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안
1. 개요
전 한화 이글스, 경찰 야구단의 감독. 야구선수 유원상, 유민상의 아버지로 별명은 '''대감''',[4] '''유대갈''', '''원소'''.[5]
2. 선수 시절
1975년부터 한일은행 야구단에 입단한 이후 포수 최초로 홈런 1위[6] 를 차지한 원조 공격형 포수로,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MBC 청룡에 합류했다.
1982년 3월 27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도 선발 포수로 출장하여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구를 받았고, 특히 7:4로 뒤지던 7회말 3점 동점 홈런을 날려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는 수훈을 세웠다. 하지만 10회 1사 2, 3루의 끝내기 찬스 상황에서 3B 0S의 유리한 상황에서 상대 구원 투수 이선희의 바깥쪽 볼을 무리하게 타격했다가 투수 앞 땅볼로[7] 3루 주자 김인식이 홈에서 아웃 당했다.[8] 이 에피소드 때문에 원년 개막전에서 유승안은 '7회말 동점 홈런'보다 '연장전에서의 과욕'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승안은 백인천 감독의 눈밖에 나 이듬해까지 경기 출장에서 많은 손해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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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선수 시절.
1983년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다가 1986년 빙그레 이글스의 1군 참가를 앞두고 빙그레에 트레이드 되었다. 참고로 해태 시절인 1984년에 드라마 수사반장의 여형사로 명성을 떨쳤던 배우 이금복 씨와 결혼했다. 당시 기사. 이후 이금복 씨가 백혈병으로 투병하자 혈액형이 O형인 임직원들이 헌혈에 동참하고 청계산 회장님까지 나서서 위로금을 전달하며 투병을 격려했지만, 안타깝게도 1999년 11월 타계했다.[9]
빙그레 시절에는 팀의 4번 타자 겸 포수를 맡으며 공수양면에서 활약, 약체 빙그레의 상위권 도약에 큰 기여를 했다. 이와 함께 1987년 지명타자 부문 KBO 골든글러브, 1989년 타점 1위와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다만 1989년 타점 1위는 김영덕 감독의 노골적인 밀어주기 때문에 저평가받고 있는 실정이다.[10][11][12] 당시 장종훈과 매년 누가 홈런 많이 치나 돈내기를 했는데, 처음엔 자기가 장종훈에게서 갈취(?)하는 구도였다가, 나중에는 점점 자기가 내주는 걸로 역전되자 두손을 들고 그만두었다는 후문.
또 빙그레 시절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하였는데 그 사건은 아래와 같다.
1987년 9월 9일 잠실 빙그레-MBC 전에서 유승안은 1-2로 뒤진 9회초 1사이후 좌중간으로 장타를 때렸다.
이때 타구가 홈런처럼 보였지만 타구가 펜스 상단을 맞고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오고 만 것 이었다. 이를 보고 홈런인줄 알고 여유를 부리던 유승안은 타구를 보고서 간신히 2루까지 달려간 뒤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허리를 구부린 채 한숨을 쉬는데, MBC 김재박이 릴레이한 볼이 유승안을 향했다.
그런데,유승안은 공을 피하지 않고 '''머리로 받아버렸다.'''
공은 1루 벤치 쪽으로 갔으며 그 틈에 유승안은 3루까지 내달렸다.
이 직후 바로 MBC 유백만 감독대행은 “수비방해다. 아웃시켜야 한다”고 어필했고 곧 이어서 빙그레 배성서 감독도 나와 “3루에 가야 한다. 아니라면 아웃”이라고 어필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심판들이 모여 합의를 했다.
이때 심판은 관례를 깨고 유승안에게 “고의로 그랬냐?”고 물었는데 이때 유승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도 기술인데, 뭐 어때요.”(...)
결국 심판진은 고민끝에 합의로 3루에 있던 유승안을 2루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는 오심으로 그날 KBO는 당시 심판 4명에게 벌금 4만원을 물었다.
