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지 마사노부

 

'''츠지 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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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초기 경력
3. 그의 만행
4. 평가: 위선자이자 간신배
5. 창작물에서의 모습


1. 개요


일본군 육군 장교로 최종 계급은 대좌.
무능함 때문에 종종 삼대오물과 비교되며 가려져있지만, 실상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인들 및 연합군의 죽음에도 큰 책임이 있는 인간이다.
기회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자, 계파적으로 이시와라 간지의 영향을 받아 명목상으로 만주국의 건국 이념인 오족협화를 신봉하였다.[1]
그는 줄곧 ''''작전의 신''''이라고 불렸는데, 자칭 신이라서 문제였다. 그러니까 부하들에게 스스로를 신으로 불러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2. 초기 경력


당시의 최신식 학문기관이던 육군대학을 3등으로 졸업하였고,[2] 수많은 정치적인 위기와 파벌 싸움 속에서도 자신의 입장과 권력을 유지해 츠지 마사노부를 수완가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면에는 남에게 건 모함이 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공식적으로 남긴 말과 행보를 볼 때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 남을 써먹고, 모략을 꾸미는 전형적인 권력지향형 인간이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육군사관학교 사건이 있다. 당시 통제파에 속했던 츠지 마사노부는 황도파에 심은 스파이로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계획을 입수하고 한밤중에 육사를 월장, 육군 차관에게로 가서 용의자를 적발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헌병대 조사에서 문제의 쿠데타 계획은 매우 조잡하고 현실성 없는 것임이 드러났지만 이에 연루된 생도 및 장교들은 퇴학 또는 정직당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연루자들은 숙군을 주장하다가 아예 면관당했다. 이 육사 사건은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2.26 사건 역시 츠지가 일으킨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3. 그의 만행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채 근성만을 엄청나게 강조하였는데, '일본군의 정신력은 대단하고, 적군은 나약한 정신력을 가졌기에 백전백승한다!'[3]는 주장을 제2차 세계대전 내내 펼쳤다. 물론 이와 같은 정신승리근성론은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군의 고질병이었지만 츠지 마사노부가 그 시초였고, 일본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기에 '''근성론 = 츠지 마사노부'''로 통한다.

