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폰 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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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Guido Freiherr von Bülow
(1830년 1월 8일 ~ 1894년 2월 12일)

'''"Le concert - c'est moi."'''

내가 곧 콘서트이외다.[1]

'''"명심하십시오. 궁정악단의 시대는 저물겁니다. 여러분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독일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세계 최초의 전문 지휘자로 기록되어 있는 음악가.
1. 생애
2. 지휘계(界)의 선구자
3. 불륜의 피해자


1. 생애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한스 폰 뷜로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9세에는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음악이 아닌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하다가 결국 음악을 공부하게 된다. 프란츠 리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리스트가 가장 총애하는 애제자가 되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되어 바그너의 제자가 된다.
바그너 제자 시절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초연했다.

지휘에 전념하기 전에는 피아니스트로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프란츠 리스트가 프랑스의 한 살롱에서 자신의 매우 어려운 곡을 연주하면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나와 한스 폰 뷜로밖에 없다"라고 말했으나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연주를 자청했으니, 그가 바로 조르주 비제였다. 비제의 연주를 들은 리스트는 “젊은 친구 비제여, 내 곡을 정확히 칠 수 있는 사람은 나, 한스 폰 뷜로 그리고 당신까지 합해 세 사람이오. 더 공평하게 말하면 세 사람 중에 제일 젊은 당신이 아마도 가장 빛날 것이오.”라고 했다고.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의 가치를 발견하여 초연한 연주가이기도 하다. 당초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이 악보를 헌정했으나 루빈스타인은 이 악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연주를 거절했다. 이에 뷜로가 이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고 차이콥스키에게 구구절절 연락을 보내 미국에서 초연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이 협주곡의 가치를 생각하면 실로 선견지명이 있는 안목이라 할 수 있다.

2. 지휘계(界)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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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휘 모습을 기록한 그림)
최초의 전문 직업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다. 기존 음악계에서는 전문 지휘자라는 존재가 따로 없었고 작곡가가 부업으로 지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지휘자로 인기가 높았던 바그너, 멘델스존, 리스트 등이 그러한 예다. 한스 폰 뷜로의 등장으로 전문 지휘자의 위상이 높아졌다.
지휘자로서 뷜로는 마이닝겐 오케스트라를 맹조련하여 독일에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단원들에게 악보를 암보하게 하거나 서서 연주하게 하였다고 한다. 만년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 정확하고 꼼꼼한 지휘 스타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3. 불륜의 피해자


1857년 27세에 프란츠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하게 되었고 두 딸인 다니엘라(1860년생), 블란디나(1863년생)를 두었지만, 1869년 결국 이혼했고, 코지마는 바그너와 재혼했다.[2] 세간에는 바그너가 일방적으로 뷜로의 여자를 빼앗아간 것처럼 알려지기도 하지만, 실상은 좀 복잡하다.
사실 뷜로와 코지마의 관계는 시작 전부터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코지마가 다름아닌 바그너의 열렬한 빠순이였던 것이다. 코지마와 뷜로가 맺어지려고 할 때 세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코지마가 아깝다, 뷜로에게 코지마는 과분한 여자라고 했다. 그런 평에도 불구하고 코지마가 뷜로와 결혼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뷜로가 바그너의 수제자였기 때문이었다. 뷜로 스스로도 코지마가 과분한 여자라는 얘기를 하도 들어서 자신의 아내(코지마)에게 더 적합한 남자가 나타난다면 미련 없이 보내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결혼 후 남편(뷜로)의 스승인 바그너를 직접 만나게 된 코지마는 바그너에 대한 빠심이 더욱 깊어졌고, 결국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이졸데(1865년생), 에바(1867년생), 지크프리트)를 낳는 등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다. 뷜로는 아내와 바그너의 관계를 묵인하면서도 결혼 관계만은 유지해보고자 몇 년 간 노력했으나 결국 이혼에 합의하고 말았다. 사실 바그너는 과거 관계를 맺었던 여자들에 비해 코지마에게는 처음에 오히려 다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코지마는 자신의 아버지뻘인 남편 바그너에게 평생 헌신했다. 노년에 바그너가 저술했던 저서들은 모두 코지마가 바그너의 구술을 받아써서 완성되었다. 나중에 바그너가 죽었을 때 코지마는 크게 상심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거의 1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이내 남편의 음악적 유산을 지키고 알리기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녀는 다시 세상으로 나와 남은 47년의 여생을 바그너의 작품을 알리고 보호하는데 바쳤다.
우선 그녀는 바그너의 죽음으로 중단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페스티벌은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바그너 생전에도 단 두 번 밖에 열리지 못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바그너가 죽은 지 4년 후에 코지마는 페스티벌을 재개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코지마는 페스티벌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정기적으로 반복해서 개최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녀의 노력의 결실로 페스티벌은 매년 개최되게 되었다. 또 그녀는 남편이 생전에 자신의 오페라를 어떻게 연출, 공연했는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바그너가 생전에 의도했던 바에 최대한 가깝게 그의 음악적을 재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과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직접 모든 공연을 연출했다. 그녀는 가수들이 악보에 써있는 것을 고쳐서 부르는 당시 관행을 금지했고 악보대로만 노래하고 연주하도록 했다. 또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이외의 극장에서는 상연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던 파르지팔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극장들의 엄청난 금전적 제안을 모두 거절했으며,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이 이를 어기고 파르지팔을 공연하려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세계 음악인들에게 호소했고 법적 투쟁에 나서기까지 했다.
한편 코지마 바그너와의 이혼으로 상심한 뷜로는 공적으로는 바그너의 작품을 지휘하거나 그의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했으나 사적으로는 그와 결별하고 바그너의 대척점에 있던 요하네스 브람스와 친분을 쌓으면서 브람스를 음악적으로 지지한다. 독일 정통 음악계의 라인을 잇는 3B (바흐 '''B'''ach, 베토벤'''B'''eethoven, 브람스'''B'''rahms)라는 호칭을 붙인 것도 뷜로였다. 또한 1882년에 27살 연하인 배우 마리 샨처(Marie Schanzer)와 재혼했다.

[1] 베를리너 필하모닉 단원들과 처음 조우했을때 남긴 전설적인 말이다. 아울러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가 한 "짐이 곧 국가다"를 흉내낸 말이기도 하다.[2] 참고로 리스트와 바그너는 원래 친구였고 바그너가 혁명 운동에 참여한 이후 수배당했을 때 리스트가 바그너를 피신시켜주기까지 했지만, 이 일로 인해 리스트는 노발대발해서 바그너와 절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