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쿱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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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쿱 벡
محمد یعقوب بیگ(Muhammad Yaqub Bek)[1][2]
阿古柏 (아고백)
1820년 ~ 1877년 5월 30일
풀 네임은 무하마드 야쿱 벡. 중앙아시아에서 마지막 유목제국을 세운 군인-정치가이다.
초기 경력은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원래 우즈벡인 또는 타지크인으로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코칸드 칸국의 장군이었다.
1864년 청나라가 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으로 쇠하자 신강에서부터 감숙성-섬서성까지 분포되어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둥간 혁명 1862~1877년)이때 코칸드 칸국의 군인이었던 야쿱벡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위구르족의 본거지였던 타림분지에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더욱 동진하여 1870년에는 돈황과 톈산 산맥 너머 신강의 수도였던 우루무치까지 점령했다. 그리하여 100여년 전 건륭제가 합병했던 신강은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야쿱 벡은 스스로 에미르라고 칭하고, 자신의 왕국을 카슈가리아 혹은 예티샤르(يەتتىشەر دۆلەتى)[3] 라고 불렀다. 1865년에서 1878년 동안 존속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도 수교했다. 오스만은 범투르크 국가의 입장에서 야쿱 벡 왕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그를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고문까지 파견했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를 약화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심산으로 야쿱 벡의 왕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인도를 통해 야쿱 벡에게 서양식 무기를 원조했고, 영사관까지 설치했다. 청나라조차 이홍장을 비롯한 해방파를 중심으로 야쿱 벡의 동투르키스탄을 자치왕국으로 인정하던가 아예 러시아에게 할양하여 그 지불금으로 해군력을 확충하려 할 정도로 '''위구르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하였을 정도였다.'''
1875년 청 조정은 좌종당을 흠차대신에 임명하고 12만명의 토벌군을 보냈다.[5] 1876년 6월 좌종당은 야쿱 벡 군을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탈환했다. 7월에는 톈산북로의 야쿱 벡 군에게 다대한 손실을 주었다. 1877년 겨울 청군은 다시 남진하여 발판성을 함락시켰다.
야쿱 벡은 영국의 중재를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정전하려 했으나, 이미 승기를 잡은 청군이 멈출 이유가 없었고, 투루판 지역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또한 야쿱 벡을 지원해줄 수 있었던 러시아나 영국은 국내사정상 중앙아시아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투루판이 청군에 함락되자 중앙아시아로 피했다가 1877년 5월 30일 급사한다. 음독자살이라는 설이 있으나 중풍일 가능성도 있다.[6] 야쿱 벡이 급사하자 이후 야쿱 벡 왕국은 와장창 무너졌고, 패잔병은 11월까지 모두 소탕되었다. 야쿱 벡의 가족들도 모두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성년들은 처형되고, 미성년 자손들은 궁형을 받고 청나라의 환관이 되었다.
신강은 중국 전토의 1/6을 차지하는 크고 아름다운 영토로서, '''야쿱 벡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이곳은 영영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홍장의 제안처럼 러시아에 할양했거나 혹은 야쿱 벡 왕국을 그대로 두었다면, 이곳은 후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계 공화국처럼 러시아 제국-소련의 영토가 되었다가 소련 해체 때 독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야쿱 벡의 엄청난 행적들로 이 곳은 청나라에 수복되었고, 1878년까지 신강지역은 다시 청나라에 합병되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사실 이 때 청나라는 영토를 러시아에 일부 상실했다. 야쿱 벡이 할거했을 즈음에, 러시아는 신장 서북부의 이리(伊犁)지역으로 군대를 파병해 집적거렸다. 청나라 조정이 야쿱 벡을 못 이기면 적당히 실효지배 하다가 꿀꺽하고, 청나라 조정이 야쿱 벡을 진압하더라도 많이 약해졌을 테니 러시아가 손쉽게 먹을 수 있을 거라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설마했지만 '''청나라가 러시아군을 이겼다.''' 이러면 러시아가 이리지역을 토해내야 할 상황에 처했지만....
