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나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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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잔 달브레
(Jeanne d'Albret)
'''출생'''
1528년 11월 16일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생제르맹앙레
'''사망'''
1572년 6월 9일 (43세)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파리
'''재위'''
나바라 왕국의 여왕
1555년 5월 25일 ~ 1572년 6월 9일
'''배우자'''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 빌헬름 (1541년 결혼 / 1545년 무효화)
앙투안 드 부르봉-방돔 (1548년 결혼 / 1562년 사망)
'''자녀'''
앙리 4세, 카탈리나
'''아버지'''
엔리케 2세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앙굴렘
'''형제'''
후안
1528년 엔리케 2세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프랑수아 1세의 외조카이다. 1541년 윌리히-클레페-베르크 연합공국의 공작 빌헬름 5세와 결혼했으나, 1545년 이 결혼은 무효처리가 되었다. 1548년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과 재혼했는데 1555년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후아나 3세는 남편 앙투안(나바르의 안토니오)과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프랑스 왕족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랐으며 종교개혁자들의 보호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위그노였다. 후아나 3세는 곧 나바라의 국교를 개신교로 지정하고 가톨릭을 배격했다. 그러나 1560년 샤를 9세 치하에서 안토니오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아들 앙리 또한 개종시켰다. 1562년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자 부부는 가톨릭 진영과 위그노 진영으로 갈라서서 대치했고 안토니오는 루앙에서 전사했다. 샤를 9세의 어머니로 당시 왕태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후아나 3세의 아들 앙리 드 부르봉과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결혼시키기로 했다. 후아나 3세는 처음에는 이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으나, 카트린의 설득에 결국 승낙했고 1572년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먼저 파리에 갔으나, 무리한 여행 끝에 지병인 호흡기 질환이 악화되어 급사했다. 이에 대해서는 카트린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1]
안토니오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앙리, 삼남 루이, 장녀 마들렌은 요절하고 차남 앙리와 차녀 카트린만 성장했다. 그중 앙리는 후아나 3세의 뒤를 이어 나바르의 왕 엔리케 3세로 즉위하는데 나중에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대가 끊긴 후 앙리 4세로 즉위하게 된다.
[1] 영화 여왕 마고에서는 독살된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