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B
1. 연필심의 강도를 이르는 단위 중 하나
이름 그대로 2B와 4B 사이에 있는 연필 강도 단계이다. 4B보다는 단단하나 2B에 비하면 상당히 무르다. 4B처럼 미술가들이 뎃생 등에 사용하거나, 제도용으로 쓴다.
국내에서는 매우 마이너한 연필심으로, 대형 문구점이나 미술용품 화방을 제외하면 웬만한 데에서는 취급도 안한다. 사실 이럴만도 한게 심의 특성이 굉장히 어중간해서 이도저도 아니기 때문. 3B로 할 수 있는건 2B + 4B 조합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2B + 4B 조합이 구하기도 쉽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4B보다 많이 쓰는 듯 하다.
2. 야구에서 3루수의 영어 약자
3. 박백범 교육부 차관의 이니셜
4. 광고에 쓰이는 소재
광고에 이 3가지를 넣으면 사람들은 일단 본다. 아기(Baby), 미녀(Beauty), 동물(Beast). 또는 같은 구성을 3B 외에도 ABC로 표현하기도 한다. 동물(Animal), 미녀(Beauty), 어린이(Child).
위의 세 가지 요소는 광고의 아이디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을 때 주목을 반드시 받는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각기 다음과 같다.
- 미녀: 미인. 아름다울수록 비용이 깨지게 되는 단점이 있다. 대신 비용만 해결되면 제어와 관리가 대체로 가능하다는 장점이 존재.
- 아기: 어지간하면 광고 비용이 그리 많이 소모되지는 않지만, 아이의 낯가림이 심하다거나 예상치 못한 일로 아이가 한번 울어버리게 되면 아기를 달래는 건 아기 엄마의 육아 숙련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라지게 되며 촬영에 지장을 주기도 쉽다.
- 동물: "주목성" 면에서 충분히 높으며 아이디어가 안 풀리면 금방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관심거리를 일으킬 수 있지만, "제어" 내지는 "관리"가 아기보다 어려워질 수도 있다. 특히 의도된 광고를 만들 때 동물이 금세 그런 행동을 해줄 리는 없고, 이마저도 개 이외에 다른 훈련이 쉽지 않은 동물들은 더욱 다루기가 어려울 수 있다. 만약 대형 동물을 등장시킬 경우엔 동물을 훈련시켜서 특정한 의도를 따라와주는 행동을 취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 동물이 발광하는 사태가 터졌을 때도 대책이 없다.
비용, 시간, 고생 3가지를 고려하면 딱히 나을 건 없지만, 위 3대 요소는 제대로 찍기만 하면 평타는 뽑는 편. 단, 모든 광고가 그럴 리는 없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현재는 광고와 밀접한 방송 장르에도 손이 뻗어서 예능에서 셋 중 하나는 필히 넣는게 10년대 후반 예능의 트렌드로 3B 요소가 첨가된 관찰예능이 더욱더 늘어나고 있다.
유튜버들도 이 세가지 주제로 꾸준한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
5. 독일 확장 정책의 도시
독일 제2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추진한 제국주의 전략 중 하나인 3B 정책을 구성하는 3개의 도시를 가리키는 용어. 교묘한 외교 정책을 통해 국제적 균형을 추진하였던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는 국제적 분쟁을 무릅 쓰고 도전적인 확장정책을 펼쳤다. 3B는 각각 베를린('''B'''erlin)-비잔티움('''B'''yzantium, 이스탄불)-바그다드('''B'''aghdad)를 가리킨다. 이것은 영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과 카이로('''C'''airo), 캘커타('''C'''alcutta)를 연결하는 3C정책과 정면 충돌하는 것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투르크 및 지중해 진출정책과 정면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장기간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가 서둘러 타협했고, 이후 유럽의 국제적 불안이 세계대전으로까지 심화된 기본요인 중 하나가 된다.
6. 독일 정통 음악의 3대장
바흐('''B'''ach), 베토벤('''B'''eethoven), 브람스('''B'''rahms)를 말한다. 명칭을 정한 것은 세계 최초의 전문 지휘자이자 브람스의 절친이었던 한스 폰 뷜로.
7. 축구에서 자동문 수비의 대명사
야구에 한화의 수비가 있다면 축구에는 뉴캐슬 3B가 있다.
