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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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샤를 9세 (Charles IX)
'''출생'''
1550년 6월 27일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사망'''
1574년 5월 30일 (23세)
프랑스 왕국 뱅센
'''재위'''
프랑스 왕국의 왕
1560년 12월 5일 ~ 1574년 5월 30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1570년 결혼)
'''자녀'''
마리 엘리자베트, 샤를
'''아버지'''
앙리 2세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형제'''
프랑수아 2세, 엘리자베트, 클로드, 루이, 앙리 3세, 마르그리트, 프랑수아, 잔, 빅투아르
1. 개요
2. 가족 관계
2.1.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2.2. 기타
3. 대중매체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4대 왕.
앙리 2세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사실상의 차남으로[1] 큰형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자 10세에 왕위에 올라 14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프랑수아 2세의 짧은 재위 기간 사이 앙리 2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억눌려 있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이 때를 기점으로 권력 장악에 나섰다. 그녀는 바닥까지 떨어진 왕권을 회복시킬 비책으로 종교를 선택했다. 그녀는 가톨릭의 대표 세력인 기즈 공작이 1562년 바시 대학살 이후 위그노 측과 무력 대립에 돌입한 정세를 이용해 배후에서 신교도와 구교도를 적절히 농단하며 10여년 사이 크게 왕권을 신장시켰다. 카트린은 무능하고 사치만 일삼는 아들들을 대신하여 대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불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였다. 그 와중 초대 기즈 공작이 부르봉 가문의 콩데 공작[2]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이들의 불화는 겉잡을 수 없이 번졌고 카트린은 두 세력의 중재자로 왕권을 어느정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에게는 큰 적이 나타났는데 바로 나바라 왕국의 여왕 잔 달브레였다. 독실한 신교도로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을 지원했던 그녀는 부르봉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와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앙리 드 부르봉[3]를 위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기 시작하였다.[4]
이처럼 처음에 카트린은 폭력적 수단은 배제하고 신교도들과 구교도들 간의 분쟁을 중재하여 발루아 왕조를 두 종파 간의 징검다리이자 종파를 초월한 정통 프랑스의 왕조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고 프랑스 전역은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거기에 잔 달브레가 발루아 왕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에 카트린의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샤를 9세는 위그노의 지도자 중 한명인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에게 감화되어 위그노 신앙에 빠져들 기미가 보이자 당황한 카트린은 한때 적이었던 기즈 공작과 손잡고 위그노 교도를 축출해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녀는 우선 나바라의 앙리와 자신의 막내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결혼시킨 후에 결혼식 하객으로 온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고자 했다. 이마저도 무시무시한 계획이었지만 기즈 가문은 집안의 원수를 끝장냄과 동시에 신교도들을 아예 뿌리뽑고자 했다. 한 명을 암살하려던 계획이 결국은 신교도 하객 모두를 학살하는 계획이 되고 만것이다. 카트린은 부르봉 가문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이들의 학살 계획을 묵인하고 말았다. 기즈 가문은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 밤을 기해 파리에서 일제히 위그노 사냥에 돌입했다. 이것이 곧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었다.
이렇게 앙리 2세의 사망 이후 조금씩 몰락하기 시작한 왕권은 그의 치세에 이르러 크게 훼손되었기에 왕권을 높이고 두 종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카트린의 행동은 결국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과 같은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원래 샤를 9세는 건장한 육체에 승마사냥을 즐겼으나, 외가인 메디시스 가문으로부터 비롯된 유전성 결핵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했고 잇딴 사건으로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곧잘 하여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폐결핵이 악화되어 1574년 2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2. 가족 관계



2.1.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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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 7월 5일 - 1592년 1월 22일 (48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16명의 자녀 중 5째이자 차녀이다. 외삼촌이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이고 동시에 형부이기도 하다.[5]
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1세의 재위시절이던 1559년부터 프랑스의 왕자인 샤를과 혼담이 있었고 결정났지만 아무도 어린 공주에게 프랑스어를 열심히 가르치지는 않았다.[6] 결혼한 둘은 외동딸 마리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를 낳았지만 1578년 6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독일어, 스페인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유창했던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어만큼은 잘하지 못했고, 프랑스 왕실에서 고립되어 외롭게 지냈다. 그나마 상대해 준 사람이 여왕 마고의 주인공인 시누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이다. 샤를9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던 엘리자베트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고, 4번째 부인을 잃은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 그녀에게 제안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의 왕비는 다시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며 거절했다.[7]

2.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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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9세의 정부인 마리 투쉐
마리 투쉐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샤를을 낳았는데 앙굴렘 백작이 되었으며 부르봉 왕조루이 14세 때까지 장수한다. 하지만 사생아였기에 왕위를 계승할 수는 없었다.

3. 대중매체


영화 여왕 마고에서는 유약한 왕으로 나오는데 얼마나 왕권이 약했는지 멧돼지 사냥에서 위기에 처했는데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실 그 정도 수준으로 왕권이 추락하진 않았다.

[1] 삼남으로 태어났으나, 차남 루이는 요절했기에 사실상 차남이었다.[2] 이지만 사실 대공에 해당하는 Prince du Sang (Prince of the Blood)였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 훗날의 앙리 4세[4] 발루아 왕가의 구성원을 제외한다면 가장 왕위 계승권에 가까웠던 사람이었다.[5] 언니인 오스트리아의 아나가 외당숙(5촌) 펠리페 2세의 4번째 부인이 되어 펠리페 3세를 낳았다.[6] 이 당시에는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는데, 공주의 통역을 맡는자에게 정보를 캐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7] 그러나 이때 결혼했어도 1592년에 사망한 엘리자베트가 1598년에 사망한 펠리페 2세보다 먼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펠리페 2세는 5번째 부인도 먼저 보내고 6번째 부인까지 들였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