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콘트레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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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투수. 쿠바 리그를 호령하는 역대급 에이스로서 대표팀에서도 무적의 에이스로 군림하다가 지내다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선수생활을 했으나, 서른이 넘은 늙은 나이에 들어와서 그런지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본인의 커리어보다는, 호세 콘트레라스 영입 경쟁에서 패한 보스턴 레드삭스 쪽에서 뉴욕 양키즈에 '''악의 제국'''이라는 입에 착 감기는 별명을 붙여 준 것이 더 야구 역사에 오래 남을 기여(?)일 것이다.
무적이었던 쿠바 국가대표팀의 에이스였으며, 쿠바리그 마지막 시즌은 13승 4패 방어율 1.76의 성적을 거두었다. 쿠바리그에서 세 번이나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 1998년 세계선수권 우승 당시 한국과 치른 결승전에서 신명철에게 홈런을 맞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쿠바를 방문해서 가진 친선경기에서 콘트레라스는 인상적인 피칭을 했고, 이때부터 메이저리그 스카우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때 쿠바 대표팀으로 참가해 한국전에 선발로 나와서 위력적인 피칭으로 한국 대표팀을 고전시켰다. 당시 한국팀 선발은 김수경.
콘트레라스는 2002년 10월에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멕시코에 파견되었을 때 망명했고[2] , 이 해 12월에 뉴욕 양키스와 4년 3200만불 계약을 맺었다.[3]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2003년에는 부상 때문에 마이너리그와 불펜을 오락가락하다가 9경기 선발 등판을 포함한 18경기 71이닝 동안 7승 2패 3.30 ERA라는 성적으로 시즌을 끝맺는다.
2004년 7월까지 5점대 ERA로 부진하던 콘트라레스는 에스테반 로아이자 트레이드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옮겼고, 화이트삭스에서도 별다른 진전 없이 기복이 심한 피칭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5년에는 그래도 쿠바에서의 이름값을 하며 204⅔이닝 동안 15승 7패 3.61 ERA를 기록했다. 탈삼진이나 볼넷 등의 여러 면에서 볼 때 지속적인 활약이 기대되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3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메이저리그에서의 커리어 하이를 썼음은 의미가 있었다. 또한 ALCS에서 첫 경기를 8⅓이닝 역투에도 불구하고 패하긴 했지만 5차전에서 4경기 연속 화이트삭스 선발투수들의 완투 기록이라는 대기록을 완성하는 완투승으로 팀의 월드 시리즈 진출에 공헌했고, WS 1차전 선발로 내정되어서도 7이닝 3실점의 호투로 승리하여 화이트삭스가 4-0으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스윕하여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이 공로로 3년 2900만불의 연장계약에도 성공.
하지만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삽질만 하며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고, 2009년 8월 말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별다른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콘트레라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50만불의 단년계약을 맺고[4] 불펜으로 전향해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년 계약을 따낸 2011~12 2년간은 부상으로 신음하였고 계약이 만료된 후 옵션이 거절되며 FA로 풀렸다.
이제는 부상으로 팔꿈치가 너덜너덜해진 콘트레라스를 원하는 팀은 없었고,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겨우겨우 마이너리그 계약에 성공했다. 5월에 잠시 메이저리그에서 몇번 던지긴 했지만 부진했고, 결국 팀에서 나가게 되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긴 했지만 이후 다시 메이저리그로 올라오지는 못했다. 2014년에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드는데 실패해 자유계약선수로 풀렸고 결국 티후아나 토로스라는 멕시코리그 팀으로 진출해서 뛰었는데 10승 3패, 3.49의 방어율과 1.15의 WHIP을 기록하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15년 대만프로야구 중신 브라더스와 계약했다. 이후 1년만 뛰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그대로 은퇴한듯.
쿠바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투수. 쿠바 리그를 호령하는 역대급 에이스로서 대표팀에서도 무적의 에이스로 군림하다가 지내다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선수생활을 했으나, 서른이 넘은 늙은 나이에 들어와서 그런지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본인의 커리어보다는, 호세 콘트레라스 영입 경쟁에서 패한 보스턴 레드삭스 쪽에서 뉴욕 양키즈에 '''악의 제국'''이라는 입에 착 감기는 별명을 붙여 준 것이 더 야구 역사에 오래 남을 기여(?)일 것이다.
