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clearfix]
1. 개요
허초희(許楚姬)는 조선의 시인, 화가로 허옥혜(許玉惠)로도 전한다. 호는 난설헌(蘭雪軒)[1] , 자는 경번(景樊), 본관은 양천(陽川).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나.
한국사에서 최초로 문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이다. 다만 본인 생전에 본인이 간행한 것이 아니며, 동생인 허균이 간행한 것이라 조선 시대부터 조선과 중국 양쪽에서 표절 시비가 분분한 논쟁적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허난설헌이 표절한 것인지, 이를 간행하는 과정에서 허균이 표절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완벽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 현대 대한민국에서 허난설헌 이미지는 그녀의 문집을 간행한 남동생 허균의 가공을 거친 것이며 그녀의 진짜 문장과 재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2] [3]
2. 가정사와 불행
허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허난설헌은 8살 때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은 뒤 신동이라고까지 불렸다.[4] 허난설헌의 집안은 당시 유교적 사회에 비추어볼 때 여성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며 당대 여자들이 거의 갖지 못했던 자를 지어 불러 주었고 한문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5] 다만 허엽과 그의 세 아들은 뛰어난 문장에 비해 정치적 감각이나 실속이 없었으며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허엽이 정치적으로 대립한 이이는 그렇다쳐도 이황에게까지 학문이 일천하다는 지적을 들었다.
허난설헌도 집안의 공통적인 불행은 피해가지 못했는데 남편 김성립과 금슬이 좋지 않았다. 남편 김성립은 임진왜란 직전에 있었던 선비들의 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고 임진왜란 시기에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깥으로 재주와 의기는 있었지만 허난설헌에게 좋은 남편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허난설헌을 둘러싼 환경은 너무 안 좋았는데 아버지 허엽은 1580년에 죽었다. 자식으로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둘 다 전염병으로 인하여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딸이 죽은 바로 다음 해에 아들이 죽었고 하필이면 그때 임신한 상태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배 속의 아기마저 유산했다. 아기 외삼촌인 허봉이 무덤 앞 글을 하나 새겼는데 글에 남자 아이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였다고 나와 있다. 둘째오빠 허봉마저 대학자 이이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귀양을 갔고 겨우 풀려난 지 얼마 안 된 1588년에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자식 2명과 오빠가 연이어 죽는데까지 8년밖에 안 걸렸으며 허난설헌은 오빠가 죽은 이듬해 사망. 허난설헌의 사망 이후 남동생 허균마저 이이첨의 장기말 노릇을 하다 버려져 오체분시당했다.
결국 허난설헌은 시집살이 스트레스에 일가족이 사회적으로도 대죄인이 되고 사망하며 자식들까지 요절한 충격으로 앓다가 27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허균이나 허난설헌을 키워낸 친정의 자유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엄격한 시가와의 갈등, 허난설헌의 도교적인 취향 등을 인정할 수 없었던 시어머니와의 불화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후인들은 추측한다.[6] 허난설헌이 두 아이를 잃은 설움에 쓴 시인 <곡자>의 링크.
자기 인생이 불행하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어서인지 생전에 '소천지(小天地; 조선)[7] 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출처는 정확하지 않다.
2.1. 남동생 허균
친정 오빠들이나 남동생과 매우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언으로 자신이 쓴 문집을 전부 불태워서 없애 달라는 말을 남겼는데, 허균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생전 한많은 일생을 산 누나의 시를 모아서 책으로 발간, 세상에 공개했다. 일설에는 모두 태워버렸는데 허균이 발군의 기억력으로 누나의 시들을 거의 외우고 있어서 자신이 외운 걸 책으로 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혹은 불태울 때 허균이 급히 이를 말리고 시 한 질을 겨우 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누나의 유언도 거스른 남동생 허균이 아니었다면 허난설헌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1598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그 후 1606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그리고 200년 뒤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수많은 여인들의 눈물을 앗아갔다. 심지어 훗날 정조마저도 이를 읽고 감탄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허균의 역모 때문에 애꿎은 허난설헌의 시집도 불태워졌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서 동래로 '''역수입 되는''' 얄궂은 상황이었다. 중국과 일본 찍고, 조선에서 다시 출판된 것이 1692년. 허난설헌이 죽은지 103년이나 지난 이후이다.
참고로 교과서에 허난설헌이 썼다고 하는 몇 가지 시들은 그렇게 추측되는 시들이다. 그런 말 없이 그냥 허난설헌이 썼다고 적혀져 있는 책들이 있는데, 시 수준이나 상황이 허난설헌이 썼을 만 해서 썼다고 가정한다고 한다.
