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크 게이블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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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헐리우드의 유명 영화배우이자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배우. 무성영화 후반기에 단역으로 시작하여 1930년대 들어서 엄청난 인기와 스타성, 탄탄한 커리어를 자랑하며 '''"할리우드의 제왕"(The King of Hollywoo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친구인 게리 쿠퍼와 같이 고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남배우이기도 했다.
1917년부터 종종 무성영화의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의 사후인 1960년대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미국 남북전쟁기를 꿋꿋하게 버티는 강인한 사나이 역할로 인상을 남겼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갈구해서 자신에게 약간의 친절을 베풀어도 청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릴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미국 오하이오 주의 카디즈에서 석유 시추 노동자와 광부, 일용직을 전전하던 윌리엄 헨리 "빌" 게이블(William Henry "Will" Gable, 1870~1948)과 아들린 허셸먼 게이블(Adeline Gable, née Hershelman, 1869~1901)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독일계 미국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어머니는 클라크가 생후 6개월일 때 가톨릭식 세례를 해주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후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생후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지 1년 4개월 후에 옆 마을에서 온 제니 던랩(Jennie Dunlap, 1874~1924)과 재혼했다. 클라크는 계모 밑에서 구박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에딘버러 고등학교 야간반 재학 중 밴드부에 들어갔고, 거기서 나팔을 불었다. 그와 동시에 1917년 극장에서 우연히 관람한 한 편의 연극에 감동한 뒤 연극과 무성영화의 단역배우로 출연했다.
2.2. 청년기
1920년에 에딘버러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가서 친구와 둘이서 방랑생활을 했다. 그 후 백화점 점원, 농부, 단역 배우, 일용직 막노동자, 은행의 계약직 사무원, 신문 보급소 사환, 전화 설치공, 석유 시추 노동자, 외무사원, 타이어 공장 노동자, 플라스틱 공장 노동자, 농장 점원, 목재 벌채 인부 일, 상점 점원, 식당과 레스토랑의 종업원 등을 전전했지만, 한 직업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3년 12월 말부터 지방을 순회하는 작은 극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단역을 맡고 1924년에는 무성영화에서 단역을 맡으면서 영화에 단역배우와 엑스트라로 출연할 기회를 얻는다. 클라크는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에드릴리 레퍼토리 극단에 배우 호출원으로 들어가 우연히 뮤직 홀에서 무대를 보게 되면서 배우가 될 것을 다짐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헐리우드의 영화배우의 길에 한 발짝을 내딛는다.
2.3. 무명 배우 시절
극단에서 만난 배우 프랑스 드루프라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클라크가 오랫동안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실망하여 청혼을 거절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게이블은 여배우 겸 연출가 조세핀 딜런(Josephine Dillon, 1884~1971)에게 연기지도를 받았다. 이 때 클라크는 1924년에 조세핀 딜런과 결혼을 한다. 그 후 1928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머시널 (Machinal)에 캐스팅되는 걸 시작으로 몇몇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출연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치아 관리를 별로 하지 않던 그에게서는 갈수록 입냄새가 심해졌다. 조세핀은 클라크를 영화배우로 만들기 위해 치과치료부터 받게 했지만 입냄새 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2.4. 데뷔 초반
유성영화가 도입된 후인 1930년 할리우드로 돌아와 1931년 "파이터 포인트"(The Finger Points), 1931년 "야간근무 간호원"(Night Nurse) 등에서 갱 역을 소화해냈는데 이때의 이미지가 인상깊게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팬이었던 17세 연상의 부유한 사교계의 여왕인 리어 랭험(Maria Franklin Prentiss Lucas "Ria" Langham)의 도움과 인맥으로 여러 영화에 캐스팅되었다. 심지어 연극 더 라스트 마일에서는 스펜서 트레이시가 주연을 맡게 되어 있는 것을 리어 랭험이 인맥을 이용해서 게이블로 교체시킬 정도였다. 클라크는 그런 리어 랭험과 사랑에 빠져 조세핀과 결혼한 지 6년만인 1930년에 이혼한다. 이 무렵 클라크는 벌어진 양쪽 윗 앞니를 교정, 의치로 이용했다. 그 후 1931년에 리어 랭험과 재혼하였다.
