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곡대전

 


'''낙곡대전[1]
駱谷大戰'''

'''흥세 전투[2]
興勢之戰'''

'''시기'''
244년 3월 ~ 244년 5월
'''장소'''
낙곡,[3] 흥세산[4]
'''원인'''
조상의 공명심
'''교전'''
조위
촉한
'''황제'''
''' 황제 조방'''
''' 황제 유선'''
'''지휘관'''
대장군 조상
정서장군 하후현
대장군 비의
진북장군 왕평
'''장수'''
양위#s-2
이승#s-2
등양
곽회
사마소
유민
등지
마충
두기#s-3
[5]
'''병력'''
최소 6만~10만 이상
3만 명 + @[6]
'''피해'''
사상자 다수 발생
군수물자 대량 망실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촉한의 대승, 위군의 퇴각
'''영향'''
조상의 권위 추락.
조위, 20년간 방어로 일관.
1. 개요
1.1. 명칭 논란
2. 당시의 상황
3. 전쟁의 전개
3.1. 위군의 출병
3.2. 촉군의 대응
3.3. 위군의 고전
3.4. 위군의 후퇴
4. 전쟁의 결과
4.1. 위
5.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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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244년 조상이 이끄는 군이 의 한중을 대규모로 공격한 사건. 이 전투에서 패배한 위는 자그마치 20년간 촉에 대해 수세로 일관하게 된다.[7]
왕평이 '''관중을 진동시키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한 전투인데 정작 삼국지연의에서는 잘렸다.

1.1. 명칭 논란


낙곡대전은 한국에서만 부르는 명칭이기 때문에 외국 사이트에서 이를 검색하는 데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낙곡대전의 외국 명칭들은 다음과 같다.
  • 중국: 흥세의 전투(興勢之戰)
  • 일본: 흥세의 역(興勢の役), 흥세산의 전투(興勢山の戦い)
  • 영어: 흥세의 전투(Battle of Xingshi)
원래 2012년까지는 한국의 삼국지 팬덤도 이 전투를 외국처럼 흥세 전투, 흥세산 전투라고 불렀지만# 2012년 말, 엔하위키에 갑자기 낙곡대전이라는 문서명으로 문서가 만들어졌고 이 문서명이 나무위키까지 이어진 덕에 한국에서만 낙곡대전이라는 동떨어진 명칭이 널리 퍼졌다. 명칭에 흥세산 대신 낙곡이 들어가고, 대전이라고 높여 부르지만 삼국지 3대 전투에도 포함되지 않는다.[8]
역사서 기준으로도 낙곡대전이 아닌 흥세 전투라고 부르는게 맞는데, 정사 삼국지에 본 전투가 흥세의 역(興勢之役)으로 기록되어있다.

흥세의 전투에 이르러 왕평이 조상을 막은 것도 다 이 제도를 계승했었다.

及興勢之役,王平捍拒曹爽,皆承此制。

삼국지 촉서 강유전

보다시피 정사 역사서에 흥세의 전투라는 명칭이 똑똑히 적혀있다.
본 항목은 낙곡대전이라는 표제어로 작성되었지만 사실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처럼 '대전' 이라고 부를 만큼 큰 전투는 아니라는 말도 많다. 석정 전투 같은 경우도 이보다 규모가 컸지만 대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더욱. 다만 조상의 실각과 사마 가문 집권의 계기이자 장기적으로 서진의 건국을 가능하게 한 전투라는 점에서 중요성은 꽤 높은 편.

2. 당시의 상황



2.1.


위 명제 조예는 239년에 죽으면서 조상사마의에게 차기 황제인 조방의 보좌를 부탁했지만, 조방의 출신 성분이 확실치 않은 데다[9] 나이도 어려 위 황실의 상황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조상은 처음에는 겸손한 태도를 취했으나[10]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는 한편 사마의를 최고위직이지만 실권은 없는 태부로 임명하여 사마의를 쩌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마의를 쩌리로 만들었다고 해도 조상은 어디까지나 낙하산에 불과했으며, 위나라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사마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11] 조상의 심복인 등양, 이승#s-2 등은 이러한 점을 걱정하여 을 정벌할 것을 조상에게 건의하였고 조상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다.

2.2.


