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엽

 

許曄
(1517년 ~ 1580년)
1. 소개
2. 생애
2.1. 이이와의 향약 시행 논쟁 관련
3. 자손
4. 그 외
5. 대중문화에서의 허엽


1. 소개


조선문신. 본관양천, 자는 태휘, 호는 초당(草堂)이다.

2. 생애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서분당 당시 동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정동(正東) 쪽을 뜻하는 묘지(卯地)가 별명으로 붙을 정도로 동인 내에서도 입장이 강경하였다. 동문수학한 사이인 박순과는 본래 서로 친밀한 사이였으나, 허엽이 동인, 박순이 서인의 중추적 인물이 되면서 사이가 갈라졌다.
이이, 이황 등에게 학문이 부족하다고 디스를 당했으나,[1] 경전 익히는 것을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아 이 점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벼슬을 30년간 했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같은 서경덕의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는 절친인 친구였다

2.1. 이이와의 향약 시행 논쟁 관련


선조에게 향약의 시행을 권하였으나, 이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당시 허엽은 향약 시행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이이는 그보다는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며 허엽의 주장을 반대했다. 그래서 허엽이 이이를 찾아가 따졌는데, 이이가 허엽에게 "선생 집안은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십니까?"라고 묻자, 허엽이 "나라의 명이 없어서 안 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이이는 "선생은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일일이 나라의 명을 기다리신단 말입니까? 부자지간에도 매일 매를 때리면서 글을 배우라고 권하면 반드시 서로 등을 지는 결과가 벌어질 것인데, 더구나 백성이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이후 허엽은 "선한 사람이 많으니 시행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이이는 다시 "당신의 마음은 선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한 것만 보셨습니다마는, 나는 선하지 않은 사람을 본 것이 더 많으니 필시 내 마음이 선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써 가르치면 말썽이 생기는 법인데, 지금 향약의 경우 어찌 말썽이 없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7년 2월 1일에 올라있는 이 기사는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우선 서인 집권기에 쓰여진 선조수정실록 내용과 달리 북인 집권기에 쓰여진 선조실록에는 향약의 시행을 미루라는 이이의 제안이 굉장히 짧게 다뤄진다. 선조실록 기사가 선조 7년 2월 1일 기사의 전부인데, 반면 선조수정실록에는 같은 날 기사 중 9개에서 이이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저 허엽과의 대화이다. 내용이 두 사람의 대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 내용은 이이 혹은 이이의 제자의 문집에서 실록으로 가져간 내용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신뢰도는 상당히 낮아진다.
두번째는 위에도 언급했지만, 저 기사는 선조 7년 2월1일 기사이다. 그리고 그해 10월 1일 이이는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 때 이이의 업적이라고 후대에 언급되는 것이 뭐냐면, '''해주향약을 만들어서 반포했다. 그리고 이 해주향약과 서원향약이 조선 후기 서인 향약의 표준이 되었다'''.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기간은 5개월여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향약을 당장 시행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1년여만에 자기 말 자기가 무너뜨린 격이 된다.


3. 자손


자식으로는 허성, 허봉, 허균, 허난설헌 등을 두었는데, 모두 글 쓰는 재주가 훌륭하였다. 그러나 이후 허균이 역모 혐의로 사형을 당하면서 가문도 쇠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균 외의 다른 자식들도 일생이 불행한 편. 허성은 임진왜란 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공신 칭호조차 받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대접을 받았다.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오히려 '계미삼찬'으로 몰려서 함경도 종성까지 유배를 당했고 이후 풀려났으나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허난설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4. 그 외


저서로는 《초당집》, 《전언왕행록》 등이 있다.
강릉의 명물인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초당두부의 이름 역시 그의 호를 딴 것이다.

5. 대중문화에서의 허엽


만화 포천에서는 이시경의 사형으로 등장한다. 초기에는 이시경과 친밀했으나, 후반부에 들어서는 이시경이 그에게 맡겼던 딸 초희를 돌려주지 않으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1] 이이는 율곡집에서 허엽에 대해 '그의 이론은 모순된 점이 많고 문장이나 글의 뜻에 잘 통달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이황은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혹은 또 "차라리 학문을 하지 않았다 하면 거짓없는 사람일텐데" 라고 개탄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