KBO 리그에서 처음으로 노히트 노런을 2번 경험한 포수이기도 하다.[13] 1984년 5월 해태의 방수원이 프로 1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 때 유승안이 마스크를 썼었고, 1988년 4월 빙그레 이동석의 노히트 노런때도 선발 포수였다.[14]
또,선동열에게 최초로 만루홈런을 친 타자가 바로 유승안이다.
3. 지도자 시절
그 후 북일고 출신 김상국과 1991년 입단한 또다른 북일고 출신 양용모에 밀려 1991년 시즌 후 유니폼을 벗었으며, 이후 KBS 라디오 해설위원을 거쳐 1994 시즌 강병철 감독 부임과 함께 한화의 코치로 영입되다. 1999년에는 이희수 감독이 심판 폭행 사건으로 12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는 사이 감독대행으로 한화를 이끈 바 있다. 2000년에는 2군 감독을 지냈고 2001년 이광환 감독 부임과 동시에 미국으로 2년 간 연수를 떠났다. 2003년에 복귀하여 2년 간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게 된다.[15] 2008년 말부터 김용철의 뒤를 이어 경찰 야구단의 2대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PC통신 시절부터 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1990년대 후반 초고속 인터넷이 대중화 되기 전부터 이미 도메인을 보유하고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면도 있었다.[16]
해외 연수 시절 홈페이지에서 당시 감독이던 이광환의 용병술을 간접적으로 까기도 했는데, 이미 후임 감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광환 감독은 2002 시즌 후반에는 거의 태업에 가까운 팀 운영을 했으며 시즌이 끝나자마자 김성근의 뒤를 이어 LG 트윈스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 후임자인 유승안이 이끄는 한화는 2003년 이광환의 LG에게 11승1무7패의 우위를 보이며 아깝게 포스트시즌을 놓치기는 했지만, 5위로 2계단 상승하며 LG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한화 감독 선임, '모그룹 최종 승인만 남았다' 2017년 시즌 중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 감독의 퇴단 이후 차기 감독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글스 프랜차이즈 원 클럽 맨이자 두산 베어스 코치였던 한용덕이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그리고 2020년 현재 한화가 개판을 치며 한용덕이 물러나고 최원호는 정식감독 승격이 어려운 상황에서 다시 한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3.1. 2003 시즌
2003 시즌 2년 계약으로 야심차게 감독 자리에 올랐으나, 감독 부임 후 첫 스프링캠프를 구단의 독단으로 해외가 아닌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치르는 곤욕을 겪었다. 당연히 훈련 효과는 미미했고 쌀쌀한 날씨 탓에 부상 선수가 속출하는 등 출발부터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민철, 송진우의 부진까지 겹쳤지만 FA를 앞둔 이상목이 커리어 하이인 15승을 올렸고, 김태균이 전년도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완벽히 극복하며 대활약을 펼친 것을 앞세워 한때 3위권 내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안타깝게 5할 가까운 승률에 4위와 2게임 차 5위를 기록, 구단의 미비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초보 감독 치고는 무난한 첫 시즌을 보냈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문제는 이듬해였다.
3.2. 2004 시즌
이듬해에는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병살을 노려 내야에 5명을 세우고 외야에 두 명만 세우는 수비 시프트를 펼쳤다가 쐐기 점수를 내주고, 박기혁에게 두 차례의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허용하면서 꼴찌 롯데에게 6승 1무 12패로 털리는 등[17] 야구장에서 야구 대신 개그를 하다가 7위로 추락해 시즌 종료 후 계약이 만료되어 물러났다.
다만 성적은 7위였지만 1,2위팀인 현대와 삼성에게 각각 9승10패, 9승1무9패로 완벽하게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문제는 압도적인 우세를 점한 팀 없이 두산 KIA 롯데한테 먼지나게 털렸다는 것.
이듬해 아들 유원상이 계약금 5억 5천만원에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면서 아버지 퇴직금이라는 드립이 난무하기도 했다.
