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전쟁
1. 개요
Guerres de Religion 1562-1598.
16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37년에 걸쳐 진행된 대대적 종교 내전으로, 프랑스 종교전쟁(guerres de religion/French Wars of Religion)이라고도 불린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극에 달해 나라 전체가 뒤집혔던 사건이었다.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각국이 얽혀들어갔던 이 사건은 백년전쟁 시기 이후 프랑스의 중흥을 이끈 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이를 대체해 훗날 절대왕정을 수립하게 되는 부르봉 왕조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위그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에 대한 호칭이다.
2. 상세
2.1.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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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의 나이에 어이없이 사망하고 만 앙리 2세.'''
발단은 앙리 2세가 1559년 자신의 딸 엘리자베트와 에스파냐 펠리페 2세와의 결혼식 부대행사 중 하나였던 마상창시합 토너먼트 도중 사고로 몽고메리 백작 콩테 드 가브리엘의 창에 오른쪽 눈을 찔려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사망한 사건이었다.[1] 이 시기는 프랑스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기나긴 투쟁 끝에 막 혼인동맹을 통한 평화조약으로 겨우 안정을 찾았던 시기로, 뜻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비극에 철저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또한 종교개혁의 열풍이 서유럽을 석권하고 있던 시기에서 교회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는 기회인 신교도로의 개종을 프랑스왕실이 생각조차 하지 않은 데에는 "갈리아교회주의"라는 프랑스 가톨릭의 독특한 이념이 있었다. 중세유럽의 시대적 이념을 완벽에 가깝게 체현한 교회의 성인이자 명군인 성 루이 9세 이래로 성립되기 시작한 이 이념을 간단히 정리하면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것. 즉 프랑스왕은 언제든지 프랑스 내 가톨릭교회의 힘을 자기 것으로 부려먹는 것이 가능했고[2] , 이 때문에 영국왕이나 독일 선제후 마냥 신교도로 개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프랑스왕은 그의 사유물이나 마찬가지이던 프랑스 가톨릭교회에게 적대적인 신교도들에게 대해서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2.2. 전개
자세한 전쟁 전개는 이곳 참고
왕권을 이어받은 앙리 2세의 맏아들 프랑수아 2세는 허약하여 재위하는 1년간 기즈 가문의 전횡을 무력하게 지켜보다 세상을 떠났다.[3] 그의 왕비였던 메리는 졸지에 과부가 되어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프랑수아의 동생 샤를 9세가 왕위에 올랐다. 프랑수아의 재위 기간 동안, 선왕 앙리 2세의 정부 디안 드푸아티에에게 억눌려 있던 이탈리아 출신 모후 카트린 드메디시스가 이 때를 기점으로 권력 장악에 나섰다. 그녀는 바닥까지 떨어진 왕권을 회복시킬 비책으로 종교를 선택했다. 그녀는 가톨릭의 대표 세력인 기즈 공이 1562년의 바시 대학살 이후 위그노 측과 무력 대립에 돌입한 정세를 이용해 배후에서 신교도와 구교도를 적절히 농단하며 10여 년 사이 왕권을 크게 신장시켰다.
카트린 드메디시스는 무능하고 사치만 일삼는 아들들을 대신하여 대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불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였다. 그 와중에 초대 기즈 공작이 부르봉 가문의 콩데 대공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이들의 불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카트린은 두 세력의 중재자로 왕권을 어느 정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에게 큰 적이 나타났는데, 바로 나바라 왕국의 여왕 잔 달브레였다. 독실한 신교도로 프랑스 내의 위그노들을 지원했던 그녀는 부르봉 공작[4] 앙투안 드콩데와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앙리를 위해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카트린은 폭력적 수단을 배제하고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분쟁을 중재하여, 발루아 왕조를 두 종파 간의 징검다리이자 종파를 초월한 정통 프랑스의 왕조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평화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카트린은 양자를 구슬리고 달래서 평화를 약속받았으나[5] 이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고, 프랑스 전역은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거기에 나바라 여왕 잔이 발루아 왕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에 카트린의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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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쟁 (1562 ~ 1563년)의 절정인 드뢰 전투. 콩데 공이 가톨릭 측에, 안 드몽모랑시가 위그노 측에 사로잡혔다.
2.3.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그러던 중 아들 샤를 9세마저 위그노의 지도자 중 한명인 콜리니 제독[6] 에게 감화되어 위그노 신앙에 빠져들 기미가 보이자 카트린은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한다. 그리고 가톨릭 진영의 실세들은 콜리니를 축출해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들은 우선 나바라의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에서 '''결혼식 하객'''으로 온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고자 했다.
