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도 도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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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ácido Domingo, 1941년[1]1월 21일 -
풀네임은 호세 플라시도 도밍고 엠빌(José Plácido Domingo Embil). 스페인과 멕시코의 성악가이자 지휘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모두 스페인 민속 오페라인 사르수엘라(Zarzuela) 극단에서 활동하던 가수였다. 여덟 살 때 부모는 멕시코 사르수엘라 극단으로 이적했고 도밍고는 부모를 따라 그곳에서 성장했다. 멕시코시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지만, 이후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어 부모처럼 사르수엘라 극단의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1년 멕시코시티 오페라 극장에서 바리톤으로 공식 데뷔했지만, 우연히 테너 성부 악보 몇 개를 초견으로 몇 번 부르던 것을 극장 관계자들이 듣게 되었는데, 그들이 이것을 좋게 평가한 것도 모자라 배역을 바꾸도록 권유했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 이후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남주인공인 알프레도 역으로 출연하면서 테너로 전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서 1965년까지 텔아비브의 이스라엘 국립 오페라단에서 활약했다. 1965년부터 뉴욕 시티 오페라단에서 활동하다가 1968년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을 훌륭히 소화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짦은 기간 동안에 세계 각지의 오페라 극장 무대를 석권하면서 불과 1~2년 사이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도이체 그라모폰, 데카, RCA 등 세계 유수의 클래식 레이블들과 계약을 맺고 여러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197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카라얀이 지휘하는 돈 카를로의 타이틀 롤을 맡아 최고의 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1981년 존 덴버와 함께 녹음한 크로스 오버 음반 Perhaps Love가 발매되어 큰 히트를 치며 크로스 오버 음악계의 한 획을 그었다.
1980년대에는 오페라의 영화화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성악 실력에 외모까지 겸비한 도밍고가 자주 주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러한 오페라 영화 영상물들이 발매되면서 도밍고의 명성도 세계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라틴계 성악가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진출했다. 처음에는 단발성 출연에 그칠 것으로 보였지만, 매우 박한 개런티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꾸준히 출연하면서 90년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성악가 중 한명이 되었다.
2009년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바리톤으로 회귀하여 시몬 보카네그라의 타이틀 롤로 재데뷔했다. 시몬 역을 맡는 도중에 직장암으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2010년 봄에 수술을 받은 뒤 완쾌되었고, 현재 오페라 무대와 콘서트에서 다시 활동 중. 수술 받은 후에는 무대 출연을 자제하는 편이라지만, 전보다 약간 줄었을 뿐 아직도 꾸준히 활동 중이다. 특히 일반적인 성악가들은 좋은 기량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은퇴는커녕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수준을 넘어서서, 잊힌 작품이나 초연작, 바리톤 배역에 출연하는 등 아직도 새로운 배역을 맡으며 레퍼토리를 넓히고 있는 노익장을 발휘 중이고, 물론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한 가창을 보여주고 있다. 2013년 7월에도 색전증으로 입원하였으나, 퇴원하자마자 원래 잡혀 있던 페스티벌 일정을 모두 소화하는 강철 체력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현재는 건강 때문인지 타이틀 롤보다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그 덕분에 레퍼토리는 더 넓어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류 역사상 평생 가장 많은 배역을 맡은 오페라 가수가 확실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그 외 2014년과 2016년에 내한을 하였는데, 이때도 들어보면 70세가 넘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목소리가 젊고 팔팔한 테너들보다 더 깊이 있는 음색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성량은 약간 줄어든 듯하다.
2018년 10월 26일 내한이 확정되었다!#
대학 시절 지휘를 공부했고, 초기에 사르수엘라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미 악단에서 보조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지휘 경험을 쌓았다. 이후 한동안 오페라 성악가로서 커리어를 쌓는데 전념했지만, 테너로서 명성이 확고해진 후 지휘 역시 경력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해 1973년, 뉴욕 시티 오페라단에서 오페라 지휘자로 데뷔했다. 1983년 세계적인 런던 코벤트 극장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를 지휘한 공연이 영상물로 발매되기도 했다.
▲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을 지휘하는 플라시도 도밍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9년
재미교포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1980~)와 오페라 <카르멘>을 협연하는 플라시도 도밍고.
▲ 도밍고의 지휘가 약간 어색하다 싶으면, 중간중간 지휘자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지휘석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는 장영주의 모습도(예, 2:50초 ~) 확인할 수 있다.
성악가로서 활동하면서도 그는 커리어 내내 지휘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때때로 콘서트를 지휘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오페라 지휘자로 머물렀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도밍고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폭넓은 편으로 바그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역을 포괄하는데,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오페라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와 오페레타 등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작품도 자주 지휘하고 있다.
지휘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성악가로서 무대에 오를 때에도 오케스트라 피트를 자세히 관찰할 때가 많다고 한다.
원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더불어서 세계 3대 테너로 불렸지만, 파바로티 사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테너다.[2]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를 비롯한 수많은 학위와 미국의 대통령 자유 훈장,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영국의 명예 기사 훈장[3] 등 온갖 상훈도 있다. 물론 이런 영예는 도밍고뿐만 아니라 파바로티와 카레라스 역시 휩쓴 바 있다.
