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야구)
1. 개요
박동희의 인터뷰,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용철편, 전설을 찾아 김용철 상편, 전설을 찾아 김용철 하편.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야구코치, 야구감독이자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2. 선수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 일찍부터 야구에 입문했다. 부산상고 시절 3루수로 주로 뛰었는데, 2학년 때는 화랑대기 우승멤버였고, 3학년 때부터 활약하기 시작하며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대학 진학과 원하는 실업팀을 골라갈 수도 있었지만, 야구를 입문하게 해 준 아버지의 별세로 집안 형편을 위해 바로 당시 실업 최고의 팀 중 하나인 한일은행 야구단으로 직행한다.[1] 참고로 이때 24번을 달게 되는데 어린시절 일본 야구를 보던 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4번을 달고 있던 나카하타 키요시[2] 의 타격 자세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때마침 한일은행 야구단에 24번이 비어 있었기에 골랐다고 한다.[3]
당시 감독이 김응용이었는데,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들어온 새내기에게 바로 주전 4번타자 3루수를 맡기면서 신임을 표했다. 고등학교 대선배라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그의 재능이 워낙 좋은 편이었다. 국가대표로도 활약하면서 실업리그 타격상을 차지하는 등, 실력 발휘를 한 편이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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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출범 후에는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서 경력을 이어갔다. 가장 유명한 대목이 1982년 KBO 올스타전. 홈런 3개를 치면서 MVP가 유력하던 시점에 올스타전 3차전에서 선배인 김용희가 친 만루홈런 한 방에 MVP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래도 상복이 아주 없는 편은 아니라서 KBO 골든글러브를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1984년 롯데 우승에 한 몫을 했다.
1988년 최동원이 주도한 선수회가 구단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그에 대한 보복이 가해졌다. 그는 끝까지 선수회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복으로 트레이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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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에서 한국시리즈 실패의 원흉으로 몰린 장효조[5] 를 상대로 트레이드된 것. 최동원, 김시진의 트레이드까지 합쳐 총 4:5 트레이드로 인해 그는 삼성으로 이적했고, 1992년 거기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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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감독 대행 시절.
은퇴한 후에는 삼성 라이온즈와 현대 유니콘스의 타격코치를 거쳐, 2002년 수석코치로 친정 팀 롯데 자이언츠에 복귀한다. 그리고 2003년 막장의 끝을 보여주던 백인천 감독이 중도 해임되자, 2003년 시즌 중 감독 대행을 맡아 무난하게 시즌을 소화한다.
감독대행 기간동안의 승률은 4할에도 못미치는 3할 9푼이었지만, 대행 부임 당시의 롯데 승률이 '''0.258'''인데다가 팀 전력을 감안해 본다면 충분히 선방한 것이며, 시즌 막판에는 정식 감독 승격 역시 유력한 상황이었다. 김용철 본인 역시 46세로 젊은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시 43세의 젊은 감독인 조범현의 SK 와이번스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프로야구에서 40대 감독 유행이 불자 더욱 더 가능성이 있던 상황이었다.[6]
그런데 시즌이 막판이던 2003년 9월 27일 사직 야구장 경기에서 홈런 신기록에 도전하던 이승엽이 찬스를 맞이하자 '''고의사구를 지시'''하면서 이승엽의 홈런을 기대하던 분노한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오물을 투척하는 사고가 일어나 경기가 1시간 30분 중단되었다. 이 당시 56호 신기록 홈런볼을 잡아 경매에 붙이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관중석이 외야부터 차고, 잠자리채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당시 하위권을 맴돌던 롯데의 성적 때문에 평소에는 주말 경기에도 텅텅비던 사직야구장이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원 관중이 든 것이 바로 이 때. 평일 야간 경기가 지상파 중계로 잡힐 정도였는데 오물 투척 사고 때문에 중계까지 중도에 끊길 정도였다. '''이날 이승엽은 첫 타석은 삼진, 두번째 타석은 뜬공, 세번째 타석은 땅볼이었다. 8회초 문제의 상황이 벌어지는데.. 상대는 중간투수였던 가득염.. 고의사구를 지시한 김용철 대행.. 그런데 사직구장은 말 그대로 위에 서술한대로 오물투척에 경기지연등이 벌어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사직구장은 엉망진창 즉 최악이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1999년 7차전 경기는 삼성 쪽으로 기울고 재연되는줄.. 결국 그라운드까지 불려나가 장내방송을 통해 직접 마이크를 들고 나와 사과방송까지 해야 했고, 고의사구를 지시한 계기에 대해 팬들에게 설명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이날은 SBS 스포츠뉴스까지 방송되었다.''' 이에 대해 김용철 대행은 2012년 SBS Sports 야구본색 <크레이지 롯데>편에 설명을 하였는데 "'''그날 이승엽 선수가 4타석인가 5타석을 들어왔는데 앞타석에 다 승부를 했다. 결국엔 투수들에게 피하지 말고 승부를 해라.."''' 이날 상황은 이랬다. 8회초 삼성이 2점 앞선 가운데 박한이가 안타, 후속 타자 박정환 번트로 1사 2루 상황에 삼성 라이온즈는 추가 득점 찬스를 만들었다. '''"1점 더 내려고 1루 주자인 박정환이 번트를 하였다. 2003년 시점에 최하위었는데 홈런을 맞고 팀도 패배하면 데미지가 컸다. '''" 결국엔 선택한 계기가 고의사구.. '''"그 앞에 있었던 게임들을 과정을 돌이켜보면 다른팀과 6~7경기를 정상대로 했었다. 롯데는 정정당당한 팀이었고 맞춰서 승부를 계속 해왔다.'''" 5일후 뭐 이날은 잔여경기지만 2003년 10월 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56호를 쳤고 김용철 대행이나 선수들은 마음 비우고 잔여경기까지 마무리 지었다.