234년 군정 양면의 최고 책임자였던 재상 제갈량이 죽으면서 촉은 위연의 반역 이외에도 이민족의 대규모 반란에도 시달리는 등 내우를 겪었지만 제갈량의 후임인 대사마 장완이 이를 잘 수습했다. 이후 장완은 수로를 이용한 대규모 북벌을 기획하기도 했으나 본인의 지병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그로 인해 촉의 공세는 상당히 둔화된 상태였다.

3. 전쟁의 전개



3.1. 위군의 출병


조상제갈량이 죽은 후의 을 쉬운 상대로 보고 있었다.[12] 더군다나 한중에 주둔 중인 병력이 불과 3만이라는 첩보까지 입수했기 때문에 싸우면 필승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244년의 출병으로 이어졌다. 한편 사마의는 이미 두 번이나 한중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며 출전을 만류했으나 조상은 이를 강행한다.
왕평전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상은 10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한중을 침공했는데, 조상전에 따르면 장안에서 징집한 관중군이 6-7만이었다고 했으니 대촉전에서 잔뼈가 굵은 곽회의 병사는 3-4만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후현, 곽회, 하후패,[13] 사마소[14] 외에도 자신의 가까운 측근들도 종군하게 했다. 사실상 사마의를 제외한 위군의 정예가 모두 출전하는 올스타팀 격의 부대였다. 정서장군 하후현이 총지휘를 맡은 촉한 정벌군이 편성되었다.
기본 전략은 주공인 대장군 조상과 정서장군 하후현이 이끄는 본대와 다수의 이민족 보급부대가 당락도[15]로 진격하며, 조공으로 곽회가 이끄는 옹주군 3-4만이 기산도로 진격해 두 갈래 길으로 한중을 압박한다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곽회가 선봉이긴 했으나 이후 곽회는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반면 조상 본대는 그렇지 못했거니와 곽회는 옹주자사였으니 옹주군을 동원해 그쪽 방향으로 치고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2개 루트 중 핵심은 조상의 본대였고 곽회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3.2. 촉군의 대응


당시 한중의 방어책임자는 진북장군 겸 감군이었던 왕평이었다. 당시 한중에는 수비하는 병사가 3만 명을 채우지 못하여 제장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10만의 위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장수들 사이에서는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한중의 양 날개인 한성, 낙성과 천험의 요새인 양평관에서 막으면서 한중의 중심도시 남정에서 장완이 주둔하고 있는 부릉의 지원군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왕평은 고지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위군을 막을 계획을 짰다. 자신의 호군인 유민(장완의 조카)을 낙곡의 길목인 흥세산으로 보내 100리에 걸쳐 군기를 꽂아놓는 허장성세를 지시하고 자신은 낙곡의 출구에 위치한 황금성에 1천의 정예군과 함께 주둔했다.
왕평의 전략은 제대로 맞아떨어져 위군 본대의 진격은 크게 둔화되었다.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악조건 아래에서도 촉군의 방비는 철통과도 같아 위군의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왕평은 밤을 틈타 소수의 병력으로 야습을 시도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위군을 몰아붙였고, 위군 본대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옹주자사인 곽회는 조상이 촉한을 토벌하자, 곽회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선봉이 되었다고 하는데 직위가 직위인 만큼 옹주군을 이끌고 한중에서 진령산맥을 넘는 길 중 가장 평탄하고 넓은 기산도로 3-4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진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 촉군과 곽회군이 대규모로 맞붙었다는 기사는 없는데, 하후현이 이끌고 있는 본대가 촉의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곽회군이 촉의 방어선을 돌파한다 해도 적지에서 고립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곽회는 본대가 낙곡을 뜷었다는 소식이 올 때까지는 상황을 관망하기로 하고 진영을 짜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3. 위군의 고전