파바로티와 비교하여 목소릴 분류하자면 그는 리릭 테너보다 좀 더 무거운 성질인 스핀토 테너[4] 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만 한정하기에는 리리코와 드라마티코의 배역에도 잘 어울리는 음성을 가지고 있다. 성악가들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인 언어의 장벽도 거의 없어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레퍼토리는 물론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등 엄청나게 폭 넓은 언어로 된 오페라 배역들을 소화해낸다. 이들 언어로 상당한 수준의 회화까지 가능한 수준이라고. 도밍고는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성악가로 기억되지만 후술되어 있듯이 독일 오페라 분야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실제로 도밍고는 독일어에도 상당히 능통하다. 독일의 토크쇼에 출연하여 프리토킹 수준의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했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로 영어 토크쇼에도 여러차례 출연했다. 학생 시절에 이런저런 연극 무대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험도 있어서 연기력도 상당히 뛰어나며, 대사와 음악을 빨리 외우는 능력 또한 갖춰 레퍼토리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쉬지 않고 연구하는 그의 열정이 도밍고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바리톤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리톤 배역을 부른 적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본인이 피가로역을 맡은 세비야의 이발사. 전곡 녹음과는 별도로 비디오 더빙으로 혼자서 테너와 바리톤의 2중창을 부르기도 했다. 다만 바리톤으로 시작해 테너 성부로 음역대를 끌어올린 탓에, 파바로티처럼 투명하고 파워풀한 고음을 내지는 못 한다. 물론 도밍고만 못 내는 게 아니다(...). 어쨌거나 안티들의 경우에는 테너이면서도 커리어의 대부분에 걸쳐 일명 하이 C로 통하는 높은 도(Do)를 내지 않았던 도밍고의 약점을 희화화시켜 'Mingo'라고 부르기도 한다. 쉽게 말해 '도'밍고에서 '도'를 뺀 거다(...). 대신 그 약점을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목소리, '3대 테너' 중 가장 다양한 레퍼토리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손쉽게 커버해낸다.
상당한 학구파로 유명하다. 음대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던 탓에 이 분야들에서도 나름대로의 능력자임을 보여주는데, 특히 지휘 쪽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오페라뿐 아니라 관현악 작품들에도 손을 대고 있는 중. 그의 자서전을 보면 파바로티나 카레라스 등 다른 가수들과 달리 클라이버, 카라얀 등 자신이 함께 했던 거장 지휘자들과의 인연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오페라 가수로선 매우 한정된 레퍼토리만 반복적으로 소화했던 파바로티와는 달리 끊임없이 새로운 배역에 도전해 현재 126개의 배역을 소화한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중 몇 개는 바리톤 배역이다.
새로운 레퍼토리 도전과 관련해 특히 커리어 후기에 접어들어서 바그너 테너 역에 도전한 것이 눈에 띈다. 음악 역사상 이탈리아 오페라와 바그너 오페라 양쪽에 정통한 거의 유일한 테너라 할 수 있다. 사실 도밍고는 제법 젊은 시절인 1968년에 처음 로엔그린 역할을 불렀다. 처음에는 로엔그린, 탄호이저 등 초기 바그너의 다소 라이트한 역부터 시작했지만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배역을 넓혀갔다. 1985년과 1986년에 시노폴리와 솔티가 각각 지휘한 탄호이저와 로엔그린 음반을 녹음하면서 본격적으로 바그너 가수로서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90년대 바그너 가수 기근 현상과도 맞물려 이 분야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1991년에는 바그너 음악의 성지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진출했다. 바이로이트는 출연료가 아주 박하기로 유명해서 도밍고가 처음 바이로이트에 섰을 때는 일회성 출연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는 수 년 동안 꾸준히 활약하여 바이로이트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테너가 되었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헬덴 테너의 정점에 있는 배역인 지크프리트와 트리스탄까지 소화하는데 성공했다. 바그너 음반 중에서는 특히 로엔그린 실황 영상물이 추천할 만하며, 파르지팔 등의 역할도 매우 훌륭하다.
바그너 이외에도 모차르트 오페라에 대한 도전도 눈에 띈다.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테너 배역은 역할이 크지 않으면서 독특한 스타일과 때때로 고난이도의 기교가 요구되기 때문에 이탈리아 오페라나 바그너 오페라들과는 또 다른 영역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도밍고는 모차르트의 이탈리아어 오페라뿐만 아니라 마술피리와 같은 독일어 작품도 모두 레퍼토리로 삼았다. 도밍고는 EMI에서 모차르트 아리아를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안타깝게도 전문 모차르트 테너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인지, 모차르트의 작은 배역을 맡기기엔 몸값이 너무 비싸서인지 전곡 음반은 거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도밍고의 EMI 모차르트 음반은 그가 라이브에서 노래했던 것 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허나 이 음반이 도밍고의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소스였다. 그러나 최근 유튜브에서 도밍고가 실제 라이브로 노래한 모차르트를 들어볼 수 있다. 프리츠 분덜리히나 스튜어트 버로우즈 같은 일급 모차르트 전문 테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가창을 들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밍고는 요즘은 자주 듣기 힘든 독일 오페레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90년 3테너 콘서트에서 레하르의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에서 나오는 테너 아리아인 "Dein ist mein ganzes herz"를 부른 것이 유명하다.
그 밖에도 베토벤 장엄미사, 베토벤 교향곡 제9번도 여러차례 부르고 녹음도 남겼다.
