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프랑코
1. 개요
과거 스페인국의 국가원수이자 독재자. 통칭 '''"카우디요(Caudillo)"'''는 한국어로 '''"지도자"''' 정도로 번역된다.'''우리는 투표소로 만들어진 정부 따위 믿지 않는다. 스페인 국민의 열망은 투표함 따위로 표출되지 않는다. 스페인은 (그런) 바보같은 꿈은 꾸지 않는다.'''
1936년 공산당 및 범 좌파가 연합한 인민전선의 집권에 위기감을 품은 스페인 우파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의 주역으로 권좌에 올라 1939년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고 1947년에는 스페인을 국민투표로 왕정체제로 되돌린 뒤 스스로 섭정이 되어 종신권력을 획득했고,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다. 프랑코 시절 스페인은 20세기 초 해군중장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섭정 신분으로 독재하던 헝가리처럼 '''국왕 없는 왕국'''이었다.
본명은 프란시스코 파울리노 에르메네힐도 테오둘로 프랑코 이 바아몬데 살가도 파르도 데 안드라데(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Salgado Pardo de Andrade)로, 줄이면 프란시스코 프랑코 이 바아몬데(Francisco Franco y Bahamonde)가 된다. 스페인인들의 정식 이름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부, 모계 성이 몇 대씩 따라붙는다.[4] Teódulo까지가 이름/세례명이고, 그 뒤가 전부 성이며 그중에서도 Franco와 Salgado는 부계, Bahamonde와 Pardo de Andrade는 모계 성이다. 프랑코의 모계 성은 대체로 갈리시아/포르투갈 계통의 가문명이다.
2. 유년기
1892년 12월 4일에 스페인 북부의 주요 해군 기지였던 갈리시아 주 페롤의 해군 가문에서 태어났다. 1살 위 형인 니콜라스와 동생 라몬, 그리고 2명의 누이가 더 있었는데, 이중 해군 장교였던 형 니콜라스는 프랑코의 집권에 큰 공헌을 했다. 동생인 라몬은 뛰어난 실력의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
3. 군인 경력
3.1. 모로코의 전쟁영웅
프랑코는 집안 내력에 따라 스페인 해군에 지원하려 했지만, 그 무렵 스페인이 미서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해군도 대폭 축소되어 해군사관학교가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문을 닫았기에 아버지의 말에 따라 1907년(16세) 톨레도에 있는 육군 보병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19세) 사관학교를 졸업해 중위가 된 프랑코는 1912년(21세)에 모로코 전선에서 벌어지는 리프 전쟁[5] 에 참전했다. 리프 전쟁에서 프랑코는 지리멸렬한 지휘로 추태를 보이던 다수 스페인군 지휘관들과는 달리 모로코 현지인들로 구성된 외인부대 레굴라레스의 지휘관으로 맹활약해 일약 전쟁영웅으로 부상했다.[6] 그 공으로 1916년에는 25세에 스페인군 최연소 대위가 되어 전도유망한 장교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 비우츠 전투에서 한쪽 낭심에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부상 중에도 의사를 권총으로 협박해 수술을 집도시켜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외인부대원들로부터 '''기적의 남자'''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 프랑코는 별다른 무공훈장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소령으로 진급하여 최연소 영관이 된다.
1923년(32세)에는 중령으로 승진하여 프랑스 외인부대를 본따 창설한 스페인 외인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결혼도 했는데, 스페인군의 전쟁 영웅이었기에 결혼식에서 대부 역할을 국왕 알폰소 13세가 맡아주었다.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프랑코는 26년(35세)에는 최연소 장성이 되고, 28년(37세)에는 사라고사에 새로 설립된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이 된다. 새로 설립된 육사는 기존의 보병, 기병, 포병 장교를 개별적으로 양성하던 관례를 깨고, 통합적인 장교양성과정을 도입하여 육군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목표로 하였다. 또한 이때 신규 육사에서 교육을 받은 장교들의 다수는 훗날 프랑코의 친위세력이 된다.
외인부대 사령관 시절 프랑코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너무나 부실한 급식을 참다 못한 병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급기야 주동자쯤 되는 병사가 프랑코의 얼굴에 음식을 집어던졌는데, 프랑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급양장교를 불러오게 해 그 병사가 보는 앞에서 "즉시 급식의 질을 개선하도록!"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리고 저 자(자신에게 음식을 던진 병사)를 즉시 끌어내 총살하도록!"'''이란 명령을 내렸다. 훗날 프랑코가 걷게 될 길을 암시하는 듯한 상당히 섬뜩한 일화다.
3.2. 제2공화국
1930년대 초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불황과 정치적 실책을 극복하지 못한 보르본 왕가의 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왕정이 붕괴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된다.
프랑코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공화정부는 툭하면 쿠데타를 남발하던 다른 장군들보다 프랑코를 다루기 쉬운 인물로 여겼다. 1931년 무렵 호세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에도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오히려 그는 1931년 공화국 수립 이후로 '우리에겐 공화국을 도와 자유와 정의를 실현할 의무가 있다'며 생도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등 공화국에 가장 협조적인 장군으로 보였고 공화국에서도 '이 사람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라고 판단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평화기에만 그렇고 혼란기라면 봉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하지만 당시 전쟁장관을 맡고 있던 마누엘 아사냐[7] 가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생도들에게 프랑코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알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는 그대로 폐쇄되었고, 프랑코는 폐교 후 6개월 동안 보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1933년 2월에 프랑코는 발레아레스 제도로 파견된다. 1933년 10월에는 이른바 아스투리아스 혁명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 반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쟁장관 디에고 이달고의 지원을 얻은 프랑코는 사단장 자격으로 반란 진압을 담당한다. 그리고 후에 스페인 내전의 용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훌리오 야구에 중령이 지휘하는 외인부대를 파견하여 오초아 장군의 응원군과 함께 반란군을 참혹하게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오초아 장군은 모로코 출신의 용병들이 포로 및 양민 학살 등의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고, 포로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했다. 그런데 그 이유로(...) 전간기 파시즘으로 가득 찬 스페인 군부 내에서 왕따가 되는 통에 프랑코는 반란진압의 1등공신이 되고, 이로 인해 1935년에는 아프리카 파견군 총사령관을 맡고 다시 스페인군 참모총장이 된다.
4. 스페인 내전
4.1. 장군들의 반란
공화정 수립 4년만인 1936년에 다시 정부가 붕괴되고 이른바 인민 전선이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좌파 연합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 우파 세력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이미 스페인 좌우파의 대립은 유혈사태로 이어진 전례가 있었다.
게다가 공화국은 우파 세력의 주요 구성원이면서 왕정 시대 거의 절대적인 특권을 보장받던 가톨릭 교회를 적극 견제했다. 원래는 가톨릭 교회 전체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부담스럽다 하여 예수회가 주 타겟이 되었다.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 따르면 가령 토지나 재산 등의 몰수, 특권 박탈 등의 주 타겟이 예수회였다. 이 때 몰수당한 재산이나 특권 등은 프랑코 시대에 정부에서 돌려준다.
그러나 정작 반동적 극우 사상이 팽배했던 당대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그나마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민중에 친화적인 성향을 보였던 파벌이 예수회였다. 당시 스페인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 본인들 또한 역사적으로 종특수준으로 교육을 강조했던 예수회 교육 과정이나 기관 출신이었고, 당시 스페인 진보 교육계를 지배한 조류였던 아나키스트 프란세스크 페레르 이 가르디아의 에스쿠엘라 모데르나(근대 학교) 운동 또한 예수회의 영심수련에 큰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에서 예수회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반대편에서도 단순히 우파의 주요 구성원인 가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샌드백으로 고른 것인데, 이런 사정 때문에 종교세력의 반발도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인민 전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위험 세력들을 제재하기 위해 군의 유력한 장군들을 외부로 떨어뜨려놓는 조치를 취한다. 이에 따라 프랑코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어 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되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프랑코는 자신의 세력기반이던 아프리카 파견군과 더욱 긴밀히 접촉할 수 있었고 이 시점에서 정부에 대한 그의 의견도 확고해진다.
하지만 프랑코는 이 시점에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상황을 주시하는 길을 택했다. 심지어 정부에 밀서를 써서 군부 내의 불만을 지금 당장 잠재워야 한다면서 필요하다면 자기도 돕겠다는 식으로 쿠데타가 곧 일어날 거라는 암시를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료 장군들로부터 불신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훗날 권력을 간단히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7월에 우파의 거물 정치이자 왕당파의 거두였던 칼보 소텔로가 좌파 정부에 부역하던 경찰에 의해 살해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7월 말, 국민 진영(Bando Nacional)이라는 이름으로 장군들과 우파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의 막이 오른다.
4.2. 권력장악
당시 국민 진영의 유력한 장군들은 대부분 스페인 영내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프랑코는 아프리카 파견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스페인군은 사실상 아프리카 파견군을 제외하면 향토방위군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프랑코의 영향력은 반란 초기부터 가장 컸다. 게다가 그때까지 반공주의 외에는 다른 정치적 성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태도 때문에 프랑코는 국민 진영을 구성하던 여러 파벌들에게 가장 적절한 지도자로 비춰졌고, 여기에 그의 형 니콜라스 프랑코의 로비 활동이 결실을 맺어 1936년 10월 1일에 프랑코는 국민 진영의 본거지인 부르고스에서 총통(3군 총사령관(Generalísimo) 겸 국가수반)이 된다.
국민 진영의 우두머리격이었던 산후르호는 진작 내전 발발 후 3일만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여기에 그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1937년 원인불명의 비행기 사고로 급사한다. 몰라 장군의 급사로 프랑코의 권력기반은 더욱 탄탄해진다.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왕초 노릇하던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내전 내내 프랑코에게 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내전이 끝난 뒤 실권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쓸 수 없게 되었다.
프랑코의 경쟁자 내지는 경쟁자 예비 후보들이 유독 비행기 사고로 많이 죽어 프랑코가 죽였다는 음모른이 돌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프랑코 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페인 내전 동안 국민군이 사고로 잃은 군용기는 공화군에게 격추당한 군용기보다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는 비행 기술 자체가 새로운 기술이라 여러가지 기술적, 운용적인 측면에서 불안정했던 시대다.[8] 그리고 이렇게 군용 비행이 아직 기술적으로 불안정했던 시절 해군이 공화파 수병들에게 장악당했으니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신기술의 개척자가 되어야 했던게 스페인 파시스트 진영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산후르호나 몰라 같은 스페인의 선구자들이 목숨으로 개척한 경험으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프랑코의 원조 세력은 2차대전이 터지자 축적된 항공 수송 기술을 잘 써먹었다.
4.3. 내전의 승리
당초 16만 정도이던 스페인군은 내전 발발 당시 국민진영에 약 10만, 공화정부에 6만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민 진영에서 프랑코가 이끌던 4만에 이르는 아프리카 파견군, 그 중에서도 주로 모로코 현지인들로 구성된 용병부대 레굴라레스와 스페인 외인부대에 필적할 정예부대가 공화정부에는 없었다.우리 정권은 선거 같은 위선적인 방법이 아닌, 총검과 피로써 쟁취한 것이다.
또한 실전경험이 있는 지휘관 대부분이 이른바 '''아프리카 당''', 즉 아프리카 파견 경력을 매개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부는 정예병사도, 신뢰할 지휘관도 없었다. 그나마 공업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제호황으로 인해 축적해두었던 상당량의 금괴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해군의 상당수가 공화정부를 지지했다는 점 정도가 공화정부가 믿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생부터 허약한 연립정권이었던 인민 전선 정부는 이런 이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갈팡질팡해야 했다.
이미 세계대전을 치른 당시 유럽 기준에서 볼 때 프랑코를 비롯해 국민 진영의 주요 지휘관들은 용감한 군인이긴 해도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부족했다. 1936년 7월의 반란도 실상 굉장히 조악한 것이어서,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기만 했어도 조기진압의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공화정부와 좌파 진영간 관계 때문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반면 프랑코가 이끌던 국민 진영에는, 왕당파인 카를로스파와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 등의 내부 계파가 있었긴 했지만, 아프리카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의 힘을 가진 프랑코의 힘이 이들을 억제하기 충분했기에 통합된 세력을 이끌 수 있었다. 이런 내부 파벌들도 내전 승리를 눈앞에 둔 프랑코가 팔랑헤 당을 중심으로 파시스트, 보수주의자, 왕당파에다가 노동조합주의자들까지[9] 모조리 통합하는 친위 쿠데타를 감행, 이른바 "통합 팔랑헤당"을 만든다.
이런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현재 학자들은 프랑코의 정치성향을 파시즘인지, 단순한 우파 권위주의+내셔널리즘으로 보는지 의견을 달리 한다. 프랑코 정권을 우파 권위주의 내셔널리즘 정권으로 보는 경우 저러한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태생적인 성격과 그 내에서 주도하기보다는 조절자 역할을 했던 프랑코의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파시즘 정권으로 보는 경우 가톨릭 보수주의를 근반으로 한 강제적인 국민적 사상 교육, 이에 따른 전쟁 이후로도 지속 되었던 전시 체제, 그리고 역시 가톨릭 교회를 매개로 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일상의 침투 등에 주목하며 프랑코 정권을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과 함께 걷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 전선 정부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독일 정부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끌던 이탈리아 왕국이였다. 히틀러는 스페인의 풍부한 광산과 대서양 연안에 있는 잠재적인 해군기지를 노렸고, 무솔리니는 장차 영국과 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다툴 때 영국의 지중해 주요 거점인 지브롤터를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파시스트 국가를 확보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당시 급속도로 재무장하고 있던 독일로서는 새로운 장비와 전술을 실전으로 시험한다는 점도 무시 못할 매력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포켓전함 '도이칠란트'와 '아드미랄 셰어'를 파견하여 공화정부의 해군을 견제하고, 콘도르 군단으로 유명한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이탈리아도 자국의 최신 피아트 전투기와 안살도 경전차를 비롯해서 수만 명의 파시스트 의용군을 파견한다.
또한 공화 정부 집권과 함께 좌파의 보복을 우려하여 해외로 도피했던 스페인 자본가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로비 활동을 펼쳐 공화 정부에 대한 지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프랑코에 대하여 미국이 석유를 계속 수출하게 만든다. 때문에 국민 진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폭격기와 이탈리아의 대포, 미국의 석유와 신용대부와 차량 덕분"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여기에 공화정부가 그나마 국제여단을 비롯한 지원세력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소진했다.
결국 1939년에 프랑코 군대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사실상 함락했다. 정확히는 마드리드가 함락된 것은 아니고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시내에서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는 시가전만 벌어지고 있었지만, 공화파의 주요 거점 도시들이었던 바르셀로나 등이 함락되으니 이미 대세는 결정난 것이었다. 제2공화국 주요 인사들은 파리로 달아나 망명정부를 세웠고, 프랑코는 전 스페인의 카우디요(지도자)가 된다.