3.1. 할힌골 전투


1937년, 츠지 마사노부는 관동군 작전참모였다. 그해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츠지는 전선 확대를 주장하며, '자신이 몸소 폭격기에 탑승하여 중국군에게 폭격을 하고 오겠다.'고 쇼를 하다가 작전주임 이케다 스미히사 중좌가 '그런 짓을 하면 전투기로 네 비행기를 쏘아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하여 단념했다.
1939년 4월 츠지 마사노부는 <만주-소련국경분쟁처리요강>이라는 문서를 작성하고 이를 사령관 명의로 포고했는데, 만주국과 소련 사이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곳에서 충돌할 때 병력에 관계없이 필승을 기하라.'는 내용이었다. 5월 11일에 외몽골과 만주국이 할힌골 강에서 충돌이 일어나자 관동군 23사단은 츠지가 작성한 문서에 따라 부대를 증파했고 전투가 확대되었다.
한편 소련에서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57군단장으로 임명받아 부임했고, 관동군 사령부는 분쟁을 확대시키기 위해 외몽골의 항공기지를 폭격하려고 계획했다. 도쿄참모본부는 전보로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츠지가 이 전보를 묵살해서 관동군 측에서는 작전속행을 알리는 답장을 보냈다. 문제는 이 답장의 '''과장과 참모장, 사령관의 결재란에 츠지의 도장이 찍혔다는 것이다'''. 이 행동은 하급자가 상급자인 양 나대며 허위명령을 내린 것이라 일본 육군 형법 제37조에 해당하는 중범죄였다. 즉, 츠지 마사노부가 독단으로 대리서명을 했기 때문에 할힌골 전투가 대형분쟁으로 커졌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에서 이시와라 간지 계파였던 츠지 마사노부가 일본과 소련 간의 전면 전쟁을 계획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어쨌든 끝내 작전은 실행되고야 말았고,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참패,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패배하여 숱한 병사들의 목숨만 날리고 말았다.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한 소련군의 공세에 일본군은 패퇴했고, 1939년 9월에 들어 정전협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1940년 1월 30일, 소련 측이 합의를 뒤엎고 귀국을 해버렸다. 이때 일본 협상단 측은 루스키 놈들 못 믿을 놈이라며 화를 냈지만 이후 '츠지 마사노부가 러시아인들에게 중재안에 서명을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츠지 마사노부가 '러시아 백군 잔당들을 사주하여 소련과 외몽골 대표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런 사실은 만주국 외교관이었던 키타가와 시로가 1978년에 털어놓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쓴 저서 <노몬한>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전쟁은 지도자 상호의 의지와 의지의 싸움이다. 조금만 더 일본이 힘을 냈다면 아마도 소련이 정전 신청을 했을지도 모른다.[4] 어쨌든 전쟁이란 의지가 센 쪽이 이긴다. 한 마디로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는 것이다."라고 써 놓았는데, 실로 훌륭한 정신승리의 표본이다. 더구나 같은 책에서, "외교 역시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는 것이다."라고 적었는데 츠지 마사노부가 정말 소련 외교관들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면 섬뜩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할힌골 전투 이후 일본군을 가리켜 "사병과 하사관들은 용감하고 초급 장교들은 완강했지만, 고급 장교들은 무능하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츠지 마사노부는 패전을 보고하면서 "소관의 작전계획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敢鬪)정신[5]의 부재로 패전했습니다."라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
츠지는 '''작전 계획 당사자'''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풀고 자기가 채점하면서 자화자찬하고 부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꼴. 이러니 제대로 평가가 될 턱이 없다. 이렇게 엉터리 평가를 내린 다음 츠지 마사노부는 이오키 에이이치 중좌, 사카이 미키오 대좌 등 그나마 잘 싸운 장교들에게 할복 자살을 강요하고 포로 교환으로 송환된 장교들에게도 자살을 강요했다. 결국 일선부대 연대장들이 줄줄이 할복 자살.[6] 일부 일본군 병사들과 부사관, 장교들은 처벌이 두려워 탈영하고 몽골-만주 일대의 마적단이 되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처벌이 두려워 송환을 거부하고 소련에 남은 포로들도 있다고 할 정도다.
일본군 다수가 탈주한 뒤 마적이 된 사태에 조사가 있었고 원인을 제공한 츠지 마사노부는 좌천당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10월, 참모본부 소속으로 오히려 승진했다.[7]
일본에서는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이라 부르지만, 사단급으로 맞붙은 엄연한 전투에 사건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에는 일본군의 참패를 감추려는 의도가 있다. 물론 전투의 승자는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니 당연히 현재 해당 전투는 '''할힌골 전투'''라고 불린다.
일본 육군의 주적은 소련이었고 모든 전략과 작전계획 등의 무게가 북방에 있었다. 이에 반해 남방은 말 그대로 오지였는데 남방으로 좌천된 츠지 마사노부는 남방의 작전계획을 마련하는 등 열심히 일했다. 뭔가 오랜만에 제대로 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행적을 보자면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출세하려면 전쟁이 나야 한다고 여겼기에 한 준비에 가깝다. 웃긴 것은 나중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은 부랴부랴 남방작전을 준비했는데 그게 다 츠지 마사노부가 짜 놓은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끝내 일본 육군은 초반의 남방작전 계획을 전적으로 츠지 마사노부에게 기댔고 그 작전으로 초반에는 싱가포르 등을 함락시키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3.2. 태평양 전쟁 개전 전후


将校は西洋人で下士官は大部分が土人であるから、軍隊の上下の精神的団結は全く零だ

장교는 서양인이지만 부사관은 대부분 토인(원주민)이기 때문에 군대 상하의 정신적 단결이 완전 빵점이다.

戦は勝ちだ。飛行機や戦車や自動車や大砲の数は支那軍より遥かに多いから注意しなければならぬが、旧式のものが多いのみならず折角の武器を使うものが弱兵だから役には立たぬ、従って夜襲は彼等の一番恐れる所である

(미국과의) 전쟁은 승리다. 비행기와 전차와 자동차와 대포의 숫자는(미군이) 지나(중국)군보다 훨씬 더 많으므로 주의해야 하지만, 구식인 것이 많을 뿐더러 그 무기를 쓰는 병사들이 약하므로 쓸모가 없다, 따라서 '''야습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츠지 마사노부가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집필한 『이것만 읽으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これだけ読めば戦は勝てる)』에서.

그리고 대본영은 이걸 각 부대로 배포했다. 물론 츠지 마사노부의 이러한 주장은 당장 유보트 때문에 본토가 아사하기 직전이라서 보급이 안 되던 식민지 영국군이나 제대로 준비를 못한 개전 초 미군만 생각하면 맞았고 실제로 이들은 일본군에게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본토에서 착실하게 준비한 미군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파멸하게 된다.