아울러 90년대 이후에는 차이코스키 등 러시아 오페라로 영역을 넓혔다. 정말 그의 도전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부모와 본인의 음악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스페인의 민속 오페라 사르수엘라를 알리려는 노력도 기울였는데, 1985년 소프라노 필라 로렌가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사르수엘라 콘서트를 가져 호평받았다. 로렌가는 스페인 출신이지만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활약하며 독일에서 명성을 쌓았는데 그녀 또한 처음에는 사라수엘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었다. 이후 도밍고는 몇 장의 사르수엘라 음반을 내기도 했으며, 98년 3테너 콘서트에서 페데리코 모레노 토로바가 작곡한 사르수엘라 "Maravilla"에 나오는 아리아 "Amor, vida de mi vida"를 불렀다. 참고로 이 아리아는 원래 바리톤을 위한 아리아이지만 도밍고는 테너 음역에 맞게 키를 높여서 불렀다. 음악적 영향력이 커진 만년에는 세계적인 무대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에서 사르수엘라 아리아로만 구성된 콘서트를 가져 호평을 받기도 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미남형이라서 때문에 극장용 또는 비디오용 오페라 영상 주역을 자주 맡았다. 지금껏 도밍고가 출연한 오페라 영상물은 5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가히 오페라 영화의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다소 어두운 칼라의 테너들을 선호했는데,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존 비커스를 중용했으며, 70년대말부터는 카레라스를 선호했다.[5][6] 도밍고가 카라얀과 처음 작업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에선 음반 녹음을 위해서 파바로티가 캐스팅됐고, 음반 녹음 직후에 진행된 영상물 녹화 세션에서야 도밍고가 기용되었다. 평소에 지휘에 관심이 많았던 도밍고는 카라얀과 처음 작업하는 자리인만큼 준비를 잘 갖추고 들어갔는데, 리허설도 없이 바로 녹음 세션이 들어가더니, 단 한 번만에 카라얀이 'OK'해서 당황했다고 한다.[7]
한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와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스리 테너 콘서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 오페라와 성악은 물론이며 일반 대중가요까지도 폭 넓게 불러왔으며, 존 덴버와 같이 불러 유명한 Perhaps Love, 모린 맥기번과 같이 부른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등 팝송을 담은 크로스오버 앨범들도 많이 내놓았다. 파바로티가 유명 가수들을 섭외해 진행한 자선 공연 시리즈인 '파바로티와 친구들'을 벤치마킹했는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 가수들을 불러모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빈 교향악단의 반주로 크리스마스 대중 콘서트를 개최하고 그 실황으로 라이브 앨범을 발매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유명한 마드리디스타[8] 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공식 응원가도 2번 맡았는데, 각각 창단 100주년 기념 곡 《Himno del Centenario del Real Madrid》(Hala Madrid), 챔피언스 리그 10회 우승 기념 곡 《Hala Madrid y nada más》로 의미가 큰 곡들이다. 《Hala Madrid y nada más》 같은 경우 원곡(2014년)이 있는 상황에서 2016년 11회 우승 달성 기념으로 새 버전을 녹음했다.
2011-12 시즌 라 리가 우승 축하 행사 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직접 나와 《Himno del Centenario》를 부르기도 했다.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 등과 더불어 2012년 레알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도밍고가 카레라스의 백혈병 투병을 계기로 카레라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잘못된 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호세 카레라스 문서와 다음의 웹 문서를 참고하라. 실제 카레라스와 관계는 라이벌이자 친구였다고 한다. 루머랑 달리 나쁜 사이는 아니라고.
성악가로서 전성기였을 때도 콘서트에서 직접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성악을 하기 힘들어지면 지휘자로 먹고 살겠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실제로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지휘자 활동이 많아지고 있다. 다만 아직 성악가로서도 은퇴는 하지 않은 듯.
199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성악 콩쿨을 만들어 계속해서 성악 인재들을 발굴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공연 중 쑥쓰러워 하면서 부른 그리운 금강산의 한국어 발음이 한국인 성악가보다 정확해 업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9] 뿐만 아니라 도밍고는 199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쓰리테너 콘서트에서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일본 청중들 앞에서 미소라 히바리의 명곡 川の流れのように를 불렀는데 일본어 발음이 많이 서툴러서 거의 발음을 뭉개다시피 부르는(...) 카레라스, 파바로티와 다르게 비교적 정확하게 발음해서 부르기도 했다.
지휘에 관심이 많은 만큼 같이 공연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 거장 지휘자들에 대해 자서전에서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미 세계정상급의 성악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얀과의 첫 녹음에서 상당히 긴장했던 듯 하다. 카라얀은 성악가들을 선정함에 있어 기존의 네임 밸류보다는 자신의 미학에 따라 선정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바리톤 ~ 테너까지 모두 소화 가능한 도밍고가 카라얀과 잘 어울릴 법 하지만, 의외로 카라얀이 도밍고와 남긴 녹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카라얀은 도밍고가 명성을 날렸던 주요 작품(오텔로, 아이다, 돈 카를로, 일 트로바토레, 카르멘, 토스카)[* 상기된 레퍼토리에서 도밍고는 70 ~ 80년대 녹음된 음반의 대다수에서 주역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녹음된 음반에서 도밍고가 아닌 테너의 음반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
공공연히 외도를 한 파바로티와 달리[10] ,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타와 30년 이상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들들 중 플라시도 도밍고 주니어는 싱어송라이터와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고, 아버지가 개최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비롯한 무대에서 자작 가요들을 내놓은 바 있다.