5. 2차 세계대전과 프랑코
프랑코는 내전 기간 중 독일과 이탈리아, 두 파시즘 국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프랑코 자신도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동안 두 나라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프랑코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행동을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문명의 수호자'''라며 칭송하고,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던 6,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하인리히 힘러에게 넘겨 주는 등 나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그 '''음흉한 돼지'''와 협상을 벌이느라 또 다시 9시간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이빨 서너개 뽑히는 편이 낫겠소."
-아돌프 히틀러, 1940년 10월 23일 프랑코와의 엔다예 협정에 대해 무솔리니에게 말한 소감.
이러한 언행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코는 히틀러가 한 것과 같은 유대인 박해 정책을 펴지는 않았다. 물론 15세기의 유명한 유대인 탄압이 있은 뒤 400여년 동안 다시 스페인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10] 위의 명단도 당시 스페인 국적자도 아니고, 그냥 스페인에 살고 있으며 유대인으로 확인된 사람들만 6,000명이라 한 것이다. 주로 대부분 다른 유럽에서 도망치는 도중 스페인에 체류 중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더불어 주 헝가리 스페인 대사로 있었던 앙헬 산즈 브리즈 대사 같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외교관 신분을 사용하여 많은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운 바도 있으며, 정권이 이런 개인적 차원의 인도주의를 제재하진 않았다. 2차대전 도중 20,000~35,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통해 탈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일부 프랑코 옹호자들은 프랑코의 이런 행적을 프랑코 정권의 인도주의적 면모라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은 정권 차원에서 홀로코스트를 막기는 커녕 오히려 직접 저질렀다. 그 대상이 이미 스페인에 있지도 않았던 유대인들이 아니었을 뿐이며, 범위를 정치범까지 확장한다면 스페인도 홀로코스트 가담 국가다. 오늘날 홀로코스트 학계는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인, 집시 같은 인종적 분류 뿐만 아니라 프리메이슨,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정치범들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에 포함한다. 2차대전 개전 당시 프랑스로 망명해 있다가 프랑스 침공과 함께 나치에 사로 잡힌 공화파 스페인인 10,000명 정도가 "스페인인들의 수용소"란 별명까지 붙었던 마트하우젠 수용소를 비롯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고, 스페인 정부는 어차피 자국으로 송환되었어도 총살했을 자들이니 나치가 이들을 절멸수용소에서 확실하게 끝장내도록 종용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9,300명 가량의 스페인인 중 50%를 훌쩍 넘는 5,000명 가량이 마트하우젠, 다카우, 부헨발트 등에서 그 어떤 나라도 돌보아 주거나 구하려는 노력 없는 무국적자로 죽었다. 반면 이 생지옥의 와중에서도 수용소의 스페인인들은 일단 정치범들이니 신념에 따라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고, 와중에는 보르본 왕조 말기→제2공화국→나치 치하 유럽에서 좌파 혁명가, 레지스탕스 투사로 잔뼈가 굵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보니 그 뒤에 들어온 폴란드인, 소련인 수감자들에게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등 수용소 내 저항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11] 부헨발트 수용소의 경우 미군이 진주하기 겨우 며칠 전 나치가 수용소를 텅텅 비우려는 (즉, 자신들을 죽음의 행진으로 학살하려는) 당국의 의도를 알아챈 스페인인, 폴란드인 카포 주도로 수용소 봉기가 터져서 미군이 들어오기 전 자체적으로 캠프가 해방되었다.[12] 종전 후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전범 재판에 핵심적인 증거 자료가 된 수용소의 사진들을 남긴 친위대 산하 수용소 사진사였던 프란시스코 보이스[13] 또한 스페인 공화파 수감자였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스페인은 내전에서의 복구가 똑바로 안되었으며, 특히 프랑스와의 국경은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피신 루트로 사용했던 저 피레네 산맥 프랑스-스페인 국경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쯤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통합되어 나치 상대로는 물론이고, 종종 월경하여 프랑코군도 습격하곤 했던 공화파/좌익 잔당 게릴라도 쉽게 통과했고, 종전 직후에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망치려는 나치 인사들도 잘만 술술 통과했다. 정권의 의도와 상관 없이 기본적으로 국경을 비롯한 인구의 호구와 이동에 대한 통제가 똑바로 안되었다는 반증이다.
히틀러와 처음으로 대면했던 엔다예(엥다예) 협정에서 프랑코는 개판이었던 당시 스페인의 철도 사정 때문에 계속 열차가 연착되어 히틀러를 무척이나 오래 기다리게 했고 히틀러와 대면해선 계속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히틀러를 상대했는데, 내전 기간 중 독일의 도움과 히틀러의 행동에 대해 찬사하며 스페인과 독일은 정신적으로 동맹한 상태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가 영국에 맞설 것을 요구하자 스페인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들먹이며 이를 거절했고 히틀러의 말을 끊고 자기 얘기만 줄창 떠들어 히틀러를 몹시나 빡치게 했다. 특히 모로코 시절과 내전기를 비롯하여 자기 자랑만 3시간을 떠들었다. 히틀러가 만난 사람 중에서 히틀러가 말을 못하게 자기 말만 떠들었던 건 프랑코(와 만네르헤임)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이 협정에서 프랑코는 프랑스령 모로코와 오랑을 요구했고 히틀러는 이를 거의 일격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히틀러도 프랑코에게 카나리아 제도, 모로코의 해군 기지들,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와 카보베르데 제도까지 고압적으로 요구하여 프랑코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했다. 또한 히틀러는 지원의 대가로 스페인 북부의 광산들을 차지했고 헤르만 괴링 장군이 공화 정부에도 무기를 파는 등의 행각을 벌였으니 강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한 프랑코로서는 감정이 나빴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동맹 조건으로 무기 지원과 지브롤터 해협,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할양을 거는 무리한 협상으로 히틀러와의 협상을 끝낸 것 같다.
그리고 프랑코는 독일이 잘 나가던 194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내전 '''전후 복구'''만 도와주면 당장이라도 참전해서 도와드림"이란 식으로 살랑이를 떨었으나, 이 내전 복구와 스페인군을 다시 전력이 될 만한 단계로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필요를 해서 히틀러가 거절하였다. 다만 이는 핑계로 볼 수도 있다. 애초에 추축국치고 계획대로 전쟁 준비를 마치고 개전한 나라가 없다.
어찌되었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니 독일의 전쟁 수행에 이런저런 협력을 했다.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성으로 인해 스페인의 주요 항구였던 카디스는 대전 기간 동안 크릭스마리네(독일 해군)의 기지가 되었고, 스페인은 '청색사단(División Azul)'과 '청색 비행중대(Escuadrilla Azul)'이라는 이름으로 1개 보병사단과 비행중대를 독소전선에 파병하기도 한다. 이 청색 사단은 구성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친지, 친구 등이 내전 당시 공화파로 싸우다가 감옥에 갇혀 있어 연좌제를 피하는 겸 그들의 형기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참전했다는 비극적인 여담이 있다. 이 때 한가지 해프닝이 터졌는데 독일에서 청색사단과 파일럿들을 환영한답시고 군악대로 국가를 연주한게 하필이면 '공화파'의 국가를 연주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파견된 청색사단과 청색 비행중대는 프랑코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소련과의 전투에만 투입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영국과 미국[14][15][16] 에 대한 자신들의 경제적 의존 및 연합군의 보복을 우려하여 참전하지는 않았다. 당시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연합군이 곧 카나리아 제도를 공격할 것이니 빨리 독일 편에서 참전하여 나라를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지키라고 위협했으나 영국과 미국은 프랑코에게 카나리아 제도를 비롯한 스페인의 영토를 침범하거나 스페인 주권을 침해할 의도가 없음을 보장했고 이에 추축국 편으로 참전할 이유가 없음을 확신한 프랑코는 외무장관을 골수 친독 인사였던 처남 라몬 세라노 수녜르에서 실리파 호르다나 장군으로 바꾸고 연합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돌아갔으며 안톤 작전에 이르러선 오히려 독일을 경계하였다.
연합국의 경우 스페인이 추축국에 가입해서 영국령 지브롤터에 위협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우려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영국과 스페인은 지브롤터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사이기도 했고 당시에도 이를 두고 스페인에서 영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전쟁 중 한동안 국제적으로 중립지역으로 간주된 탕헤르를 잠시 점령하는 일도 벌였다.[17] 이에 더해 오늘날 기록에 따르면 MI6 소속 영국 정보원들이 스페인 장성과 관료들을 매수하는 등 영향력을 확보하는 식으로 어떻게 스페인이 참전하는 것은 막았다고 한다.[18]
당시 처칠의 프랑코에 대한 평가는 꽤 이중적이었다. 일단 프랑코가 조금이라도 추축국쪽으로 기울 것 같으면 비판적으로 대하다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 프랑코를 중립정책도 잘 유지하는 상당히 훌륭한 반공지도자로 포장하는 멘트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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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작전'''에 대한 스페인의 신문 기사.
1940년 11월에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 18호'로 지브롤터 공격 계획인 펠릭스(Felix) 작전을 수립한다. 루트비히 퀴블러(Ludwig Kübler)를 사령관으로 1개 군단이 스페인을 통과해 스페인 공군의 지원과 함께 지브롤터를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코는 지브롤터를 스페인에게 주겠다는 히틀러의 말에도 작전에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고, 독일으로서도 소련 침공을 위한 준비가 필요해 지중해 봉쇄는 이탈리아 해군과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의 수에즈 공격에 맡기기로 한다. 프랑코가 무기뿐만 아니라 식량, 석유에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식민지(모로코 전체, 알제리의 일부, 사하라 사막 등)까지 요구해대니, 아무리 지브롤터 공략이 매력적이라도 히틀러가 선뜻 들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1941년에 히틀러는 또 다시 지브롤터를, 이번에는 스페인 전부를 공격할 이사벨라(Isabella) 작전을 구상한다. 프랑코가 계속 중립을 지키자, 프랑코가 연합군에 가담하거나 연합군이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스페인을 통과해 서유럽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것이지만, 계획에 그친다. 이러다가 전황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하는 1942년부터 역으로 히틀러가 참전 좀 하라고 살랑이를 떨다가, 그 이후 독일의 패색이 확실히 짙어지자 완전히 쌩깠다. 그리고 무솔리니 또한 내심 지중해에서 다른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 등 뒤에서 히틀러에게 스페인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코는 재빨리 청색사단을 국내로 소환하고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44년 말에 프랑코가 연합국과의 협상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개새끼"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다른 얘기로는 연합국에서 프랑코에게 중립국인 척 하면서 계속 독일을 지원하면 스페인을 추축국으로 인정하고 공격하겠다고 했고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그대로 하소연하면서 청색사단을 빼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만약에 스페인이 공격당하면 스페인을 지켜줄 상황도 아니고 스페인 방향에서 연합군이 밀고 올라오면 곤란해지니 차라리 친독일성향의 중립국으로 놔두는게 낫다고 판단해서 프랑코가 발을 빼는걸 허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소련에 밀리던 상황에서 "스페인 사단만 빼갈게요" 한다고 히틀러가 곱게 들어줄 리도 없고(...)
히틀러와는 다르게 무솔리니는 그 특유의 허세 때문인지 프랑코에게 그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스페인에 필요 이상의 지원을 퍼부었다. 결국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그나마 잘하고 있던 경제분야를 고대로 말아먹어 2차 세계대전 그 숱한 병크를 터뜨리는 또 하나의 원인을 초래하고 만다.
이렇게 독일 등의 추축국 세력과 거리를 둔 덕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권력이 무너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런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같은 추축국인 일본 제국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군이 필리핀 마닐라를 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성으로 터진 마닐라 대학살 와중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을 일본군이 공격해서 영사관에 방화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하자 프랑코는 당연히 격노했고, 1945년 4월 11일에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 버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스페인 정부에선 '사건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일본과의 관계는 유지해야 하지 않은가'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만큼 당시 스페인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강했다. 이런 엄청난 외교적, 국제적 무례를 당하고 국교 단절을 하기는 했으나[20] "이런 행위는 지금까지 있었던 스페인과 일본 제국의 우호적 관계에 타격을 줄 수 밖에 없다"라고 상당히 소극적으로 항의하고, 학살 보도도 "가톨릭 신앙과 스페인 제국의 유산을 지키겠다며 그 난리를 쳐놓고 이런 일도 못 막나?"라는 식의 반정부 여론이 형성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의 스페인 국내 보도도 사건 발발 이후 몇주 뒤에야 허용하는 등 심각하게 비굴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 뒤에는 "추축국들이 끝나면 우리 차례일지도 모른다"라며 두려워하던 정권의 공포와 취약함이 있었다.[21] 다만,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과의 관계는 훨씬 복잡했다. 프랑코는 친추축국적 중립국이면서 동시에 영미권과도 여전히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였기 때문에 막상 영미권 대사 등을 접견할 경우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같은 백인들이 어쩌구...' 하면서 일본을 헐뜯었다. 그와 동시에 자국민들에게 해외 상황을 왜곡 선전할 때, '전 세계적으로 큰 전쟁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소련에 대한 전쟁이고 하나는 일본에 대한 전쟁이라더라'고 했다. 아무리 일본이 추축국이기로서니 따지고보면 이역만리에 있는 이제는 자국하고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에 불과한 반면 여전히 영미권은 스페인과 중요한 관계에 놓였으니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청색사단 문제를 따지면 스페인을 교전 상대인 적국으로 분류할 만할 명분도 있고, 일단 국제 공산권의 거두이며 실제로도 엔리케 리스테르를 비롯한 적지 않은 공화파 망명객들이 붉은 군대에 지원했던 스탈린의 경우 아예 스페인도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조지려고 하였으나, 포츠담 회담에서 더 이상 전쟁을 키우기도 싫고, 좌파 공화파를 도와주기도 싫었던 처칠과 트루먼이 "스페인 저 시끼들은 무조건 국제연합에 끼워주지도 않고, 추축국 애들 급으로 경제 제재를 먹여 참교육 시켜줄거니 님이 참으삼"이라 설득하여 겨우 스탈린을 달랠 수 있었다.
스페인이 비록 직접적으로 2차대전 자체는 비껴나갔지만 연합국, 특히 소련을 비롯한 공산 세계 또한 내전 당시의 만행을 잊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2차대전 직후와 냉전 체제가 본격화된 1950년대 사이에는 동서방을 가리지 않고 파시즘에 대한 혐오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대세였다. 때문에 2차대전에 휘말려드는건 피했을망정 외교적으로 스페인은 포르투갈, 남아공, 로디지아와 함께 여전히 국제적 천민 취급을 받으며 고립되었고, 위의 처칠과 트루먼이 약속한 경제제재로 인해 극도의 고통을 받았다. 이 내전 이후 2차대전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스페인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정권의 폭력성도 극에 달했던 1939~1955년 사이의 시절을 스페인인들은 "기아의 세월(años del hambre)"이라 부르며 스페인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세월로 기억한다. 이 시기 프랑코는 자신의 정권이 파시즘과 무관하단 인상을 해외에 심어주기 위해 발광했고, 실제로 내전 직후 자행되었던, 히믈러, 치아노 백작이 회고한 "매일마다 마드리드에서 100명, 세비야에서 50명..." 규모의 학살과 사법 살인, 정치적 '실종'은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이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정권이 본보기로 삼을만하다 싶은 경우엔 정치적 사형을 하긴 했고, 이때마다 스페인을 반공 서방 진영에 포함시키려는 미국은 한숨 쉬고, 나머지 유럽에선 히틀러, 무솔리니의 동지 프랑코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대규모 시위와 압박이 종종 터지곤 했으나 적어도 '파시즘' 운운할 만큼 '''폭력의 일상화'''와 '''정치적 폭력에 의존한 국가 이데올로기'''[22] 는 학계에선 주로 1944년을 기점으로 끝났다고 본다. 이 때까지 스페인은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2차 세계대전에 엮일 가능성을 대비해 경제사회적으로 전시체제를 당분간 유지했다.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이 되자 공화파에 대한 박해 수위도 낮추고 전시체제를 풀게 된다.
