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카레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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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라스의 2014년 11월 내한 기자회견 모습.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만큼 많이 노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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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라스의 2017년 3월 내한 기자회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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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시절
1. 개요
2. 생애
3. 음악적 성향
4. 내한


1. 개요


José Carreras. 본명은 주제프 마리아 카레라스 이 콜 (Josep Maria Carreras i Coll)
1946.12. 5.~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더불어 '쓰리 테너'라 불렸다.
동향 출신의 소프라노 몽셰라 카바예와 이탈리아 로비고[1] 출신의 성악가 카티아 리치아렐리[2]와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기도 했고, 필립스와 EMI, 도이치 그라모폰에서도 많은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리스 출신의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와도 여러 편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2. 생애


카레라스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카탈루냐인이다.[3] 이런 연고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음악감독을 맡게 되었고 본인이 주제가인 '아미고스 빠라 씨엠쁘레(Amigos Para Siempre)'를 직접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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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시절의 카레라스'''
카레라스의 어린 시절 내용 중에서 이런 일화가 전해지는데, 카레라스는 꼬맹이 시절부터 타고난 영재로 손꼽혔고, 여덟 살 때는 지방방송에 출연까지 했다고 한다. 그 때, 방송 출연하고 있었던 꼬맹이 카레라스가 엄청난 노래를 불러서 방송을 보고있던 시청자들을 깜놀케 했는데, 바로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을 어린나이에 열창했다는 것. 이것은 당시에 많은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카레라스의 어린 시절을 언급할 때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진다.
카레라스가 꼬맹이 시절에 시청자들 앞에서 "여자의 마음"을 불렀다는 그 증거 영상. 6분 34초쯤에 나온다.

커리어 초기인 1970년대 초중반에는 동향 출신의 선배이자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몽셰라 카바예의 상대역으로 단골로 출연하며 그녀의 도움을 받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에 카바예의 상대역으로 토스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투란도트, 운명의 힘 등의 음반을 녹음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7년 이전까지 카레라스는 카바예의 상대역으로서 출연, 녹음한 것 이외에 카바예 없이 스스로의 네임 밸류로 일류 극장에 출연하거나 음반을 녹음한 경우는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1977년 카라얀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두번째 전기를 이루며 세계 정상급 테너로 성장하게 되었다. 성악가를 고르는 기준이 다소 독특했던 카라얀은 이전에도 다소 특이한 성악가들과 함께 주로 작업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바그너 오페라에서 당대 최고의 헬덴 테너들과 바그너 소프라노들을 외면하고 헬게 브릴리요트, 존 비커스, 헬가 데르네슈 등 다소 생소한 성악가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 카라얀의 이러한 선택은 득과 실이 있었는데, 최소한 바그너 음악 쪽에서는 실이 많았던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카라얀 본인 역시 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실황 무대에서는 자신이 녹음에서 선택한 가수들이 아니라 기존의 유명한 비르기트 닐손, 제스 토마스 등을 캐스팅해서 공연하곤 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쪽에서도 카라얀은 대중들에게 다소 호불호가 강한 존 비커스를 중용하여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녹음했다. 하지만 비커스의 목소리와 발성, 딕션이 워낙 호불호가 있었고 비커스도 약간 하락세에 들어서면서 카라얀은 다른 테너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70년대 중반 카라얀은 루치아노 파바로티(라 보엠, 나비부인), 플라시도 도밍고(나비부인 영상물), 프랑코 보니솔리(일 트로바토레) 등 몇몇 테너들과 함께 작업했으나 모두 1,2회 단발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77년 카레라스를 알게 된 카라얀은 이후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 오페라 분야의 거의 모든 음반 녹음과 공연을 카레라스와 함께 했다.
이렇게 카레라스는 카라얀의 남자로서 1977년 이후 카라얀이 녹음한 음반 아이다, 토스카, 돈 카를로, 카르멘, 베르디 레퀴엠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영상물로 남겼다.
80년대 이후 카레라스는 세계 유명 오페라 하우스에 단골로 출연하게 되었으며, 아직 탈모가 오기 전 젊은 시절의 빼어난 외모로 인해 영상물에도 자주 출연하기 시작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7년 카레라스는 정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데, 급성 백혈병진단을 받은 것이다. 생사를 오가는 투병 끝에 결국 기적적으로 완치를 받고 무대에 복귀할 수 있게 된다. 복귀 이후에 급속도로 기량이 쇠퇴하게 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샀지만, 1988년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여 백혈병 환자들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수많은 자선공연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사회공헌에 전념하고 있다. 다만,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백혈병 치료를 도우면서 좋아졌다"는 설이 많이 돌고 있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친했다고 한다.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는 유명한 다음의 이야기가 적혀 있으니 참고할 것. #

