하후상 등은 이길 수 없게 되었으므로 퇴각했다. 퇴각하기는 했지만 공이 있어 식읍 600호를 늘려 이전과 합쳐 모두 1,900호가 되었다.
문제는 하후상에게 조서를 내려, 아랫사람에게 형벌과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게 했다. 하후상은 이것을 장제에게 보였고, 장제는 문제에게 간언하여 이 조서를 물려오게 하였다.
그 후 형주목으로 승진해 형주목으로 있으면서 상용쪽으로 길을 뚫어 서쪽으로 7백여 리를 행군하자, 산민(山民-산에 사는 백성) 만이(蠻夷)가 다수 복종하였고 5, 6년간 투항한 자가 수천호에 이르렀다.
224년에 창릉향후로 봉해지면서 그의 진짜 안습한 부분이 나오게 되는데 위에서 말했지만 위문제 조비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고 결혼도 조씨 일가의 덕양향주 조씨와 결혼했는데, 나중에 본처 덕양향주보다 첩을 더 사랑하게 되어 덕양향주가 하후상의 총애를 잃자 조비가 그 첩을 살해하는 일이 있었다. 여기에 충격받은 하후상은 죽은 첩을 보고싶어 첩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신을 꺼내서 끌어안고 울 정도로 폐인이 되어 상사병이 드는데 조비는 이 짓을 듣고 "두습이 괜히 하후상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구만"이라고 말은 했지만 총애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225년 병이 악화되자 직접 찾아가서 손을 잡고 울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첩의 뒤를 따라 1년만인 225년에 사망한다.
243년 조방에 의해 조조의 묘 앞에서 제사지냈다. 나름대로 하후연, 조진, 조휴와 함께 조조의 20명 배향공신에 지정.[3]
결과적으로 조비의 치졸한 짓으로 꼽히며, 하후상이 죽은 건 위가 멸망하는 나비효과로서 작용했다. 조비는 동생들을 철저히 실권에서 배척하면서[4] 방계 친족들에게는 군권과 실권을 나눠주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외척과 환관 대신 왕권을 강화했는데[5] 조예 시절에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황가를 지탱하던 조진과 조휴가 죽어버리면서 조씨나 하후씨 중 군권을 부릴 인재가 없어지자 군권이 사마의에게로 몰아졌는데, 이는 고평릉 사변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후반기 조씨, 하후씨 일가 중 하후상이 유능한 모습들을 보여줬기에 하후상이 살아있었다면 조휴와 조진이 죽더라도 군권이 사마의에게 가는 상황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조비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 죽게 되었으니 조비가 위의 멸망 단초를 제공했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중 공방전에서 하후연의 부장으로 등장해 한호와 함께 출진한다. 늙은 황충엄안을 얕보고 장합의 충고를 무시한 채 싸우지만 첫 번째 싸움에서 대패하고 두 번째 싸움에서 형 하후덕과 한호는 각각 엄안과 황충에게 끔살을 당했으며 본인도 사로잡히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다행히 하후연이 앞서 진식을 포로로 잡아놔서 하후상의 포로 교환을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포로 교환이 성사된다. 하후연이 진식을 무사히 보내준 반면 황충은 하후상이 위군 진지로 향하자마자 '''등짝에 화살을 맞춰 보냈다.''' 촉에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삼국지연의에서 이런 서술이 이상하다 생각할 수 있으나, 애초에 양 포로가 중간에서 만나서 서로 자기 진영으로 뛰고 일반 궁병들이 상대방에게 화살을 쏘는 살벌한 분위기로 서술되었다. 물론 하후연은 본인은 딱히 활을 쏘지 않았지만 황충은 하후상이 위나라 진영 거의 다갔을때 직접 활을 쏜 것이다. 안습(...)
등짝에 화살을 맞고 죽지 않았는지 나중에 조비에게 투항한 맹달이 양양에 왔을 때 잠시 등장한다. 하후상은 당시 상용을 뺏기 위해 서황과 양양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언급된다.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하후상에게 하후덕이라는 가공의 형이 있다.