2019년 8월, 미투 운동 폭로 대상이 되는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십년간 여성 성악가, 무용가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것.
미국의 유명 극장들은 성추문 의혹이 발생한 직후 도밍고를 출연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지만, 유럽 업계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거, 확실한 사안(예, 본인의 인정)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도밍고의 공연을 계속 유지하였다. 또한 도밍고가 평소 자기 후배나 제자들이 '''"무대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양보"'''[11][12] 하곤 했던 덕분에, 업계의 실력자로 성장한 후학들과 꾸준히 무대 위에 서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오페라 노조(AGMA)의 조사 결과가 나온 후, 결국 자신을 성희롱 혐의로 고소한 여성들에게 사과("l'm truly sorry")하게 된 일이 영국 BBC 등을 통해 보도된다. 당초 결백을 주장해 오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사 결과가 나온 후 고개를 숙였다는 점에서 다시한 번 명성에 타격을 입게 된 것.# 게다가 도밍고 본인이 사과를 했기 때문에, 그간 도밍고의 활동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 스페인에서도 그의 공연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 현재, 도밍고측에서는 28일에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며, 기존 공연의 취소를 재고해달라고 호소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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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가족 19시즌 2화[13] 에 본인이 목소리 출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애니에서도 성우로서 활약했는데, 디즈니사의 비벌리 힐스 치와와의 몬테쥬마, 마놀로와 마법의 책의 캐릭터 호르헤 산체스의 목소리를 맡은 바 있다. 마놀로와 마법의 책 OST에 도밍고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2018년 7월 스페인의 플래그 캐리어인 이베리아 항공에서 자사의 첫 A350 여객기 인도를 받았을 때, 비행기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2020년 3월 23일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았고, 합병증 증상까지 보여 현재 멕시코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다. 7월에 완치판정을 받아 8월부터 활동을 재개했다.
1. 개요
Plácido Domingo, 1941년[1]1월 21일 -
풀네임은 호세 플라시도 도밍고 엠빌(José Plácido Domingo Embil). 스페인과 멕시코의 성악가이자 지휘자.
2. 약력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모두 스페인 민속 오페라인 사르수엘라(Zarzuela) 극단에서 활동하던 가수였다. 여덟 살 때 부모는 멕시코 사르수엘라 극단으로 이적했고 도밍고는 부모를 따라 그곳에서 성장했다. 멕시코시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지만, 이후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어 부모처럼 사르수엘라 극단의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1년 멕시코시티 오페라 극장에서 바리톤으로 공식 데뷔했지만, 우연히 테너 성부 악보 몇 개를 초견으로 몇 번 부르던 것을 극장 관계자들이 듣게 되었는데, 그들이 이것을 좋게 평가한 것도 모자라 배역을 바꾸도록 권유했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 이후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남주인공인 알프레도 역으로 출연하면서 테너로 전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서 1965년까지 텔아비브의 이스라엘 국립 오페라단에서 활약했다. 1965년부터 뉴욕 시티 오페라단에서 활동하다가 1968년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을 훌륭히 소화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이후 짦은 기간 동안에 세계 각지의 오페라 극장 무대를 석권하면서 불과 1~2년 사이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도이체 그라모폰, 데카, RCA 등 세계 유수의 클래식 레이블들과 계약을 맺고 여러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197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카라얀이 지휘하는 돈 카를로의 타이틀 롤을 맡아 최고의 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1981년 존 덴버와 함께 녹음한 크로스 오버 음반 Perhaps Love가 발매되어 큰 히트를 치며 크로스 오버 음악계의 한 획을 그었다.
1980년대에는 오페라의 영화화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성악 실력에 외모까지 겸비한 도밍고가 자주 주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러한 오페라 영화 영상물들이 발매되면서 도밍고의 명성도 세계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라틴계 성악가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진출했다. 처음에는 단발성 출연에 그칠 것으로 보였지만, 매우 박한 개런티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꾸준히 출연하면서 90년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성악가 중 한명이 되었다.
2009년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바리톤으로 회귀하여 시몬 보카네그라의 타이틀 롤로 재데뷔했다. 시몬 역을 맡는 도중에 직장암으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2010년 봄에 수술을 받은 뒤 완쾌되었고, 현재 오페라 무대와 콘서트에서 다시 활동 중. 수술 받은 후에는 무대 출연을 자제하는 편이라지만, 전보다 약간 줄었을 뿐 아직도 꾸준히 활동 중이다. 특히 일반적인 성악가들은 좋은 기량을 보여주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7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은퇴는커녕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수준을 넘어서서, 잊힌 작품이나 초연작, 바리톤 배역에 출연하는 등 아직도 새로운 배역을 맡으며 레퍼토리를 넓히고 있는 노익장을 발휘 중이고, 물론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한 가창을 보여주고 있다. 2013년 7월에도 색전증으로 입원하였으나, 퇴원하자마자 원래 잡혀 있던 페스티벌 일정을 모두 소화하는 강철 체력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현재는 건강 때문인지 타이틀 롤보다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히려 그 덕분에 레퍼토리는 더 넓어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류 역사상 평생 가장 많은 배역을 맡은 오페라 가수가 확실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그 외 2014년과 2016년에 내한을 하였는데, 이때도 들어보면 70세가 넘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목소리가 젊고 팔팔한 테너들보다 더 깊이 있는 음색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성량은 약간 줄어든 듯하다.