그리고 1947년 프랑코는 이미 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복권을 선언하면서 '''왕위를 이을 적합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는 내가 섭정'''이라고 선언, 종신 집권을 합법화한다.
6. 프랑코의 정치
흔히 프랑코는 파시스트로 칭해지지만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달리 프랑코가 학술적 의미에서 파시스트인지는 논란이 있는데, 현대 학계에서 프랑코 정권의 성격 논쟁, '프랑코주의'란 이념의 실존 여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논쟁이다.[23]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에 비교해도 프랑코 정권은 일단 존속 기간이 사십년 가깝게 압도적으로 길었고, 2차대전과 함께 사라졌거나 대전 이후 새로 생긴 독재 정권들과 달리 대전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모두 겪었다.
그만큼 프랑코 정권의 성격을 '파시즘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에 따라 부분적으로 구 내전 이전 정치적 파벌을 정리하고, 어느정도 정상적인(?) 독재국가(?)가 되어 능력주의에 기반한 관료 엘리트들에게 국정을 위임하기 시작한 50년대 이후로는 급진적 파시즘보다 전통주의적 파시즘에 가까워졌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전 기간 도중과 나머지 유럽은 대전 중이었던 전시 직후 체제까지 프랑코 정권이 자행한 자국민의 정치적 '청소'에 가까운 대량 학살과 사상적 색출, 탄압,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아예 '''마치 다른 인종인 마냥''' 타자화 하기 위해 동원했던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의 유사 우생학적 이론과 그 사회적 여파까지 고려하면 정권 초기에는 소위 '오리지널'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보다 확실하게 억압적이고 폭력성으론 오히려 나치 독일이나 헝가리의 화살십자당, 루마니아의 철위대에 비교하는게 가깝다.
보통 이런 자국민 학살 규모의 폭력적 탄압이 사그라들고, 정치범도 그나마 '재판' 비슷한걸 거치면서 사형보다 투옥을 하며 이후로 점차적으로 급진적 파시즘 성향이 누그러지기 시작한 기점은 연합군의 승리가 명백했던 1944년으로 보며,[24] 이런 (나머지 유럽과 세계 정세 변화에 맞물린) 프랑코 정권의 성격 변화는 파시즘 자체의 정의 문제와는 별개로 파시스트라 부를만큼 폭력적 대중동원, 사상적 과격화를 했냐 안했냐를 판단함에 있어 의미 있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코는 구 팔랑헤의 진보주의, 사회주의보다는 전통주의, 교권주의에 더 가까운 파시스트였다.
실제로 프랑코는 경제가 복구되고 국가가 재건되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물론 이리 저리 지원해 달라고 들이민 비용이 천문학적인 비용[25] 이라 히틀러가 거부하였다. 그마저도 추축국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끝까지(표면적으로는) 중립국으로 남게 되었다. 만약 스페인이 경제를 복구하고 내전 피해를 복구하였다면 2차대전의 양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정작 복구가 끝난 후에는 과거와는 달리 스페인을 제외한 모든 파시즘 국가들이 망해서 사상적 과격화나 대중동원이고 뭐고 일단 국가 유지가 우선이었지만.[26] 그러나 설령 참전하여 사상적 과격화, 대중동원을 했어도 프랑코 본인이 전통주의적, 교권주의, 보수주의적 인물인 이상 구 팔랑헤의 반자본주의적, 국민생디칼리슴[27] , 사회주의적 요소는 복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6.1. 무자비한 철권 통치 및 일인독재
스페인의 철권통치자가 된 프랑코는 군총사령관, 유일한 합법정당인 팔랑헤당 당수, 국가원수, 내각수반을 모두 겸임하며 헌법도 국민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는 폭압적 체제의 수장으로 40년 간 군림했다. 그의 권력엔 어떠한 제도적 한계도 없었고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코는 공산주의자와 무신론자들로부터 스페인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철저한 반공주의, 중앙집권, 스페인 단일국가주의를 국시로 옛 공화주의 세력, 카탈루냐/바스크 등 지역 분리주의 세력을 뿌리뽑다시피 탄압했다. 또한 이웃 포르투갈의 살라자르와 함께 중남미 우파 독재정권 국가들의 콘도르 작전(더러운 전쟁의 일부)을 지원했으며 우파성향의 중남미 독재국가 폭정아래 신음하다 망명온 중남미 사람들을 잡아서 중남미 본국으로 송환했다. 연좌제는 기본이었고 스페인 국민들의 탈출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았으며 탈출하다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가했다.
때문에 내전 중 전사자를 빼고 지금까지 집계된 프랑코 정권하에서의 사망자만도 20만을 넘어서며, 이것도 극히 일부라는 말이 나온다. 프랑코 정권이 정권 말기 조직적으로 대대적인 기록 말살을 저질러 정확한 숫자가 파악될 날은 멀지만, 근 몇년간 암매장된 집단 무덤이 대거 발굴되면서 희생자의 추정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같은 전간기~2차대전~대전 후 유럽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를 제외하면 이 정도 숫자의 자국민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는 없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정말로 독보적인데, 총인구 1억 7천만(1939)의 소련에서 대숙청 희생자가 681,692명인데, 스페인 인구가 내전 전후로 약 2500만~2600만이었는데, 내전 사망자만 50만이고(국민진영의 사망자도 포함), 집권 이후 프랑코가 직접적으로 죽인 백색테러 희생자는 대체로 10만, 최대 30만 정도로 잡는다. '비전시 자국민 희생자'라는 카테고리로만 한정하면 프랑코 정권의 폭력성을 능가할만한 동시대 체제는 스탈린 정도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스탈린 하면 으레 따라붙는 '대숙청'의 이미지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어났다. 히틀러만 해도 당장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학살 행위는 일단 전쟁 발발 이후 점차적으로 심화된 것이다.[28] 프랑코는 아침식사를 한 뒤 커피를 마시면서 사형수 명부를 갖다놓고 이름 옆에 '''사형''', '''연기''', '''사형 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 등을 직접 기입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세력은 죄다 외부로 망명하거나 사형당해서 스페인 내부의 진보, 좌파 진영이 아예 절멸당했다. 이를 두고 영국의 근현대 스페인사 전공 역사학자인 폴 프레스턴은 '스페인의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했다.
반대파였던 스페인 공화국이 양성평등, 문화적 세속화, 자유연애 등 페미니즘과 사회적 진보 담론에 적극적이었던만큼 프랑코 정권의 탄압은 반대로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의 강화로 연결됬다. 여성의 간통죄는 부활하고 적극 처벌되었던 반면, 남성의 경우 남자가 간통한 여성과 동거하는 경우에만 간통죄로 인정되었고, 여성의 독립적인 재산권, 정치적, 법적 권리를 심하게 제한되었다. 특히 반대편인 공화파 여성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폭력적이었다.
[image]우리의 용맹한 군단원들과 식민지병들은 저 비겁한 빨갱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여자들에게도 진짜 남자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애초에 저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여자들이 '자유 연애' 따위를 설파한 시점부터 이런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이제 적어도 저 빨갱이 여자들은 어디 말라깽이 민병대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남자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고, 울부짓고 발버둥쳐봐야 아무 소용없다는걸 알게 될 것이다
내전 당시 국민전선 남부군 사령관 케이도 데 야노의 주기적인 선동 라디오 채널 담화 중에서[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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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삭발 당한 이후 이마에 십자가 무늬가 강제로 낙인 찍힌후 수용소에 수감된 공화파 여성들
내전기 내내 수만명의 공화파쪽 여성이 국가군 병사들에게 전시강간당했고, 국가군 지도부는 이를 자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위 케이포 데 야노의 사례 처럼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특히 포로로 잡은 여성 민병대원이나 점령한 지역 일대의 여성운동가, 노조 활동원 같은 정치적으로 '빨갱이' 분류당한 여성의 말로는 비참했다. 사회와 정치참여 등 '남자의 일'에 '감히' 참여한 공화파 여성들은 여성성을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명분 아래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하던짓 그대로 피마자유를 강제로 먹인 이후 발가벗긴 이후 동네에서 강제로 조리돌림하며 대중 앞에서 강제 분변하게 만들며 강간 후 탈진, 탈수로 죽이는게 일반적이었다. 살해당하지 않는 공화파 여성도 포로수용소 역할을 했던 수녀원에서 이런 '탈선한 빨갱이 여성'을 어찌 생각할지 뻔한 수녀, 사제들에게 집중적으로 학대, 강간당했으며, 훗날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나와도 정권의 여성 경제권 제한+전직 공화파들의 경제활동 제한이란 이중 제약 아래 자연스럽게 매춘으로 빠질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한 뒤 이를 오히려 좌파의 도덕적 타락의 증거라며 선전자료로 썼다. 그리고 프랑코 시절 법조계는 이런 전시 강간 정책에서 비롯된 조직적 남성우월주의를 돕기라도 하는 양 부부강간 불인정은 기본이고, '강간'의 의미를 무조건 여성이 심신미약 상태여야 하며, 항문이나 구강성교는 쳐주지도 않는 등 의도적으로 강간의 법적의미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고, 왠만한 성적 학대는 '단순 학대 (abuso deshonesto)'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프랑코 정권의 성범죄의 전시, 통치 도구화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스페인 민주화 진영에선 반작용으로 페미니즘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유산으로 현대 스페인 페미니즘권은 성향도 강성이고 영향력도 강한 편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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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및 그 군대가 반대파를 처형 혹은 학살하고 암매장 혹은 공개매장한 장소다. 색깔 별로 발굴-이장(적색), 유실(흰색)로 구분했다. 이 지도는 스페인 법무부가 작성한 곳이다. 녹색은 아직까지도 발굴이 안된 곳이다.
가벼운(?) 정치범들은 수용소에 가둬놓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프랑코 정권 치하에 이루어진 과달키비르 강 운하부터 철도선, 자기 영묘인 전몰자의 계곡까지, 그의 국가 기반사업이나 공업 육성 정책들 뒤에는 연평균 수십만명에 달하는 전직 공화파 출신 강제 노역자들이 있었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스페인 내전 도중과 이후 프랑코 정권은 참혹한 환경의 강제 노동 수용소[30] 를 170개 이상 운영했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미란다 델 에브로의 수용소에서는 6만 5천명의 공화파 정치범들이 왔다가며 이 중에서 수백, 수천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코 정권이 2차대전이란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프랑코 체제'라 부를 만한 것이 자리 잡은 50년대 중후반 쯤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다시 대학생, 근대 자유주의 성향의 정권 내 반독재 인사들, 망명 2세대, 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2기가 나타나게 된다.
스페인 우익과 반공주의자들은 프랑코의 '숙청'을 일종의 정당방위로 옹호하기도 한다. 1936년 여름 쿠데타와 프랑코 정권의 백색 테러가 좌파가 먼저 공격한 것에 대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세력이 적었던 곳에서도 학살은 전국 평균만큼(?) 이루어졌다. 레온, 나바라 같은 지방은 쿠데타 발발과 동시에 거의 무저항으로 국민군에게 넘어가면서 좌파와 인민전선에 뭐 반격이고 보복이고 할 짬도 없이 집어 먹힌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도 정치적 폭력의 정도는 전국 평균에서 뒤쳐지지 않는다. 지도상 학살의 밀도는 으스스하게도 거의 스페인 전국의 인구 밀도, 도시화율과 거의 일치한다(...). 프랑코 정권은 카탈루냐, 바스크,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가리지 않고 소위 '빨갱이' 딱지 붙기만 하면 공평하게(...) 때려 죽였다.
6.2. 학계와 문화계 탄압
프랑코는 문화, 예술, 학문 방면에서 지식인 계층을 탄압하였다.
내전 발발 이전 스페인의 문화적, 예술적 사조를 주도하던 '''27 세대'''라고 불렸던 문학인, 예술인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전쟁 초기 길거리에서 잡혀 처형, 미겔 에르난데스는 옥사했고, 페드로 살리나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망명지에서 객사했다.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내전 발발 직후 아르헨티나로 겨우 튀었고, 안토니오 마차도는 프랑스로 도망가면서도 "Dos Españas (두개의 스페인)"이란 걸출한 시를 썼다. 처음에는 좌파의 모험주의, 진보주의적 광신성을 혐오하며 정치적 우익으로서 쿠데타를 좋게 생각했던 철학자 겸 문화비평가 미겔 우나무노는 겨우 며칠만에 학살, 폭력, 반지성주의로 무장한 쿠데타군의 본질을 알아 채고, 근무하던 살라망카 대학의 공식 석상에서 이를 비난하다 그 자리에서 스페인 외인부대원들에게 몰매 맞아 죽을뻔 한걸 현장에 있었던 프랑코 부인의 개입으로 살아 남아 가택연금, 한달 쯤 이후 집에서 돌연사했다.[31]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화파 인사들에게 관대했던 멕시코부터 시작해 중남미/유럽/북미 국가로 도망쳤는데, 대표적으로 루이스 부뉴엘이 있다. 부뉴엘은 전후 멕시코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했고[32] 비리디아나를 만들면서 겨우 유럽으로 돌아올수 있었다.[33] 전후 스페인 영화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서 루이스 가르시아 베를란가와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이 처음부터 그 인프라를 다시 다져야만 했다. 심지어 베를란가와 바르뎀도 엄청나게 탄압받으면서 활동했다.[34]
학계에서도 당시 대부분 공화국,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을 지지했던 스페인의 진보적 지식인들, 대표적으로 클라우디오 산체스 알보르노, 라몬 피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아메리코 카스트로 등 당시의 거물 역사학자, 철학자, 비평가 등이 대거 중남미, 북미, 프랑스 등지로 망명하기도 했다.
내전 이전만 해도 상당히 발전해있었던 스페인의 역사학계와 문화비평학은 대거 작살나서 오히려 70년대, 80년대를 들어 미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을 통해 역수입되었다. 서구권 지식인 사회 전반에서 히스패닉 역사, 문화, 예술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대폭 늘었던 시기가 바로 이 망명인사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40년대, 50년대의 일이다. 과장 아니라 20세기 초중반은 스페인에게 있어서 16-17세기 스페인 제국 시절 이후 문화적으로는 국제적 아웃풋이 최고로 끝물을 달리던 황금기였고, 이런 문화적 황금기를 프랑코 정권은 알아서 작살내주었다.