첫 번째 암살 시도는 콜리니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났으나 기즈 공작은 기어이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 밤을 기해 파리에서 콜리니 제독을 자기 집에서 끌어내서 살해했다. 그리고 이 일이 기폭제가 되어 성난 가톨릭 군중들은 일제히 위그노 사냥에 돌입했다. 이것이 곧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었다. 이 과정에서 파리에서만 하룻밤에 천 명 이상이 살해당했고, 그 중에는 죄 없는 시민들과 어린이들도 섞여 있었다. 당시 강성 가톨릭 세력은 콜리니 제독의 집을 수색한 결과 실제로 그가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샤를 9세를 암살하고 프랑스를 스위스와도 같은 연방국가로 만들 계획이었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잔혹하게 신교도들을 살해한 기즈 가문과는 반대로 카트린과 샤를 9세는 그날 밤 내내 방에 틀어박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학살극은 대실패였고, 이 한 차례의 대사건으로 인해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수많은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주동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게 되었다. 나바라의 앙리는 카트린이 보호하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 억류되어 실질적으로는 포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주동자로 카트린, 기즈 가문, 앙주 공작 등이 거론되나 카트린이 주동자였을 가능성은 적다. 그녀의 정치는 평생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균형과 화합을 꿈꾼 인물로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도 그 아이디어의 일부였다.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인 가톨릭 왕녀와 위그노 왕의 결혼을 단지 위험한 정적의 제거를 위한 미끼로 삼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낮다.
충격적인 참극을 목도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실성한 샤를 9세는 오래지 않아 결핵으로 사망했고 다시 그 동생이자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었던 앙리 3세가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국왕으로 즉위했다. 어째서 앙리 3세가 폴란드 왕이 되었는가는 다음과 같다. 당시 폴란드의 왕위는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선제후들의 투표로 이루어지는데, 공석이었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두 세력이 끼어들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카트린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였다. 처음에 폴란드 귀족들은 신교도들에게 유화적이었던 카트린을 불신하고 막시밀리안 2세가 내세운 후보에게 호의적이었으나,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로 인해 카트린 쪽으로 마음이 돌아갔다. 물론 폴란드 왕위는 단지 허울만 좋은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카트린은 셋째 아들인 앙리를 편애했기 때문에 그를 폴란드 왕위에 앉히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어쨌든 형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앙리 3세가 탄압을 완화한 사이, 세력을 규합한 위그노 교도들은 마침내 왕실을 적대자로 선언하여 무장 봉기에 돌입했고 1576년 포로 신세에서 탈출한 나바라의 앙리를 구심점으로 삼았다. 거기에 카트린의 딸인 마르그리트와 막내아들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단지 '''앙리 3세가 싫다'''는 이유로 위그노측으로 전향할 기미까지 보여 정국은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양측은 곧 화친을 맺고 이렇게 프랑스는 평화로워지는 듯 했다.
2.4. 발루아 왕조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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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조용해지던 프랑스에 1585년 다시 전쟁의 기운이 물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앙리 3세의 동생이자 제1후계자였던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후사 없이 사망한 것이었다. 앙리 3세 역시 자식이 없었을 뿐더러 왕후가 병약하여 자식을 낳을 가망은 없었다. 샤를 9세의 경우 서자 샤를이 있었지만 동양과 달리[7] 유럽에서는 서자나 사생아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왕위를 계승할 수는 없었다. 유럽에서는 서자가 부친의 작위를 세습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왕이고 귀족이고 똑같았다. 다만 왕위 계승이 가능한 특수한 경우는 2가지인데 하나는 아버지가 서자를 자신의 적자로 인정한 경우[8] 이고, 다른 하나는 서자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전을 벌여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었다.[9] 하지만 어떤 나라든,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이유에서든 서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정통성에서 심하게 밀릴 수 밖에 없었다.'''카트린 드 메디시스. 평생 발루아 왕조에 헌신한 그녀였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보답받지 못했다. 스스로 평생을 바쳐 사랑한 자식들은 모두 모후를 실망시켰고 거기에 막내딸 발루아의 마르그리트와 막내아들 프랑수아는 대놓고 어머니에게 반기를 들었다. 거기다 가장 사랑한 자식인 앙리 3세에게는 결국 실각당하고 유폐당하여 외로이 사망했다. '''
아무튼 이렇게 되자 프랑스 왕실은 족보를 뒤적이기 시작하고 가장 가까운 제1후계자가 나바르의 앙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세히 따져보면 그와 앙리 3세는 22촌(...)이나 되는데 사실상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먼 친척이었지만 살리카법에 의해 모계혈통을 인정치 않는 프랑스 왕실의 규칙에 의하면 가장 가까운 부계 친척이었다. 참고로 앙리 3세와 앙리는 모계 쪽으로는 6촌지간이었다.