2018년 10월 26일 내한이 확정되었다!#
2.1. 지휘자
대학 시절 지휘를 공부했고, 초기에 사르수엘라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미 악단에서 보조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지휘 경험을 쌓았다. 이후 한동안 오페라 성악가로서 커리어를 쌓는데 전념했지만, 테너로서 명성이 확고해진 후 지휘 역시 경력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해 1973년, 뉴욕 시티 오페라단에서 오페라 지휘자로 데뷔했다. 1983년 세계적인 런던 코벤트 극장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를 지휘한 공연이 영상물로 발매되기도 했다.
▲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을 지휘하는 플라시도 도밍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9년
재미교포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1980~)와 오페라 <카르멘>을 협연하는 플라시도 도밍고.
▲ 도밍고의 지휘가 약간 어색하다 싶으면, 중간중간 지휘자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지휘석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는 장영주의 모습도(예, 2:50초 ~) 확인할 수 있다.
성악가로서 활동하면서도 그는 커리어 내내 지휘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때때로 콘서트를 지휘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오페라 지휘자로 머물렀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도밍고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폭넓은 편으로 바그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역을 포괄하는데,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오페라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와 오페레타 등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작품도 자주 지휘하고 있다.
지휘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성악가로서 무대에 오를 때에도 오케스트라 피트를 자세히 관찰할 때가 많다고 한다.
3. 평가
원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더불어서 세계 3대 테너로 불렸지만, 파바로티 사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테너다.[2]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를 비롯한 수많은 학위와 미국의 대통령 자유 훈장,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영국의 명예 기사 훈장[3] 등 온갖 상훈도 있다. 물론 이런 영예는 도밍고뿐만 아니라 파바로티와 카레라스 역시 휩쓴 바 있다.
파바로티와 비교하여 목소릴 분류하자면 그는 리릭 테너보다 좀 더 무거운 성질인 스핀토 테너[4] 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만 한정하기에는 리리코와 드라마티코의 배역에도 잘 어울리는 음성을 가지고 있다. 성악가들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인 언어의 장벽도 거의 없어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레퍼토리는 물론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등 엄청나게 폭 넓은 언어로 된 오페라 배역들을 소화해낸다. 이들 언어로 상당한 수준의 회화까지 가능한 수준이라고. 도밍고는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 성악가로 기억되지만 후술되어 있듯이 독일 오페라 분야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실제로 도밍고는 독일어에도 상당히 능통하다. 독일의 토크쇼에 출연하여 프리토킹 수준의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했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로 영어 토크쇼에도 여러차례 출연했다. 학생 시절에 이런저런 연극 무대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험도 있어서 연기력도 상당히 뛰어나며, 대사와 음악을 빨리 외우는 능력 또한 갖춰 레퍼토리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쉬지 않고 연구하는 그의 열정이 도밍고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바리톤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리톤 배역을 부른 적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본인이 피가로역을 맡은 세비야의 이발사. 전곡 녹음과는 별도로 비디오 더빙으로 혼자서 테너와 바리톤의 2중창을 부르기도 했다. 다만 바리톤으로 시작해 테너 성부로 음역대를 끌어올린 탓에, 파바로티처럼 투명하고 파워풀한 고음을 내지는 못 한다. 물론 도밍고만 못 내는 게 아니다(...). 어쨌거나 안티들의 경우에는 테너이면서도 커리어의 대부분에 걸쳐 일명 하이 C로 통하는 높은 도(Do)를 내지 않았던 도밍고의 약점을 희화화시켜 'Mingo'라고 부르기도 한다. 쉽게 말해 '도'밍고에서 '도'를 뺀 거다(...). 대신 그 약점을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목소리, '3대 테너' 중 가장 다양한 레퍼토리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손쉽게 커버해낸다.
상당한 학구파로 유명하다. 음대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던 탓에 이 분야들에서도 나름대로의 능력자임을 보여주는데, 특히 지휘 쪽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오페라뿐 아니라 관현악 작품들에도 손을 대고 있는 중. 그의 자서전을 보면 파바로티나 카레라스 등 다른 가수들과 달리 클라이버, 카라얀 등 자신이 함께 했던 거장 지휘자들과의 인연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오페라 가수로선 매우 한정된 레퍼토리만 반복적으로 소화했던 파바로티와는 달리 끊임없이 새로운 배역에 도전해 현재 126개의 배역을 소화한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중 몇 개는 바리톤 배역이다.