1931년부터 1954년까지 MGM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점차 쾌활하고 모험을 즐기는 중년 남성 역을 주로 맡아 유명해졌다. 1930년대에 헐리우드의 미남 배우이자 이상적인 미국 남성상으로까지 호평을 얻었다. 1932년 여배우 진 할로와 함께 출연한 "붉은 먼지"(Red Dust)의 흥행 이후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에 캐스팅되었는데 영화의 성공과 동시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2] 1934년 "남자의 세계", 1935년 "바운티호의 반란#s-2"(Mutiny on the Bounty)을 찍는데 대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여성팬이 생겨났고, 클라크 주변에는 여성팬들이 몰려왔다. 또한 여러 여배우들도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치아를 교정한 후 말끔한 외모가 되었고, 180cm 중반의 훤칠한 키와 친절함으로 인해. 여성팬은 물론이고 남성팬들에게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때 할리우드의 아름다운 일부 여배우들과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되었다. 클라크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여성에게는 금방 마음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 캐럴 롬바드, 조운 크로포드, 로레타 영 등의 새로운 연인들이 공개되었다. 이름이 거론된 일부 여배우들과는 실제로 연인관계였다.
2.5. 제2차 세계대전
1937년에는 영화 "새러토가"(Saratoga), 1938년 "테스트 파일럿" 등의 주연을 맡았다. 1937년 영화 파넬에서는 아일랜드인 정치가 역할을 맡았는데 크게 실패했다. 그러다 드디어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역으로 캐스팅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 중 치아 관리를 잘 하지 않아서 비비안 리가 키스신을 거절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으로 1935년, "바운티호의 반란#s-2"과 함께 두 번이나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자에 올랐다. 이렇게 어렵고 가난한 시절을 겪더보니 같은 신세이거나 직장동료인 흑인 여럿과 친구가 되었고 나중에 대배우가 되어서도 그들을 잊지않고 반갑게 맞이했으며, 이 영화에 나온 흑인배우들을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시사회에 못 나오게 하던 걸 결사반대하고 그렇게 된다면 나도 시상식이고 뭐고 보이콧하겠다고 강력하게 따져 흑인 배우들이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오게 했던 것도 이 시절 경험과 흑인들과 거리낌없이 친하게 지낸 경험이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촬영장에서 영화 파트너로 만나지만 여성팬들과 여배우들이 몰려드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리어 랭험과는 8년만인 1939년 이혼한다. 이런 여성편력에 대한 시중의 평은 그가 갓난아이일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할 존재를 찾는 것이라는 시선과 함께 자신의 성공에 여인들을 이용한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1939년 1월에는 인기 코메디 여배우 캐럴 롬바드(Carole Lombard, 1908~1942)와 재혼했다. [3] 특히 세번째 부인 캐럴에게 마라라는 애칭을 붙였다 한다. 그리고 1940년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신흥도시"(Boom Town) 등은 흥행하였다.
그러나 캐럴과의 결혼생활은 3년만에 끝이난다. 클라크는 1942년 1월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둘만을 위한 파티를 준비했다. 그는 멋진 저택에 손수 풍선을 불어 장식하고 그녀가 오면 놀라게 할 초 장식도 꾸며놓았다. 그러나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켜놓은 양초가 타들어 가던 1월 16일 8시경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캐럴 롬바드는 오지 않고 항공기 추락 소식을 접했다. 전쟁 기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던 캐럴 롬바드가 그의 곁으로 오기 위해 탔던 비행기가 라스베가스 교외의 야산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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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이 죽은 뒤, 비탄에 잠겨 있던 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에 미 육군 항공대 장교로 입대하여 참전, 항공 훈장을 받고 소령까지 진급했다. 항공대 생활 중 비행기를 몰던 클라크는 캐럴의 흔적을 찾으려고 사고가 일어난 라스베가스 산에 착륙 후 캐럴 롬바드가 추락한 지점을 다년간 수색한 끝에 아내 캐럴의 추락 현장에서 비행기 잔해들 중에 캐럴이 착용하던 스카프 조각을 찾아냈으며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 아끼며 죽을 때 같이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부분은 2015년 7월 1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다뤄졌다.
2.6. 종전 이후
2차대전 종전 후 클라크는 다시 브라운관과 브로드웨이에 출연한 뒤 다시 영화로 복귀, 1940년대 중반부터 할리우드로 돌아와 여러 영화에 출연하였다. 1950년 "스피드 왕"에서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고, 1953년의 "모감보"(Mogambo), 종전의 "붉은 먼지"를 개작한 "붉은 먼지 2", 1958년의 "런 사일런트 런 디프"(Run Silent Run Deep)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 1960년 "거친 말(馬)과 여자"의 주연을 맡은 뒤 몇편의 영화와 연극, 뮤지컬에 출연한 뒤 1960년 말 아서 밀러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에 캐스팅되었는데 여기서는 늙은 카우보이 역을 맡았다. 이는 그가 죽기 2주 전에 끝내 그의 유작이 되었다.[4]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클라크 게이블의 유작이면서 동시에 마릴린 먼로의 유작이기도 하다.