카탈루냐출신인 카레라스와 카스티야 출신인 플라시도 도밍고지역감정 그리고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백혈병 투병을 하게 된 카레라스는 계속된 항암치료와 골수 이식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 카레라스는 마드리드에 위치한 에르모사 백혈병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무료로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한다. 완치판정을 받은 카레라스는 에르모사 재단에 감사 표하는 마음으로 후원회원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는데, 알고보니 에르모사 재단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설립한 재단이며, 설립한 취지가 호세 카레라스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라이벌인 카레라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익명으로 처리했던 것. 카레라스는 도밍고의 우정에 진심으로 감사했고 그 이후로 둘은 절친이 된다. 카레라스가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그 재단의 홈페이지에서는 이 일화가 거짓임을 공지하고 있다고 하나, 워낙 전세계적으로 퍼져버린 루머(?)이다보니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서프라이즈"에서 방송을 탄 이후, 기정사실로 알려져 버렸다. 이와는 별개로, 절친한 또 다른 불세출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투병 당시, 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며 격려했다고 전한다, "힘내요. 당신이 쓰러지면 나는 누구와 경쟁한단 말이오."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는 예술로 세계 개선에 기여한 공으로 다보스 크리스탈 어워드를 수상했다. 수상 후 파씨오네. 열정으로 화답해주었다.
5분 41초부터 수상자 소개. 7분 33초 호세 카레라스 수상 소감. 12분 52초부터 공연.


3. 음악적 성향


리리코 테너로 분류되며, 발성이나 기교보다는 호소력 짙은 노래와 연기로 유명하다. 또, 이러한 점이 카레라스의 매력이라는 평가가 많다. 백혈병 치료 이후 성량이 줄면서 기량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가를 적시게 했다. 비슷한 성향의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는 바리톤으로 시작해서 음역을 넓혔기에 풍성한 저음의 음색이 있지만, 카레라스는 (상대적으로)깨끗하고 맑은 고음의 음색이라는 점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카레라스의 진가는 PP에서 드러난다. ff에서 부드럽게 PP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당장 밑의 50주년 바르셀로나 앵콜을 뒤 관객들을 향해 불러주는 노래 마지막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섬세한 감정연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쓰러지기 직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했던 카르멘(1986년 공연)은 그의 연기와 연주의 진면목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명반. 실제로 카르멘의 돈 호세와 같이 불쌍한 남자주인공 역할을 맡을 경우, 그의 목소리의 진가가 멋지게 드러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오페라 공연보다는 주로 연주회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은 오페라 무대도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나이가 상당히 든 만큼 오페라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4. 내한


외국 성악가로써는 드물게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4]인지 자주 내한해서 콘서트를 가지는 편.[5]
국내 연주를 자주 왔던 몇 안 되는 성악가로, 한국 출신 성악도들에게도 호의를 보이고 있다. 한국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는 듯. 파바로티와 도밍고가 내한 횟수가 7번 이하인데 카레라스는 15번 이상이다. 아무래도 박수와 브라보, 환호소리를 제대로 선사해주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인 듯 하다. 카레라스 고향과도 비슷한 국가이고. 연주회에서 몇 차례 앵콜을 받으면, 그 중 한 곡은 무대 뒷쪽 좌석으로 돌아서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위해 한 곡을 불러주는, 좋은 매너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번 17년 3월4일 공연에서도 첫번째 앵콜곡은 합창석 자리를 보고 불러주어서 노래시작과 동시에 환호와 박수의 도가니가 되었고 노래 마치자 마자 합창석은 물론 일반석에서도 기립박수와 환호가 들렸다.
해당 영상... chitarra romana 로마의 기타

바르셀로나 데뷔 50주년 앵콜에서도 뒷 관중들을 향해 불러주었다. 카레라스의 무대 매너를 확실히 보여준다.
노래 시작 할 때 뒤로 부드럽게 돌아보는 것이 백미. 1분 13초부터 볼 수 있다. 마치고 전체 기립박수를 받는다.

1993년도 2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독창회를 가졌었다. 4000여석의 당시 우리나라 가장 많은 좌석을 가진 공연장에서 4000여명의 기립박수를 가진것으로 아주 유명했다. 이 공연을 mbc에서 방영 했었다.
본 공연