새로운 레퍼토리 도전과 관련해 특히 커리어 후기에 접어들어서 바그너 테너 역에 도전한 것이 눈에 띈다. 음악 역사상 이탈리아 오페라와 바그너 오페라 양쪽에 정통한 거의 유일한 테너라 할 수 있다. 사실 도밍고는 제법 젊은 시절인 1968년에 처음 로엔그린 역할을 불렀다. 처음에는 로엔그린, 탄호이저 등 초기 바그너의 다소 라이트한 역부터 시작했지만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배역을 넓혀갔다. 1985년과 1986년에 시노폴리와 솔티가 각각 지휘한 탄호이저와 로엔그린 음반을 녹음하면서 본격적으로 바그너 가수로서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90년대 바그너 가수 기근 현상과도 맞물려 이 분야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1991년에는 바그너 음악의 성지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진출했다. 바이로이트는 출연료가 아주 박하기로 유명해서 도밍고가 처음 바이로이트에 섰을 때는 일회성 출연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는 수 년 동안 꾸준히 활약하여 바이로이트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테너가 되었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헬덴 테너의 정점에 있는 배역인 지크프리트와 트리스탄까지 소화하는데 성공했다. 바그너 음반 중에서는 특히 로엔그린 실황 영상물이 추천할 만하며, 파르지팔 등의 역할도 매우 훌륭하다.
바그너 이외에도 모차르트 오페라에 대한 도전도 눈에 띈다.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테너 배역은 역할이 크지 않으면서 독특한 스타일과 때때로 고난이도의 기교가 요구되기 때문에 이탈리아 오페라나 바그너 오페라들과는 또 다른 영역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도밍고는 모차르트의 이탈리아어 오페라뿐만 아니라 마술피리와 같은 독일어 작품도 모두 레퍼토리로 삼았다. 도밍고는 EMI에서 모차르트 아리아를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안타깝게도 전문 모차르트 테너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인지, 모차르트의 작은 배역을 맡기기엔 몸값이 너무 비싸서인지 전곡 음반은 거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도밍고의 EMI 모차르트 음반은 그가 라이브에서 노래했던 것 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허나 이 음반이 도밍고의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소스였다. 그러나 최근 유튜브에서 도밍고가 실제 라이브로 노래한 모차르트를 들어볼 수 있다. 프리츠 분덜리히나 스튜어트 버로우즈 같은 일급 모차르트 전문 테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가창을 들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밍고는 요즘은 자주 듣기 힘든 독일 오페레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90년 3테너 콘서트에서 레하르의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에서 나오는 테너 아리아인 "Dein ist mein ganzes herz"를 부른 것이 유명하다.
그 밖에도 베토벤 장엄미사, 베토벤 교향곡 제9번도 여러차례 부르고 녹음도 남겼다.
아울러 90년대 이후에는 차이코스키 등 러시아 오페라로 영역을 넓혔다. 정말 그의 도전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부모와 본인의 음악적 뿌리라 할 수 있는 스페인의 민속 오페라 사르수엘라를 알리려는 노력도 기울였는데, 1985년 소프라노 필라 로렌가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사르수엘라 콘서트를 가져 호평받았다. 로렌가는 스페인 출신이지만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활약하며 독일에서 명성을 쌓았는데 그녀 또한 처음에는 사라수엘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었다. 이후 도밍고는 몇 장의 사르수엘라 음반을 내기도 했으며, 98년 3테너 콘서트에서 페데리코 모레노 토로바가 작곡한 사르수엘라 "Maravilla"에 나오는 아리아 "Amor, vida de mi vida"를 불렀다. 참고로 이 아리아는 원래 바리톤을 위한 아리아이지만 도밍고는 테너 음역에 맞게 키를 높여서 불렀다. 음악적 영향력이 커진 만년에는 세계적인 무대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에서 사르수엘라 아리아로만 구성된 콘서트를 가져 호평을 받기도 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미남형이라서 때문에 극장용 또는 비디오용 오페라 영상 주역을 자주 맡았다. 지금껏 도밍고가 출연한 오페라 영상물은 5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가히 오페라 영화의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다소 어두운 칼라의 테너들을 선호했는데,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존 비커스를 중용했으며, 70년대말부터는 카레라스를 선호했다.[5][6] 도밍고가 카라얀과 처음 작업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에선 음반 녹음을 위해서 파바로티가 캐스팅됐고, 음반 녹음 직후에 진행된 영상물 녹화 세션에서야 도밍고가 기용되었다. 평소에 지휘에 관심이 많았던 도밍고는 카라얀과 처음 작업하는 자리인만큼 준비를 잘 갖추고 들어갔는데, 리허설도 없이 바로 녹음 세션이 들어가더니, 단 한 번만에 카라얀이 'OK'해서 당황했다고 한다.[7]
4. 그 외
한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와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스리 테너 콘서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 오페라와 성악은 물론이며 일반 대중가요까지도 폭 넓게 불러왔으며, 존 덴버와 같이 불러 유명한 Perhaps Love, 모린 맥기번과 같이 부른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등 팝송을 담은 크로스오버 앨범들도 많이 내놓았다. 파바로티가 유명 가수들을 섭외해 진행한 자선 공연 시리즈인 '파바로티와 친구들'을 벤치마킹했는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 가수들을 불러모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빈 교향악단의 반주로 크리스마스 대중 콘서트를 개최하고 그 실황으로 라이브 앨범을 발매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유명한 마드리디스타[8] 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공식 응원가도 2번 맡았는데, 각각 창단 100주년 기념 곡 《Himno del Centenario del Real Madrid》(Hala Madrid), 챔피언스 리그 10회 우승 기념 곡 《Hala Madrid y nada más》로 의미가 큰 곡들이다. 《Hala Madrid y nada más》 같은 경우 원곡(2014년)이 있는 상황에서 2016년 11회 우승 달성 기념으로 새 버전을 녹음했다.
