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준(강사)

 


'''한상준'''

<colbgcolor=#66cccc><colcolor=#fff> '''출생'''
1971년 ??월 ??일
'''본명'''
이상준
'''직업'''
강사
'''학력'''
[image]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학사(90학번), 석사 및 박사 수료)
'''소속'''
HANPSAT
'''과목'''
PSAT 언어논리
1. 개요
2. 강사 생활
2.1. 데뷔 전
2.2. 강사 데뷔 및 PSAT최강팀
2.3. HAN PSAT의 설립 그리고 흥망성쇠
3. 여담


1. 개요


공직적격성평가 언어논리 강사 및 학원인. [1] 전 가수.

2. 강사 생활



2.1. 데뷔 전


이전에 아카펠라 음악을 하였다고 한다.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의 리더였다.[2] 인공위성을 그만둔 후 군대를 다녀와서 아카펠라 가스펠 팀에서 활동했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4년간 고시를 하다가 그만두었다.[3][4]
정말 혼자 살아보려고 그 뒤 집을 나와 수학 강사를 했었다고 한다. 3년 넘게 하면서 사교육 시장에 서서히 적응해가다가 4년차 되던 해에 이건 아니다 싶어 원래 하던 음악으로 돌아와 음반 기획사 차리고 3년 치열하게 일했다고 한다. 벌어놓은 돈 몽땅 음반 제작에 써버렸으나 음반을 제대로 망했다.
그 뒤 이번엔 대학원에 들어갔다. 본인이 시를 좋아해서 두보시 전공으로 대학원을 다녔다. 석사논문도 열심히 썼고 교수들로부터 학자로서의 자질도 인정받고 박사도 잘 다녔지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대학원을 박차고 나와 PSAT 언어논리 강사를 시작하였다.

2.2. 강사 데뷔 및 PSAT최강팀


언어논리 강사로 데뷔하면서 명강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조 언어논리 1타로써 PSAT 시장이 처음 생길 때 적성시험에 대한 자세로 중심을 잘 잡았고 모의고사 질도 좋았다고 한다.[5] 2006년부터 한국법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2007년 중순 박준범 강사를 데뷔시키고 신헌 강사와 셋이서 연합해서 PSAT최강팀을 만들었다. 당시 한신박 PSAT최강팀은 무시무시한 파워를 지녔다.[6]
이후 신헌 강사가 베리타스 법학원 이적으로 PSAT최강팀을 나가자 2009년 석치수 강사를 데뷔시켜 한석박 체제를 유지시켰고 학교 후배 이주섭을 불러 연구원을 시키다가 언어논리 강사로 데뷔시켰다.

2.3. HAN PSAT의 설립 그리고 흥망성쇠


이후 모종의 이유로 합격의 법학원을 나가 2011년말 한상준PSAT전문학원(HANPSAT)을 설립하였다. 지금의 베리타스 법학원 위치에서 시작했다가 9동 여가숙수 3층으로 옮겼다.
원래 신헌, 석치수, 박준범, 이주섭을 다 데려오려 했으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7][8]
그 뒤 강사를 양성하기로 마음먹고 강의보다는 원장 겸 매니저로[9]서 역할을 늘려갔다.[10] 제일 먼저 양성한 사람이 상황판단 하주응 강사이다.[11]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결별한 뒤 양성한 사람이 언어논리 조은정[12]과 상황판단 길규범[13], 자료해석 홍지석 강사이다. 조은정 강사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다시 점유율이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은정 강사 외에는 큰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 소수지도반은 꾸준히 했으나 대형 강의는 소녀가장 조은정 강사가 압도적이였으나 타 강사들은 정규강의 수강생 수는 적었다.
별도로 2012년 법률저널과 전국모의고사 제휴를 맺어 문제를 공급했었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2014년말 2015년 초에는 자체 PSAT 전국 모의고사를 만들었으나 미비한 점이 많아 대차게 말아먹고 다시는 하지 않았다.[14] 당시 행시사랑에 사과문을 올리고 1회 모의고사를 전원 1/3환불을 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고 한다.
이후 길규범 강사는 원장인 한상준과 불화로 독립해나가서 합격의 길 연구원을 차리고 홍지석 강사는 본업인 세무사로 돌아갔다. 이후 상황판단 성인경 강사도 데뷔시켰으나 그닥 좋은 성과가 나오기 어려웠다. 신헌 강사의 연구실장 배승철 강사도 공부를 그만두고 잠시 민경채 강의와 소수지도반을 잠깐 했으나 이후 신헌 강사의 연구실로 취직이 되면서 그만두었다.
결국 2017년 본인, 조은정, 성인경 강사를 베리타스 법학원으로 임대보내고[15] 2019년 중순 학원을 폐업하고 고시촌에서 두문불출하였다.