청나라는 러시아와 영토 반환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숭후(崇厚)라는 인물을 보냈는데 이 양반이 이리지역 뿐만이 아니라 '''신장 지역의 70% 가량을 러시아에 내준데다가 러시아군의 이리 주둔 비용 500만 루블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리비디아 조약) 이런 어처구니 없는 조약에 청나라 조정은 당장에 숭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7] , 증국번의 아들인 증기택을 보내 재협상을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압박을 주자 러시아는 차지한 지역을 도로 토해내야 했지만, 일부 지역은 러시아령이 되었다가 현재에는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영토가 되어 이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위구르의 잠깐의 영웅이었으나 광신과 악행으로 대차게 망한 케이스다(...). 만약 폭정만 없었더라면 위구르와 회족이 협력하여 청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해 청도 함부로 제압을 못했을 것이고 그나마 반란이 조금은 성공을 했을텐데 종교광신자였지라 화를 초래했다.(...)
야쿱 벡
محمد یعقوب بیگ(Muhammad Yaqub Bek)[1][2]
阿古柏 (아고백)
1820년 ~ 1877년 5월 30일
1. 생애
풀 네임은 무하마드 야쿱 벡. 중앙아시아에서 마지막 유목제국을 세운 군인-정치가이다.
초기 경력은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원래 우즈벡인 또는 타지크인으로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코칸드 칸국의 장군이었다.
1864년 청나라가 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으로 쇠하자 신강에서부터 감숙성-섬서성까지 분포되어 있던 이슬람교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둥간 혁명 1862~1877년)이때 코칸드 칸국의 군인이었던 야쿱벡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위구르족의 본거지였던 타림분지에 진격하여 그곳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더욱 동진하여 1870년에는 돈황과 톈산 산맥 너머 신강의 수도였던 우루무치까지 점령했다. 그리하여 100여년 전 건륭제가 합병했던 신강은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야쿱 벡은 스스로 에미르라고 칭하고, 자신의 왕국을 카슈가리아 혹은 예티샤르(يەتتىشەر دۆلەتى)[3] 라고 불렀다. 1865년에서 1878년 동안 존속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도 수교했다. 오스만은 범투르크 국가의 입장에서 야쿱 벡 왕국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그를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고문까지 파견했다.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를 약화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심산으로 야쿱 벡의 왕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인도를 통해 야쿱 벡에게 서양식 무기를 원조했고, 영사관까지 설치했다. 청나라조차 이홍장을 비롯한 해방파를 중심으로 야쿱 벡의 동투르키스탄을 자치왕국으로 인정하던가 아예 러시아에게 할양하여 그 지불금으로 해군력을 확충하려 할 정도로 '''위구르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쿱 벡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였기 때문에 왕이 되자마자 선정은커녕 폭군이 되어 탈레반식의 폭정을 저질렀다. 이슬람 근본생활 방식을 위구르인, 회족들에게 강요한 것도 모자라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원성이 높았다. 그래서 현지의 위구르들에게조차 폭군, "호로자식"이라고 증오받았다. 게다가 같은 무슬림이지만 다른 교파를 믿던 회족(둥간족)에게 지하드를 선포하여 이들을 학살하는 최악의 행위를 저질렀다. 이때문에 회족이 분노하여 청나라에게 가담했고[4] 민심의 이반이 있었으며, 청나라 정부가 공격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일부 위구르 독립운동가들이나 이들에 동조하는 이들이 야쿱 벡 왕국을 마치 위구르족의 독립국가였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야쿱 벡 자신부터가 중앙아시아에 있던 코칸드 칸국의 우즈베크족 혹은 타지크족 군인이었고 지배층이 코칸드 칸국인들이었을 뿐, 분리운동을 일으켜 타림분지에 거주하던 위구르족을 제압해 자립한 상황이었고, 오히려 위구르인들은 중과세를 매기고 탈레반식 근본주의를 실시하는 야쿱 벡을 싫어했다.야쿱 벡은 자신을 신앙의 수호자이자 이교도인 키타이(중국인)에 대한 가지(성전사)라고 선전하면서 엄격한 이슬람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카지는 제대로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나 터번을 쓰지 않은 남성을 매질하고 샤리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무리의 경찰들과 함께 거리를 순찰했다. 현지 위구르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전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야쿱 벡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시행한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무거워진 세금 부담과 회복이 더딘 경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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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 James A. Millward
1875년 청 조정은 좌종당을 흠차대신에 임명하고 12만명의 토벌군을 보냈다.[5] 1876년 6월 좌종당은 야쿱 벡 군을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탈환했다. 7월에는 톈산북로의 야쿱 벡 군에게 다대한 손실을 주었다. 1877년 겨울 청군은 다시 남진하여 발판성을 함락시켰다.