야심차게 영입했던 용병 엔젤 페냐가 3루에서 만족할 만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대체 용병으로 영입한 에디 디아즈 역시 전년도에 SK 와이번스에서 보여 주었던 만큼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멘도사 라인에서 허덕였다. 또한 전년도 실질적 에이스였던 이상목은 FA 계약으로 롯데 자이언츠로 떠났으며, 정민철은 1승도 올리지 못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고, 프랜차이즈 스타인 송지만을 현대 유니콘스에 내주면서까지 영입한 클로저 권준헌이 상반기까지는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리며 뒷문을 잠궈주었으나 7월 말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전력이 약화되어 순위가 추락하고 말았다.
9월에는 프로야구판을 뒤흔든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주축 선수들이 다수 연루되는 사태를 겪으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7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결국 재계약에 실패했다.
첫 부임 때의 패착에서 교훈을 얻은 듯, 이번에는 구단에서 스프링캠프도 제대로 보내주고 송창식, 김창훈 등 거물 신인들을 영입하였으며, 계약 마지막 해로 팬들의 성적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상황에서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자, 감독의 선수 기용을 비난하는 여론이 구단 홈페이지와 팬카페에 들끓기 시작한다. 일찌감치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했을 정도로 인터넷 문화에 익숙했던만큼 구단 홈페이지 채팅방에서 팬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으나 쉽게 여론이 진정되지 않자, 비난 여론을 주도했던 몇몇 팬들을 직접 지목하며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대화의 자리를 갖자는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5월 30일 대전구장 근처에서 스무명 가량의 팬 대표들과 비공개 만남이 성사되었다.[18]
이 당시 팬들의 불만 중 상당 부분은 노장인 송진우를 혹사한다는 데에서 기인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그가 남긴 '송진우는 흑인같이 몸이 유연하다'(…)는 해명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대사이다.
3.3. 지도자로서의 평가
일명 '유승안 시프트'라고 불리는 5내야수 수비 시프트[19]
내야수를 5명으로 포진시키는 수비 시프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마이크 소시아를 비롯한 몇몇 감독들이 실제로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시프트는 9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팀 주자가 출루했을 때 땅볼로 병살타를 유도해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점을 더 내주지 않게 하려고 쓰진 않는다. 이 시프트와 앞서 서술한 네티즌 놀이는 그를 감독계의 개그 캐릭터로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승안 본인은 자기가 시프트를 쓰고 난 뒤 유소년 야구에서 학습을 목적으로 이 시프트를 사용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고 주장했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쓰이지 않던 새로운 시프트를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선 높게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다.[20]
감독으로 재임하고 있는 경찰 야구단에서도 이 시프트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2013년 3월 28일 LG 트윈스와의 연습경기에서도 똑같은 5인 내야 시프트를 선보였다.
또한 감독 해임 후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2006년 5월 하일성이 KBO 사무총장으로 임명되고 후임자인 이용철이 법규 사건으로 출연을 못하게 되는 바람에 갑자기 KBS 지상파 해설자 자리가 공석이 되자, 과거 KBS 라디오 해설을 했었던 인연으로 5월 21일 두산-한화 잠실 경기(류현진 선발 경기)에 땜방을 맡게 되었는데 경기 감독관이 자리를 비우고 부업을 했다는 이유로 언론으로부터 까이면서 개그 이력서에 한 줄을 더 추가하게 된다.
한화 감독 시절 상술한 어이없는 작전을 종종 시전해 패배를 자초했고, 그로 인해 불로장생할만큼의 욕을 먹었지만 후임 김인식 감독이 팀을 노령화시킨 것과 한화 이글스 프런트의 고질적인 운영 미숙 등이 참작되면서, 이글스 팬덤에서는 재평가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문동환을 부활시키고, 이범호, 최진행, 신종길 등을 발굴하는 등 고교 선배처럼 완전히 팀을 암흑의 구렁텅이로 처박지는 않았기 때문.