5월에 들어 위군은 출병에서 약 2달이 흘렀음에도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으며 '''심각한 보급 문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원정 총책임자인 조상은 에 복속되어 있던 이민족인 강족저족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하도록 명했는데, 한중의 지리적 험난함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험악하여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자치통감과 조진전에 부속된 '조상전'의 묘사를 예로 들면, '''군량 수송 중에 소, 말, 노새가 죽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울부짖는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다'''고 서술되어 있을 정도다.[16] 차이가 있다면 제갈량이 보급이 어려워서 진격을 멈췄다면, 조상군은 보급이 어렵지만 쌩까고 전진했다는 점...
게다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한 사이 '''성도에서 출발한 비의가 이끄는 대규모 지원군이 한중에 도착하고 말았다'''. 위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벼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이 와중에 곽회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생각해 이 원정은 이미 글렀다고 판단하고서 일찌감치 싸우다 말고 즉시 군사를 적지에서 탈출시켜 퇴각한 상태였다. 덕분에 곽회가 이끄는 군은 크게 패하지는 않았으며 곽회는 이 공으로 훗날 부절(권위를 상징하는 증표)까지 수여받는다.
이때 태부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편지를 보내 '무황제(조조)도 두 번 한중에 들어갔지만[17] 거의 대패하기에 이르렀던 것을 그대도 알 테고 지금 싸우고 있는 흥세는 아주 험한 지역이며 촉한군이 이미 먼저 점거하고 있는데 나아가도 싸우지 못하고 물러난다고 해도 중간이 잘리면 군사가 전복되어 무너질 것이 분명한데 그럼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오?'라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한다.

3.4. 위군의 후퇴


비의의 증원군이 한중에 진입할 때까지 위군 조상의 진영에서는 참모들끼리 퇴각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양위#s-2가 조상에게 형세를 설명하면서 빨리 퇴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패할 것이라고 간언한다. 등양이승은 이를 반대하여 양위와 조상 면전에서 다투었는데 빡친 양위는 등양과 이승은 장차 나랏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니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한다며 분노한다. 이 와중에 위에서 언급된 사마의의 편지를 받은 하후현은 이를 조상에게 알렸다.
결국 전면적인 퇴각을 결심한 조상은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게다가 비의는 촉군만이 알고 있는 샛길을 이용해 낙곡의 심령, 아령, 분수령을 점거하여 길목을 모조리 차단해 위군을 고립시켰고, 조상은 필사적으로 며칠 동안이나 싸워서 퇴각로를 뚫어 간신히 도망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위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소, 말과 군량을 수송하던 수송대는 거의가 죽거나 실종되어 강족과 호인들이 원망했다. 결국 사마의의 예측대로 된 것이다.

