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
1. 사전적인 의미
엄청나게 큰 규모를 속되게 표현하는 부사.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위의 정치가이자 학자 겸 장군. 자는 문서(文舒). 왕택의 아들이자 왕유의 손자, 왕기의 형이자 왕혼#s-1, 왕륜#s-3, 왕심, 왕담의 아버지. 또한 왕묵, 왕침의 숙부. 병주 진양 사람.
동군의 왕릉과 함께 명사로 이름을 얻었는데, 아버지뻘의 나이차가 나는 왕릉을 친형처럼 모셨다고 한다.[1]
관직에 출사한 것은 위 왕국 성립 시기부터로 조비가 태자일 때 태자문학에 있었다. 위 제국이 세워진 뒤에는 낙양 전농교위가 되어 전답 개간에 실적을 거둔 공적으로 연주자사가 되었고, 위명제 조예#s-2가 등극하면서는 양렬장군으로 관내후의 직위를 받았다. 이때 여러 저술활동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법을 적용함에 있어 지나친 엄격함보다는 관용의 여지를 두어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의 《치론》(治論) 이 있고 그밖에도 병서(兵書), 가성(家誠) 등을 지었다.
사마의로부터 현인으로 추천받아 정시 연간에 무관정후가 되었고, 이어 정남장군 가절도독형예제군사에 올라 동오의 형주측 전선을 방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치소가 전선기지인 양양과 멀었기 때문에 치소를 가까운 신야로 옮기고, 수군 훈련과 군량 비축 등 오의 동태를 대비한 방비에 힘썼다.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 실각한 후 사마의가 대국을 장악해 신료들과 향후 국정을 의논할 때 교육/인사에 역점을 둔 5개조를 건의했다. 250년 오나라가 이궁의 변으로 혼란한 틈을 타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제안해 신성태수 주태#s-2, 형주자사 왕기와 더불어 강릉을 공격해 오의 주적#s-2(朱績)을 패퇴시켰는데,[2] 이 공적으로 정남대장군 의동삼사로 승진하고 경릉후 작위를 받았다.
252년 손권 사후 사마사가 오를 토벌하려 하자 호준, 관구검, 제갈탄 등과 재차 협력해 공세에 들어갔으나 제갈각이 정봉#s-1을 보내 한종을 죽이는 등 양주 방면의 군세를 꺾자 군을 물렸다. 이후 관구검, 문흠의 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표기장군이 되었고 257년 제갈탄 궐기 당시에는 주적의 동태를 철저히 견제해 형북의 안전을 지켰다. 그 공적으로 도독의 자리를 유지한 채 사공의 지위에 올랐다. 2년 후 병사해 시호를 목후(穆候) 라 했다.
안목이 탁월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과 만나보고 그 사람됨에 감탄했다고 하며, 세설신어보에는 사마염을 비롯해 모두가 바보라고 놀렸던 막내아들 왕담의 재능을 일찍부터 간파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형의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훈육시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곽가의 아들 곽혁과는 친구 사이였지만 자식들에겐 그의 사람을 가려 대하는 됨됨이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이 점은 훗날 배송지가 주를 달아 비판하기도 했다.
아들 중 맏아들 왕혼은 서진 성립 후 동오 정벌 때 군을 이끌고 오 승상 장제를 죽이는 등 왕준#s-1과 전공을 다퉜고, 조카(형의 아들) 왕침은 역사서인 《위서》를 집필한 업적[3] 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조모를 등지고 사마소에게 아첨한 곡학아세의 행적 때문에 세인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오나라를 정벌하려다 제갈각의 반격으로 군을 물렸다는 것 딱 한 줄만 적혀 나온다. 딱 양호의 선임 역할을 훌륭히 해낸데다 삼공까지 오른 인물인데도 끝머리에 나오는 아들 왕혼보다 비중이 더 없어서 안습.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60대인 무력을 제외한 다른 능력치가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을 오가는 밸런스형 무장으로, 그 중 정치력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1, 무력 63, 지력 70, 정치 83이며 병법으로는 제사, 누선, 정란, 조영, 덫,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61/지력 70/정치력 83/매력 78로 준수하며 명사 특기를 가지고 나온다. 아이템으로 본인 저서인 치론(지력+2)을 들고 나와서 실질 지력은 72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농업, 치안, 징병, 화시, 진정, 고무, 저지, 반박, 명사. 총 9개다.