할힌골 전투 때는 북진론자로서, 외교관을 살해 협박하면서까지 소련전쟁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던 츠지 마사노부였다. 그러나 이때는 남진론자가 되어 영미와 전쟁을 일으키려고 발광했다. 심지어 전쟁을 막으려고 미일 정상 회담을 준비하던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을 폭탄으로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회담이 결렬되고 고노에 내각이 퇴진하여 계획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 시기 츠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40년 10월 고노에 내각은 총력전을 연구할 기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총력전 연구소라 이름하였다. '총력전 연구소'라는 이름은 원래는 가칭이었지만, 그대로 정식 명칭으로 확정되었다. 총력전 연구소는 이듬해(1941)부터 군사,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의 나이 30대의 인물들을 받아들여[8] 교련 및 정신교육 등을 하였다. 츠지 마사노부도 총력전 연구소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재미있긴 했는지 이때 참가자들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그때 츠지가 했던 강의 내용을 또렷이 기억했다고 한다.
그해(1941) 여름부터 총력전 연구소에서는 '책상연구'라는 이름으로 워 게임을 하였다. 연구생들이 군부, 조선총독 등 역할을 맡아 전쟁을 개전해야 하는지, 만약 개전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시뮬레이션하도록 한 것이다. 워 게임 결과는 8월 27일에 당시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를 비롯, 츠지 마사노부 자신도 참석한 가운데 발표되었다. 결과는 개전시 패전. 이를 대놓고 말할 수가 없어서 연구생들은 이리저리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결론은 '개전하면 일본이 집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결과를 듣고 있던 중에 츠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연구생들의 좌장이며 책상연구에서 총리 역할을 맡은 구보타 가쿠이치란 사람에게 "송구스럽게도 작년(1940) 9월 4일에 몽골에서 사망한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北白川宮永久王)[9][10] 전하의 영령이 다치카와 비행장에 도착하셨을 때 어째서 당신은 마중 나오지 않았소!"라고 따졌다고 한다. 실제 고노에 총리가 아니라 단지 '고노에 총리 역할'만 맡은 사람에게 저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다니 어처구니없는 행동인데, 결국 츠지는 '군인정신이 빠진 인물이 지휘하면 이길 전쟁도 못 이긴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에서는 이들 총력전 연구소에서 했던 '책상연구' 결과와 대략적인 흐름이 비슷하게 진행되었다.[11]

3.3. 싱가포르 전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싱가포르 전투와 말라야를 침공하던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25군에 참모로 임명되어 근성론을 앞세우며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작전의 신'''이란 말을 공개적으로 썼다고 한다. 이때도 똘기는 여전해서 츠지 마사노부는 제5사단의 선두에 서서 '''직접 전차를 탈취하고 적군 진지에 돌입하는 기행을 보였다.''' 얼핏 보면 영웅적인 행동을 한 듯하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일개 이나 부사관, 초급장교가 아니라 '참모장교'다. 당장 참모장교는 작전지휘를 돕고, 전략을 짜는 아주 중요한 일을 맡는데, 작전 참모로서 임무를 포기하고 일선에서 명령계통을 무시하는 지휘를 한거다.
만약 저런 고급장교가 앞장서서 싸우다 죽거나 포로가 되면 군대 입장에선 병사부사관 몇 명, 하급장교 몇 명 죽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피해다. 저런 고급 장교는 양성하는 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드니 죽으면 엄청난 손해일 뿐더러 일반 병사나 하급 장교에 비해 군사 관련 기밀이나 작전에 대해 아는 것도 더 많을 가능성이 높으니 포로로 잡힌다면 군사기밀이 노출될 확률이 더 높다. 같은 군대에 도미나가 교지무타구치 렌야[12]와 180도 다른 상황이지만, 일반적인 군대에선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거기에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식민지 치안군이라 숫자만 많았지 훈련의 수준도 떨어지고 사기도 바닥을 치는 오합지졸인 데다 장비도 빈약했다. 그리고 전차라고 설명된 것도 모두 브렌건 캐리어 같은 소형 병력수송 장갑차였다. 더불어 본국이 독일과 전쟁한다고 보급도 제대로 안되는 형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 이겨가는 싸움에서 빈약한 적을 상대로 부린 만용이라 일반 장병으로서 영웅적인 전투라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할힌골 이후 과달카날까지의 행적을 정리하면, 전쟁이 나야 출세를 하니까 일단 불은 지르고 보고, 일선부대를 책임지는 지휘관이 되면 부대에 매여 빼도박도 못하고 돌격해야 하니까 그 짓은 못하겠고, 참모장교를 하면서 월권해 장기말을 옮기고도 책임은 빠져나갔지만 손맛도 안 나니까, 눈치봐서 재미있는 싸움이면 나서고, 망한 싸움이면 핑계대서 빠지는 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아군이든 적군이든 전쟁을 게임으로 본 것의 연장선상에서 옥쇄명령과 포로학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런 웃기지도 않은 광경을 본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츠지 마사노부의 사악한 성격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얼마나 츠지 마사노부에게 학을 떼었는지 일지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この男、矢張り我意強く、小才に長じ、所謂こすき男にして、国家の大をなすに足らざる小人なり。使用上注意すべき男也

이 자는 고집이 세고 잔재주에 능하며 교활하니, 국가의 대계를 이루기에는 부족한 소인배다. 쓸 때 주의할 남자다.