대중적 차원에서도 유명한 사례가 있다면 현대 프리메라 리가의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사이 라이벌리에서 마드리드가 정권의 비호를 받았니 안 받았니, 바르셀로나가 핍박을 받았니, 받았으면 다른 팀들에 비해 얼마나 받았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쟁일 것이다. 역사적 민감성과 양 팀이 주도하는 스페인축구판 전반에 걸린 돈과 여론의 무게(...)를 고려하면 제대로 된 공론이란 걸 형성할 만한 연구는 요원해 보인다. 제대로 된 공론을 형성하려면 결국 그 당시 스페인 축구판에 대한 고밀도 역사학적 연구가 필요한데, 바르샤나 레알이 잘도 외부 연구자들에게 공문서들 보여주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같은 양반들의 녹취록을 보여주겠다.
다만 확실한 점은 프랑코 정권이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축구에 큰 집중을 한 건 사실이고, 이게 당시 안그래도 살기 팍팍했으며, 역사적으로 16~17세기 리즈 시절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어엌 피레네 이남 아프리카ㅋㅋㅋ' 같은 '''유럽 내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릴 만한 낮은 국민적 자존감이 정점에 달했던 후기 프랑코 정권 시절[35] 스페인 축구의 부상이 정치적, 민족적 분열을 초월하여 스페인 국민 전반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던 것과 맞물려 떨어졌다. 논란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영입 같은 사례가 대표적으로 이 와중에서 프랑코 정권이 정치적 의도로 레알 마드리드를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대변했던 바르샤 상대로 푸시했다는 것인데... 확실한 사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전체주의 정권의 영향력은 비단 바르샤,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스페인 축구판 전반에서 넘칠 수 밖에 없었다. 이런건 영향력을 고려하면 국민에 대한 테러에 거리낌 없었던 정권이 굳이 치졸하면서도 번거로운 방법을 썼을까 일각에서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논란과는 별개로 당시 축구팀들의 업적이 전적으로는커녕 일부 유의미한 수준에서나마 정치적인 푸시로 이루어진 가짜 업적이라면 그리 돈이 많이 걸려 있는 유럽 축구판에서 진작 레알의 가치는 훨씬 저평가 받았을 것이다.
6.3. 경제정책
크게 초기의 국민생디칼리슴 원리에 따른 자급자족(autarky)적 경제 체제와 후기의 시장 개방을 통한 성장으로 나눌 수 있다. 프랑코 체제는 1939~1950년대까지 고립주의 하에서 자급자족을 지향했지만 처참하고 망하고 1960년대 들어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축을 돌렸고 뒤늦게나마 성장을 하긴 했다. 그래서 프랑코 지지자들은 후반기의 경제 성과를 업적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갑론을박은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스페인의 경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는 것과 동시에, 프랑코의 이른바 '자급주의', '군수공업우선주의'로 인해 거의 파탄 직전까지 갔다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스페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역을 활발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스페인이 고립된 것도 따지고 보면 프랑코 때문인데, 2차대전 끝날 무렵에는 스탈린의 소련과 공산당, 사회당이 주축인 자유 프랑스 측, 스페인 내전 때 부터 스페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합법적인 신정부로 재탄생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측을 비롯하여 프랑코 정권을 실질적인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조지려는 세력은 연합군 내에 충만했다. 그나마 영국과 미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이들을 뜯어 말렸으며, 뜯어 말리면서 직접 조지진 않아도 국제 왕따로 만들어서 벌은 주겠다고 설득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경제제재 정도가 아니라 2차대전의 참화 자체가 스페인에 직접 쏟아져도 신기하지 않을 만큼 전후 세계 여론은 프랑코 체제를 차갑게 봤다.
프랑코는 정부 각 부처의 장관들과 고위 관료들을 모두 전문성과는 별 상관이 없는 정치적인 이유로만 골랐다. 때문에 나머지 유럽이 모두 2차대전의 참화에서 재기하고 경제적인 호황기를 누린 1950년대 후반까지, 스페인의 경제는 한국전쟁 직후 한국과 비슷하게 전후 복구는 그럭저럭 됐지만 전쟁 복구 이상은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 1950년대 후반부터 프랑코 정부는 카를로스파, 왕당파, 파시스트 등 복잡한 정파 싸움의 교통 정리가 이루어졌고, 프랑코 정권도 눈치 안보고 제대로 된 전문 관료들을 선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부턴 뒤늦었지만 괜찮은 수준의 제조업을 갖추게 되어 스페인 경제가 성장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가 그의 최초 집권에서 20년 가량 지난 뒤에 취해졌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내전 끝나고 20년 뒤인 1950년대 후반에야 내전 및 혼란 이전 경제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다. 능가했다는 게 아니라 내전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됐다는것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전부 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넘었고, 마셜 플랜의 지원과 눈부신 전후 경제 발전으로 인하여 진작에 유례없던 호황기를 한창 누리며 전후복구를 수년 만에 끝내고 빠른 속도로 고성장에 돌입했다. 그 사이 스페인은 겨우 경제가 막장이 되고 내전이 벌어지기 전인 1930년대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서도 스페인의 지배 계층은 사치를 부렸다. 최고 대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알바 공작가의 여공[36] 이 1947년에 2천만 페세타나 쏟아부은 화려한 결혼식을 치르기도 했다[37] . 당시는 다른 유럽마저도 박살이 나서 스페인 전체가 내전 후 파괴와 고립에 떨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스페인의 귀족은 마치 계급 투쟁의 승리를 과시하는 듯 막장 행보를 거듭했다. 프랑코 사후 처음으로 경제가 개판이 되자 갑자기 과거의 공화국 시절 적-황-자색의 깃발을 들고 쏟아져 나오는 현대의 스페인인들의 행동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바탕에 있다. 이후에는 성장이 궤도에 오르면서 서유럽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고 이에 따라 국민소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긴 했다.
프랑코 옹호자들은 프랑코 정권의 스페인이 서유럽에 비해 좋지 못한 경제 성과를 보인 것에 대해 마셜 플랜의 지원을 못 받아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이 스페인만 마셜 플랜에서 쏙 빼놓은 건 그만큼 프랑코 정권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원은커녕 2차세계대전 당시 안뭉갠 것에 고마워해야 할 지경. 이미 버스가 지나간 후긴 하지만 처칠 같은 보수 인사들마저도 훗날에나마 '그때 눈 앞의 레드 컴플렉스를 치우고 공화국을 도왔어야 했다'라고 하며 후회할 정도였다. 그리고 프랑코 정권의 경제 발전 담론에서 종종 간과되는 사실인데, 다른 전후 서유럽 국가들은 프랑코 치하 스페인처럼 핵심 국가 인프라 사업에 동원할 정치범 노예노동자 수만명이 없었다(...). 상술한 과달키비르 운하, 현대 수도권과 북부지방 일대를 연결하는 마드리드-부르고스 전철선, 수도권의 급수를 책임지는 리오세끼요 저수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나 바야돌리드 공항 같은 경제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핵심 기간 산업 상당수가 강제노역으로 인해 지어진 마당에 프랑코 정권의 경제정책로 일반적인 서구 시장 민주주의국가의 정치경제 잣대로 평가하긴 힘들다.
일각에선 바스크나 카탈루냐의 사례를 들어 스페인이 이미 경제를 성장시킬 기반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물론 해당 지역이 꽤 발전한 지역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나친 비약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래도 스페인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가난한 국가였던 그리스나 포르투갈, 불가리아, 루마니아, 아일랜드 같은 나라들에 비하면 나름 중공업 기반이 튼튼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페인은 20세기만 해도 영국, 스웨덴과 함께 유럽 조선업의 선두주자였고, 자동차의 경우 과거에는 이스파노-수이자, 현재는 세아트라는 자국산 자동차 브랜드도 있다. 고속철도 AVE도 프랑스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서 자체 개발할 정도다. 유럽의 다국적 기업 에어버스에도 지분이 있고 스페인 국내에 공장도 있다.
스페인에서는 레저, 관광산업이 스페인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여가산업은 보르본 왕정부터 리베라 정권, 스페인 제2공화국까지 계속 중점적으로 역점을 두던 분야였고, 지중해 연락선, 내륙철도 개통, 20~30년대 파라도르(Parador)같은 국영 숙박업소체인 정비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했다. 1차대전 중립국 특수를 누리기도 했고.. 여하간 내전 전까지 스페인은 연 인원 50만명 가까이 지중해의 따뜻한 기후를 찾는 부유한 여행객들의 목적지가 되어왔다. 도리어 프랑코 정권 초기, 정권에 비 협조적인 관광사업자에 대한 제재, 경찰들이 관광객들의 특정지역 출입을 금지하거나, 방문객 행로에 밀착하여 해변이나 마을 주변까지 감시하고, 프랑코 정권의 고립된 국제정세와 좌익 게릴라 (Spanish Maquis)소탕 목적으로 국경을 봉쇄하는 등(...) 양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여러모로 산업 잠재력을 깎아먹는 정책을 펴왔다. 물론 포텐셜은 어디 안가서 50년대 말 서방세계에 편입되고 국경을 개방하면서 스페인의 여가, 관광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말이다.[38]
또 이시기 스페인의 상대적 경제 미비가 꼭 프랑코 정권만의 탓이라고 보긴 뭐한게, 스페인이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후진적이었던 것은 물론 내전의 여파나 마셜 플랜 수혜 여부도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늦게 잡더라도 18세기부터 남북유럽 격차[39] 가 커진 것 역시 큰 원인이었다. 즉, 스페인의 경제적 성취가 전적으로 프랑코 덕이라고 하는건 어불성설이지만 마찬가지 논리로 볼 때 프랑코 집권 전의 스페인이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이었던 것 역시 마냥 프랑코 탓은 아니라는 것.
다만 다른 주변 국가들의 경제발전[40] 이 이미 1945년 종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15년은 늦은 프랑코 체제의 발전에 대한 평가는 낮을 수 밖에 없다. 기반시설 미비 드립도 반대로 보자면 개도국의 경제발전 속도가 초반에 급격한 것처럼, 오히려 다른 유럽국들보다 상대적으로 개도국 스탠스였던 스페인은 더 빨리 갔을 수 있다는 주장도 된다. 즉, 빨리 기반 시설 마련 안하고 뭐한 거냐는 것. 결국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의 경제 개발이 상대적으로 늦은 것은 이런 것들보다도 파시즘의 잔재인 국가조합주의를 고집한 이유도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60년대 이후의 스페인의 경제성장 자체는 상당히 괄목할만 했다. 이를 스페인의 기적(spanish miracle)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허나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한 것이나 경제적 발전은 프랑코의 개인적 유능함보다 당시 국제적 여건의 도움이 더 컸다. 2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 약 30년의 기간은 서방이든, 공산주의 동구권이든, 이제 막 생긴 제 3세계든 세계 경제 자체가 급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스페인은 오히려 이 열차에 늦게 올라탄 국가 중 하나였다. 늦게나마 올라탄건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은 민주화가 이행된 후에도 지속되었다.
또 프랑코 시기의 경제 발전은 작위적이고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져 그 결과를 현대의 스페인인들이 유로존 경제 위기로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코 정권 당시에는 경기나 회사 상황이 나빠져도 노동자를 함부로 못 자르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실업자가 늘어나면 정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동자를 지킨다는 취지에선 평가할만도 하지만 문젠 이게 1970년대 오일 쇼크로 경제 불황이 오면서 기업들에게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것. 이래저래 기존의 노동자들은 철밥통으로 남아 있는 탓에 기업들의 신규 고용은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페인은 일자리가 불안정해져 한땐 실업률이 20%를 넘나드는 막장 상태가 되기도 했다. 유로존 위기로 2013년 27%라는 신기록을 달성해서 그렇지, 스페인은 1970년대 이후 실업률이 선진국 중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2007년 버블 당시 정점에서도 8%에 달했다.[41] 다만 이것 역시 스페인 경제 성장이 프랑코 정권의 업적만도 아니듯, 실업률 문제도 그럼 민주 정부는 뭘 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오늘날 스페인 경제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죄다 특정 정권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6.4. 대외관계
프랑코 정권은 정치적인 기반도 불안하고, 국제적으로는 왕따고, 경제 사정은 또 개판이니 결국 50년대를 기점으로 외교 정책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했다. 프랑코는 냉전 시기 서방의 편집증적 좌익공포증에 편승하여 갑작스럽게 자신을 반공 투사 1세대로 국제 무대에서 포장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코는 한국에 스페인 지원병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에 참전을 해서라도 UN과 서방 국가들의 인정을 받겠다는 뜻이었다.[42] 결국 스페인의 한국 파병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국제 교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6.5. 심화된 지역 갈등과 분리주의
프랑코는 현재의 지역분리에도 책임이 있다. 폭탄테러 등으로 스페인을 괴롭힌 바스크 지방의 ETA를 필두로 한 테러리즘, 그리고 독립 선언을 한다 만다 하는 카탈루냐의 분리주의 운동은 역사적으로 프랑코 이전에는 전례가 없었다. 분리주의라 해도 스페인 내에서 자치권의 확대와 보장을 요구하는 훨씬 더 온건한, 중앙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소수의 지식인들과 산업가들 중심의 지역주의 운동 수준에 가까웠다.
원래 역사적으로 스페인이란 나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에 맞선 여러 가톨릭 왕국들의 동군연합에 뿌리를 둔 나라다. 때문에 이웃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지방 자치 전통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며, 중앙 또한 이를 대체적으로 존중하고 합리적으로 교섭을 하는 게 전통이었다. 스페인 각 지방들의 사법적, 정치적 통합은 카탈루냐의 경우 18세기 중반, 바스크 지방은 19세기 후반에야 이루어졌다. 당연히 통합 이후에도 자국어 사용같은 시시콜콜하면서도 민감한 문제로 지방을 건드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렇다 보니 지방의 민족주의, 독립 분리주의 운동들도 지식인, 중산층 사회 밖으로는 파급력이 제한되어 21세기 현재 스페인 자체의 통합에 위협이 될 만큼 힘이 강했던적은 드물었다. 바스크, 나바라 기반이었던 초보수주의 카를리스타 운동도 기반이 그쪽 지방과 지방 자치 수호였다는거지 훗날 ETA의 테러가 대표한 본격 분리 독립이 아니었고, 1934년 헌정 위기 사태 중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언했던 자치정부(Generalitat) 수반 유이스 콤파니스는 그 뒤 "스페인 연방 내"라는 조항을 덛붙였었다. 그리고 세간에서 종종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으로 착각하기도 하나, 내전 당시 그 지역을 휩쓴 아나키스트 혁명과 자치공동체들은 카를리스타와 마찬가지로 '''지리적 기반이 카탈루냐, 아라곤이다 보니 그 지역 사람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지, 원칙적으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의 해방을[43] 주장했던 탈민족주의적 국제주의 좌파였다. 카탈루냐 아나키즘의 경우 오히려 인구 기반이 상당수 카스티야, 안달루시아에서 흘러온 국내 이민 노동자들이었고[44] , 사상적으로도 민족주의와 확고하게 반대되다 보니 카탈루냐 민족주의 성향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 정치인들과 치열하게 대립하며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부르주아들의 처량한 애국놀이'[45] , '사자(스페인 중앙정부)가 없는 자리를 대신 꿰차려는게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동네 폭군을 꿈꾸는 여우' 라 부르며 격렬하게 대립하는 관계였다.[46]
그런데 프랑코는 정권을 잡은 이후 현지에서 일상 언어로 수백 년간 사용된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를 제한도 아니고 금지했다. 그리고 공권력을 동원해 스페인 역사상 유례 없는 탄압을 가하며 중앙에 대한 복속을 강요했다.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은 제국의 먼 식민지도 아니었고 현대 스페인의 중심인 카스티야와는 독립적인 정치적, 사회적 집단으로 존속해온 땅으로 자국 땅에서 뿌리 없는 강제동화정책의 대상이 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 시절의 기억은 현재도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의 중장년층 사이에 남아있다. 젊은 시절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모어인 바스크어나 카탈루냐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헌병대에 끌려가 뺨때귀 맞은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자기네 땅에서 이런 유례없는 탄압과 강제동화정책을 40년 가까이 겪으며 산 이 지방들은 프랑코 정권 말기 독재자가 죽을 기미가 보이자 아예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에 질색을 하게된다. 그리고 폭탄이나 로비, 여론을 통해서 노골적인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급진적 방향으로 선회한다.
