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티 맥대니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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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해티 맥대니얼 (Hattie McDaniel)
'''국적'''
미국 [image]
'''출생'''
1895년 6월 10일, 캔자스 주 위치토
'''사망'''
1952년 10월 26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직업'''
배우, 싱어송라이터, 코미디언
'''신장'''
157cm
'''활동'''
1920 –1952
'''가족'''
조지 랭포드 (1922년–1922년)
님 랑파르 (1922년–1938년)
하워드 힉맨 (1938년–1938년)
제임스 로이드 크로포드 (1941년–1945년, 사별)
래리 윌리엄스 (1949년–1950년, 사별)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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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조연상'''
'''제11회
(1938년)'''

'''제12회
(1939년)'''

'''제13회
(1940년)'''
페이 베인터
(제저벨)

'''해티 맥대니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인 다웰
(분노의 포도)
1. 개요
2. 어린 시절
3. 경력
4. 말년과 죽음
5. 기타
6. 헌액


1. 개요


[image]

'''최초의 흑인 배우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자'''


2. 어린 시절


캔자스 주 위치토에서 태어나 후에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주하여 자라왔다. 15세인 1910년부터 쇼 비지니스 경력을 시작하여 자신의 가족이 이끄는 악극단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또한 1920년대에는 보더빌(vaudeville) 가수로서 공연을 하였고 나중에 35세가 된 1931년에는 헐리우드로 이주하였다.

3. 경력


이주한 후에는 거기서 영화 경력을 설득하여 1932년 《황금의 서부》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조연과 단역들의 무명생활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의 하녀이자 자상하고 충직한 유모인 마미 역을 맡아 아카데미 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의 아카데미 상 수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동안에 많은 영화들에 출연하였는데 대표적으로《난 천사가 아니다》(1933년),《쇼우보트》(1936년),《아무도 무섭지 않다》와《사라토가》(1937년),《이 우리의 인생에서》(1942년),《남부의 노래》(1946년) 등이 있다.
그녀는 1947년부터 1952년에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라디오 코미디 프로그램《뷸라》(Beulah)에 출연하였다.

4. 말년과 죽음


1952년 유방암으로 인해 57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후 할리우드 묘지에 안장하려고 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안장이 허가되지 못했다가 무려 47년이 지난 1999년에 안장되었다. 이는 영국 출신의 유명 사업가인 타일러 캐시티가 1998년에 공원묘지를 인수해 ‘할리우드 포에버’로 개칭한 다음에 맥대니얼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많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할리우드 영화사를 빛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녀의 한을 풀어주기로 했던 것이 바탕이 된것이라고 한다.

5. 기타


  • 질 와트의 자사전을 바탕으로 한 전기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다.
  • 클라크 게이블하고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 당시에도 스타였던 게이블이 캐스팅에 힘써줬고, 아카데미 수상할때도 맥대니얼은 참석 못했던걸 게이블이 인종 차별하지 마라고, 차별한다면 나도 시상식으로 보이콧하겠다며 구제해줬다고 한다. 은인 수준의 친구였던 셈. 게이블은 맥대니얼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6. 헌액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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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해티 맥대니얼
HATTIE MCDANIEL
'''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719 Vine Str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