4. 전쟁의 결과



4.1. 위


《자치통감》의 기록에서는 '''잃고 죽은 자가 많았고 관중이 텅 비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진전〉에 부속된 〈조상전〉 주석 〈한진춘추〉에서는 '''동관 오른편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위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을 보여준다. 곽회가 이끈 3-4만명은 어찌어찌 크게 패하지 않고 살아갔을 수도 있다 해도 조상 본군이 동원한 군대는 수뇌부조차 간신히 도망갔다고 나올 정도니 피해가 컸을 것이고 대놓고 거의 전멸했다고 나오는 수송대와 치중대의 피해는 그 이상일 것이다.[18] 뿐만 아니라 군량 수송에 동원된 강족과 저족도 심각한 피해를 입어 위나라에 강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에 양위#s-2라는 자는 조상을 부추겨서 이딴 결과를 만든 이승과 등양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위는 이후 263년에 사마소정촉을 결심하기까지 무려 '''약 20년간 촉의 공격에 대해 수세로만 일관하게 된다'''. 마치 이목에게 참패하고 10년간 조나라 근처에도 오지 못한 흉노와 비견될 정도로 위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위나라의 역사를 바꾼 전투이다. 안그래도 낙하산이라 군부에 영향력이 약하던 조상은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더더욱 영향력이 약해지고 만다. 이는 고평릉 사변으로 이어지고 조씨 일족이 몰락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실 이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니었다면 고평릉 사변이 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최소 조상의 실각이 늦어졌다면 더 장성한 조방을 사마의가 그리 쉽게 꼭두각시로 만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평릉 사변 당시 조방은 19살로 서서히 고명대신의 입김에서 벗어날 시기였다.
아무튼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조상은 자신이 계획하고 실행한 원정이 크나큰 참극으로 끝난 상황에서 본인만 살아남아 돌아왔음에도, 반성하지 않고 '''더욱 전횡을 일삼았다'''. 그나마 뒤늦게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처벌을 받은 건 5년이나 지난 뒤인 249년. 이 해에 고평릉 사변을 통해 사마의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물론 측근에 이르기까지 역적+낙곡대전의 패배 책임까지 지고 3족이 멸족당했다.
다만, 낙곡대전 자체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보는 입장도 있다. 일단 다른 국가의 경우 낙곡대전이란 표현 자체를 쓰지 않고 흥세산 전투 또는 흥세의 역으로 표현하며 관도, 적벽, 이릉대전 급의 규모로 치지 않는 관점이다. 정사에 기록된 숫자만 보면 순수 위나라 전투병력은 6~7만 정도이며, 전멸했다는 표현은 비약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일례로 위나라 주요 장수는 한명도 전사하지 않았으며 다른 대전들이 전멸에 가깝다고 표현한 문구가 있는 것에 반해, 흥세산 전투의 경우 "잃고 죽은 자가 많았고 관중이 텅 비었다" 와 "동관 오른편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정도의 표현에 그쳤다는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
낙곡전투 이후 일어난 일들로 볼 때, 차라리 이 전투에서 위가 이겼다면 이후의 엄청난 비극들을 막을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조상이 여기서 승리했다면 사마씨가 나라를 잡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서진의 막장과 오호십육국의 참상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조상 정권 역시 실책이 많았다는 측면에서 꼭 조상의 지위가 굳건해졌다고 위나라가 막장에 접어들지 말란 법은 없기에 결국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한편 낙곡대전은 위나라가 이민족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최후의 전투이기도 한데 삼국시대 자체가 중국 역사에서 특이할 정도로 이민족을 잘 관리한 시대이기도 했다. 촉한은 서쪽과 남쪽, 위는 북방 이민족들을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잘 다룬 편이었다. [19] 다만 낙곡대전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조위는 당근과 채찍을 골고루 썼던 촉한의 경우와는 달리 오로지 군사력으로 깔아 뭉개는 토벌 형식의 전략을 썼을 뿐이어서 이민족들의 인식이 나빴는데 낙곡대전 당시 이민족들이 입은 막대한 인명 손실은 이런 인식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전에 조조오환족을 토벌해 답돈을 참수하고 남흉노를 복속시켜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큰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들 이민족을 하북에 정착시켰고 조비가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이들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짐과 동시에 공손연의 난을 비롯한 하북 지역의 반란으로 인해 조위 후반부터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서진이 멸망할 때까지 이민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서진시기 독발수기능의 난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 연유를 찾아야하며 해당 사건은 당시만 해도 그나마 제정신이던 사마염이 무려 7년간 물자와 인력을 투입하여 간신히 진압에 성공하나 덕분에 동오의 멸망이 10년은 뒤로 미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21]

4.2.


지병에 시달리던 장완이 246년 세상을 떠나면서 비의가 권력을 승계하지만, 비의는 북벌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낙곡대전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후 253년에 비의가 암살당하고 강유가 북벌의 총책임자가 될 때까지 위와 촉 사이에 이와 같은 대규모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비의가 북벌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 북벌에 회의적인 이들로 인해 그랬다는 시각도 있지만, 후일 비의 본인이 손오와 연계된 대대적인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당시 반발이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다고 보긴 어렵고, 당시 정치, 군사 1인자인 장완은 와병 중이었다. 또 장완 사후엔 정치적으로 비의가 완전히 1인자로서 입지가 다져지기 전이었고 기본적으로 외교가였던 비의 입장에서 동맹인 오나라의 혼란상으로 인해 촉한 단독 북벌이 어렵다 보고 비의 역시 자신이나 주변의 역량이 과거 제갈량 시절 만큼은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라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가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장완조차 본격적으로 북벌을 논의한 건 제갈량 사후 몇 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 시점에서 위나라가 대패를 당해 촉이 역습을 가한다고 해도 위나라가 삼국시대 3대 대전 급의 피해를 입은건 또 아니었고 곽회의 군사도 비교적 온전히 살아나갔기에 비의가 신중하게 나간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지도 있다. 위에서 서술한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일부러 그랬다라기보단 어쩔 수 없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유가 이 시절에 주장한 대로 강족과 연계해[22] 대대적으로 북벌하여 낙곡의 승리를 이용했어도 좋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는 지금도 간간히 나온다.[23] 낙곡의 승리를 이용하지 못하고 장완과 비의가 사망함으로서 결국 대승을 거두고도 촉이 불리한 국력차를 좁히거나 뒤집을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이후의 역사를 볼 때 이 전투의 결과는 촉이 위를 거꾸러뜨릴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다거나, 적어도 옹양주 겸병을 제대로 시도해 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당시까지 촉한의 국력은 쇠퇴하지 않았기도 했고. 후일 동진비수대전에서 대승하고 기회를 잡아 화북을 통일했던 전진 상대로 영토를 넓히는데 성공한 것과 비교하면 아쉽다는 평가도 많다.[24]