6.6. 우생학
프랑코는 나치식 인종주의를 어설프게나마 받아들여서 '''빨갱이가 되는 것은 열등한 유전적 요인이 있으니 그 형질을 물려 받은 빨갱이 자식들은 사회에서 정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공화파 여성 포로를 강간해서 임신, 출산시키고 그 자식들을 납치해 부모로부터 격리시킨 적도 있다. 이 정책을 주로 밀어 붙힌 당시 국가군 군의관단의 간부였던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초기 독일에서 유학하며 에른스트 크레치머 아래 공부하며 우생학을 전공했다. 내전 당시 그는 프랑코 정권의 허가를 받아 심리전 연구부(Gabinete de Investigaciones Psicológicas)라는 독자 부서를 새우고 포로로 잡은 공화파, 국제여단원들 상대로 전형적인 나치 정권의 그것스러운 '신체검사'를 한 이후 스페인의 민족성 (hispanidad)는 유전적인 성질이 있고, 좌파, 자유주의자, 세속주의자들은 이런 열등한 민족적 유전성을 가지고 났다며 아래 대량 아동 납치, 격리 프로그렘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47]
19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 진압과 내전 당시 프랑코가 모로코 식민지병을 끌고 와 공포 정책을 편 적이 있다. 이때 좌익에서 "왜 니들 우익은 천날만날 레콩키스타드립 치면서 스페인 정화 운운하는 주제에 그 스페인 노동자들 죽일 때는 왜 바로 그 무어인들을 끌고오냐?"라고 따지자 우익 쪽에서 변명이라고 꺼낸 게 좌익은 생물학적으로 스페인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격리 당시 스페인은 고아원에라도 보낼 능력조차 없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사회의 암지에서 버림받아 자라게 된 아이들이 30만명이다.[48] . 그리고 자국민 상대로 열등인종 운운하는걸 전문으로 파며 이런 국가적 아동 유괴 프로그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던 상술한 바예호-나헤라는 전후 콤플루텐세 대학 심리학과 교수직으로 정권에게 보상 받았고, 그와 동명의 아들은 지금까지도 스페인 심리학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영향력있는 학계의 대부격 인물들이다(...).
6.7. 섭정 통치
프랑코는 집권 이후 자신을 스페인 왕국의 섭정임을 자처하며 왕정을 복고하고 귀족 제도를 부활하는 등 왕국을 다시 열긴 했지만 정작 자기 살아 생전엔 왕을 세우지 않았다.(...)
프랑코는 1961년 과거 스페인을 지배한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에게 스페인의 국왕 자리를 제안하였다. 하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거부한다. 그리고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후예로 이탈리아에 망명 중이던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추천했다. 프랑코는 그를 만난 뒤 1969년 그를 행정법을 통해 '스페인의 왕',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원래 계승 순위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의 아버지이자 알폰소 13세의 3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프랑코는 탐탁치않게 여겼다. 때문에 프랑코는 후안 대신 그의 아들인 후안 카를로스를 지명했지만 후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코가 죽은 이후 스페인이 민주화되기 전까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다.[49] 프랑코는 외동딸 카르멘만 있었고 아들이 없어서 권력을 세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프랑코 정권 말기에 이르면 서방과의 관계가 계속 긴밀해지면서 이전처럼 나라 문을 닫고 살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아마 아들이 있었다고 해도 북한의 김씨 일가나 시리아 아사드 일가처럼 권력 세습은 안 했을 공산도 있다.
원래 후안 카를로스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실제 프랑코가 후계자로 삼았던 것은 스페인 내전 이후 함께 해 온 그의 측근이었던 해군원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제독이었다. 프랑코는 그를 1973년 수상에 임명하며 후계자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스페인 군부는 후안 카를로스를 애송이(ese niño)라고 공공연하게 비웃었다. 그런데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하면서[50] 프랑코 체제는 후계자를 잃었고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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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총통과 한 때 후계자였던 블랑코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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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훗날 스페인의 국왕이 되는 후안 카를로스와 악수하는 프랑코. 두 사람의 관계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꽤 괜찮은 편이였다고 한다.
결국 프랑코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 했던 후안 카를로스를 프랑코 체제의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군부도 후안 카를로스에게 2대 카우디요가 되길 바랬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어릴 때부터 그를 신경써서 교육했다고 하는데, 교육 내용이 실질적으로 죄다 군사교육. 후안 카를로스는 육해공군 사관학교 세 곳을 모두 졸업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프랑코는 장래의 임금님에게 스페인 전군의 장교단에 골고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맥을 만들어 준 것. 이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왕위에 오른 뒤 군의 움직임에 민활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에게 정치를 가르쳐주진 않았는데,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프랑코에게 내각 회의에 참여시켜달라고 하자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방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한 바 있다.[51] 이 에피소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자신이 직접 들은 얘기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과 떨어져 자란 국왕 본인은 프랑코에게서 일종의 부성애를, 아들 없이 산 프랑코 본인은 국왕을 일종의 아들처럼 아끼며 자랐다고 한다. 후안 카를로스는 공적인 자리에서 프랑코 옹호 발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사석에서 다른 사람이 프랑코를 비판하는 건 용납 안할 정도로 프랑코에 대한 친밀감이 컸다고 한다. 한편 사형과 수감을 비롯한 탄압은 말년이라고 특별히 더 누그러지고 그딴 거 없었기에 후안 카를로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코를 두둔하는듯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프랑코 살아 생전인 1970년대부터 프랑코 정권에 대한 저항이 멈추지 않았고 프랑코의 사망이 목전에 다가오자 저항 운동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프랑코 체제는 생존을 위해 '통제된 민주주의'란 명목으로 민주주의와 일부 협상을 시도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개혁 요구에 놀란 아리아스 나바로 수상은 바스크 분리주의자, 카탈루냐 분리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처형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프랑코 말엽의 스페인은 다시 유럽 정가의 천민으로 추락했다.
프랑코는 군부에게 후안 카를로스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주문하는 등[52] 후안 카를로스의 권위를 세워주는 행보를 밟았지만 민주화 세력과의 일부 협상 시도를 제외하곤 큰 틀에선 자신의 카우디요 독재 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프랑코를 절대적으로 떠받들었던 벙커파들도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독재를 원했고, 체제 내부에서도 개방파나 기술 관료 세력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후일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급격한 개혁 수준까진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6.8. 사망
1975년 9월, 프랑코 정권은 정권 최후의 사형 집행으로 기록 될 ETA, 좌파 반체제 무장 단체 반파시스트 애국 혁명 전선(Frente Revolucionario Antifascista y Patriota) 소속의 정치범들과 아나키스트 살바도르 푸이그의 처형을 집행했다. 같은 해 5월 대통령 제럴드 포드가 스페인 방문까지 했었던 미국측은 크게 당혹스러워했고, 15개 유럽 국가에서 이에 대한 항의로 주 스페인 대사들을 소환하며 유럽과 중남미 각지의 스페인 대사관 앞에 항의 시위가 들끓거나, 국제 여단과 2차대전 당시 빨치산, 레지스탕스 투쟁의 역사 때문에 반프랑코 정서가 강했던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주요 이웃 강대국에선 심지어 대사관들이 공격당하기까지 했다.'''모든 정적들에게 용서를 빌며 나 또한 정적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53]
이 와중에 골골대던 프랑코는 1975년 10월 1일 대중연설에서 40년 내내 했던 그대로 이 모든 항의 시위는 프리메이슨과 국제 볼셰비키들이 국내 테러리스트를 앞세운 사회 전복 시도라 주장했다. 이 연설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중 앞에 서지 못했고 대수술 끝에 그해 11월 20일에 사망했다. 향년 82세. 후안 카를로스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으며,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프랑코가 죽은 뒤 그의 권한을 물려받은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민주화를 추진했으며, 1981년 2월 23일 민주화에 반대해 의회가 점령당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비교적 문제없이 진압함으로써 스페인의 민주주의 체제는 강고해질 수 있었다.
허나 민주화 이후에도 프랑코 정권의 후유증이 너무 컸는지, 당대 스페인 국민들은 암묵적으로 '''망각 협정'''을 맺어 이 당시의 일을 입 밖에 내는 것을 금기시했다.
7. 프랑코 통치 이후
7.1. 프랑코와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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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가톨릭의 파시스트 경례를 하는 톨레도 대주교이자 스페인 총대주교 이시드로 데 고마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가톨릭은 프랑코 체제의 정치적 우군이 되어주었다. 프랑코 체제의 정신나간 인종주의 덕에 공산주의자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납치해 고아원으로 보내는 일이 잦았는데, 스페인 가톨릭은 아이들 납치를 반대하기는 커녕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조직적으로 도왔다.(...)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미혼 여성이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한 후 그 아이를 '신앙이 투철하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 입양했는데, 이런 애들 납치에서 나오는 돈에 맛들린 의사 성직자 수녀들이 조직을 짜서 1990년대까지 했다.
가톨릭 교회 당사자들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위의 교회 상류층의 비리와 사회적 무책임함은 주교단 등 고위 사제들 중심으로 존재했지, 대다수 마을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일반 신부들은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착취적인 구체제의 희생양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내전이 터지고 좌파들이 자기네 교회와 성직자, 수녀들을 테러하는 것과 달리 우파에서는 스페인 전통이라며 치켜세워주는데 좌파 편을 드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공화국 정부, 좌익 혁명 단체들과의 합의로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공화파에서 싸웠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체제를 유지하며 군종사제 등을 유지했던 바스크 지방의 경우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게다가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시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지만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내전이 휩쓸고 간 이후 프랑코 정권 내부에서의 가톨릭 인본주의에 기반한 반정권 인사도 많이 배출되었다. 또 피상적으로나마 현대 스페인 가톨릭 사제들 또한 이 시절의 얘기는 피하거나 아니면 소극적으로나마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코 독재 말년에 이르면 결국 스페인 가톨릭 주요 성직자들까지도 프랑코의 독재에 불만을 드러냈다. 프랑코가 반공정책을 펴고 가톨릭을 수호했다고 하지만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프랑코의 강압적이고 비상식적인 독재 통치에 스페인 가톨릭 교회조차도 결국 엄청난 염증과 답답함을 느꼈다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과 연관되어 스페인 사회 내에서 가톨릭 교회의 입지가 단단히 꼬인 상황이다. 가톨릭 교회 전반은 2차대전 당시 파시즘에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게 협조한 과거를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근대 세계와의 대립보다 화해, 공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그런데 프랑코 정권이 필요했던 가톨릭 교회는 바로 옛날의 반동적이고, 억압적이었던 그 모습 그대로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페인 인구의 절대 다수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반교회주의 또한 대중적으로 강한 나라다. 비록 모든 가톨릭 성직자들이 프랑코와 결탁한 것은 아니나 많은 성직자들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며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니 인식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영화 등의 매체의 경우, 같은 우파 쪽이라도 팔랑헤나 프랑코 휘하의 군인들은 가차없는 인간 말종으로 묘사하는 반면 그나마 성직자들이나 비교적 종교기사 코스프레를 하는 카를로스파는 개념으로 쳐준다.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이 사람도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스페인 내에서 존재한다. 빨갱이들로부터 스페인과 가톨릭을 수호했다는 이유에서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부나 그러하고 로마 교황청 및 가톨릭 주류는 씹는다. 가톨릭 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겪으며 자유주의와 어느 정도 관계 회복을 하면서 프랑코 정권과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해졌으며, 정권 말기에는 가톨릭 교회 내의 반체제 인사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아니, 원론적으로 현대 스페인 가톨릭 교회가 현재 처한 딜레마 자체가 프랑코와의 야합에서 비롯 된 바가 많으며, 스페인 가톨릭 교회도 이 문제를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는 만큼 저런 프랑코 정권 옹호 여론은 오히려 교회 측에서 먼저 나서서 헛소리 트롤링 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경우가 많다. 프랑코 사후에도 활동을 계속한 마누엘 프라가[54] 같은 프랑코파 정치인들과 피오 모아 같은 학계 내의 수정주의자들은 스페인 가톨릭 교회와도 상당히 냉담한 관계이다.
프랑코 정권을 대놓고 긍정할 정도의 스페인 현지 골수 우익은 전통적 우파적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일환으로 가톨릭 정체성을 강조할 뿐이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바티칸과 교회 자체는 '자유주의와 결탁한 변절자' 비슷한 존재로 보았다.[55]
겨우 40년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놓고 나치 경례를 하며 프랑코와 시시덕거리는 톨레도 총대주교의 사진 같은 역사가 지금도 당장 검색하면 좌르륵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스페인 가톨릭 입장에서 프랑코 정권은 가능하면 지우고 싶은 깨끗치 못한 역사이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냉담하다.
스페인 가톨릭교회 주류는 프랑코와 관련된 논란을 되도록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에서 강성보수파에 속하는 전통 가톨릭 세력은 지금도 프랑코를 두둔하거나 미화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독립한 팔마리아 교회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자기네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했을만큼 프랑코와 그의 체제를 미화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전(前) 에콰도르 대통령이거나 안토니우 살라자르 전(前) 포르투갈 총리 등이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존경하는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교회 신자도 적지 않은 편이다.