문제는 그가 가톨릭이 아닌 위그노였다는 것이었다. 기즈 가문을 위시한 가톨릭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교황으로 하여금 나바르의 앙리를 파문하고 계승권을 박탈하게 해달라고 청원, 통과시킨다. 물론 나바르의 앙리측도 이에 반발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이 잠시 있었지만 곧 결렬되면서 위그노 전쟁 중 가장 격렬한 9차 위그노 전쟁, 혹은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은 남부와 북부 모두에서 일어났지만 곧 남부 프랑스에서는 위그노가, 북부 프랑스에서는 기즈 공을 위시한 가톨릭 세력이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이런 판국에 가톨릭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지극히 무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카트린의 섭정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앙리 3세는 어머니를 실각시킨 이후 기즈 가문과 공개적으로 적대했다. 평생 아들들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카트린이었으나, 이 배신에 그녀는 큰 슬픔에 빠졌고 곧 병에 걸렸다. 이런 와중 기즈 공작 또한 가톨릭의 수호를 명분으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끌어들였다. 펠리페 2세는 이전 카트린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더군다나 기즈 공작은 신성동맹 등 가톨릭(구교)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점차 왕위를 넘보게 되었다. 졸지에 축출당할 위기에 처한 앙리 3세는 1588년 홧김에 기즈 공을 암살했지만 이는 구교도와 신교도 모두에게서 적대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듬해인 1589년에 왕 자신마저 수도사에게 암살당하는 막장 사태가 빚어졌다(…). 불운하게도 같은 해에 이미 모후인 카트린마저 세상을 떠난 상태[10] 였다.
이처럼 가톨릭은 내부에서 삽질을 벌여 완전히 와해되었다. 기즈 가문과 발루아 가문 모두 몰락한 것이다. 샤를 9세, 프랑수아 2세, 앙리 3세 모두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앙리 3세가 비참하게 살해당하므로써 백년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노리기도 하였던 명문가 발루아 가문은 초라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방조하면서까지도 발루아 가문의 왕좌를 지키고자 했던 카트린의 노력은 덧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2.5.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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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그는 후세에 길이 남을 명군이었으나 부르봉 왕조의 왕답게 사생활 면에서는 수많은 정부를 두었다.[11] 이후 프랑스 왕들의 아름답지 못한 선례가 된 셈.'''
내전으로 잿더미가 된 폐허 위에서 최후로 승리한 것은 발루아 가문도, 기즈 가문도 아닌 제3자였던 부르봉 가문의 앙리였다. 그는 일부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얻고 새 국왕 앙리 4세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가톨릭 교도와 스페인은 앙리 4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치는 계속 이어졌다.
그 와중에 앙리 4세는 전쟁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1593년에 이르면 이미 파리 근방을 제외한 전 프랑스를 석권한다. 파리의 문턱까지 들어선 위그노파와 일부 가톨릭파 군대는 지휘관인 앙리 4세의 최종 진격 명령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이 국면에서 앙리 4세는 불후의 명언을 날린다.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지!"'''[12]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당장 가톨릭으로 개종해버린다.
앙리의 대승적 차원의 결단은 신구교도의 갈등을 급속도로 봉합시켰다. 이전 세대 갈등의 주역들은 이미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위그노들은 인망 높은 지휘관의 결정에 반발할 수가 없었고, 이미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가톨릭은 앙리 4세의 결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13] 이렇게 파리에 입성한 앙리 4세는 비로소 왕좌에 앉아 새 왕조인 부르봉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로도 이어진 소요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1598년의 낭트 칙령이다. 앙리 4세는 위그노의 종교의 자유 역시 공식적으로 보장[14] 함으로써 기나긴 내전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이후 10여년간 훌륭히 내치와 외교를 수행하여 프랑스를 재차 중흥시켰다.
하지만 앙리 4세조차도 결국은 선왕 앙리 3세와 같은 운명을 겪고 말았다. 1610년 그의 친위그노 정책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며 발달한 종교적 관용은 8년 후 발발한 30년전쟁에서 명분보다 실리를 위해 신교도 측에 붙을 만큼 유연성을 갖추게 되었다.[15]
2.6.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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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셸의 항복
그러나 30년 전쟁 동안 프랑스 내부에서 가톨릭과 위그노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삼총사에도 나오는 라 로셸 포위전이 그 예. 역사가에 따라서 1620년대의 위그노 반란을 위그노 전쟁의 진정한 종결로 간주하기도 한다. 결국 낭트 칙령에서 보장되었던 위그노의 자치권은 1627년의 알레 화약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제외하고 전부 사라져 버렸다.
(세부 사항은 라로셸 문서 참고)
1685년,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을 내리며 위그노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자 남아있던 신교도들인 대부분 떠나거나 싸웠다. 저항을 선택한 이들의 예시는 1702-04년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기에 일어난 카미자르의 난. 하지만 그마저도 진압된 이후 유럽에서 신/구교도간의 전쟁은 멈추었다. 현재 프랑스에는 80만의 신교도가 남아있다.