5. 기타 창작물에서


촉한의 대승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친촉한 성향을 가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예 사망과 조상 집권 후 고평릉 사변으로 넘어간다. 제갈량 사후를 책임지는 캐릭터인 강유의 본격적인 데뷔전으로 포장할 수 있는데도 생략된 것. 이 전투의 주요 승장인 왕평만 해도 연의에서 제갈량에게 신임을 받아 여러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이므로 "승상께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계책을 남겨두셨지!"라고 해도 되고, 더군다나 강유의 능력을 보고 등용한 게 제갈량이니 "승상께서 등용하신 강유가 이렇게 능력 좋다! 승상은 역시 보는 눈이 있음!" 이라는 서술도 할 수 있으며, 역시 제갈량이 직접 지명한 후계자 비의의 능력도 보여줄 수 있으니 여러모로 "제갈승상이 촉을 위해 후사를 얼마나 든든히 준비하셨는가?"로 포장할 꺼리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고 실제 역사랑 그렇게 어긋날 묘사도 아니다. 이 쯤 되면 나관중이 왜 안 넣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기본적으로 연의는 제갈량 사후를 그다지 자세히 다루지 않는 편이므로, 분량 조절 문제나 상당수 삼국지 창작물들이 그러하듯 제갈량이 죽고 나서 열정이 팍 식는 등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이유로 84부작 삼국지삼국 등 드라마에서도 생략되었다. 삼국의 경우는 마지막 화에 와서야 조방이 등장하는 등 사마의를 최후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버리기 때문에 뭔가 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내용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니 고평릉 사변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결말을 내레이션 처리라 들어갈 틈이 없었다.

5.1.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6에서 독자 세력이 된 진의 스토리 모드에서 '촉 토벌전'이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조작무장은 사마소. 대장군 조상이 등애와 사마소의 진언을 무시하고 병량고 습격을 지시했다가 야습, 복병, 화계 에 당해서 엉망이 된 위군을 수습하여 퇴각하는 것이 목표.
진삼국무쌍7에서는 '흥세산 전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지휘관은 여전히 조상. 플레이어블 무장은 사마의가 보낸 사마사, 사마소, 가충, 장춘화. 당연하지만 사마 가문 사람들 모두 조상이 능력 없는 장군이고 지금 생각 중인 작전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전투 시작전부터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로 나온다. 특히 장춘화와 가충은 그 성격상 정말 작정하고 조상을 깐다(…).
걱정 그대로 시작하자마자 조상은 닥돌하다가 촉군의 계략에 걸려서 본진이 털리고 화계에 당하면서 위군은 대패,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조상을 호위해서 탈출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승리 목표다. 탈출지점에 갈 때까지 쉴새없이 나타나서 공격하는 촉군의 장수들은 덤. 장춘화나 가충으로 진행하면 탈출지점까지 가는 와중에도 조상을 까댄다(…).
진삼국무쌍6진삼국무쌍7에서 낙곡대전에서 조상을 격파한 왕평은 조상이 지시한 기습 지역인 군량고를 지키고 패배한 위군을 추격할 때 탈출 경로로 도착하기 직전에 강유가 퇴로를 끊는 것이 아닌 마대#s-2가 가로막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대가 총대장으로 설정되며, 마대를 격파해야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된다.