7.2. 프랑코 통치의 유산
프랑코의 비호 아래 성장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 그리고 그들의 전횡, 실정과 뿌리깊은 부정부패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요소들은 현재 스페인 국민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경제적 고통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스페인은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서 측정한 청렴지수에서 2015년 기준 58점을 받아 조사대상 168개국 중 36등을 기록하였다. 특히 스페인은 지도부 주변층이나 지방 토호, 왕족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 들어 스페인에서 벌어진 큼직큼직한 부정부패 스캔들의 대표적인 사례로, 바로 전 국왕의 사위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랏돈을 580만 유로(!)[56] 나 횡령했다가 걸려서 해외로 반(半) 귀양을 간 일이 있다. 또 다른 예로, 스페인 고속철도 노선을 보면 도저히 수익을 낼 수가 없는 외딴 시골 마을이나 아예 대놓고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역을 세워놓은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것 또한 지역 토호들의 욕심과 표심(票心)에 눈이 먼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기업가들 사이의 정경유착의 고리가 핵심 원인이다. 이런 일들을 한번 두번 겪으면서 잘못이 개선되는 게 않고 새 노선을 깔 때마다 유령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스페인 자국 주요 언론들도 대차게 깔 정도다. 아예 제목이 유령역(...)인 기사 기사2[A] 하루 이용객이 8명(...)에 불과한 시골역까지...(동영상) 스페인어가 가능한 위키러는 참고 바람.
그 밖에도 수많은 고위층의 비리 스캔들이 자고 일어나면 터진다. 무엇보다도 강자 앞에선 한없이 나약하면서 약자 앞에서만 강한 사법부의 태도 또한 스페인의 부패척결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로 꼽히며, 이것 역시 프랑코식 철권통치의 어두운 유산 중 하나로 지적받는다(관련기사(스페인어)). 프랑코의 장기 집권 기간 내내 중앙의 귀족들과 지방의 토착 유지들, 그리고 금융권과 대기업들이 서로 치밀하게 결탁하여서 국가 시스템 내부에 깊숙히 파고들어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가 이들에 의해 잠식당해버렸기 때문에 이들을 뿌리뽑는 게 쉽지 않다.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정치권과 권력기구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크다.
그리고 과거사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지도하는 계층이 주로 왕족, 지방 옛 귀족 가문들과 결탁 된 금융권, 프랑코 정권의 비호 아래 큰 몇몇 재벌 등 어디어디 공작가 하면 많은 국민들이 알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중앙 왕실에서부터 동네 토호들까지 위아래로 고르게 썩은 물이 흐른다.(...) 때문에 2010년대 재정 긴축의 그림자 아래 사는 현대 스페인인들은 아예 이런 체제를 고착시켜 버린 프랑코 정권과 이를 승계한 현대 보르본 3차 복고 왕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구 공화국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아예 당장의 헌정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여론이 상당하다.
같은 발상으로 반대편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고 네그린과 결탁해 공화진영에서 트롤링을 일삼은 공산당은 우익에게는 당연히 집중적으로, 좌파 내에서도 극딜당하며 현대 스페인 공산당은 의례적으로 '그 시절의 잘못된 선택을 반성한다'라는 식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반면 스페인 고유의 민중적 전통에서 시작하여 민중의 영웅관에 딱 부합한다는 문화적 버프를 잔뜩 받은 CNT나, 양쪽에서 버림 받은 시대의 피해자인 POUM같은 동네는 비교적 전반적인 칭송을 받는 편이고, 적어도 그 순수성은 이념과 무관하게 인정을 받는 편이다[57][58] . 정작 공화국 정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은 예나 지금이나 낭만적 미화의 대상이 되기 힘든 거대 정당이라서 과거에는 공산당이나 CNT에게 휘둘렸고, 현대에는 그냥 무능하다고 까인다.
하여튼 저렇게 수십만의 정적들을 학살하고, 좌파 성향 시민들을 나치 치하 독일의 소위 '열등민족'처럼 취급하고, 국제사회의 천민이 되도록 70년대까지도 처형에 정치범 탄압하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음에도 프랑코는 스페인의 좌파세력을 박멸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스페인에서 탄압받던 좌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통해 프랑스라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했던 선진 강대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었고, 배편 하나만 타면 언어도 똑같으며 문화도 동질성이 강하고, 20세기 초중반 시점에서는 페닌술라레스(Peninsulares)라 부르며 스페인 본토 출신인들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중남미 국가로도 얼마든지 튈 수 있었기 때문이다.[59] 공간적인 문제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 봐도 스페인의 좌파 혁명가들은 나머지 유럽 대륙과 미주의 동지들과 행보와 투쟁을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면서 장시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형성한 국제 좌파 네트워크의 일부이기도 했다. 프랑코 체제 아래서 스페인 좌파는 자국 내에서는 뿌리가 뽑히거나 지하로 들어가야했지만, 전 세계에서 수 만명의 반파시스트 투사들이 국제여단으로 참전했던 것부터 시작하여 2차대전 이후 스페인의 반체제 인사들은 의탁할 친구와 동지들이 유럽 각지에 많았으며, 심지어 샤를 드골 같이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프랑코에 더 가까운 우파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전후 여론과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에 공헌했던 빚을 고려하여 스페인 좌파 반체제 인사들이 자국에 정착하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피레네 산맥 넘어 지하 활동을 하는 것도 묵인해줬다.
이런 대외적인 여건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 CNT, 사회주의 노동자당 산하 UGT(Union General de Trabajadores, 노동자 총연맹), 공산당 산하 CCOO(Comisiones Obreras, 노동자 위원회) 같은 거대 노조들은 스페인 내전 이전부터 정치판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도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프랑코 치하에서 가해진 탄압도 이들의 활동을 지하로 몰아 넣을 수는 있어도, 이미 스페인인, 비스페인인 각계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활동을 필두로 20세기 민중 운동사에서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서 수 많은 활동가들과 추종자들을 재생산할 역량을 얻은 좌익 세력을 근본적으로 박멸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폴 프레스턴, 휴 토머스 등을 비롯한 현대에 스페인 근현대사의 거장으로 추앙 받는 역사학자들 중 상당수는 프랑코 정권이 아직 현재진행형이었을 때 부터 외국인 신분을 이용하여 반체제인사들을 보호했고, 1964년 스튜어트 크리스티라고 하는 스코틀랜드의 아나키스트 청년이 프랑코를 암살하려고 마드리드 백주 대낮에 폭발물을 대거 소지한 체로 체포당했을 때도 프랑코 정권은 자국민 앞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하지만 진짜배기 강대국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며 3년 동안 카라방첼 감옥 특실에 구금하다가[60]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전 세계 지식인들의 압력 아래 석방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자체적으로 막강한 조직력과 선동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지 기반이 뿌리 깊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이기도 했던 스페인 좌익들이 자국 내 활동 터전은 잃었어도 2차대전 이후 유럽과 미주 전역에서 성장한 시민 사회, 대중 매체와 적극 연계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정권은 이미 더 조질 것도 없는 자국 내의 지하 세력 빼고는 아예 반체제 세력을 터치도 못하는 팔다리 묶인 입장에 빠져버린 것이다. 정권의 지상과제이자 존재 이유를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며, 분열을 용납하지 않는 통일 스페인 민족 국가의 반좌빨 레콩키스타라고 규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60년대, 70년대 들어서 공산당,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숨겨 왔던 지하 조직과 함께 정권에게 이빨을 들이대기 시작했고, 프랑코 사후에는 몇년 지나지도 않아 다시 당당한 사회의 주류 여론이자 거대 이해 집단으로 재부상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한다.[61] 그리고 이들 좌파 단체, 정당들이 재부상을 넘어 30년 넘은 세월이 흘러 기성 세력으로 정착하기까지 한 2020년대 현재 스페인에서 좌파 세력들은 '''헌정 질서 자체를 공화정으로 복고시킨다 vs 만다로 우익 세력과 치열한 줄당기기'''를 하고 있으며[62] 프랑코가 그렇게 지우려고 했던 제2공화국의 삼색기는 스페인 어디를 가든 시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프랑코가 엄청난 인권 탄압과 국제적 멸시를 감수하면서도 추구했던 '''강압적인 국론 통합'''이란 지상과제는 그가 죽자말자 바로 실패한 셈. 50년 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한 짓을 반대편인 우파에서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한 것이나 경제적 발전은 프랑코의 개인적 유능함[63] 보다 당시 국제적 여건의 도움이 더 컸다. 2차대전 이후 70년대까지 약 30년의 기간은 서방이든, 공산주의 동구권이든, 이제 막 생긴 제 3세계든 세계 경제 자체가 급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마셜 플랜의 원조를 받아가며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전 경제 수준을 대부분 회복한다. 1950년대 후반 쯤 되면 전쟁 전에도 상상치 못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의 낙인으로 인하여 왕따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까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군터를 비롯한 동시대 관찰자들에게 '스페인은 지정학적으로만 유럽이지 차라리 아프리카에 속한다고 보는 게 맞다' 따위 소리나 듣고 있었다. 그나마 본격적으로 서방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시작되던 1950년대 후반에 타이밍을 잘 잡아 나라문을 연데다 그 이전에도 최소한의 경제 기반은 갖춰놓은 덕택에 최악은 피한다.
또 스페인의 프랑코 추종자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2차대전 이후로 명맥이 끊기질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최후의 순수한 파시스트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코 정권이 1970년대까지 워낙 오래 버티다 보니 다른 서방 국가에서는 엄두도 못낼 저런 공개적인 파시즘 옹호 세력이 많은 편이다. 프랑코 정권이 학술적 의미로 순수한 파시즘이 맞냐 아니냐는 정권의 성격에 대한 학술적인 문제지, 공교육 과정, 대민 선동 등을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는 차원에서의 프랑코 정권은 '''유대인들과 볼셰비키들의 사주로 스페인에 침투한 비국민 빨갱이들과 자유주의자들, 지역 분열주의자들에게 대항하여 단일 가톨릭 스페인 민족을 수호하는 성전'''이란 바람직하게 일관적인 전투적, 혁명적, 정화적 파시스트 운동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7.3. 구 프랑코 묘역
프랑코 묘역을 포함해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사망한 전몰자 4만 여 명의 무덤이 위치한 전몰자의 계곡은 공화군 포로 1,200명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코 비판자들은 그의 묘역을 역사교육센터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치의 만행을 반성하는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변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코 추종자들은 오히려 그의 묘역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완공 후 계산한 총 길이가 교황청에서 '이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음'이라고 못 박은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조금 더 길다. 그래서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미터 짧아지는 지점에 격벽을 짓고 '여기서부터가 성당입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고 한다.
프랑코는 말년에 결장암, 동맥경화 등 합병증에 시달렸고 1975년 11월 3일 위수술을 받고 혼수상태로 17일을 버티다가 19일에 사망하고 20일날 그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그 또한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마찬가지로 측근들이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결과 이미 죽은 사람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에 양도하는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의 기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비화가 있다.
36.07.18 - 스페인 내전의 발발일
39.04.01 - 스페인 내전의 종전일
이 두 날짜를 각각 더하면
75.11.19 - 즉, 그가 사망한 날짜가 된다.
2019년 스페인 정부가 프랑코의 유해를 전몰자의 계곡에서 이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스페인 주재 교황청 대사가 이를 비판했고, 이에 대해 스페인 정부가 내정간섭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문제는 법적으로 번져 2019년 9월 24일. 스페인 대법원이 프랑코의 유해를 이장해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정부는 10월 24일에 발굴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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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관을 지고 떠나는 후손들과 관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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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 묘소 이장 과정 그림 (더 타임즈 제공)
2019년 10월 24일 스페인 정부는 비공개에 프랑코의 관을 이장하는 장례식을 군장으로 치렀다. # 프랑코의 관은 군 헬리콥터 편으로 60㎞ 떨어진 마드리드 북부 엘파르도의 주립 추모공원인 민고루비오 묘지에 있는 프랑코 가문의 가족묘역[65] 으로 이장되었으며, 사망한지 44년만에 프랑코의 아내와 함께 합장된다. # 파묘 현장과 재안장할 묘지까지는 후손 22명과 법무장관, 법의학자, 카톨릭 사제들 등 극소수만 참여하여 조용히 치러졌다.
정부는 선전 남용 방지 차 참관자들의 휴대폰 소지를 금했다. 그 대신 스페인 언론은 이 비공개 행사를 제한적으로 찍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장지인 프랑코 가문 묘역 앞에서 프랑코 찬양 노래를 부르는 일부 극우파들도 있었지만, 마드리드 중심가에서 시민들이 축하 파티를 벌이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8. 현재 스페인 사회의 평가
프랑코 사후 스페인이 민주화되고 좌파 정당도 여러 번 집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시절에 대한 정부 차원의 역사적 재조명은 명확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민주화 이후 역대 스페인 정부는 대체로 과거를 보기보다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대 스페인의 민주정 체제가 온건 프랑코파 세력과 제도권 온건 좌파 세력의 타협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좌파 정당들이 합법적으로 집권할 수 있는 민주체제를 열며 한국의 87년 체제 이상의 비중을 스페인에선 지니는 몽클로아 협약[66] 부터가 프랑코 체제에 기대며 성장한 기득권 세력의 유지를 체제 전환의 대가로 보장했다.
한편으론 그 시대가 너무 참혹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시절을 파헤치는걸 꺼리는 경향도 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선 민간, 학술 단체와 구 공화파 계열 정치 세력, 외부 국제 기관의 적극적인 활동, 특히 역사적 기억의 회복 위원회(Asociación para la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의 활동을 통해 프랑코 사후 체제를 지배했던 소위 '''망각의 협약'''의 그늘은 서서히 물러나고 있고, 포데모스의 부상 뒤에 있는 인디그나도(Indignado) 운동으로 대표되는, 몽클로아 협약과 전혀 상관없는 현대 스페인의 신세대 정치 세력의 미래 행보에 따라서 프랑코 정권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평가도 점차적으로 많이 바뀔 여지는 있다지만, 현 헌정질서의 직계 선대 정부인 프랑코 정권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스페인에선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정치적 논쟁 거리다.
예를 들어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즉위로 스페인에 왕정이 복고되자 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 전 국왕 주도의 민주화 개혁 정책을 지지, 추진했던 아돌포 수아레스(1932~2014) 전 스페인 수상 역시 프랑코 독재 정권 시절에 국영 방송사 사장직을 지내는 등 프랑코 정부 아래에서 경제관료로 성장한 인물이었다.[67] 게다가 1980~90년대 IOC위원장으로 장기간 군림했고, 한국에서도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위원장으로서 잘 알려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1920~2010)는 프랑코 치하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출세한 인사였으며, 그가 파시스트 군복을 입고 파시스트 경례하는 사진들도 수없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와 국제평화를 위한 사도 정도로 알려지곤 했다. 전두환의 회고에 의하면 사마란치는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전두환이 단임 약속을 깨고 영구독재를 해주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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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치권에서도 과거 청산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8년에 스페인 의회에서 프랑코의 묘를 전몰자의 계곡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로 의회에서 가결이 났으며, 2019년에 실행되었다. 반면 이런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과 맞물려 부상한 카탈루냐 독립운동 문제도 같이 대두하면서 한동안 '극우 청정국'이라 불렸던 스페인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로 VOX 같은 극우 세력이 다시 주류 정계에 뛰어들면서 과거사 + 국체 문제를 포괄하는 프랑코 정권의 유산의 영향력은 여전히 스페인 정국의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주고 있다.