강릉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2.2. 남편 김성립
그녀는 15세가 되던 해 구 안동 김씨(安東金氏)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를 계속해야만 양반 지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3대 이상 낙방이 계속되면 양반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실제로도 4대가 연속으로 급제를 한 집안은 많지 않은데, 김성립의 집안은 무려 '''6대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던 엘리트 집안이었다[8] . 따라서 김성립 본인도 대를 이어 공부를 했으나 매번 낙방을 했으며, 허난설헌이 죽기 전까지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자형인 김성립에 대해, "누나보다 못나고 공부만 할 뿐, 실제로는 경전이나 역사도 제대로 모른다"고 평가했다. 허균은 17세에 초시에 합격, 21세에 급제하고 우참찬(정2품)이란 고위직까지 올랐던 인물이며, 누나 허난설헌까지 문장력이 굉장한 반면 김성립 자신은 28세가 되어서야 문과 말단인 병과(정9품)로 급제했다는 것도 불화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다만 김성립에 대한 허균의 기록은 사감이 대폭 들어가 있어서 "부부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다." 정도로 걸러 듣는게 좋다.
이렇게 김성립은 과거 시험에 모든 신경을 쏟는다고 가정을 등한시했고, 허난설헌은 남편의 무심함과 시어머니와의 고부갈등으로 크게 마음 고생을 했다. 김성립은 28살 때 아내 허난설헌이 죽은 바로 그 해에 과거에 급제해서 홍문관 저작(정9품)을 역임했고, 이후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서 싸우다 1592년 사망하였다. 원래는 무덤에 비석 하나 없었는데 철종 때 7세손 김수돈이 세워주었다. 그런데 비문을 부탁받아서 써준 사람이 허씨 집안의 후손인 허전(1797년 ~ 1886년)이다.
3. 작품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 야좌(野坐), 채련곡(採蓮曲), 아이들의 죽음을 한탄한 곡자(哭子),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등이 유명하다. 후술하겠으나 표절로 밝혀진 빈녀음(貧女音) 등의 문제가 있어 여기서는 의혹이 없는 몽유광상산만 언급한다.
1구과 2구의 창해와 청란은 실존하는 사물이다. 창해는 북쪽에 있는 바다의 이름이고, 청란은 큰 푸른목도리꿩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종류이다. 하지만 요해는 신선들이 산다는 산해경에나 나오는 가상의 바다이고, 채란은 채란신조라고 해서 봉황의 일종이다.
허난설헌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여 썼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허균은 "형님(허봉)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로 짓고 죽더니, 누님(허난설헌)도 자신의 꿈을 시로 짓고 죽었다."고 애통해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보면 부용은 당연히 허난설헌 자신이고, 27은 당시의 나이, 마지막 연은 요절을 의미한다.
허난설헌의 이 시는 도교적 취향과, 절묘한 대구와 요절의 안타까움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허난설헌의 묘에 시비로 남아 있다.
4. 표절 논란
허난설헌의 시에 대한 표절 시비는 지봉유설을 지은 동시대 사람인 이수광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2편, 3편을 제외하면 전부 위작이다'이라고 주장했다. 이수광은 허난설헌과 우연하게도 딱 동갑으로, 완전히 동시대부터 논란이 있었던 셈이다. 표절에 대한 비판은 이후 김만중의 '서포만필', 홍만종의 '시화총림', 이덕무의 '청비록', 신흠, 김시양, 한치윤 등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허난설헌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규원가(閨怨歌)[11] 역시 조선시대부터 허난설헌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50행 100구로 이뤄진 이 장편 가사는 동시대인인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유사하면서도 좀 더 노골적인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드러내는데 홍대용은 허균의 첩인 소쌍이 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허난설헌의 문집은 중국으로 건너가 유명세를 떨쳤는데 이를 본 중국의 시인인 유여시(1616년 ~ 1664년)[12] 는 남편 전겸익이 쓴 열조시집에서 허난설헌의 시 대부분이 당나라 시의 표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사실 의혹 수준이 아니라 몇 가지는 사실로 밝혀진 것인데, 예를 들어 《빈녀음(貧女音)》이란 작품은 당나라 시인 진도옥(秦韜玉)의 한시 《빈녀(貧女)》를 표절했으며 문장 일부는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드러나 있다.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현규 교수의 논문 '허난설헌 한시의 표절 문제'에서 박 교수는 허난설헌 작품이 '표절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 근거를 '다른 시에서 절반 이상을 베꼈을 경우'로 설정하고 허난설헌의 대표작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조사대상 작품 중 상당수가 중국시에서 베껴왔거나 그런 흔적이 농후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상한 기억력으로 (누나의) 문장을 되살려서 문집을 간행했다'라는 남동생 허균이 표절의 원흉으로 지목되는데, 그 시대 조선 규방(여자들)에서 유행했던 시들을 허균이 수집해서 자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이름으로 간행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허난설헌의 작품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학술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소수의 작품에만 한정이 되며, 또한 그 동안 그녀의 작품으로 알려졌었던 대표작과 이에 따른 그녀의 명성은 허구가 된다. #
5. 그 외
- 팬텀 하록의 웹툰 포천에서는 아명인 초희로 등장해서 주인공 이시경과 지내다가[13] 허엽의 가문에 양녀로 들어간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허난설헌은 허엽의 친딸이 맞지만, 결국 맞이하게 될 안타까운 운명과 맞물려서 보는 사람들을 탄식하게 했다. 실제 역사와 달리 다시 이시경과 같이 임진왜란이 터지기전 안전한 장소로 이사가서 편안하게 사는 것으로 나온다.[14] 나머지는 다들 허난설헌은 죽었다고 기록된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조선 이벤트로 등장하는데, 선택에 따라 조언가로 등용하거나 그대로 두어서 위신이 오르게 할 수 있다.