5.2. 삼국전투기


조상 일당이 자신들의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자 전쟁 한번 크게 이기면 된다며 한중의 병력이 3만 밖에 안된다는 정보를 입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마의가 원정 계획을 두고 '바보짓이다'라고 일축하지만 하후현을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결국 출전하고 만다. 여기에 사마소까지 참전한다. 사마소가 친구따라 참전했다고 보고하는 사마사에게 조상 일당의 원정을 술잔에 술을 부어서 구멍을 뚫으려는 것으로 비유하며 당장은 촉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한다. 사마의는 촉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잔을 뜷을 수 있는 송곳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평했다. 이에 사마사는 그냥 깨버리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3가지 루트[25]로 위군이 오고 두기는 왕평에게 남정에서 농성을 하자고 하지만 왕평은 지리 특성상 농성을 했다간 위군을 평지로 오게 두는 것이고 평지를 장악당하면 반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이용해 지형을 끼고 산에서 영격하기로 한다. 그런데 서열 3위에서도 문맹이라고 휘하 장수들이 왕평 말을 안듣자 왕평은 자기 호군인 유민에게 낙곡 출구인 흥세산을 점거하고 버티라고 지시한다.
적이 방어선이 있는 고지를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조상군은 공격은 고사하고 험난한 낙곡을 오르느라 조상은 물론 병사들, 온갖 군수물자를 나르던 백성들까지 모두 죽을 고생을 해서 흥세산 앞까지 올라오지만 흥세산은 이미 유민이 점거한 상태. 유민은 최소병력으로 깃발만 세우고 있지만, 가뜩이나 힘들게 올라온 조상군은 전의를 상실한다. 실전경험이 없는 하후현이 절망하고 있을 동안 사마의는 경험의 문제라며 실전 경험이 없으니 촉의 험난한 지형을 알지 못하고 무턱대고 원정을 나선 준비성이 없는 조상 일행을 비웃는다. 그러자 옆에서 사마사가 곽회는 경험 많은 장수니 어떻게든 되지 않냐고 묻지만, 그러니까 곽회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곽회는 아직 촉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알 정도로 촉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
사마의의 예상대로 곽회는 기산도로 가다가 강유가 이끄는 촉군을 보자 병력이 많은 낙곡이 뚫려야 전세가 움직인다고 판단하며 버티기 상태로 들어가고, 그것만으로도 강유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하후패 쪽은 자오도를 통해 먼저 한중에 들어오긴 했지만, 나오자마자 왕평에게 지면서 물러난다.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에도 하후현이 미련을 못버리고 있는 사이 사마의가 곧 촉의 지원군이 올 테니 퇴로가 막히면 몰살당하니까 빨리 퇴각하라는 서신을 보내지만 이미 비의의 원군이 도착하여 화살비+바위+추락사+군량 고갈 크리를 당한 위군은 물론 셰르파마냥 부려 먹히던 관서의 백성들과 이민족들까지 몰살당한다.
잘못된 판단은 그 대단한 위인들도 몇 번씩 저지른다는 내레이션과 그 실수를 한 지점까지가 본전이고 그 실수로부터 얼마나 빨리 돌아오느냐로 실수의 폭이 결정된다는 조조의 말이 함께 하후현의 실패를 지적한다. 비참한 꼴로 돌아온 조상 일행과 촉의 장완이 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을 마지막으로 낙곡대전은 종료된다.

5.3. 조조전 온라인


사마의전(하)편에서 등장하고 조상이 자신도 군공을 세워 사마의의 병권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나오며, 조상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를 인질로 삼기 위해 사마소도 데려간다. 곽회가 낙곡에서 진지를 설치하자 조상이 왜 전진하지 않냐고 하자 적군의 매복을 우려해 설치했다고 하지만 조상은 적의 원군이 오기 전에 승부를 봐야한다면서 싸우는 것을 강요한다.
곽회는 자신의 막사로 군막으로돌아가서 조상의 판단에 분노하고 사마소가 곽회에게 그저 대장군(조상)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조상이 사마의의 병권을 빼앗기 위해 이런 일을 일으킨 것을 설명한다.
곽회와 사마소는 매복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봉대가 되어 흥세로 진군하며, 선봉대가 매복된 군사가 나타나자 이를 상대하다가 더 이상 깊게 들어가면 안된다고 여겨 곽회와 사마소는 물러나기로 한다.
그러나 왕평의 지시로 서쪽에 있던 매복군과 동쪽에서 나타난 비의의 군사로 인해 후방에 있던 조상과 하후현이 포위되었으며, 조상은 서쪽의 북쪽으로 도망친다. 조상이 서쪽의 매복군을 뚫고 달아나자 비의가 북쪽에 있는 매복군을 시켜 조상을 공격하며, 조상은 목숨을 건지고 겨우 달아난다.