9. 대중문화
내전기를 다룬 가장 문학 작품으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있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함께, 헤밍웨이가 저술한 장편소설의 대표작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는 오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수기이다. 켄 로치 감독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바탕으로 영화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을 만들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집권기는 멕시코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두 장편영화, '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과 남쪽, 카를로스 사우라의 까마귀 기르기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
스페인을 비롯한 중남미 등 스페인어권 지역에서는 이 시기를 다룬 영화들이 상당히 많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자국 영화계를 작살낸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어서 어지간한 스페인 영화계 인사들은 프랑코를 '''매우 싫어한다'''. 관련 영화가 나오면 95% 이상 비난하는 작품일 정도.
소련이 나치의 포지션에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대체역사물 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는 역사개변 최고의 수혜자로 추정된다. 히틀러가 사라진 작중 설정 상 프랑코의 스페인은 자연스레 친영미 반공노선을 탔고 영국, 포르투갈과 함께 자유 유럽의 최후의 보루였다. 리마스터 버전에서는 유독 스페인만 국가별 보너스가 풍부[68] 한데 미국이 물자와 의용군 지원을 한 것을 보면 스페인 외인부대 인종제한을 풀어서 사실상 미국이 주축이 된 보수우파 버전 국제여단처럼 운용되어 연합국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10. 가족
프랑코의 부인 카르멘 폴로 프랑코(María del Carmen Polo y Martínez-Valdés)는 프랑코가 북아프리카로 파견될 때 즈음에 그와 결혼했다. 프랑코가 카우디요가 되자 그도 정치에 나서 언론 검열 등에서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프랑코가 병석에 있을 때 아리아스 나바로를 후임 총리로 인선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로부터 메이라스 공작(Señora de Meirás) 자리를 받고 스페인 대귀족(그란데 데 에스파냐)의 일원이 되었다. 프랑코 체제의 몰락 이후로는 대외 활동을 극도로 기피하고 정치에 대해서도 일체 발언하지 않다가 1988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랑코의 외동딸 카르멘은 비야바르데 후작 크리스토발 마르니테스-보르디유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후안 카를로스 1세로부터 프랑코 공작에 서임되었다. 2008년에 회고록을 쓰면서 아버지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대해 따뜻했던 사람이라 평했고 그가 저지른 만행 등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집에서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해서 몰랐다"라는 식의 입장을 보였다. 카르멘은 프랑코 재평가(?)를 주도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국민 재단(Fundación Nacional Francisco Franco)의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69] 프랑코 추종자들의 우상처럼 되어 있다. 2017년 12월 29일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카르멘 프랑코의 장녀 마리아는 스페인 전왕 알폰소 13세의 손자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폰소 데 보르본과 결혼하여(후에 이혼함), 아들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을 두었다. 작위 절대장자상속법에 의해[70] 카르멘 사후 프랑코 공작 자리를 이어받았다.
마리아의 장자, 즉 프랑코의 외증손자가 되는 루이스 알폰소는 현재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위 요구자로 루이 20세라 자칭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현재의 카페 왕조의 총 수장이다.[71][72] 마리아의 뒤를 이어 자칭 루이 20세가, 프랑스 왕들이 가졌던 수많은 작위들과 함께 프랑코 공작 자리'''도''' 이어받게 될 것이다.
11. 여담
- 해외축구 갤러리에서는 FC 바르셀로나가 불리한 심판판정을 받거나 레알 마드리드 CF가 유리한 심판판정을 받으면 그의 이름을 아예 동사처럼 써서 '프랑코' 했다는 말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상술했듯이 디 스테파노 건과 같은 프랑코 정권의 바르셀로나와 같은 지역 축구팀 탄압과 레알 마드리드 밀어주기 정책 때문이다. 프랑코는 어느 특정 팀을 밀어주기하려는 정책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이러한 짓을 저지른 것이라 마드리드 또한 프랑코의 피해를 본 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사실 프랑코 독재 이전, 2공화정과 내전 시기 레알이란 수식어가 없던 그냥 Madrid CF는 의외로 친공화파, 반프랑코 성향이 강했던 팀이었다. 마드리드 자체가 프랑코군의 폭격을 맞으면서도 전쟁 내내 높은 사기와 문화적 수준을 유지했던, 한때 마드리드는 파시스트들의 무덤이 될것이다(Madrid sera la tumba del fascismo; 내전 당시 마드리드 수비전에 앞서 선전장관 돌로레스 이바루리가 만든 구호이다)라는 구호 아래 묶였던 강력한 집단적 기억이 있는 고장이고, 당시 팀은 마드리드의 공화주의적 정신을 상징하는 스페인 인민의 팀으로 사랑 받았다. 이런 레알 팬덤 내에서 프랑코와 왕실의 유산을 혐오하는 팬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어서 종종 프랑코가 복귀시켜준 왕가의 상징물은 싸그리 떼버린 레알 저지, 팀 아이템을 자체 제작해서 파는 팬들도 많다. 이런 셔츠나 이런 이미지만 봐도 그렇다. 오히려 이 시절 노골적으로 군부의 팀을 상징했던건 이름부터 바로 그 마드리드에 폭탄 떨궜던 파시스트 진영 항공사들이 주축으로 만들었다 하며 아비아시온 나쇼날로 불렸던 AT 마드리드였는데, 지금은 남부 마드리드 좌파 동네의 AT 팬들이 레알 팬들더러 왕실의 팀, 권력가의 팀이라 놀리고 있다.
- 월간 항공에선 그를 유태인이라고 한 바 있다. 프랑코 유대인 드립은 스페인 내전 시기까지 궤를 올라가는데 안달루시아 지방엔 프랑코라는 성을 쓰는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에 프랑코도 유대인이 아니겠냐는 인민전선의 황색선전이 시초다. 이 떡밥을 주워들은 히틀러도 자기 말 잘 안 듣는 프랑코가 유대인이 아닌지 의심한 바가 있다.(...) 1540년 이후로 스페인에서는 콘베르소(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및 후손)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어(Helen Rawlings, The Spanish Inquisition, 15), 유대교 신자가 아니라 '혈통적 의미에서의' 유대인 후손들이 스페인에 잔존해있기는 했다. 하지만 무슨 하플로그룹 같은걸 연구한다면 모를까, 스페인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동화되었기에 이런 식의 '이방인' 논란은 무의미하다.
- 나름대로 숙련된 화가이기도 했다. 시간이 생기면 즐기는 취미가 사냥과 그림 그리기였기 때문에 취미삼아 하던 것이 내공이 쌓인 케이스다. 그 부하인 블랑코 제독도 역시 실력이 좋았다고 한다.[73]https://www.miradorarts.com/franco-the-painter/
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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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정확히는 El Gran Capitan[3] 해당 계급은 전통적으로 스페인 국왕이 겸했고 지금은 서방권의 원수와 동격 대접을 받는다. 물론, 이전에도 국왕이 아닌 원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프랑코 시절에도 프랑코는 공신들에게 이런 원수 자리를 뿌렸다.[4] 중남미 사람들은 부, 모계의 직계 성만 붙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5] 모로코 베르베르인들과 벌어진 전쟁.[6] 당시 프랑코는 체격이 작아 '''꼬마 프랑코''', '''계집애 파카'''(프란시스코의 '''여성형'''인 프란시스카의 애칭) 등으로 불리며 동료 장교들에게 무시당했다.[7] 나중에 스페인 제2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내전에서 프랑코와 대립하게 된다.[8] 이 당시 비행기 기술이 얼마나 불안정했던지, 동시대의 또다른 독재자 스탈린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딱 한 번. 그것도 테헤란 회담에 갈 때만 탔다고 한다.[9] 좌파 노동조합이 아니라 파시즘의 원류가 되는 국가노동조합주의자들이다.[10] 리베라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은 없었고 '유대인 그거 그냥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정도의 생각만 했다고. 물론 그렇다고 착하게 군 것도 아니라 정치활동의 일환으로 유대인 상점에 대한 공격을 지시한 적도 있었다.[11] 대전 후에는 일찍부터 나치에게 점령 당해 국가가 유린 당한 폴란드인들이 비슷하게 살아 남은 자들은 수용소 고참이 되어 그 중 지조와 양심을 지킨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수감자를 도우며 수용소 내 저항에 핵심적인 역할을 종종 맡았는데, 폴란드는 전쟁 이전에는 군사정권 아래 반공 우익 정권이었기 때문에 이 폴란드인 수감자 중에는 폴란드 국내군을 비롯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따지면 스페인 공화파와 반대인 우익 가톨릭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많았다. 폴 프레스턴이나 스타니스와프 도보시에비츠 같은 스페인과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와중 실재로 마트하우젠, 부헨발트, 다하우 같은 곳에서는 스페인 공산당원/아나키스트와 폴란드 가톨릭 사제의 협력 같은 좌우합작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12] 이런 신념적 정치범들이 수용소 내 저항 조직을 만드는 걸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카포는 민간 사회에서도 삐뚤어진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냥 범죄자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특히 아직 전시 체제가 본격화되지 않고 홀로코스트가 정치적 박해 수준으로 머물렀던 30년대 말을 비롯하여 이따금 대규모 소탕 작전 이후 한번에 대규모로 독일이나 각 점령지의 정치범들이 대거 입소하여 이들이 카포 층을 이루었던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정치사상적 수감자들은 일단 고학력자들이 많고 어디 조직 활동을 해 본 경험이 많았으니 중간 관리자로서 딱이라서 해당 수용소의 사정이나 수용소장 성향에 따라 오히려 카포로 더 잘 쓰였던 경우도 있었다. 부헨발트의 경우도 그렇고 수용소 문학에서 가끔 가다 나오는 양심을 지키고, 엄청난 위험을 간수하며 중간관리자로서 다른 수감자들을 더 박해한게 아니라 오히려 감싸주고 지키려고 했던 예외적인 카포들은 다수가 이런 경우이다.[13] Francisco Boix(1920~1951). 이름에서 보이듯이 카탈루냐인이었다.[14] 영국과 미국은 겉으로는 중립이지만 국제여단을 제외하면 속으로는 은근 슬쩍 국민진영과 거래를 하거나 이런 저런 편의를 봐줬다. 오히려 이 덕분에 프랑코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미측 인맥과 경제적 의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프랑코가 추축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9년 당시 가진 의구심과 달리 중립으로 남을 수 있도록 기여하기도 했다. 가장 특기할만한 건 역사가이면서 주 스페인 미국 대사인 J. H. 하예스의 사례다. 이 사람은 42년, 45년 당시 주스페인 미국 대사로 파견나갔는데 독실한 가톨릭이라는 점 덕분에 스페인으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았고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스페인이 추축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했으며 덤으로 히틀러로부터 도망친 몇 만에 유대인을 포함한 정치적 난민들을 구출하는 일도 맡았다. 이 외에도 처칠의 영국은 스페인 관료들에게 뇌물을 푸는 외교 공작을 벌이기도 했고.[15] 대표적인 스페인 내 친영파 거물로 왕정시기 외무장관이자 프랑코 정권의 초대 영국 대사 제17대 알바 공을 들 수 있다. 영국에도 영지가 있는 그냥 반쯤 영국인이었던 사람인지라 내전 기간 내내 줄곧 영국 상류 귀족층을 상대로 국민진영에 유리하게 여론공작을 했고 그 덕에 프랑코 정권에서도 잘 나갔다.[16] 2차세계대전 당시 스페인의 정치구도를 보면 세라노 수녜르같은 파시스트가 사실상 2인자로서 각종 분야에서 프랑코에게 조언하면서 실세 노릇을 했고 가톨릭, 군부, 왕당파는 그 주변에서 화를 참아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청색사단 아이디어도 세라노 수녜르가 떠올린 것이다. 영국은 특히 왕당파와 가톨릭을 중심으로 반독 공작을 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나면서 세라노 수녜르같은 친독 파시스트는 당연히 영향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친영적인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가 차지한다.[17] 이 때 탕헤르에 주둔한 외교관들은 전부 추방한다. 독일 외교관도[18] https://winstonchurchill.org/publications/finest-hour-extras/the-creeds-of-the-devil-churchill-between-the-two-totalitarianisms-1917-1945-3-of-3/[19] https://winstonchurchill.org/publications/finest-hour-extras/the-creeds-of-the-devil-churchill-between-the-two-totalitarianisms-1917-1945-3-of-3/[20] 내부적으로도 어쩔수 없었다. 스페인 입장에서 필리핀은 당장 프랑코와 같은 세대들이 초년 장교나 어린 아이였던 시절 상실했던, 아시아 유일의 스페인어권-이때만 하더라도 필리핀의 엘리트들은 아직 영어 못지않게 스페인어도 많이 썼다-가톨릭 국가였다는 점만으로 과거 스페인 제국에 대한 향수에 의존한 프랑코 정권의 자기 인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나라였다.[21] Wayne Bowen, Spain During World War 2, 2006년 작 출처[22] 당시 스페인의 경우를 들자면 "건강한 스페인 민족 남아는 나약한 빨갱이를 죽이며 새로 태어나고..." 운운하던 식의 대중 동원이다. 정치적으론 고참 당원들이 숙청당하며 쩌리가 된 정당 팔랑헤였지만 이런 선동과 심리전 쪽에선 계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3] 이하 문단은 발렌시아 대학 사학 교수 이스마엘 캄포스의 2003년 저서, 'España contra españa: los nacionalismos franquistas(스페인과 맞선 스페인: 프랑코주의적 민족주의'들')'에서 주로 참조한 내용들이다.[24]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스페인은 전시상태를 해제한다. 동시에 정치범에 대한 사면 조치도 내린다.[25] 복구해야 한다고 해서 못한다는 건 정말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완곡한 거부를 위한 핑계로 볼 수도 있다. 당장 이탈리아나 일본이 전쟁 준비를 충분히 하고 개전한 건 아니다. 심지어 그 독일조차도 영국, 프랑스와 싸운 건 계산 밖이었다.[26] 그것 때문인지 지구상 마지막 파시즘 국가 혹은 파시즘 최후의 보루(어디까지나 그들 관점이지만)로 불린다.[27] 다만 초기에 국민생디칼리슴적 자급자족을 한것으로 보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28] 스탈린은 30년대만 해도 여타 정치인들의 견제를 받아왔다. 히틀러도 30년대만 해도 군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성 보수 우익의 협조를 얻어 정권을 유지해야 했다. 반면,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내전을 겪어 출범했다는 특성 때문에 거의 줄곧 군부가 부동의 최고 실세였다. 즉, 정권 획득 과정에서 폭력성을 겪었기 때문에 그만큼 폭력이 초기부터 매서웠다는 것이 차이다.[29] 원문: Nuestros valientes legionarios y regulares han demostrado a los rojos cobardes lo que significa ser hombres de verdad y de paso también a sus mujeres. Esto está totalmente justificado porque estas comunistas y anarquistas predican el amor libre. Ahora por lo menos sabrán lo que son hombres de verdad y no milicianos maricones. No se van a librar por mucho que berreen y pataleen[30] 게다가 자칭 가톨릭 신앙을 위해 성전을 치렀다는 자가 전후 포로, '전범'수용소로 산티아고 기사단의 총본산인 톨레도 주 우클레스 수도원이나 발렌시아의 산 미겔 데 로스 레예스, 레온 주의 산 마르코스 수도원 같은 현대와선 유네스코 문화유산급의 유서 깊은 교회, 수도원들을 개조해 썼다.