05-06 시즌에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기용하던 전설의 수비 라인으로 셀레스틴 '''바'''바야로와 장알랭 '''붐'''송, 타이터스 '''브'''램블, 3명을 일컫는 말. 셋 다 이름이 B로 시작하기 때문에 3B다. 전설의 3B 라인, 공포의 3B 라인, 자동문 3형제라고도 불린다. 당시 뉴캐슬의 골키퍼 셰이 기븐을 이전에도 EPL 내에서 훌륭한 골키퍼였지만 더욱 실력을 향상시켜 세계 최고의 골리로 성장시킨 수훈갑들이다(...).
05-06 시즌에 뉴캐슬 유나이티드 주전 4백은 셀레스틴 '''바'''바야로 - 장 알렝 '''붐'''송 - 타이터스 '''브'''램블 - 스티븐 카였는데 3B가 너무나 눈부신 활약을 펼친 탓에 라이트백 스티븐 카의 활약이나 실력은 묻혀버렸다. [1]
어떤 공격수가 와도 숭숭 뚫리는 바람에 많은 골을 허용했으며, 같은 팀 선수의 진로를 막는가 하면 상대편을 대신해서 자책골을 넣어주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능력이 부족하면 호흡이라도 맞아야 하는데 호흡도 안 맞았다. 스포츠 인터랙티브도 이러한 상황을 파악해 풋볼 매니저에서 세 선수의 집중력 능력치를 낮춰버렸다.
3B가 못한 탓에 골키퍼였던 셰이 기븐만 바빴다. 쉴 새 없이 파고드는 상대편 공격수들을 상대로 선방에 선방을 거듭해야 했고 때때로 날아오는 3B의 자책골도 막아야 하는 처지였다. 셰이 기븐이 없었으면 뉴캐슬은 처음부터 강등당했을 것이다. 하여간 3B의 막장 행보 덕에 셰이 기븐의 주가는 치솟을 대로 치솟았고 뉴캐슬 팬들은 물론 타 축구팬들도 '''기븐신'''이라 추앙받으면서 순식간에 최강의 골키퍼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2] 3B로 시작된 뉴캐슬의 수비 불안은 3B를 방출하거나 다른 선수들을 영입해도 해결되지 못했고 결국 풋볼 리그 챔피언십으로 나들이를 떠나야 했다.
결국 그 다음 시즌인 06-07 시즌 장 알랭 붐송이 '''유벤투스'''로 이적하면서 3B는 해체되었고 스티븐 카마저 본격적으로 부진하면서 BBC로 남아있다가(...) 07-08 시즌, 3B의 남은 두 명 모두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서 3B는 완전히 뉴캐슬에서 사라졌다.
7.1. 3B 소개
7.1.1. 장 알랭 붐송Jean-Alain Boumsong), 1979년 12월 14일, 프랑스
3B의 핵심이자 3B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선수로 3B 시절에는 '''앙리에게만''' 강한 면모를 보였다.[3] 2005년 1월 거금 '''800만 파운드'''에 레인저스 FC에서 뉴캐슬로 이적했으며, 1년 반 동안의 뉴캐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당시 세리에 B로 추락했던 유벤투스로 '''330만 파운드'''에 이적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유벤투스 시절에는 상당한 벽이었다. 물론 세리에 B였으니 그러려니 하는 사람도 많다. 유벤투스가 세리에 A로 승격 후 부상 때문에 세리에 A에서는 뛰지 못하고[4] 컵 경기만 뛰다가 올랭피크 리옹으로 이적했고, 2010년부터는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에서 뛰다가 2013년 은퇴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선수가 붐송으로 뉴캐슬에서의 임팩트가 너무 컸을 뿐 국대와 유벤투스(세리에 B 시절), 리옹에서는 '''벽'''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붐송이 프랑스 국대와 프랑스 클럽에서만 잘한다고 애국자 칭호를 붙이는 실정.[5] 이후 리옹에서 주전에서 밀려난 이후 벤치를 데우다가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로 이적하게 된다. 파나티나이코스 데뷔전인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시작하더니 파나티나이코스에서도 열심히 문을 열어주다가 경기력을 되찾은 이후 호평을 받고 있다. 33경기에서 넣은 6골은 커리어에서 제일 많은 골이기도 하다(...).