4. 미디어 믹스



4.1. 삼국지 시리즈


[image]
[image]
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image]
삼국지 12, 13
[image]
삼국지 14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 하후상 자신은 전반적으로 70대 능력의 그저 그런 잡장으로 묘사된다.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고, 꽤나 공이 큰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대신 바닥인 능력치는 또 없어서 능력치 총합만 보면 그럭저럭 높다. 평균 능력치가 70정도를 유지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 아들 하후현은 삼국지 3에서 정치력 93부터 시작해서 어떤 삼국지 시리즈라 해도 딴 능력이 그저 그런데 정치력만은 항상 90을 넘는 발군의 모사로 등장한다. 특히 하후현이 나오는 후반 시나리오에는 인재들의 씨가 마르는 수준으로 좋은 장수들이 별로 안나오는데 하후현만 정치력 90대 중반이라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나온다. 심지어 삼국지 11에서는 특기로 명성#s-2을 가지고 나오면서 위군의 내정에 꼭 필요한 인재로 나온다. 이런 면 때문에 하후상은 은근히 문흠과 같은 취급으로 여겨진다. 정사로 비교하면 둘의 공적은 비교가 불가능 하지만....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가 잘 안 맞는다. 조비는 187년생이고 하후상은 그의 또래였는데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81년생으로 조비보다 6살 많게 나온다.[6]
삼국지 3에서는 육전지휘 68/수전지휘 25/무력 70/지력 60/ 정치력 54/매력67에 야망 10, 운 8, 냉정 8, 용맹 9라 하후덕과는 달리 조금 분발하면 장군이 될 수 있다. 장군이 되는 데 추가로 필요한 육전지휘 및 수전지휘는 15에 불과하니 전장에서 조금만 굴려주면 장군도 가능하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71/지력 77/정치력 62. 네 개의 공격계 병법을 다 가지고 있지만 어째 죄다 1단계인 분전, 돌파, 제사, 기사뿐이라 효용성이 좀 떨어진다. 그 이외의 병법으로는 공성계 병법인 정란과 모략계 병법인 덫을 가지고 있다. 능력치도 그렇고 좀 아쉬운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68/지력 79/정치력 66/매력 59로 총합 350을 마크. 활약하는 시대를 감안하면 능력치가 조금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특기는 보수, 화시, 일제, 진정, 기습, 반목, 저지, 기합, 제독. 총 9개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9/무력 72/지력 74/정치력 65/매력 61로 총합 351로 삼국지 10 때의 능력치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지력이 하락하고 무력이 상승했다. 특기가 없기 때문에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효용성이 떨어진다. 여담으로 79에 불과한 통솔력은 특기가 없는 장수들 중에서는 단독 1위이다. 바꿔 생각해 통솔력이 80을 넘어가는 장수들은 모두 특기가 있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9/무력 72/지력 75/정치력 65. 병과는 궁병, 특기는 대타격이지만 무력이 낮아 사용하기 힘들다. 일러스트는 깃발을 들고 있다.
삼국지 13 본편에서 하후상은 뭔가 좀 처절하다.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와 같아 큰 문제가 없는데 보유 특기가 꼴랑 순찰 1 이거 하나다. 병과적성은 창병, 기병 B/궁병 A. 전수특기는 역시 순찰. 보유전법은 채배 3에 아군궁병의 공격 40과 사정을 올려주는 궁병공격진. 어디에도 쓸 수가 없는 특기수. 꼴랑 하나 있는 순찰 특기를 살려 민심을 올리려 해 봐도 나오는 도적에게 헉헉대는 무력이라 안습 그 자체. 하후연, 조비, 조홍, 조휴 등과 같이 궁병이 주력인 장수들과 묶어서 써주자. 자리잡고 조홍의 제사채배와 동시에 써주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PK로 한다면 훈련, 분전, 견수, 수영 정도의 특기를 추가해주고 전수특기도 수영으로 변경해주자.
삼국지 14에서는 100만인의 삼국지 일러스트로 변경되었으며 능력치는 통솔 79, 무력 71, 지력 75, 정치 65, 매력 61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화공, 교련, 위무, 소침, 주의는 할거, 정책은 화계연구 Lv 4, 진형은 안행, 학익, 충차, 전법은 화시, 견제, 업화, 충자, 구축, 친애무장은 맹달, 조비, 환계, 혐오무장은 순운이다.