거기다가 라이벌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비해 약체로 평가받았던 경찰 야구단의 감독을 맡은지 세 번째 시즌만에 퓨처스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또한 경찰청을 거쳤던 타자들, 특히 야수(민병헌) 및 포수들이(가장 최근의 예로 양의지나 최재훈) 전역 후 괴물같은 상승세를 보인 것 또한 재평가의 요인이기도 하다.
이로써 2009년부터 경찰 야구단의 사령탑을 맡은지 10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1]
반면 김인식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주목받기는 해도, 결과론적으로 그가 감독 시절 본인의 본분인 '성적'과 '팀 육성'의 균형을 잡는 데에 실패한 건 사실이라 지나친 띄워주기란 시각도 있으며, 어찌보면 재임 시절이 워낙 프로야구 인기가 바닥을 칠 때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비인기 구단이었던 한화의 당시 막장 상황을 모르는 초보 팬들이 많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성적을 내는 것에 있어서는 호불호도 갈리고 비판도 많지만 육성에 있어서만큼은 입을 모아 좋은 평가를 받는 감독. 후에 경찰 야구단을 다녀와서 만개한 선수들이 쌓여감에 따라 이런 평가는 더욱 강화되었다.
아울러, 엽기적이고 이상한 아집,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 점, 경동고, 포수, MBC 출신, 서북식 발성과 발음 등은 백인천 감독과 똑같은데,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는 점, 한일은행 출신 등에서 강병철 감독과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병철 감독의 경기 운영이 너무 뻔하고 틀에 박혀 있었던 것에 비해 흥미와 볼거리를 확실히 줬다는 점에서 백인천 감독의 경기 운영과 거의 비슷하다.
'''사실 까이던 이유는 따로 있다(…)'''.
4. 근황
2019년을 끝으로 경찰 야구단이 해체되어 야인이 되었고, 충청남도 계룡시에서 카페를 운영중이다.
2020년 10월 31일 창단식을 가지는 여자경찰야구단의 명예감독을 맡는다.
2021년 1월 6일 사단법인 한국리틀야구연맹의 6대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약 14년 동안 재임한 전임 한영관 회장[22] 의 뒤를 이어 1월 14일부터 임기를 시작한다.
5. 흑역사
은퇴 직후 대전 지역 교수, 사업가들과 함께 억대 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 명단에 올랐던 흑역사가 있다.당시 기사 1당시 기사 2 당시 기사 3
경찰 야구단 감독인 지금 상황을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6. 야구선수 가족들
장남 유원상[23] 은 KT 위즈에서 뛰고 있고, 차남 유민상은 KIA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다. 둘 다 아버지가 뛰었던 팀은 하나씩 거쳤다.[24]
2020년 5월 26일 KIA와 KT의 경기에서 첫째와 둘째가 맞대결을 펼치며 이들의 아버지 라는게 다시금 알려지며 자식 농사 잘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25]
그 외에 조카 유재상과 유근상도 프로야구에 신고선수로 입단했지만 얼마 못가 은퇴하였다.