5.4. 대군사 사마의


조상 일파에서 첩자를 통해 사마의가 사병을 기르고 있는 것을 간파하며, 사마의가 사병을 양성해 모반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확실히 잡아 사마의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원정을 나선 것으로 나오고 해당 전투는 나오지 않고 전투 상황을 이용한 정치 암투만 등장한다.
사마소가 전농중랑장을 하면서 농사나 짓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하안은 사마소가 야심이 큰 것을 알고 일부러 조상이 이끄는 원정군에 사마소를 하후현 휘하에 배속되도록 천거한다. 사마사가 사마소에게 출정하기 직전에 사마의의 사병 30명을 사마소 휘하에 붙여준다. 조상은 하후현, 곽회, 등양 등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고 사마소에게는 3천의 병력으로 흥세에 주둔해 상황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조상이 군사들에게 몰래 지시해 촉군으로 위장해 사마소의 군영을 공격했으며, 사마소가 이를 물리치고 함께 있던 이승이 추격하려 하자 사마소는 이를 멈추게 한다. 조상은 자신이 보낸 자객들이 사마소의 가노로 온 자들에게 쉽게 죽는 것을 알고 사마의의 사병임을 짐작한다. 사마소의 가노로 온 자들 중 한 명을 생포해 심문했지만 정체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며, 사마소는 사마의의 사병임을 간파하면서도 비밀을 지키기 위해 조상을 욕한 가노를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조상 일파에 포로로 잡힌 1명, 연노에 맞아 죽은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병 28명을 모조리 죽인다.
한편 조상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하려고 해서 하후현이 화를 내자 조상은 하후현에게 이미 촉이 방비를 철저히 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공격을 하지 않고 퇴각하려는 것이며, 자신이 하후현보다 상관인 대장군임을 강조하며 경고한다. 그리고 하후현에게 조상이 생포한 사병을 보여주면서 사마의가 사병을 양성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하후현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조상의 심증만이 있을 뿐 물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하후현은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고, 결국 조상 일파가 사마씨의 사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건진 채로 낙양에 복귀함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결국 이 작품에서의 낙곡대전은 조상 일파가 정적의 약점을 잡기 위해 불가능한 전쟁임을 알면서도 이들의 눈을 속이고자 거짓으로 벌인 전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인데, 당시에 대한 기록이 조상의 정적이었던, 위를 무너뜨린 진나라 혹은 그 이후의 인물들이 쓴 것인 만큼 과장,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할지라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후 위의 대촉 정책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던 만큼 상당히 심각했던 전투였던 것이 분명한데, 그런 전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건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26][27]