1949년에 유명 배우였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전 부인이었던 실비아 애슐리(Sylvia Ashley, 1904~1977)와 네 번째 재혼을 했다. 실비아 애슐리는 사교성이 좋고 스포츠를 잘 했다. 클라크는 여성편력을 그만두고 가정에 정착하려 했지만, 전혀 가정적이지 않은 실비아 애슐리는 늘 일 아니면 집 바깥을 돌았다. 실망한 그는 성격차이로 1952년에 이혼하고 만다. 1955년 그는 세 번의 이혼 경험이 있던 29세의 케이 스프레클스 윌리엄스(Kathleen "Kay" Spreckels Williams)와 재혼하였다.
혈관질환과 심장질환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그는 1960년 무렵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그 해의 선거는 우편으로 투표를 했다 한다. 병중이었던 그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선 늙어가는 현대의 카우보이역을 맡았지만, 여전히 밧줄을 던져 마릴린 먼로를 사로잡을 만큼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60년 관상 동맥 혈전증과 심근경색으로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는 오랫동안 캐럴을 잊지 못했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캐럴의 옆에 안치된다.
2.7. 사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소중히 간직했던 스카프 조각과 함께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포레스트론 묘지에 있는 세 번째 아내인 캐럴 롬바드의 묘 옆에 안치되었다.
그가 1960년에 사망했던 병원에서 4개월 뒤 그의 유복자 외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난다. 마릴린 먼로는 그의 유복자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날 때 직접 병원에 찾아와서 이를 지켜봤다고 한다.
1977년에 린 토너번이 쓴 그의 일대기 "거장 만세"(Long Live the King)가 출판되었다.
그의 5번째 아내인 케이 스프렉스 윌리엄스 역시 1983년에 사망하여 그의 옆에 안치되었다.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현시대의 가장 위대한 남성 스타' 부문 7위로 선정했다.
3. 기타
- 술과 담배를 좋아했다. 담배는 20대 초반일 때부터 하루 세 갑 이상 피웠고, 술은 위스키와 와인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 잦은 흡연으로 인하여 평생 치아와 잇몸이 좋지 않았고, 입냄새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비비안 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클라크 게이블과 키스씬을 찍다가 혼절할 뻔했다고 한다.(...)
- 성격도 화끈하여 유명 배우가 되자 자동차도 여러 고급차를 타고 다니며 스피드를 즐겼다. 그 와중에 몇번 사고도 냈는데 돈으로 무마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사람을 치어죽였는데 돈으로 무마했다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대니얼이 당시 흑인이라고하여 시상식에 못 나오게 되자 강력하게 결사반대하며 만약 그녀가 나오지 못하면 나도 시상식을 보이콧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그녀가 무사히 시상식에 나오게 한 바 있다. 흑인이 좋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맥대니얼과 친구로 잘 알던 사이였기에 흑인이고 뭐고 연기잘하면 받는 건데 그걸 못 나오게 하다니 그런게 어디있냐며 인터뷰했다. 이래서 KKK에게 협박편지를 받기도 했으나 무시했다. 맥대니얼이 1953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에도 참가하여 명복을 빌었다.
- 게이 또는 양성애자였다는 루머가 있었다. 그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조지 큐커 감독을 내쫓고 빅터 플레밍에게 연출을 맡긴 것도 큐커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어서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그와 스캔들이 있었던 여배우는 "게이블은 의외로 그쪽이 허약했지만, '클라크 게이블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전설적인 배우였던 클라크 게이블은 유감스럽게도 사후 호부견자와 호부견손을 동시에 겪고 있는 중이다. 명배우 아들과 손자의 흔한 품행(...) 아들인 존 클라크 게이블''(John Clark Gable)'은 음주운전 밎 뺑소니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고 아버지의 명성에 흠집날 짓만 하고 있고, 손자인 클라크 제임스 게이블''(Clark James Gable)'은 2011년 LA 경찰의 순찰헬기에 레이저 광선을 쏘는 장난을 치다 구류 10일 형을 받는등 할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제대로 했다. 더군다나 항공기나 비행기에 불법으로 강화된 레이저포인터를 들이대면 조종사가 실명할 수 있다.[5]
- 클라크 게이블도 자동차 사고를 매우 많이 치긴 했다. 잡지 People에서 이 게이블 집안의 사건사고를 다루면서도 "ㅉㅉ 왜 지 애비의 나쁜것만 배워가지고는..."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 2019년 2월 22일, 손자 클라크 제임스 게이블(Clark James Gable)[6] 이 30세의 나이로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밝혀졌다.(...)