사실 뉴캐슬에서의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당시 아내가 암투병 중이어서 간호를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매일같이 왕복했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3B 당시의 활약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은 게임 리딩도 좋고 분석력과 언변도 훌륭한 선수였다는 비밀(...)이 있다. 선수 시절에도 월드컵 시즌 해설자로 활약했으며, 영국 잡지에 '베르캄프 대 붐송'이라는 축구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한 적도 있다. 은퇴 후에도 해설자로 활약 중.
14-15 시즌 3월 16일에 열린 맨유 vs 토트넘 전에서 3번 실수로 3골을 헌납한 에릭 다이어를 보고 김동완 해설이 붐송을 예로 들며 명성을 과시했다.
7.1.2. 타이터스 브램블(Titus Malachi Bramble), 1981년 7월 21일, 잉글랜드
입스위치 타운에서 미래의 잉글랜드 수비진을 이끌 재목으로 불리며[6] 2002년 600만 파운드에 뉴캐슬로 왔지만, 영 좋지 못한 성장세를 보이며 실망만 안겨 주었다. "뉴캐슬을 위해 충성을 바칠 자신이 있다"라는 인터뷰를 한 직후에 위건 애슬레틱으로 이적'''당했다.''' 유독 '''드록바에게만''' 강한 수비수. 이상하게도 드록바를 봉쇄할 뿐만이 아니라 첼시하고 할때'''만''' 잘했다. 단독드리블로 첼시 진영을 돌파하기도(...). 심지어 첼시전 득점 기록까지 가지고 있는데, 엄청 높은 타점의 시저스 킥이었다(...). 동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수비수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위건에서는 초반에는 불안했지만 이 후 '''벽'''으로 각성해 수비수다워졌고 쏠쏠하게 득점도 몇 번 해주기도 했다. 위건 팬들이 선정한 성공적인 영입으로 꼽히기도 했으며(...) 위건 시절 자신을 영입한 스티브 브루스 감독을 따라 2010년 뉴캐슬의 최대 라이벌인 '''선덜랜드'''로 이적하였다.[7]
참고로 위건이 뉴캐슬과 시합을 했을 때 헤딩골로 뉴캐슬 골망을 가른 적이 있다. 덕분에 뉴캐슬 팬들은 분노폭발. 혹자는 '''늘 하던 거라''' 자기도 모르게 '''뉴캐슬의 골망을 출렁이게 했다'''라고 표현하기도. 이적'''당한''' 후, 현지의 잡지에서 브램블(out)이 뉴캐슬 전력 상승의 원인으로 꼽힐 정도였으니...오죽하면 뉴캐슬 팬들은 '''브램블을 국대로!'''라고 외쳤다. 물론 반어법.
그래도 나름 뉴캐슬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인지 2010년 10월 31일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열린 타인웨어 더비에서 '''퇴장(...)'''당하면서 선더랜드의 '''5 대 1이란 스코어의 대패를 이끌었다.'''[8] 정말로 수비의 핵심으로 활약했는지 브램블 퇴장 후 선더랜드 수비진은 형편없이 털렸다.
2011-12 시즌에 성폭행 혐의로 체포되었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징계를 먹어 3개월간 뛰지 못한다. 그와 함께 선더랜드 수비진은 시망이 되었다. 그리고 12월에 돌아온 뒤 선더랜드 성적이 함께 좋아지며 호평을 받았으나...이전의 혐의가 성폭행, 마약, 폭행으로 3개로 불어나버리면서 기껏 좋아졌던 팀 분위기에 찬물을 부어버렸다. 2013년 선더랜드와 계약이 만료된 후 새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했으며, 2014년 고향 팀 입스위치 타운의 11세 이하 팀 코치로 재직 중인 것이 확인되었다.
7.1.3. 셀레스틴 바바야로(Celestine Babayaro), 1978년 8월 29일,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1994년 안데를레흐트에서 프로에 데뷔했으며 16세 87일이라는 챔피언스리그 데뷔 세계 2위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9] 첼시 FC에서 오랫동안 '''준수한''' 활약을 하다가 웨인 브리지의 영입으로 자리를 잃어 2005년 뉴캐슬로 이적했다. 사실 바바야로는 97-98시즌에 첼시에 입단한 이후 뛰어난 오버래핑 능력과 피지컬 때문에 꽤나 촉망받던 윙백 유망주였다. 04-05 시즌의 첼시가 스쿼드를 강화하기 위해서 웨인 브리지를 질러버렸던 상황이지만 첼시 팬들 입장에서는 웨인 브리지와 로테이션으로 공존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컸고, 팬들 입장에서는 오래 팀에서 키워오던 유망주들에 대해 기대를 크게 가지던 경우가 많았던 만큼, 이 당시 바바야로의 이적을 꽤나 아쉽게 보았던 편.