시즌 후 롯데가 본인보다 후배인 양상문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자 그는 결국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지 못하는데, 이 사건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 새 술은 새 부대에 식으로 접근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 2004년 총선에서 부신진갑에 나온 열린우리당 조영동 후보를 지원 유세하기도 했다. 고교 선배의 부탁이라서 같이 하게 되었다고. 2005년 MBC ESPN에서 해설을 하다가 경찰 야구단 감독으로 야구계에 컴백, 2008년까지 재직하다가 그 해 6월에 개인사정을 이유로 사임했다.
2011년 미국 야구 연수 관련 프로그램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2014년까지 SPOTV 해설위원으로 있었다.
2016년 10월 12일에는 SK 와이번스 후임 감독 후보로 거론 중이라는 한 시민기자의 기사가 흘러 나왔지만 이런 종류의 기사가 늘 그렇듯 신뢰성은 없었다.
4. 미디어에서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도 등장하는데, 역할을 맡은 배우는 뿌리깊은 나무(드라마)에서 무휼 역할로 잘 알려진 조진웅이 맡았다.[7] 다만 영화에서는 최동원과 같은 경남고 출신으로 나온다.[8] 거기다 최동원과 10년째 같이 야구한 것으로 언급된다. 실제로는 1살 많으니 선배.
다만 영화에서 최동원을 '고독한 에이스'로 캐릭터를 잡으면서 김용철은 최동원을 사사건건 질투하는 졸렬한 소인배 캐릭터로 다루는 왜곡을 보였다. 김용철은 여기에 대해서는 영화적 각색이라고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씁쓸함을 감추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김용철과 최동원은 돈독한 관계였고, 최동원이 선수회 관련으로 탄압받는 와중에도 끝까지 구단의 탈퇴 각서를 거부하면서 싸워 준 선수가 김용철이다. 감독 입장에서야 그런 친한 사이니까 오히려 마음껏 망가뜨려도 되겠다 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영화 중반 부터는 눈 부상 상태에서도 경기 균형을 깨는 적시타를 날리거나, 락커룸에서 최동원을 위해 팀원들을 각성시키는 등의 꽤 멋진 역할로 탈바꿈 한다.
이 영화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김일권과 주로 싸우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 당시에 해태에서 김용철과 대립각을 세웠던 선수는 서정환이었다. 해태 : 롯데의 어느 경기에서 김용철이 2루 도루를 시도해 2루수인 서정환이 볼을 잡아 태그해 타이밍상 완전히 아웃이었는데 심판의 애매한 판정으로 세이프가 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 열받은 서정환이 2루 베이스에 주저앉아있는 김용철을 위협하려고 돌려차기가 나가서, 까려다 발이 김용철 머리 5센티 앞에서 겨우 멈추는 장면이 고스란히 텔레비전 중계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진 일이 있었다.
5. 기타
온라인 게임 마구마구에서는 84년도 레어카드가 조금 느리지만 '''1슬롯에 하이점프캐치를 가지고 있는 카드'''로 출시되어 있다.
마구마구 2014 for kakao 에서는 가명 손경민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모든연도와 레전드카드가 전부 2루수로 나와 있다. 알다시피 김용철은 프로 생활 통틀어 외야와 3루수를 본적은 있지만 주 포지션은 1루수다. 즉 2루수로 뛴 기록 자체가 없다! [9]
프야매에서는 제대로 1루 레전드로 나왔지만 문제는 1루에 이미 마해영이라는 걸출한 레전드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김용철을 쓸 이유가 없다. 결국 양대 야구게임 모두에서 고통받는 중(...).
슬러거#s-2에서는 오버롤 97.4 라는 내야, 외야, 포수 부분에서 최고점을 기록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서 이봉주와 더불어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다문화야구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1] 여담으로 본래 한국전력 야구단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던 김응용 감독이 직접 계약하기 위해 찾아와서 한일은행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2] 당시 요미우리의 45대 4번타자였다.[3]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24번을 달았다.[4] 당시 기존의 4번타자 또한 고등학교 대선배인 강병철이다. 강병철과는 훗날 프로때 감독과 선수로 재회해서 코시반지를 획득한다.[5] 1987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어이없는 외야수비로 4연패의 빌미를 주었다는 책임론이 제기되었다.[6] 실제로 2003년 시즌 43세의 조범현 감독이 이끄는 창단 초기의 SK가 준PO-PO를 '''모두 스윕'''해버리고 한국시리즈에서도 당시 강팀이었던 현대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등 돌풍의 모습을 보여주자 더욱더 40대 감독 선임 유행이 불기 시작했고 결국 2003년 시즌 종료 후 LG가 43세의 이순철을, 두산이 46세의 김경문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고 한때 LG와 두산 감독 영입설이 돌았던 선동열 역시 삼성 투수코치를 1년 하다가 42세의 젊은 나이에 삼성 감독으로 승격하게 된다. 김용철을 정식 감독으로 올리지 않은 롯데 역시 43세의 젊은 양상문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며 한동안 프로야구계에 40대 감독 선임이 유행하게 되었다. [7] 실제로 조진웅은 롯데 팬이기도 하다.[8] 사실은 부산상고 출신.[9] 백골퍼도 상황은 비슷한데, 삼미에서 겨우 2년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2루수 레전드 카드로 나왔다. 백골프가 현역 시절, 외야수, 지명타자로 활약한 걸 보면, 마구마구측의 병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