4.2.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image]
연의대로 한중공방전에 참여한 전투마다 번번이 패한다. 그러면서 장합을 겁쟁이로 매도한다. 여기서도 황충의 화살에 등짝을 맞고 쓰러진다. 이후 관우를 공격할 때 등장한다.

4.3.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순정파라서 그런지 로미오X줄리엣로미오 칸드레 반 드 몬태규로 패러디되었다. 본인이 처음으로 등장한 유수구 전투 (4)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나온 한줄평이 '''삼국지 최고의 로맨티스트'''.
유수구 전투 편에서 첫 등장. 조조가 유수오를 공략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을 때 휘하 장수진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하후돈을 위시한 조조군이 소호를 가로질러 수전으로 손권군을 급습할 때 참전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강릉 공방전에서의 실책을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치명적인 오점으로 회상하는데 뒤에서 조비가 '''"네 치명적인 오점은 그게 아니잖아!"'''라고 태클을 걸고 있다. 치명적인 오점에 대한 설명은 생략.

4.4. 삼국지 영걸전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와구관전투2에서 장합 휘하로 처음 등장, 이후 정군산, 양평관전투 등에 출전한다. 능력치 자체는 무력 70대의 평범한 발석차 클래스이지만, 게임 후반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템빨 갖춘 적군 네임드 발석차라 아군 기병계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최후엔 4장 형주탈환 남사의 전투 분기때 서황의 부장으로 나와 북쪽 성채를 지키고 있으며 장포에게 일기토로 썰리는 이벤트가 있다. 남사 대신 신야로 가면 이후 아예 볼 수 없다.

4.5. 불편한 삼국지


[image]
불편한 삼국지에서 하후상은 조비와 절친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조조가 조진과 조휴를 조비와 같이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조진이나 조휴에 비해 10년 가까이 나이차가 났기 때문에 친구라고 하기에는 뭐했다. 그래서 하후상과 조비가 절친이 되었다.
하후상에게는 상당한 미인에 인간성까지 자애로운 첩이 하나 있었다. 이 처자는 하후상이 상용 서쪽을 개척할 때 포획했던 원주민의 딸이였다. 이 때문에 하후상의 본처 덕양향주 조씨가 이 여자를 시기 질투했고 조비는 해결책이라고 내놓은게 이 처자를 살해한 것이였다. 자신의 애첩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인해 하후상은 미쳐서 날뛰었고 결국 애첩이 죽은 그 다음해에 미쳐서 죽었다.

[1] 조진의 누이이다.[2] 딸 하후휘가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와 결혼하면서 하후상은 사마의의 사돈이 된다.[3] 하후돈조인, 정욱의 경우 233년 이미 배향되었다.[4] 동생들의 실력들이 좋았던 것도 있고 조조가 말년에 후계자 선정 때 고민을 한 것, 형제끼리의 싸움으로 세력 자체가 멸망해버린 원소 등을 보면 이렇게 안하기가 힘들다.[5] 조조가 외척환관에 학을 떼었기 때문.[6] 하지만 200년에 종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성년임은 분명한데 조비 또래 나이라면 너무 나이가 어리다. 최소 관례를 치른 16살이라 가정하면 실제로는 조비보다 한두살 더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