[1] 한국에서만 부르는 명칭이다.[2] 중국, 일본 등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기준이 되는 명칭이다.[3] 지금의 섬서성 주지현 서남.[4] 지금의 섬서성 성고현 이북.[5] 왕평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6] 비의가 이끌고 온 원군이다.[7] 물론 위가 수세로 돌아선 건 이 사건 이후로 터진 고평릉 사변으로 위가 정치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탓도 크다.[8] 한국에서는 원래 삼국지 3대 전투만 대전이라고 불렀다.[9] 조예의 슬하에는 4남 2녀가 있었으나 모두 요절했다.[10] 모든 일을 사마의와 함께 논의하여 처리했고 사마의를 마치 아버지처럼 섬겼을 정도였다고 한다.[11] 사마의는 그 제갈량의 북벌을 어떻게든 막아낸 인물이니 영향력에서 조상은 상대가 안되는게 당연한 일이다. 조상의 아버지인 조진이라면 모를까...[12] 이전부터 걸핏하면 촉을 치려고 했으며 사마의가 촉 정벌의 어려움에 대해 조언했으나 간단히 무시했다. 사실 조상만 촉을 우습게 여긴 건 아니고, 유비가 사망한 직후의 촉에게 왕랑, 진군, 화흠, 제갈장 등 위나라 대신들이 항복하여 위의 신하국가나 되라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제갈량에게 박살났다...여기서 사마의는 뭔가 기시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13] 장안에서 자오도로 나아가는 본군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고 하는데, 이건 230년에 벌어진 전투로 보이고, 이후에 토촉호군이 되어 원정군에 소속되면서 서쪽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낙곡대전에 참전한 것은 확실하다.[14] 하후현의 휘하에서 부장으로 종군했다.[15] 자오도는 비가 와서 조진도 실패한 길인 데다가 한고제 유방이 '이 길로 쫓겨나느니 항우와 싸우다 죽겠다!' 라고 울분을 터트릴 정도로 험한 길이었다. 당낙도보다 더 험난한 길이 자오도이다.[16] 수차례의 북벌을 진행한 제갈량 역시 보급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고 조엄#s-1 또한 한중으로의 수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유일하게 한중 수송에 대해 긍정적인 말이 적혀 있는 것은 두기#s-1뿐으로, 5천 명을 보냈으나 한 명도 탈주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7] 장로 정벌과 한중 공방전을 뜻한다.[18] 삼국지 후반기라 인기가 적어서 그렇지 촉의 꿈과 희망이 갈려나간 이릉대전 못지 않은 참패다. 70만이라 나온 건 소설인 연의의 창작이고 실제로는 적게는 4만에서 많게는 8~10만까지로 보았다. 물론 실제 촉과 위의 국력을 생각하면 비슷한 숫자라도 촉이 더 큰 피해를 입은 거지만 노동력에 투입 가능한 장정 10만 명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하게 볼 만한 숫자는 아니다.[19] 그래서 삼국지 관련 게임 등을 통해 중국 역사를 접한 사람들은 이런 이민족들에 대해서 나중에 더 심도있게 역사를 본 뒤에 그냥 그때만 특이하게 중원에 밀렸을 뿐, 그 외에는 막강했다고 재평가하게 된다.[20] 다만 청담사상이 맛이 가게 된 것도 그 3대 때문이기도 한데 청담의 시초라할 수 있는 하안, 왕필, 하후현 등이나 죽림칠현이라고 청담사상의 원 뜻을 이어받은 이들은 그래도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후대의 청담사상을 보면 그나마 나을 정도로 정신머리가 온전한 편이었지만 왕필이 일찍 죽고 하안과 하휴연이 고평릉 사변으로 참살당했으며 사마소가 종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죽림칠현 중 하나인 혜강을 불효죄로 처형하자 청담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저항'은 사라지고 저항할만한 지식인들은 죄다 쥐죽은듯 조용해지고 그들의 자리를 죄다 청담을 곡해한 중앙귀족 등이 차지하가 안 그래도 문제가 있던 청담사상이 빠르게 타락한 것이다. 요컨대 청담사상의 타락에는 이들 3대의 책임도 크다.[21] 왕조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이라고는 없다고 평가받는 서진이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 출범하는 서진 정권과 초대 황제가 의욕적으로 사태 진압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점에서 청담사상구품관인법의 부작용으로 인해 휘청거리기 시작하던 조위 정권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독발수기능의 난을 제대로 진압이나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서진의 붕괴와 오호십육국시대의 개괄은 단순히 사마씨의 부정부패에서 기인했다기 보다는 사마씨를 필두로 한 문벌귀족 전체의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국정의 문란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구품관인법의 부작용은 이미 조비 때부터 그 증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쳐 남북조시대 남조, 북조 할 것 없이 나라를 휘청이게 했던 청담사상의 경우엔 오히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3부자에게 탄압받아 그 정도였지[20] 이미 조위 때부터 나라를 좀먹고 있었다.[22] 낙곡대전으로 관서지역 이민족들의 인심이 위나라에게 확 나빠진 걸 생각해보자.[23] 중국의 근대사학자 여사면 같은 사람은 장완, 비의가 촉한 국정 해먹은 시절이 20년에 가까운데 왜 그 시기에 안 쳐들어갔냐? 당시 위나라도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결국 촉이 무너진 건 강유보단 장완, 비의 책임이 크다라고 강유를 옹호하면서 논평한 적이 있다.[24]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면 동진과 촉의 영역과 국력차를 들 수도 있다. 실제로 동진의 영역은 양쯔강 이남 거의 전역이며 초기에는 그나마 성한이 지배하는 촉 지역은 손에 넣지 못한 채 있었지만 그마저도 340년대에는 손에 넣었다. 그리고 비수대전은 이로부터 약 20~30년 정도 후의 일, 즉 촉나라+오나라의 수준이 비수대전 당시 동진이었던 셈이다. 이러니 북벌에 못 나선 건 아쉽다고 쳐도 그것과 별개로 성공확률은 더 낮았을 것이다.[25] 그나마 짧은 야곡으로 가는 잔도가 있었지만 위연이 태워버린 상태.[26] 무엇보다도 전쟁에 소모되는 인적, 경제적 손실이 엄청난데, 정적 약점 하나 잡겠다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부터가 다소 심각한 설정이다.[27] 사실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사건마다 사마의를 둘러싼 정세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시켜 놓아서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