2011-12 시즌 라 리가 우승 축하 행사 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직접 나와 《Himno del Centenario》를 부르기도 했다.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 등과 더불어 2012년 레알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도밍고가 카레라스의 백혈병 투병을 계기로 카레라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잘못된 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호세 카레라스 문서와 다음의 웹 문서를 참고하라. 실제 카레라스와 관계는 라이벌이자 친구였다고 한다. 루머랑 달리 나쁜 사이는 아니라고.
성악가로서 전성기였을 때도 콘서트에서 직접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성악을 하기 힘들어지면 지휘자로 먹고 살겠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실제로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지휘자 활동이 많아지고 있다. 다만 아직 성악가로서도 은퇴는 하지 않은 듯.
199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성악 콩쿨을 만들어 계속해서 성악 인재들을 발굴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공연 중 쑥쓰러워 하면서 부른 그리운 금강산의 한국어 발음이 한국인 성악가보다 정확해 업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9] 뿐만 아니라 도밍고는 199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쓰리테너 콘서트에서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일본 청중들 앞에서 미소라 히바리의 명곡 川の流れのように를 불렀는데 일본어 발음이 많이 서툴러서 거의 발음을 뭉개다시피 부르는(...) 카레라스, 파바로티와 다르게 비교적 정확하게 발음해서 부르기도 했다.
지휘에 관심이 많은 만큼 같이 공연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 거장 지휘자들에 대해 자서전에서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미 세계정상급의 성악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얀과의 첫 녹음에서 상당히 긴장했던 듯 하다. 카라얀은 성악가들을 선정함에 있어 기존의 네임 밸류보다는 자신의 미학에 따라 선정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바리톤 ~ 테너까지 모두 소화 가능한 도밍고가 카라얀과 잘 어울릴 법 하지만, 의외로 카라얀이 도밍고와 남긴 녹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카라얀은 도밍고가 명성을 날렸던 주요 작품(오텔로, 아이다, 돈 카를로, 일 트로바토레, 카르멘, 토스카)[* 상기된 레퍼토리에서 도밍고는 70 ~ 80년대 녹음된 음반의 대다수에서 주역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녹음된 음반에서 도밍고가 아닌 테너의 음반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
- 위 레퍼토리에서 도밍고가 남긴 음반의 지휘자는 다음과 같다. 돈 카를로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라 트라비아타 - 카를로스 클라이버,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아이다 –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리카르도 무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오텔로 – 제임스 레바인, 로린 마젤, 게오르그 솔티(영상물), 정명훈,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리카르도 무티(영상물), 일트로바토레 – 카라얀(영상물), 주빈 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제임스 레바인, 카르멘 – 게오르그 솔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를로스 클라이버(영상물), 로린 마젤, 토스카 – 주빈 메타, 브루노 바르톨레티(영상물), 제임스 레바인, 주세페 시노폴리(영상물), 주세페 시노폴리, 주빈 메타(영상물)]에서도 도밍고 대신 상대적으로 커리어가 약했던 다른 테너를 기용했고, 특히 79년 이후에는 당시 기준으로 도밍고보다 커리어가 훨씬 짧았던 호세 카레라스와 대부분 녹음했다. 카라얀이 카레라스와 남긴 음반으로는 돈 카를로, 아이다, 카르멘, 토스카, 베르디 레퀴엠 등이 있다. 카라얀이 79년 이전에 녹음한 일트로바토레 등도 79년 이후에 녹음되었다면 아마도 카레라스가 기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레라스가 쓰리 테너로 도약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 카라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라얀이 도밍고와 녹음한 정규 음반은 투란도트와 가면무도회 정도 밖에 없다. 도밍고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카라얀이 가면무도회에 도밍고를 기용한 것도 당시 카레라스가 백혈병 투병 중이어서 기용할 수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도밍고를 기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정규음반 외에 카라얀은 도밍고와 영상물 2편(나비부인, 일트로바토레)을 남겼는데, 특기할만한 점은 둘 다 카라얀이 영상물 제작 직전에 거의 동일한 배역진으로 녹음한 정규 음반을 녹음했었는데, 여기서는 다른 테너(파바로티, 보니솔리)를 기용했다는 점이다. 비주얼 배우로서의 선호를 제외한다면 카라얀에게 도밍고는 목소리 자체로는 최선의 옵션이 아니었다는 심증을 더욱 강하게 해주고 있다. 도밍고가 카라얀에게 가졌던 존경심, 그리고 해당 배역에서 도밍고가 떨쳤던 명성, 그리고 오페라에서 극도의 유려함을 추구했던 카라얀의 해석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2018년 10월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판매 티켓 최고가는 55만원으로 책정되었다. 다만 이건 전체 좌석 중 150석 가량되는 협찬사 물량(55만원 Svip 석, 44만원 Vvip 석)이고, 그 외에 VIP석 25만원, R석 18만원, S석 12만원, A석 8만원 B석 5만5천원이다. 고액 좌석 논란에 주관사는 억울하다는 입장.4.1. 사생활
공공연히 외도를 한 파바로티와 달리[10] ,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이후에는 마르타와 30년 이상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들들 중 플라시도 도밍고 주니어는 싱어송라이터와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고, 아버지가 개최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비롯한 무대에서 자작 가요들을 내놓은 바 있다.