삼국지 11에서도 능력치가 통솔력 74/무력 64/지력 79/정치력 79/매력 75로 지력이 전작에 비해 9 상승했다. 삼국지 전 장수 중 능력치 총합 65위에 들 정도로 준수한 편이며, 저술한 치론의 내용에 근거해 인정#s-4 특기를 갖고 있다.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진양의 재야무장으로 나와서 정원 세력으로 플레이할 경우 학소 등과 함께 중요한 인재로 쓰인다.
삼국지 12에서 능력치는 통솔력 74/ 무력 64/ 지력 79/ 정치력 79로 매력이 빠졌을 뿐 능력치가 이전작과 같다. 그리고 본인 저서인 치론(지력+2) 버프로 지력은 81로 올라간다. 전법은 공격약화.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특기가 효율이 떨어져 성능은 떨어졌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정원 세력의 중요한 인재 중 하나. 일러스트는 말을 타고 고삐를 쥔 채 손바닥을 펼치고 있다.
삼국지 13에서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2, 농업 2. 전수특기는 상업이고 전법은 창병선동.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4, 무력 64, 지력 79, 정치 80, 매력 75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1 상승했다. 개성은 후위, 명성, 법률, 농정, 학자, 주의는 왕도, 정책은 성벽확장 Lv 4, 진형은 어린, 안행, 충차, 전법은 제사, 화시, 저지, 충차, 친애무장은 곽혁, 완적, 왕릉, 혐오무장은 없다.
3. 후한 말의 인물 1
王昌
(? ~ ?)
황궁을 호위하는 호분을 지내면서 이각#s-1과 곽사가 서로 싸움을 벌이자 헌제가 황보력을 보내 화해시키도록 했는데, 곽사는 이를 따랐지만 이각은 따르지 않으면서 황보력을 바깥에 나가게 했고 황보력은 성문을 나아가 이각이 명을 따르지 않고 불손하다고 했다.
헌제는 이각이 이를 들을까 두려워 해 황보력을 내보내게 했는데, 이 때 왕창은 이각에게서 황보력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받아 그를 쫓아갔다. 그러나 왕창은 황보력이 충직함을 알았으므로 일부러 그를 보내주고는 돌아가서 이각에게 추격했지만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보력이 이각에게 직접 욕설을 한 것으로 나오고 또한 황보력이 서량 사람들에게 이각을 따르면 역적의 무리가 된다는 말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흐트린 것으로 인해 분노한 이각의 지시로 황보력을 추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왕창은 아예 쫓지도 않고 되돌아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보고했으며, 한글판의 일부 판본에서는 호분중랑장으로 나온다.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 등장한다.
4. 후한 말의 인물 2
王暢
(? ~ 169년)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숙무(叔茂). 팔준(八俊)의 한 사람. 왕공의 아들이자 왕겸의 아버지.
젊어서 청렴하고 질박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특별히 교제하는 무리는 없었으며, 처음에 효렴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양하면서 응하지 않다가 대장군 양상에게 무재로 천거되었다가 4차례 옮겨져 상서령, 제상, 사례교위 등을 지내고 어양태수를 역임하다가 업무 상의 일로 죄를 얻어 면직되었으며, 환제가 삼공에게 물어 인재를 추천할 것을 명하자 태위 진번#s-2이 왕창을 청렴하고 공정하다면서 추천했기에 상서를 지냈다.
얼마 안 가서 왕창은 남양태수가 되어 그 지역의 귀척, 호족들을 싫어해 도착하자마자 범죄를 저지르면 관리를 시켜 집을 허물고 나무를 베면서 우물, 아궁이를 막는 등 가혹하게 행하다가 공조 장창이 간하자 이를 받아들여 관대한 정치를 했다.
유표#s-1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왕창은 행실에 검소함이 지나쳐서 유표가 논어의 구절을 통해 검소함으로 아랫 사람을 핍박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자 왕창도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검약함으로 실수하는 자는 드물다고 반박했다.
후에 왕창은 장락위위가 되었고 168년에 사공이 되었다가 8월에 재난을 이유로 파면되었으며, 당시 천하 사람들에게 존경받아 천하에 빼어나게 우수한 인재는 왕숙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169년에 집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