1. 쿠바 시절
무적이었던 쿠바 국가대표팀의 에이스였으며, 쿠바리그 마지막 시즌은 13승 4패 방어율 1.76의 성적을 거두었다. 쿠바리그에서 세 번이나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 1998년 세계선수권 우승 당시 한국과 치른 결승전에서 신명철에게 홈런을 맞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쿠바를 방문해서 가진 친선경기에서 콘트레라스는 인상적인 피칭을 했고, 이때부터 메이저리그 스카우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때 쿠바 대표팀으로 참가해 한국전에 선발로 나와서 위력적인 피칭으로 한국 대표팀을 고전시켰다. 당시 한국팀 선발은 김수경.
2. 메이저리그
2.1. 뉴욕 양키스
콘트레라스는 2002년 10월에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멕시코에 파견되었을 때 망명했고[2] , 이 해 12월에 뉴욕 양키스와 4년 3200만불 계약을 맺었다.[3]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2003년에는 부상 때문에 마이너리그와 불펜을 오락가락하다가 9경기 선발 등판을 포함한 18경기 71이닝 동안 7승 2패 3.30 ERA라는 성적으로 시즌을 끝맺는다.
2.2.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4년 7월까지 5점대 ERA로 부진하던 콘트라레스는 에스테반 로아이자 트레이드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옮겼고, 화이트삭스에서도 별다른 진전 없이 기복이 심한 피칭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5년에는 그래도 쿠바에서의 이름값을 하며 204⅔이닝 동안 15승 7패 3.61 ERA를 기록했다. 탈삼진이나 볼넷 등의 여러 면에서 볼 때 지속적인 활약이 기대되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3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메이저리그에서의 커리어 하이를 썼음은 의미가 있었다. 또한 ALCS에서 첫 경기를 8⅓이닝 역투에도 불구하고 패하긴 했지만 5차전에서 4경기 연속 화이트삭스 선발투수들의 완투 기록이라는 대기록을 완성하는 완투승으로 팀의 월드 시리즈 진출에 공헌했고, WS 1차전 선발로 내정되어서도 7이닝 3실점의 호투로 승리하여 화이트삭스가 4-0으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스윕하여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이 공로로 3년 2900만불의 연장계약에도 성공.
하지만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삽질만 하며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고, 2009년 8월 말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3. 필라델피아 필리스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별다른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콘트레라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150만불의 단년계약을 맺고[4] 불펜으로 전향해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년 계약을 따낸 2011~12 2년간은 부상으로 신음하였고 계약이 만료된 후 옵션이 거절되며 FA로 풀렸다.
2.4. 이후의 커리어
이제는 부상으로 팔꿈치가 너덜너덜해진 콘트레라스를 원하는 팀은 없었고,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겨우겨우 마이너리그 계약에 성공했다. 5월에 잠시 메이저리그에서 몇번 던지긴 했지만 부진했고, 결국 팀에서 나가게 되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긴 했지만 이후 다시 메이저리그로 올라오지는 못했다. 2014년에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드는데 실패해 자유계약선수로 풀렸고 결국 티후아나 토로스라는 멕시코리그 팀으로 진출해서 뛰었는데 10승 3패, 3.49의 방어율과 1.15의 WHIP을 기록하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15년 대만프로야구 중신 브라더스와 계약했다. 이후 1년만 뛰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그대로 은퇴한듯.
[1] 멕시코리그(LMB)의 팀으로서, 마이너리그에서 AAA로 인정하는 리그이다.[2] 쿠바 운동선수들의 잦은 망명을 쿠바 높으신 분들 쪽에서 눈 감아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쿠바와 미국은 적대국이며 미국이 경제적 봉쇄에 해당하는 조치(쉽게 말해 쿠바를 경제적으로 왕따시키고 쿠바랑 같이 노는 나라는 쿠바랑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것)를 취해놓은 상태라 쿠바 선수를 원하는 미국 팀들이 정식으로 쿠바 선수에게 오퍼를 하는 것이 불법이고 쿠바 정부로서도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풀어주는 대신 얼마씩을 뒤로 떼어간다는 썰이다. [3] 이 당시 양키스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거포 마쓰이 히데키의 영입으로 화제가 되던 시기라 외인으로 일낸다는 말을 들었다. [4] 이 계약 때문에 박찬호는 필리스와의 재계약이 물건너가며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