7. 성씨
참고로 실제 성은 '류'씨(버들 류)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류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류씨를 유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유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유씨로 살았다고 한다.[26]
8. 연도별 주요 성적
9. 관련 문서
[1] 진주 류씨 토류계 계참판공파 28세손 '承'자 항렬이다. [2] 아내와 사별 후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3] 1977~1979년까지는 군 복무.[4] 과거 PC통신 내 한화 이글스 게시판에서의 ID가 '대감'이었다.[5] 유'''원상''' 아버지니까.[6] 1977년 실업야구 페넌트레이스. 여담으로 그와 공동 홈런왕을 차지했던 선수가 리즈시절의 DTD 사마였다.[7] 당시 출범 개막전 수훈선수에게 주는 부상인 오토바이에 눈독 들이다가 그랬다(…). 결국 오토바이는 끝내기 만루 포의 주인공 이종도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이날 프로 출범 1호 타점과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등나무 가구 세트를 받았다.[8] 당시 유승안의 타격은 백인천 감독의 웨이팅 사인을 무시한 결과였고, 유승안의 고교 선배이자 청룡 입단의 은인이었던 백인천은 이 일로 유승안에게 단단히 실망했다는 후문.[9] 이후 유승안은 재혼해 늦둥이 딸을 얻었다. 유원상, 유민상 형제에게는 이복 여동생.[10] 1, 3루에서 후속타자 안타 때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지 않고 유승안 앞에 만루 밥상을 차려준 적도 있다.[11] 그런데 이건 당시 유승안과 홈런, 타점왕 경쟁을 벌이고 있던 김성한의 해태도 마찬가지여서 유승안이 나오면 고의사구로 거르거나, 김성한을 만루 찬스에서 대타로 출장시키기도 했다.[12] 다만 김종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영덕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유승안이 타점을 올릴 때마다 주자들에게 용돈을 줘서 인심을 잃지 않았고, 후배들이 그런 유승안을 위해 도와준 일이었다고 하며, 본인이 지시한 일은 아니라고 해명했다.[13] 이후 두 명의 선수가 이 기록을 다시 한번 작성하는데, 1997년 정민철, 2000년 송진우의 노히트 노런때 호흡을 맞춘 강인권, 그리고 유네스키 마야와 마이클 보우덴의 노히트 노런때 호흡을 맞춘 양의지다. 재밌는 점은 이 둘 모두 선수시절 중간에 지도자로 재직하던 유승안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14] 이때 상대팀 선발이 다름아닌 해태의 선동열. 그런데 유승안이 그날 경기 전에 선수들에게 "오늘(선동열 나오는데) 질 게 뻔하다. 만약 오늘 이기면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너님들한테 10만원씩 돌리겠다"라고 했다가 그냥 이긴 것도 아니고 노히트 노런으로 이기는 바람에 실없는 사람으로 몰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코치이던 강병철이 "상조회에 10만원 내는걸로 퉁치자"고 중재해 주긴 했지만.[15] '''빙그레-한화 이글스 선수 출신 지도자가 이글스 감독에 오른 최초의 사례.''' 이 때문에 당시의 감독 선임 건이 한화 이글스 구단 역사상으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16] eagles.co.kr 도메인이 그의 소유였다.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당시의 흔적을 열람해볼 수 있다.[17] 참고로 8888577시절 한화는 2004년만 빼고 롯데를 탈탈 털었다. 특히 김인식시절인 2005~07에는 '''38승16패'''를 기록하였다.[18] 정작 그가 지명했던 사람들 상당수는 일방적으로 정해진 일정이라며 반발하여 불참하였고, 비교적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는 후문.[19] 개그 포인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포장을 해보려는 하일성 해설위원. [20] 이만수 SK 와이번스 감독이 2013 시즌 시범경기 넥센 히어로즈 전에서 똑같은 수비시프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 경기는 투수 밀어내기로 패배... 시즌에 들어선 이후로도 이따금씩 선보였다만 어째 하나같이 결과가 영 좋지 않았다. 예를 들면 NC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스퀴즈 번트.[21] 2019년 6월 30일 벽제 야구장 두산 베어스 홈 경기를 마무리를 끝으로 2019년 7월 9일 서산 야구장 한화 이글스 경기를 통해 막을 내렸다[22] 3~5대 회장 연임. 프로 골퍼 한희원의 아버지이며 손혁의 장인이다.[23] 한화에 있던 그 유원상 맞다.[24] 유원상-한화,LG(前 MBC), 유민상-KIA(前 해태)[25] 참고로 형이 이겼다. 이 후 한 번 더 붙었는데 역시 이 때도 형이 이겼다.[26]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류씨들이 행정상 유씨로 살고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유현진'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류'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류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류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유현진이 아닌 류현진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류지현도 뒤늦게 유지현이 아닌 류지현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류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