2019년 8월, 미투 운동 폭로 대상이 되는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십년간 여성 성악가, 무용가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것.
미국의 유명 극장들은 성추문 의혹이 발생한 직후 도밍고를 출연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지만, 유럽 업계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거, 확실한 사안(예, 본인의 인정)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도밍고의 공연을 계속 유지하였다. 또한 도밍고가 평소 자기 후배나 제자들이 '''"무대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양보"'''[11][12] 하곤 했던 덕분에, 업계의 실력자로 성장한 후학들과 꾸준히 무대 위에 서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오페라 노조(AGMA)의 조사 결과가 나온 후, 결국 자신을 성희롱 혐의로 고소한 여성들에게 사과("l'm truly sorry")하게 된 일이 영국 BBC 등을 통해 보도된다. 당초 결백을 주장해 오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사 결과가 나온 후 고개를 숙였다는 점에서 다시한 번 명성에 타격을 입게 된 것.# 게다가 도밍고 본인이 사과를 했기 때문에, 그간 도밍고의 활동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 스페인에서도 그의 공연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 현재, 도밍고측에서는 28일에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며, 기존 공연의 취소를 재고해달라고 호소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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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가족 19시즌 2화[13] 에 본인이 목소리 출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애니에서도 성우로서 활약했는데, 디즈니사의 비벌리 힐스 치와와의 몬테쥬마, 마놀로와 마법의 책의 캐릭터 호르헤 산체스의 목소리를 맡은 바 있다. 마놀로와 마법의 책 OST에 도밍고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2018년 7월 스페인의 플래그 캐리어인 이베리아 항공에서 자사의 첫 A350 여객기 인도를 받았을 때, 비행기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2020년 3월 23일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았고, 합병증 증상까지 보여 현재 멕시코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다. 7월에 완치판정을 받아 8월부터 활동을 재개했다.
[1] 1934년에 태어났다는 루머가 예전부터 돌았으나, 일단은 자신이 직접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혔다.[2] 물론 지금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오페라에선 자신의 원래 성부였던 바리톤으로 활동한다.[3] 외국인에게 주는 명예 KBE 훈장으로, 정원 외이기 때문에 'Sir' 칭호도 붙지 않는다.[4] 리릭과 드라마틱의 중간 성질을 가진 소리로, '스핀토(Spinto)'란 이태리어로 '찌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목소리로 분류되는 테너는 말 그대로 고음을 앞으로 찌르듯이 강렬하게 밀어붙이면서 확실하게 잘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요구되며, 통상적인 리릭 테너보다 더 중량감 있는 소릴 가진 게 특징이다.[5] 카라얀은 지휘능력 외에도 업계의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이들을 설득하는 능력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3테너 중 가창의 폭발력이 "상대적으로"(링크 : 번스타인 작곡 및 지휘, <Maria>) 약한 카레라스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도 카라얀의 공로가 적지 않다고[6] 카라얀이 도밍고와 녹음한 정규 음반은 <투란도트>와 <가면무도회> 정도 밖에 없다. 그나마 <가면무도회> 역시, 녹음 작업 즈음 카레라스가 백혈병 투병 중이 아니었으면, 카레라스에게 배역이 갔을 수도 있었을 만큼, 카라얀 지휘에서만큼은 도밍고가 아닌 카레라스나 조수미처럼 미성을 지닌 성악가들이 중용되었다는 후문. 조수미는 보기 드물게 미성과 흔들림없는 힘, 성량까지 모두 갖춘 사례라, 카라얀이 '''"신께서 내려주신 목소리"'''라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7] 이미 직전에 파바로티와 음반 녹음이 진행된 사실을 몰랐던 듯. 파바로티와 도밍고 이외의 다른 배역은 다 동일하다. [8] 스페인의 대표적인 축구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CF의 팬.[9] 한국 성악의 딕션이 외국보다 부정확하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 영상이 그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영상은 1995년에 있었던 홍혜경과 플라시도 도밍고, 베이스 연광철의 합동 연주회였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연광철이나 홍혜경보다도 오히려 더 정확한 한국어 가사를 들려준다.[10]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죽은 덕분에, 말년의 불명예를 피할 수 있었다.[11] 음악은 운동처럼 짧은 시간 내에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는 직종이라, 종사자들의 승부욕이 남다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이 빛날 수 있는 무대의 highlight(4:10초부터)를 양보하는 광경은 흔치 않은 일[12] 첨부된 영상(트리오 Il Volo, 도밍고 협연)에서 도밍고는 <Non tis corda>를 부른 5:39초부터 자기 파트가 오자, 콧노래로만 흥얼거리다, 트리오 리더 잔루카 지노블레가 재촉하자 잠깐 노래가사를 넣어 부른다. 기본 발성은 배웠으되 정식으로 벨칸토 창법을 익히지 않은 이들 신예 트리오(90년대 중후반 출생)가, 무대에서 더 빛날 수 있도록 한 것. ※ 자세히 보면 도밍고가 학생 채점하는 음악 선생님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모습도 볼 수 있다.[13] 호머가 우연히 등을 다치고는 성악가가 되는 에피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