3. 여담


  • 2011년 초 떡조교 사건이 있었다. 합격의 법학원에서 모의고사 강의 때 수강생이 먹을 떡들을 학원 조교가 착복한 사건이다. 한상준 강사는 항상 종강 때 합격찹쌀떡을 쏘았는데 그 해 강의 때 떡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그 수백인분[16]을 한 조교가 배낭에 다 쓸어담다가 학원에서 목격자 하나 둘 등장하고 그 조교는 추궁당하자 학원데스크 문을 발로 차고 도망가고 그랬다고 했다고 한다. 정작 애꿎은 여자조교가 덤터기를 써서 사비로 찹쌀떡사서 나눠주었다는 썰이 있다. 착복하지 않은 다른 조교들도 해명 및 관리상 문제에 대한 사과문도 올렸으나 당시 행시사랑 분위기는 싸늘했으며 장난아니었다고 한다.
  • 수학강사를 그만두고 다시 음악을 했을 때 맛 잃은 소금을 작업한 적이 있었다. 언어논리 수업 시간에 '원래 이 노래는 교회 한번 제대로 까보려고 만들었는데 그냥 이상하게 (노래 참 뜻도 모른 채) 여기저기서 많이 부른다'며 한탄한 적이 있다고.
  • 2019년 인공위성 25주년을 기념해 멤버들끼리 만난 적이 있다.#
[1] 실제로 이전에 독자적인 컨텐츠가 있었던 신헌이승일 빼고 1세대 PSAT 강사들은 다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험생이 주축이 되는 2세대 PSAT 강사들도 1세대 PSAT강사들이 닦아 놓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2] 1집 때 활동했다고 한다.[3] 사법시험인지 행정외무고시인지는 불명.[4] 이 때 4년 동안 준비했던 고시를 포기하겠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집을 나가라고 해서 정말로 가출을 했었다. 물론 단기 가출로 끝나긴 했다.[5] 다만 모의고사 때 기출문제가 몇몇 섞여있다는 평도 있는데 본인은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후술할 전국모의고사 사건으로 이미지에 치명타를 받게 되었다.[6] 박준범이라는 이름은 한상준이 지어줬다.[7] 지르고 보는 타입이라 사전 이야기 없이 때리면 자기 밑으로 올줄 알았으나 예상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PSAT최강팀의 수장은 박준범이 되고 한승아 강사가 들어올 때까지의 모습을 계속 유지한다.[8] 이 당시 경쟁이 심해졌고 2013년 모의고사 때 석치수 강사의 모의고사 수업에 일부러 맞춰 본인의 언어논리 모의고사를 배치했다. 통상적으로 같은 과목의 동일 순환 날짜를 같이 맞추는걸 생각하면 상당히 도박적인 일. 당시 자기 학원의 유명 강사가 자기 밖에 없었다는 것도 그 이유.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광고를 걸었고 이에 분노한 합격의 법학원과 이석박 체제로 돌아가던 PSAT최강팀이 행동에 나섰고, 특히 석치수 강사는 출석 장학금을 내걸어 출혈경쟁이 발생했다. 당시 2014년 모의고사 강의 때 석치수 강사가 말하길 문제 난이도 자체는 2013년이나 2014년도는 다르지도 않았고 2013년에 문제 난이도가 토나오는게 아니었는데 평균이 2014년이 더 높은 이유는 출혈경쟁 당시 지각자도 OMR 다 찍어서 내고 보는경우가 많아서였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으로 한동안 석치수 기본서의 서문어택의 1호 대상이 되었다.[9] 학원 직원이 하는 잔업을 다 해주었다.[10] 아마 삽자루식 강사 매니지먼트를 생각한듯 하다[11] 사실 몇 더 있었으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12] 특히 조은정 강사의 경우 원래 본인의 과목인 언어논리에서 문제 만드는 것도 도와주었다.[13] 길규범도 본인이 지어준 이름이다.[14] 사실 프라임 법학원 이전의 최초의 강사 출제 전국모의고사였다. 이 때 언어논리는 본인과 조은정 강사가 만들어서 그나마 품질이 보장되었으나 자료해석에서 여러 문제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등 크게 문제가 발생했고 상황판단 길규범 강사가 낸 문제들은 행시스럽지 않고 입법고시스럽게 냈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 게다가 일부 문제는 입법고시와 LEET, M/DEET 문제도 그대로 들어있었다고. 사장 본인이야 언어논리는 케어할 수 있어도 자료해석, 상황판단까지 케어하기는 어렵기도 했고 당시 강사들 수준은 조은정조차도 아직 성장 중인 상태인지라... 이후 잘 정착되었으면 좀 더 좋은 품질의 전국모의고사가 빨리 나올 수 있었음에도 아쉬운 일. 여담으로 길규범 강사가 2018년 입법고시 이야기를 할 때 이 때 모의고사를 만든 것을 이야기하며 3년만에서야 시험에 적중했다는 회상을 하기도 했다.[15] 본인도 특강을 하였다.[16] 오후 영상반 것까지 포함된 양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