- 허난설헌의 생가는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데, 남동생은 임진왜란 때 강릉으로 피난 가 있으면서 학산초담(鶴山樵談)에 강릉은 산과 물이 아름답고 정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정기를 받았던 누나의 재능이 뛰어났었던 거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재미있게도 신사임당과 이이 두 모자도 허난설헌과 같은 강릉 출신이다. 실제로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 터는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참고로 이곳은 나중에 다른 집안에서 건물을 헐고 새로 다시 집을 지었기 때문에 허난설헌 생가터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등록이 되어있다.
- 여성으로서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사후에야 가족의 노력으로 뒤늦게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점은 19세기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비슷하다. 다만 허난설헌이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불과 20대 후반의 나이로 요절했던 것과는 달리, 디킨슨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50대 중반의 나이로 타계하였으므로 허난설헌보다 2배쯤은 더 오래 살았다.
- 대항해시대 6에서 허초희라는 이름으로 항해사로 등장한다. 도련님으로 그려진 남동생 허균처럼 어린 나이로 그려졌다.
- 2020년 11월 8일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 허난설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6. 관련 문서
[1] 난설화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현재 대중적으로는 허난설헌으로 굳어진 상태.[2] 난설헌보다 앞서 예술가로 유명했던 신사임당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녀가 그렸다고 낙관을 찍은 그림이 남아있는게 아니라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傳)해지는 그림들만 잔뜩 전해지는데 300년 전에 50세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전해지는 작품이 너무 많고 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화풍이 너무 상이하다.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진 초충도는 그렇게 전해지는 작품일뿐 신사임당이 그렸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아들 이이나 동시대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포도, 산수,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하며 초충, 화조를 그렸다는 기록은 없어서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3] 물론 <규원가>와 같은 한글 가사 작품들도 전하긴 하지만, 한시 표절이 확인된 상황에서 아무래도 미묘한 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아래에 기술한 것처럼 이 작품도 정말로 난설헌의 것인지 애매하다.[4] 허균이 『학산초담(鶴山樵談)』 등에서 직접 기록한 많은 일화와 다르게 중국을 통해 역수입된 기록이다.[5] 서자 출신으로 허봉과 친분이 있던 이달(1539~1612)에게 가르침을 받았다.[6] 허난설헌이 못된 시댁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들 대부분이 현대에서야 등장하고 계속 이야기가 과장된다. 정작 조선 시대 문헌에는 부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정도의 기록만 나오고 심지어 오히려 허난설헌이 남편이 재주가 없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구박을 한 가해자로 나오는 평까지 있다.[7]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조선은 변방이었다.[8] 이정도면 가히 명문가라 칭할만한데 대표적으로 이발의 경우 본인부터 9대조까지 모두 과거에 급제한 가문이었는데 이 집안은 호남 제일의 명문가였다.[9]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10] 삼구(三九)는 '39'가 아니라 3 곱하기 9로, '27'의 의미이다. 이팔(二八)청춘이 16세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11] 원부사(怨夫詞)나 원부가(怨夫歌)로도 불린다. 규원가는 규방에서 원망하는 노래라는 이야기고, 원부사나 원부가는 좀 더 노골적으로 남편을 원망하는 노래라는 제목이다.[12] 유여시도 상당히 재미있는 인물로 중국에서는 꽤 알려져 있다. 본래 기녀 출신으로 당대의 여러 명사들과 교류했고 나중에 훨씬 연상인 전겸익의 아내가 되지만, 전겸익이 청나라에 굽실거리자 이를 꾸짖는 등 남편보다 훨씬 대가 센 인물이었다.[13] 그마저도 이시경의 친딸이 아닌 양녀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걸 이시경이 거둬기르고 있었다. 참고로 이시경의 양녀로 살 땐 순진무구한 성격과 그 나잇대 아이의 귀여운 행동이 맞물려 작중 귀요미 역할을 담당했다.[14] 그러나 잠시 사이가 틀어졌던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포천(웹툰)/등장인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