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탄

 






위구르어 خوتەن
중국어 和田
영어 Hetian / Hotan / Khotan (호탄)
1. 개요
2. 역사


1. 개요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지급시. 타림 분지의 남쪽, 쿤룬 산맥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 인구는 33만명이다. 우루무치에서는 서남쪽으로 무려 1500km 떨어져 있으며, 서쪽의 카슈가르 / 야르칸드와 동쪽의 뤼창을 잇는 도로 상에 위치한다. 호탄은 티베트어로 '왕의 성'이라는 뜻이며 산스크리트어로는 '대지의 가슴', 위구르어로는 '상아의 집'이라는 뜻이다. 옥 채굴 및 재련 외에 포도 농사와 양잠 산업 (비단 제조) 등이 발달하였다. 도시 남쪽에 허톈 공항이 있는데, 우루무치 공항과 왕래가 잦다. 시내의 문화 박물관과 바자르, 이슬람 사원 등이 볼만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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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림 분지 동부와 투르판 분지의 도시 국가들이 토하라어를 쓰는 토하라인인 것과 다르게, 타림 분지 서부에 위치한 호탄은 샤카족 계열로 인도-스키타이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호탄 주민들의 조상은 원래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던 스키타이 유목민 혹은 준가리아 출신 스카티아 유목민으로 추정된다. 호탄 사람들이 쓰는 언어는 서기 3~4세기 간다라 지방의 말과 비슷하였다.
중국 역사서에는 호탄 왕국은 우전국 (于闐國) 혹은 호탄은 우전이라고 기록되었으며, 주나라 때부터 이 지역으로부터 연옥을 수입한 듯 하다. 일명 곤륜의 옥 생산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자신들의 나라를 땅의 젖이라는 뜻의 쿠스타나(Kustana)로 불렀다. 한때 야르칸드의 사차국 (莎車國)에게 지배를 받기도 했으나 이후 독립하였고 선선 (鄯善國), 소륵(카슈가르), 구자(쿠차), 언기(카라샤르)와 함께 타림 분지의 5대 강국이 되었다.

구살단나(Kustana, 호탄의 산스크리트어 이름)국은 모래와 돌이 태반이고 토양이 있는 곳은 조금뿐이다. 토양이 비옥하여 갖가지 과일이 많다. 이 곳에서는 품질 좋은 면제품이 나오고 백옥과 예옥이 난다. 기후는 온화하지만 회오리 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사람들의 성질은 예절바르고 온순하며 학예를 좋아하면서도 음악도 발달했다. 가죽옷이나 모직물을 입은 사람은 드물고 면직물 옷을 입은 사람이 많다. 천축국(인도)에서 유래된 문자를 변형해서 쓴다. ... 사찰은 1백여개에 승도는 5천여명에 달하며 모두 대승불교를 배운다.

현장은 타림 분지 동부에 위치한 다른 국가들이 소승 불교를 믿는 것과 다르게 다르게 호탄에서는 대승 불교를 믿는다고 기록하였다. 본래 비단이 생산되지 않던 호탄은 2세기에 호탄 왕국의 군주가 후한의 공주인 견왕녀와 결혼할 시에 그녀가 털모자에 숨겨 가져온 뽕나무 씨앗으로 양잠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비단은 연옥과 함께 서쪽의 이란 등지로 수출되어 호탄을 부유하게 해주었다. 이 설화는 대당서역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20세기에 도시 인근 단달윌리크 유적에서 해당 내용이 그려진 천조각이 발견되어 사실로 인정되었다.
401년에 도시를 지나간 법현은 신도 수만 수만명에 달하는 불교 도시라고 기록하였다. 호탄은 7세기에 서돌궐에 속하였다가 결국 당나라에게 멸망당하여 우전도독부가 설치되어 안서사진 (安西四鎭)의 하나를 구성하게 되었다. 790년에는 토번에게 정복되었으나 9세기 말에 그가 붕괴하며 다시 독립하였다. 하지만 1006년에 이번에는 처음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튀르크 국가인 카라한 왕조에게 점령되었고, 따라서 1천년간 이어온 불교 대신 이슬람이 도래하였다. 이후 카라 키타이 (서요), 몽골제국,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13세기 이 도시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주민이 전부 무슬림이라고 기록하였다. 명나라, 청나라, 야쿱 벡의 반란 등을 거쳐현재는 무슬림 위구르 인들이 주민의 80%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