야쿱 벡은 영국의 중재를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정전하려 했으나, 이미 승기를 잡은 청군이 멈출 이유가 없었고, 투루판 지역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또한 야쿱 벡을 지원해줄 수 있었던 러시아나 영국은 국내사정상 중앙아시아에 신경쓸 수가 없었다.
투루판이 청군에 함락되자 중앙아시아로 피했다가 1877년 5월 30일 급사한다. 음독자살이라는 설이 있으나 중풍일 가능성도 있다.[6] 야쿱 벡이 급사하자 이후 야쿱 벡 왕국은 와장창 무너졌고, 패잔병은 11월까지 모두 소탕되었다. 야쿱 벡의 가족들도 모두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성년들은 처형되고, 미성년 자손들은 궁형을 받고 청나라의 환관이 되었다.
2. 평가
신강은 중국 전토의 1/6을 차지하는 크고 아름다운 영토로서, '''야쿱 벡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이곳은 영영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홍장의 제안처럼 러시아에 할양했거나 혹은 야쿱 벡 왕국을 그대로 두었다면, 이곳은 후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계 공화국처럼 러시아 제국-소련의 영토가 되었다가 소련 해체 때 독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야쿱 벡의 엄청난 행적들로 이 곳은 청나라에 수복되었고, 1878년까지 신강지역은 다시 청나라에 합병되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사실 이 때 청나라는 영토를 러시아에 일부 상실했다. 야쿱 벡이 할거했을 즈음에, 러시아는 신장 서북부의 이리(伊犁)지역으로 군대를 파병해 집적거렸다. 청나라 조정이 야쿱 벡을 못 이기면 적당히 실효지배 하다가 꿀꺽하고, 청나라 조정이 야쿱 벡을 진압하더라도 많이 약해졌을 테니 러시아가 손쉽게 먹을 수 있을 거라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설마했지만 '''청나라가 러시아군을 이겼다.''' 이러면 러시아가 이리지역을 토해내야 할 상황에 처했지만....
청나라는 러시아와 영토 반환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숭후(崇厚)라는 인물을 보냈는데 이 양반이 이리지역 뿐만이 아니라 '''신장 지역의 70% 가량을 러시아에 내준데다가 러시아군의 이리 주둔 비용 500만 루블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리비디아 조약) 이런 어처구니 없는 조약에 청나라 조정은 당장에 숭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7] , 증국번의 아들인 증기택을 보내 재협상을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압박을 주자 러시아는 차지한 지역을 도로 토해내야 했지만, 일부 지역은 러시아령이 되었다가 현재에는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영토가 되어 이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위구르의 잠깐의 영웅이었으나 광신과 악행으로 대차게 망한 케이스다(...). 만약 폭정만 없었더라면 위구르와 회족이 협력하여 청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해 청도 함부로 제압을 못했을 것이고 그나마 반란이 조금은 성공을 했을텐데 종교광신자였지라 화를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