앵콜 공연

다만, 2014년 내한 연주회[6] 에서는 11월 23일자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준비하던 중, 급성 후두염과 감기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는데, 언론에서 자극적인 기사로 이를 비난하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시 공연 포스터 자체가 "전설을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홍보했기에 그의 생전 한 번 더 공연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듯. 토요일은 공연을 했다. 토요일은 공연 시작직전 안내 멘트로 '호세카레라스씨가 감기 걸렸으나 최선을 다해 부른다고 관객의 양해 부탁드립니다'가 나왔다. 공연 도중에도 계속 코나 입주변을 손수건으로 닦기도 했다. 언론에선 토요일 공연은 애기도 안 하고 일요일 공연취소에 대해서 매우 신랄하게 까댔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게 주최측에서는 일요일 공연을 무리하게 진행하고자는 의지로 관객들을 공연장에 입장시켰고, 입장한 관객들은 약30분 동안이나 주최측의 별다른 설명없이 기다리기만 하였다. 알고보니 그 당시에도 호세 카레라스는 병원에 있었던 모양. 추후에 일요일 공연을 예매한 관객들에게는 추가로 10프로를 더 환불해 주는걸로 일단락됐다.
2017년 3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계투어 공연의 일환으로 한국에서도 공연할 계획이 전해졌다.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번이야말로 그를 무대에서 접할 마지막 기회가 될듯. 이 투어는 서울이 마지막이라고 알려졌다. 16년부터 시작한 그랜드 월드 파이널 투어를 유럽부터시작해서 마지막 한국 서울에서 공연할거라고... 알려졌지만 터키에서도 하는 걸 보니 더 계약이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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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4일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는 무려 앵콜만 6곡을, 커튼콜만 4번이상을 보여주었다.(확실친 않다. 그렇지만 횟수는 물론 무대에 있어준 시간이 엄청 길었다.) 1부에서는 아껴주듯이 노래를 불렀으나 2부에서는 클래식 매들리부터는 뒤를 생각않고 열창했다. 다만 고음이 힘들기에 팔리아치는 고음은 1키내렸고 브린디시에서는 마지막 부분에선 소프라노에게 넘겨주었다. 그렇지만 다수의 공연 후기와 기사에서 보듯이 고음만[7] 안나왔을 뿐 나머진 마에스트로, 3대테너,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카레라스가 옛날부터 즐겨 불렀던 Cardillo : Core 'ngrato는 정말 잘 표현해주었다. 마지막 인사 중에 사진 찍고있는 앞좌석 관람객에게 권총?꺼내는 장난도 하고 장사익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에서 장미 한송이는 옆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도 선사하는 듯 14년 11월 22일 공연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컨디션관리를 잘 했고, 한국 관람객들의 열띤 호응과 박수에 공식적이지만 마지막 무대를 세계를 호령했던 테너로서 마무리 했다. 무엇보다 이날은 마이크를 쓰지 않고 콘서트홀이 떠나가게 열창했다. 2부 후반에선 매 노래와 커튼콜마다 전원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은 2500여석 좌석 가운데 2400여석이 넘는 관중이 있었고, 2100여석의 일반판매석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장비 등으로 인해 관람이 여의치 않은 자리와 초대석일부 제외하면 가득 찼다.
더불어 도밍고가 그리운 금강산을 내한 공연 때 자주 불렀다면, 카레라스는 공연에서 부르진 않지만 역시 한국노래 불러서 녹음 한 적이 있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노래이다. 역시 한국인보다 발음이 좋다.


[1] 베네치아 지방의 일부이다.[2] 심지어 리치아렐리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설명들 참조.[3] 카탈루냐어로는 주제프 카레라스(Josep Carreras)라고 부르는게 맞다. 허나, 카레라스가 태어날 시기의 스페인은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 분리주의 운동이 거셌던 지역을 억압했던 프랑코의 철권통치 기간 이었고, 카레라스가 그 시기에 태어난 탓에 카탈루냐어 본명보다 스페인어(=카스티야어)로 된 '호세 카레라스'로 많이 불려지게 된다.[4] 실제로 인터뷰에서 한국은 자신의 고향과 굉장히 비슷해서 친숙하다고 얘기했다.[5] 단, 2011년 11월 23일,24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내한공연은 취소되었다. 공연 주최사인 애셋 &밸류 인베스트 그룹(Asset & Value Investment Group)의 사정 및 부가적인 문제가 그 이유였다고....[6] 플라시도 도밍고의 연주회와 겹친데다 최고가 티켓 값이 44만원에 달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참고로 파바로티가 3-4-5억, 도밍고가 3-4억 카레라스가 2-3-4억 정도이며 3태너 합동 땐 각자가 10억원의 게런티가 있었다. 모든 콘서트가 저 게런티가 아니다. 보통 저 당시에 잘나가는 태너들은 1억 내외의 게런티를 받았다. 파바로티가 90년대에 내한했을 떈 30만불정도 받았다. 물론 평소보다 게런티를 무척 적게 받은 계약이였지만 21세기에 와서 이 게런티를 받는 테너는 없다. 오직 3대테너만 가능했다. 더군다나 3대 테너 공연을 하면서 합동으로 공연시에 게런티가 더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 더하여 이 3 모두 전용기가 있다. 서울 3태너 공연때도 3명 모두 전용기를 탔다. 서울 3태너 공연시 3테너에게만 30억의 게런티가 있었다. 정확히는 3사람에게 2001년 당시 324만불이 게런티였다. 당시 한국 3대 테너 공연 최고가는 25만원으로 당시 역대 최고표값이였다. 그런데 같은 공연의 시카고라던지 일본의 공연값이랑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다. 최고가가 일본은 69만원 미국은 75만원수준이다.... 저 게런티가 20세기 금액이다. 21세기에 조수미가 1억원 정도이며 안나 네트렙코는1억4천만원 수준이다. 그 20세기 당시에 3-4-5억 인데 지금에서야 몸값이 많이 낮아졌어도 티켓값이 비싼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7] 하지만 전체 프로그램 중 2곡정도(Cardillo : Core 'ngrato, Leoncavallo : Pagliacci - Vesti la giubba)에서 한 순간 고음이 시원하게 나오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