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마 마사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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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마 마사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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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間 雅晴)
출생
1888년 1월 28일
사망
1946년 4월 3일
1. 개요
2. 상세
3. 전범 재판
4.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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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 육군의 장군으로, 필리핀 침공 당시 사령관.

2. 상세


혼마 마사하루는 1888년 1월 28일에 니가타현 사도가시마에서 태어났다.
1907년 육군사관학교 19기를 거쳐, 1915년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8년간 영국의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있으면서 유창한 영어를 익혔으며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참관하기도 했다.
1930-1932년에 혼마는 다시 영국에 무관으로 파견되었고, 1932년에 제네바 군축협상에 일본대표의 일원으로 파견되었으며, 육군성의 대변인으로 일했다.
1933-1936년에는 야전으로 파견되어 여단장을 맡았다.
1937년 혼마는 쇼와 천황의 동생이었던 지치부 친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유럽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은 독일과 일본의 외교관계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이었고, 그는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기도 했다.
1939년에는 중국 톈진에서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는데, 이때 일본 육군은 이 지역에서 외국조계를 봉쇄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육군 중장이었던 그는 일본군의 필리핀 군도 침략을 지휘했다. 그러나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부터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으로 교체되었다는 추측이 일반적이지만, 이후 조사된 증거에 의하면 필리핀 군도에 대한 침략전쟁의 전기간에 걸쳐 혼마가 최고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사야 제도와 민다나오 제도에 산재해 있던 미국 군대와 필리핀 군대에 대한 소탕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다.
17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11만의 미군+필리핀군 연합군의 지연전에 휘말려 만주, 싱가포르 등에서 5만여 명의 증원이 오고 나서야 겨우 방어선을 돌파해 웨인라이트의 항복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적인 군인으로 보이나, 문제는 그가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바탄 죽음의 행진의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필리핀에서의 확전으로 예비역으로 예편된 후에는 군에 등용되지는 못했다.

3. 전범 재판


2차대 종전 후 민간인 신분으로 마닐라 전범재판에 소환되어 당시 포로학대 행위와 죽음의 행진을 강행한 책임자로 판명 되어서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졌다. 그는 일본의 바탄 점령 직후 벌어졌던 '죽음의 바탄 행진'에 대해 공식적인 책임 추궁을 받았다. 이 죽음의 행진 동안 미군과 필리핀군 장병들이 1만 명 안팎으로 죽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츠지 마사노부가 죽음의 행진을 명령한 것과 그 밖의 다른 잔혹행위들을 묵인한 것이 유죄로 입증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46년 4월 3일, 일반적으로 전범들은 군인이라고 할지라도 교수형에 처해지던 관례와는 달리 그는 명예롭게 죽겠다는 유언이 받아들여져 맥아더의 명령에 의해 민간인 신분으로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이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혼마는 자신이 전투에만 집중한 나머지 포로 수송에 대해서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며 포로들이 그렇게 학대를 받았는지도 법정에 와서 처음 알았다고 주장하며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군이 항복한 직후 포로에 대한 이송은 카와네 요시타케 소장에게 일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마가 처형된 이유는 일설에는 맥아더에게 필리핀에서 도망가는 굴욕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사형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고 재판 과정은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혼마의 변호인단 여섯 명은 형사재판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변호인 중에 한 명었던 로버트 펠츠는 일기에 "혼마는 정말로 학살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다." 라고 적었다. 혼마의 수석 변호인인 존 스킨 주니어는 "결론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매우 불공정한 재판이다."고 말했다. 재판에 관여한 아더 트뤼도 장군은 "나는 혼마를 별로 처형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수형을 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혼마가 훌륭한 장군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1]. 맥아더는 "혼마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지나. 전쟁범죄만큼 큰 범죄는 없다. 이런 범죄를 단죄하는데 실패한다면 인류 사회는 붕괴할 것이다."라며 원론적인 기록을 남겼다. 대신 교수형은 시키지 않고 혼마 마사하루는 이를 봐줘서 맥아더의 명령으로 총살형으로 사형을 집행하였다.

4. 사형 집행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에 처해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다른 전범들과는 다르게 미군 측으로부터 후한 예우를 받았으며 사형 직전에 마지막 식사로 맥주샌드위치, 그리고 비프스테이크와 식후 커피까지 청해서 다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이후 혼마 마사하루는 원하는 옷을 입고 총살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고, 혼마 마사하루의 선택은 일본군 군복을 입은 채로 집행 되는 것을 원해서 서훈.계급장이 탈거된 일본군 군복을 입고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유언은 총살형 집행대가 "준비" 구령을 듣는 순간 "자아, 오너라!"를 큰 소리로 외쳤다. 참고로 그는 홍사익모리 쿠니조와 함게 일본군 군복을 입은채로 죽은 단 3 명의 일본군 장성 사형수이다.[2]
흉부를 꿰뚫은 명중탄은 6발, 중장은 절명 후에도 유혈이 낭자한 가슴을 편 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1] 그 말대로 혼마의 교수형은 선고되지 않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총살형이 선고되었다.[2] 다만 모리 쿠니조와 혼마 마사하루는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으로 집행되었고, 홍사익은 군복을 입은 채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