뉴캐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마지막 3B다. 보다 못한 TV 캐스터가 ''''경기 도중 졸고 있는 거냐''''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2010년까지 예정된 주급을 모두 일시불로 받고 방출당했다. 뉴캐슬이 바바야로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방출당한 이후 미국 MLS의 LA 갤럭시로 이적했는데 여기서도 방출당했다.[10]
본의 아니게 나이지리아 리그를 초토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바바야로가 첼시 FC로 이적하면서 나이지리아에 프리미어 리그 붐이 일었고 그 바람에 나이지리아 리그의 인기가 바닥을 치게 됐다고.
참고로 1978년생인 그는 1984년생인 오바페미 마르틴스와 청소년 대표 동기라고 주장하여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마르틴스의 소속 팀이었던 인테르 구단과 마르틴스 본인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반박했다. 사실 아프리카 유망주들의 나이 속이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누가 과연 거짓말을 했을 지는...
나이지리아의 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과 98 월드컵 16강의 주역 치고는 크게 몰락했다. 은퇴 후에는 영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2011년 파산을 신고했다고 한다(...). 한때 주급 2만 5천 파운드를 받던 선수가 어쩌다가...
국내 팬들은 '''엘라스틴 빠가야로'''라고 불렀다.(...)
7.2. 3B의 활약상
7.2.1. 붐송 스페셜
지금은 이렇게 놀림받는 선수들이지만 영입 당시에는 뉴캐슬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던 선수들이다. 두근거리며 기대했을 뉴캐슬 팬들 참 불쌍하다. 아래는 이 선수들 영입 당시 기사.
7.2.2. 영입 당시 기사
당시 바바야로 영입 원본 기사를 보면, '이 거래는 아무리 봐도 첼시의 손해네요. 아깝습니다'라는 댓글이 달려있다. OTL 상술하였듯 첼시에서 장기간 기대할 만한 모습을 보였던 유망주였기 때문에...그리고 바비 롭슨 감독이 기초를 세우고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완성시켰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8. 대한민국의 프로듀싱팀 이름 3B
3B는 이기, 용배, 앙리로 구성된 프로듀싱팀 이름이기도 하다.
[1] 물론 스티븐 카는 이들보단 나은 활약을 보였고, 오히려 묶여서 비판당한다는 평도 있다. 3B의 활약이 워낙 넘사벽이라...[2] 사실 기븐은 3B 이전에도 선방 능력 하나만큼은 출중했지만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던 뉴캐슬 소속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실력의 여타 명문 팀 골키퍼들보다 주목도가 떨어졌다.[3] 하지만 앙리는 2006년 자신이 가장 어려워하는 수비수로 토트넘 핫스퍼의 레들리 킹을 꼽았다.[4] 게다가 유벤투스가 야심차게 영입한 조르제 안드라데는 붐송보다 더한 유리몸이 되어 2년 동안 네 경기밖에 뛰지 못 할 정도였다. 이렇게 센터백이 부족하다보니 유벤투스는 센터백을 당시 레프트백으로 뛰던 조르조 키엘리니로 메꾸었고 키엘리니는 이 때부터 훌륭한 실력의 센터백으로 성장한다.[5] 05-06 시즌에서 심각한 부진을 겪었음에도 독일 월드컵 국가대표 명단에도 들 정도였다. 물론 이 당시 감독인 레몽 도메네크가 워낙 괴짜이긴 하지만.[6] 당시 언론에서 함께 언급된 3명의 선수가 맨유의 웨스 브라운, 첼시의 존 테리, 리즈의 리오 퍼디난드다 (.......) 여러모로 전설적인 인물[7] 그리고 브루스는 9년 뒤에 '''뉴캐슬의 감독이 된다.'''[8] 케빈 놀란 해트트릭, 숄라 아메오비 2골. 선더랜드는 대런 벤트가 94분에야 겨우 득점했다.[9] 1위는 2020년 12월 유수파 무코코의 16세 18일.[10] 딱 한 경기 45분 뛰고 방출당했는데 그 경기는 FC 서울과의 친선 경기. [11] 유럽 축구 팬들 사이에서 무능한 감독의 대명사. 뉴캐슬 팬들 사이에서 금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