3. 여담
프랑스 영화 여왕 마고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지도가 없는 시대이지만, 황미나의 만화 '불새의 늪'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 그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기에 죽기 직전 앙리 2세의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개신교로 개종하고 영국으로 튀었다가 위그노 전쟁 와중 영국에서 지원군을 끌고 와서 싸우다 사로 잡혀 사형당했다. 그의 후손이 바로 버나드 로 몽고메리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사고를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2] 대신 교황권과는 끊임없이 마찰이 일어났고, 결국 나폴레옹 시대의 종교협약으로 갈리아교회주의가 포기되면서 교황청은 비로소 프랑스내의 성직자들에 대한 온전한 통제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아비뇽 유수도 크게보면 이것 때문에 벌어진 일.[3] 아직 미성년이어서 모후인 카트린이 섭정할 여지가 있었지만, 하필이면 '''사춘기였기 때문에 신혼 마누라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이었던 메리에게 홀딱 빠져 메리 스튜어트의 말을 훨씬 더 잘 들었다.''' 그리고'''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는 마리 드기즈'''. 왕실과 귀족사회의 상황이 이랬으니 기즈 가문이 전횡하다시피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랑수아 2세의 치세기에 벌어진 앙부아즈 음모는 기즈 가문의 전횡에 공포를 느낀 위그노들이 계획한 것이었지만, 누설되는 바람에 위그노들에게 대숙청이 닥치게 된다.[4] 이들은 제2 왕족 가문으로서, 발루아 가문의 대가 끊어지면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였다.[5] 그녀의 발상으로 파리에선 부활절에 신교도 어린이들과 구교도 어린이들이 함께 행렬을 이루어 행진했고, 암살당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소 기즈 공작과 그 암살범 콩데 공이 서로 궁정에서 키스를 하게 하기도 했다.[6] 대귀족가인 몽모랑시 가문 출신으로, 콩데 공작과 함께 기즈 공작 암살을 사주한 인물. 첫번째 내전에서는 2대 기즈 공작의 암살을 사주했다고 가톨릭측에게 의심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젊었을 때는 카트린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이었다.[7] 물론 동양에서도 적자가 있을 경우 서자는 절대 계승이 불가능했다. 적자가 씨가 마른 경우가 아니면 말이다.[8] 서출을 적자로 인정하는 경우는 꽤나 자주 일어난 편이긴 했지만 결국 왕위계승의 서열은 적출에 비해서 한참 뒤로 밀린다.[9] 포르투갈 독립전쟁 이후 성립된 브라간사 왕조는 이 두가지가 혼합된 예로 볼 수도 있는데 초대 브라간사 공작은 서출왕자였고 스페인에게서 독립하기 위해서 내란을 일으킨 포르투갈의 귀족들이 대표로 당시에 전 왕조의 피를 유일하게 남기고 있었던 브라간사 공작의 후손을 내세웠다.[10] 부검 결과 폐렴이 심하게 악화되어 다른 장기들까지 전이되었고, 사인은 뇌출혈이었다.[11] 첫번째 왕비 마르그리트와의 사이에서는 서로가 공공연하게 바람을 피우다 이혼하고,두 번째 왕비로 맞이한 마리 드 메디시스와도 별거했을 정도. 두 번째 왕비는 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메디치 집안으로 카트린의 조카 손녀다.[12] 당대 프랑스의 종교분포를 보면 위그노는 아무리 따져 보아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다수파이던 가톨릭교도들은 중세의 교회이념을 완벽하게 체현한 성인이자 명군이던 '''성 루이'''의 왕좌에 신교도가 앉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앙리 3세조차 앙리 4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 통치에 유리하다는 유언까지 남겼으니.[13] 다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앙리 자신뿐이었고, 이전까지 그를 따르던 중신들, 특히 앙리의 오른팔이라고 해도 좋았던 막시밀리앙 드 베튄(Maximilien de Bethune) 같은 인물은 개종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 분쟁을 수습한답시고 부하들에게까지 몽땅 개종을 명령했더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문제가 되었을 테니, '나 혼자 개종' 이라는 건 참으로 적절했던 셈.[14] 다만 구교와 신교를 완전히 동등한 위치에 놓치는 않았다. 가령 낭트 칙령의 내용 가운데에는 구교와 신교의 종교 분쟁을 수습하기 위해 파리 고등법원 내에 특별법정을 두어 심의토록 한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 법정은 가톨릭교도 10명, 위그노 6명으로 구성되었다. 즉, 위그노 측에 꽤 불리한 '보장'이었던 것.[15] 그도 그럴 것이, 신교도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가톨릭 추기경'''인 리슐리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