[31] 비슷한 시기에 마침 로르카가 살해당해 국민 진영이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는데 그로 인한 부담을 우려했다는 설명이 있다.[32] 이와 연계되어 멕시코 영화 감독 중에서는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보이는 감독들이 존재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대표적.[33] 하지만 비리디아나는 대놓고 가톨릭을 까는 내용 때문에 영화를 본 프랑코 정권이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34]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은 하비에르 바르뎀의 삼촌이었는데, 그 여파로 하비에르는 좌파적인 소신을 가지고 있다.[35] 다른 유럽 지역, 특히 프랑스에선 '''영광의 30년'''이라 부르던 전후 복지국가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정착을 한껏 누리던 시절이다.[36]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2세의 서자인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장군(1670-1734)의 직계후손으로 원래 피츠제임스는 영국인이었지만 명예혁명 후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30세로 참가하고 37세에 알만사 전투에서 펠리페 5세의 왕위를 합스부르크의 카를 6세로부터 지켜내 원수가 된다. 이로 인해 프랑스 귀족작위(피츠제임스 공작-차남에게 주었는데 차남은 일찍 죽어 삼남에게 주었는데 이쪽은 주교가 되어 사남에게 갔다. 여담이지만 사남인 샤를은 7년 전쟁에서 삽질 꽤나 했다)와 스페인 귀족 작위(영국에서 쓰던 것 그대로 베릭 공작-장남에게 주었다. 실제 에스파냐 쪽 재산이 더 많았다고...)를 가지게 되는데 프랑스계는 왕당파였던 6대 공작 에두아르 드 피츠제임스(증손, 4대 공작의 손자)의 죽음 이후 단절 조짐이 보이다가 1967년 후사 없이 단절되고 이 사람이 후손인데, 남녀관계랑 사치문제로 스캔들이 꽤 많은 사람이었다. 노년에 한창 어린 남자와의 재혼 같은 셀레브리티성 가십은 거르더라도, 일단 귀족 작위 숫자가 심지어 왕실보다도 많아서 의전상 이리저리 꼬이는게 많아 사교자리나 공식 석상에서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이 아줌마랑 같은 공간에 있는걸 피했다는 야사가 널리 퍼질정도.[37] 요즘 돈으로 약 천만달러, 백억원을 넘는 액수이다[38] <Exploring the History of Leisure and Tourism in Spain> M. barke 참조.[39] 남유럽 국가 중 가장 산업적으로 발달한 이탈리아의 철강 생산량은 1925년 기준으로 160만 톤을 넘는 수준이었다. 스페인은 70만 톤도 안 되었다. 동시기 미국, 독일은 4600만 톤, 1500만 톤을 넘겼고, 프랑스는 950만 톤, 영국은 870만 톤, 소련과 벨기에가 대략 350만 톤 정도, 룩셈부르크는 230만 톤 정도였다. 일본은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1929년을 기준으로 스페인의 1인당 GDP는 당시 선진국으로 여겨지는 17개국 중 일본, 핀란드 빼고 가장 낮았다. 한 때 자기들이 지배했던 일부 남미 국가 칠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보다도 떨어졌던 것.[40] 이른바 프랑스의 영광의 30년, 서독, 이탈리아의 경제 발전 등.[41] 이는 실업률의 국가간 집계방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한국이나 일본은 실업률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낮게 나오지만(당장 일자리 없다 타령하는 한국의 실업률은 3~4%대다. 물론 청년 실업률은 좀 더 높긴 하다.) 그렇다고 한국 노동시장이 두드러지게 상태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실업의 이력현상(과거의 변수가 현재의 변수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의 근거로 스페인의 사례를 드는 경우도 있다.[42] 유사한 사례로 이탈리아가 있다.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스페인처럼 UN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한국전쟁 때 의료 지원단을 파견하였다.[43] 괜히 CNT의 이데올로기적 보조 조직인 FAI가 Federacion Anarquista '''Iberica'''가 아니다[44] 당장 아나키즘이 주도했던 1910-30년대 스페인 노동운동의 성장은 안달루시아-바르셀로나 공업지대 사이 국내 인구 유출의 역사와 지역적, 시기적으로 상당부분 일치한다. 즉, 평소에는 바르셀로나 아파트에서 생활하던 안달루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농번기 되면 고향에 돌아가 주로 소작농 출신 가족 일 도우면서 사상 전파도 하고, 이런식으로 안달루시아 라티푼디움 농촌과 카탈루냐 공업지대 양 지방이 당시 스페인 급진 좌익 운동의 본거지로 성장했던 것이다[45] patrioteria, 스페인어로 '바보짓'이란 단어인 tonteria의 말장난으로 CNT 당지인 '노동자 연대 (Solidaridad Obrera)' 등에서 종종 사용했던 표현이다[46] 레닌 시절부터 민족주의 담론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고 전략적으로 연대하려고 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자들과 달리 아나키즘 진영은 적어도 유럽과 북미 같은 눈앞에 대적한 실존적 정치적 문제가 식민지 현실이 아니었던 곳에서는 민족주의 조류 일체에 대해서 상당이 일관적으로 비타협적 모습을 보였던 편이다. 소위 '방어적 민족주의', '피압제민족의 민족주의'도 결국 본질적으론 위험하고 폭압적인 사상으로 보고 배격하는 조류는 애초에 스페인내전 20년전 네스토르 마흐노 시절부터 일찍 자리잡았고, CNT 또한 프랑스로 망명온 마흐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이런 입장을 건지하며, 21세기 작금까지도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관하여 '폭압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는 프랑코 정권의 후계자' 중앙 정부도 욕하지만 카탈루냐 민족주의 세력도 여전히 동네왕초를 꿈꾸는 또다른 악에 불과하다는 양비론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47] 이 점 또한 다른 전간기에서 냉전기까지 과도기적 이념 대립의 역사와 비슷하게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미 국가들의 군부 독재 정권에서도 벤치마킹해서 써 먹은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나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이 벌인 더러운 전쟁이다.[48] Capnuano & Carli, 2012, "Antonio Vallejo Nagera (1889-1960) and Eugenics in Franco's Spain. When science was the argument for offspring's ownership"[49]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아들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국왕이 되고 민주화를 추진하자 아들을 왕으로 인정하고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50] 차에 탄채로 폭탄이 터져서 폭사한다. 이때 폭발 충격으로 차가 공중으로 이십미터 가량이나 솟아오르는데 그게 짤방으로 남아 지금까지도 스페인 인터넷에서 '스페인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며 조리돌림당한다.[51] 출처: 전 주 스페인 미국 대사 David Brightly와 John Holroyd-Doveton의 대화.[52] 나에게 바친 충성을 국왕에 바치라는 것이 군부에 대한 프랑코의 유언이었다.[53] 프랑코의 유언장에 적힌 문구다. 사실 이 외에도 행적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골때리는 말들을 많이 했는데 프랑코 유언 전문 참고.[54] 이 사람도 따지고 보면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좌익 세력에 대한 온건파였다.[55] 정치적으로 극우 성향의 서구권 전통 가톨릭 신자들이 취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를 현대주의의 오류라든지 사탄의 작품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56] 한국 돈으로 약 76억 원 정도.[A] 정확한 기사는 아님을 참고바람.[57] 프랑코 정권의 공식 사관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극우 성향의 역사학자 리카르도 데 라 시에르바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그의 저작, Nueva y definitiva historia de la guerra civil (1986)에서 마드리드 방어전 당시 두루티 휘하 아나키스트 CNT가 참 열정적으로 싸운다고 호평한 뒤, "그러나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분투는 아나키즘 자체가 현대 사회의 정신병적 현상이란 점을 고려하면 설명하기 힘든 미스테리한 일이다(...)"라는 논평을 남겼다 [58] 아나키스트들은 자기들이 사는 도시를 지키는데는 분명 유능했지만 이들의 군사적 행적은 한계 역시 뚜렷했다. 우선 잘 모르는 평지에서의 싸움에 약했고, 정부와 규율을 싫어하는 특성상 의용군 체제에 집착했다. 이 점 때문에 통일된 규율을 강조한 공산당과 중도공화주의자들에게 논쟁에서 밀리고 군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해서 정치적으로도 밀렸다. 조직력 떨어지는 의용군이 좋다면 하다못해 게릴라전을 했으면 나았을텐데 정작 그러지도 못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59] 현대 같은 경우 예를 들자면 중남미 상류층은 자녀들을 대부분 영미권 대학에 보내는게 일반적이지만, 프랑코 정권 치하 학계의 단절 이전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스페인 자체의 학문적 경쟁력도 있고, 다른 언어권간 제도 통합도 현격하게 부족했던 시절엔 중남미 엘리트들은 여전히 살라망카, 마드리드, 코임브라 같은 옛 식민 모국 유수의 대학에서 교육 받는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스페인/포르투갈과 구 식민지 국가들간의 유대감은 오히려 21세기 현대 와선 영미권 헤게모니의 부상으로 오히려 이 시대보다 약해진 경향이 있다.[60] 이 사람은 카라방첼 감옥 수감 중에서 한국로 치면 수능 비슷한 A-Level를 취득하기도 하며, 본인 인터뷰에서 자신은 영국인이라 감옥에서도 다른 스페인인 수감자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부끄럽다고 할 만큼 당국자들이 자신을 터치하지 못했다고 했다. 석방 이후 이 사람은 영국으로 귀환, CNT 계열 스페인 반체제 인사들 비호 활동에 주력하다가 현대에도 명망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살다 2020년 가을 자연사했다.[61] 유튜브에도 동영상이 올라와 있는 프랑코가 죽은지 고작 2년 뒤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열린 CNT 총 대회만 해도 30만명의 군중이 집결하며 이들이 40년 동안 활동가 수 만명을 잃으며 철저하게 탄압 받았던 지하 조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동원력과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정권 말기로 가면 갈수록 체제 유지와 반대파 탄압 능력 자체가 서슬퍼렀던 40년대와 달리 녹이 슬어버렸던 프랑코 정권의 말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좌익도 현대 들어서는 예전 20세기 초중반 국제 좌파의 전성기 CNT의 경우 정규 노조원 백만, 방계조직 이백만 운운하던 시절만큼의 대중 장악력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이건 서방 사회 전반의 트렌드에 가깝지 프랑코 정권의 억압성과 한계 같은 '스페인의 특수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62] 사실 스페인의 민주화를 촉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위상 덕분에 진보/공화파 세력들조차 2천년대까진 입헌군주제를 공화정으로 복고시키자는 말은 섣불리 내뱉지 못했으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2010년대 들어 노망이 났는지 각종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르며 꾸준한 삽질을 하는 바람에(...) 2014년엔 아예 왕위에서 퇴위까지 했기에 스페인에선 공화정으로 돌아가자는 여론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63] 개인적 유능함이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일단 스페인 같이 19세기 이래 허구헌 날 쿠데타와 반란이 일상이던 나라에서 프랑코 수준으로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강력한 권력을 유지한 정치지도자는 스페인에서 옛 국왕들 빼면 찾기 어렵다. 프랑코는 물론 독재자이기는 했지만 다수 정치집단들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특성 때문에 이런 여러 세력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개중에는 케이포 데 야노같이 대놓고 기어오르는 이들도 있었고, 왕당파와 같이 프랑코를 국왕이 돌아오기 전의 일종의 대리권력으로 여기고 '그래서 우리 폐하는 언제 돌아오세요?'라고 하면서 압력을 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지집단이 다른 생각을 하거나 청구서를 들이미는데도 불구하고 내전 종결 후 스페인에서는 23-F를 빼면 유의미한 쿠데타가 없었을 정도로 정치적 안정성이 유지된 건 특기할 만하다.[64] 우리가 생각하는 땅을 파고 흙을 덮는 무덤과는 살짝 다른데, 건물 바닥을 파긴 하지만 그 구덩이(광중) 자체에 아예 단단한 석벽들을 세워 석곽으로 만든 다음 관을 안장한 후에 관 길이만한 석판으로 잠궈 봉안하는 방식이다.[65] SBS 보도에 따르면 프랑코 가문의 가족묘지라고 한다.[66] 스페인 현지에서는 2017년 카탈루냐 분리 독립 사태를 포함한 중대한 정치적 위기 때마다 언론에서는 몽클로아 협약이 체결된 '77년 체제' (sistema de '77)의 위기'라는 식으로 말한다.[67] 다만 수아레스 전 수상은 유년 시절이던 프랑코 정권 초반기에 가족이 공화파였다는 이유로 프랑코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68] 하지만 멀티에서는 더미 데이터로만 존재했으며 리마스터 컬렉션에서 플레이어블 국가가 되었는데 영국의 장갑, 독일의 화력에 보병 이동속도 보너스가 있다. 이렇게 3종의 버프가 있는 연합국은 스페인이 유일하다.[69] 정부에서 설립한 '국가'재단이 아니라 유족들 멋대로 갖다붙인 '국민'재단이다. 그러나 재단 성립 당시 정권의 주요 공문서를 프랑코 가족의 개인 소유물이랍시고 싸들고 가거나, 스페인 정부 내 프랑코 추종자들이 연루되는 등 정치권과도 종종 나쁜 방향으로 엮인다.[70] 2005년에 법이 개정되었다. 그 전에는 아들을 우선했지만, 카르멘은 아들이 없어서 이 법이 아니었더라도 마리아가 작위를 이어받는다.[71] 항렬로 볼때 후안 카를로스가 알폰소 13세의 3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고, 루이스 알폰소의 아버지인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폰소 데 보르본이 차남인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의 아들이어서 항렬이 알폰소가 더 높지만, 이미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975년 후안 카를로스가 왕위에 올라서 결국 왕이 되지 못했다. 또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알폰소 13세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인데, 반면에 후안의 형인 하이메는 본인의 청각장애 때문에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귀천상혼을 해서(알폰소 13세의 허락이 있었다) 하이메의 아들인 알폰소에게는 스페인 왕위계승권이 아예 없었다. 또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스페인 국왕이 프랑스 국왕을 겸하는 것도, 그 반대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이던 하이메는 스페인 국왕에 오를 수 없었다.[72] 다만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왕정 폐지 이후에는 보통 파리 백작이라 칭함 :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방계. 루이 필리프 1세의 후손이다. 부르봉 가문 직계가 앙리 5세를 끝으로 끊겼기에 오를레앙 가문에게 수장이 가야 하는게 맞지만,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봉 본가가 척을 져서 완전히 인정 받고 있지는 못하다.)에선 당연히 루이스 알폰소를 카페 왕조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73] 데셍이나 소묘 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