- 로레타 영과의 사이에 사생아 딸이 있다. 이름은 주디스 루이스(Judith Lewis). 당시 클라크 게이블이 유부남이었던 데다 클라크 게이블과 그녀 자신이 헐리웃의 유명 배우였기에, 파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로레타 영은 출산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딸이 태어난 지 2년 후에 입양의 형태로 딸을 데려왔다. 독실한 카톨릭교도였던 로레타 영에게 딸은 ‘걸어다니는 죄의 증거’ 였고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그래서였는지 로레타 영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딸 장본인에게마저 그녀의 친부와 친모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 딸 주디스(주디)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친부인 클라크 게이블과 판에 박은 듯 닮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클라크 게이블의 특징적인 큰 귀모양마저 닮아, 그녀의 정체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로레타 영은 주디가 어렸을 때 그녀에게 귀 성형수술을 받게 했다. 어린 주디 본인도 학교에서의 별명이 ‘덤보’ 인 데에 불만을 갖고 있었기에 이에 군말없이 따랐다고.
- 주디 루이스가 자라가면서 게이블을 더욱 닮게 되었기 때문에, 헐리우드에는 그녀가 실은 클라크 게이블의 딸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그녀 본인은 이 사실을 23살에, 그것도 곧 결혼할 남편이 소문을 이야기해주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 이와 관련하여 주디 루이스가 회상한 일화가 있다. 그녀가 15세였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클라크 게이블이 있었다. 클라크 게이블은 주디에게 남자친구나 학교 생활, 장래희망 등을 물어본 뒤 집을 떠나면서 그녀의 이마에 뽀뽀해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주디 루이스와 클라크 게이블 사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정작 주디는 자신의 친부가 클라크 게이블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 일에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 이런저런 사건들로 구설수에 올랐던 클라크 게이블의 아들이나 손자와 비교하면 이쪽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그녀는 브로드웨이 배우, 작가, 심리상담사로 일했으며 2011년 암으로 사망했다.
- 클라크 게이블이 바티칸을 방문해서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한 적이 있는데, 문제는 이탈리아인 추기경인 안젤로 론칼리도 이때 교황을 알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에 '여교황'이라고 불리며 바티칸의 실권자로 활동하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클라크 게이블의 알현을 핑계로 론칼리 추기경의 알현 일정을 취소하고 내쫓는 하극상을 벌였다! 때문에 론칼리 추기경은 추운 겨울날에 찬바람을 맞으면서 알현 허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이건 게이블 잘못이 아니니 뭐라할 건 없지만, 이때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되돌아가는 굴욕을 당한 론칼리 추기경이 이후 다음 교황이 되는 요한 23세다.
- 몬티 파이선과 성배의 카멜롯 기사들이 클라크 게이블 성대모사를 한다고 한다.
- 별명이 '할리우드의 제왕'이지만, 진보적인 할리우드와는 달리 공화당 지지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극단주의적이지는 않고, 자유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고.
[1] 참고로 아들이 1961년 생이라서 생전에 직접 본 적은 없으며 아버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여러 사건사고를 일으켰다.[2] 이 영화는 최초의 스크루볼 코미디이자 최초로 오스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영화로도 유명한 데,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연상, 여우 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했지만, 촬영 직전까지 수많은 배우들에게 퇴짜를 맞았고, 소규모 영화사였던 콜롬비아는 MGM과 워너브라더스 소속이였던 클라크 게이블과 클로데트 콜베르를 빌려와서 간신히 영화를 끝냈다.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순식간에 메이저 영화사로 발돋음하였으니 고생 끝에 낙이 온 격.[3] 참고로 에이미 애덤스의 주연 <미스 페티그루의 특별한 하루>에서 이 여배우의 비서였다고 자랑하는 언급이 나온다.[4] 엔딩씬에서 마릴린 먼로와 함께 차를 타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죽기 '''10일''' 전에 찍은 것이라고 한다.[5] 실제로 호주에서는 이런 장난으로 인해 항공기 추락사고까지 났다.(...) 위기탈출 넘버원 에서도 이 사례가 다뤄진적이 있다.[6] 과거 Q채널등에서도 방영된 바 있던, 바람 난 배우자나 애인을 고발하는 <현장고발 치터스>의 진행자를 2013년부터 맡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