싱가포르를 점령한 마사노부는 시내의 화교 20만 명 중 항일분자로 판단된 6천여 명을 대량 처형했다. 그런데 종전후에 이 학살의 책임자가 불명확해서 전범 재판 때 문제가 되었다. 관련자로 기소장교들은 모두 싱가포르 함락 직후 츠지 마사노부가 들이닥쳐 처형을 독촉했다고 주장했으며, 경비 본부에서 근무하던 시노자키 마모루도 츠지 마사노부가 입안했다고 증언했다. 피고들과 그 가족들은 츠지 마사노부를 체포하기를 기다렸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종전 직전 종적을 감추어 버렸고, 어쨌거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어떻게든 책임질 사람은 필요했기에, 츠지 대신 당시 총사령관이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 사건과 이후 벌어진 필리핀 학살 등의 책임을 지고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어찌 되었든,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자행한 츠지 마사노부는 말레이 전역이 종료된 1942년 3월에 도쿄로 돌아가서 진급했다.

3.4. 필리핀, 바탄 죽음의 행진


츠지 마사노부가 여전히 근성을 외치는 지휘를 하던 어느날, 갑자기 14군 전체가 '미군 포로를 처형하라.'는 구두명령을 받았다. 아무리 일본군포로 학대니 뭐니 악명이 높아도 일단 당시 일본군의 방침은 포로 생포였다. 갑자기 뜬금없이 포로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의구심을 품은 대좌 하나가 문서로 적은 공식적인 명령확인서를 상부에 요청했다.
갑자기 날아든 명령확인 요청에 작전본부(대본영)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답변했고[13] 14군 내의 자체조사결과 츠지 마사노부가 '포로감시를 엄중히 하라.'는 명령을 포로 학살왜곡하여 내린 지시로 판명되었다.
사실 일본군 안에서는 중요한 명령이면 문서로 내리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츠지 마사노부의 이같은 전화구두명령은 의구심을 받아 실제로 이 명령을 따른 일은 드물었다. 따라서 바탄 죽음의 행진은 츠지 마사노부의 책임이 아니라 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의 판단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일본극우세력은 이 학살 사건을 일본군 전체의 잘못이 아닌 츠지 마사노부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기 위해 이 에피소드를 특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츠지 마사노부의 죄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며 츠지 마사노부도 죽일 놈이지만 혼마 마사하루도 마찬가지로 죽일 놈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한 놈이 초막장 명령을 내렸다고 해서 그걸 또 그대로 따랐다면 어차피 따른, 이를 저지하지도 처벌하지도 않은 놈도 문제다. '위에서 명령을 내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상당수 통할지 몰라도, 서구세계에서는 그걸 오히려 더한 악당짓으로 본다.
좌우지간 츠지 마사노부와 혼마 마사하루의 합작 덕분에 일본군은 현대에 들어와서 미국인이 학살당했기에 미국이 직접 객관적으로 기록해놓은, 그 때문에 일본 마음대로 역사 왜곡을 할 수 없는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는 악랄한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전쟁 범죄의 설득력을 마구마구 높이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일본 역사계의 X맨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똥별들이라 할 수 있다(...).

3.5. 과달카날 전투


과달카날 전투는 이미 이치키 기요나오 지대의 1차 공격이 전멸로 끝난 상태였기에 대본영은 전황 파악을 위하여 츠지 마사노부를 과달카날로 파견한다.
당시 일본군 참전 병사의 증언에 의하면, 병사들이 식량이 부족해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불을 피우면 적에게 들키므로) 날것으로 먹고 있을 때 어떤 장교가 불을 피워서 흰 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장교가 츠지였다고 한다. 게다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누워서 다 죽어가는 병사들을 물건 취급하듯이 "어라? 눈알도 있네. 색깔이 하얗게 되었네..."라며 칼집으로 "야! 야!" 하고 쿡쿡 찔러댔다고 한다.출처
가와구치 소장의 필사적인 2차 공격마저도 압도적인 미군화력에 밀려 패배한 상태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근성으로 헨더슨 비행장 남쪽의 험난한 밀림을 빠르게 돌파한 뒤 대원 모두 착검한 채 야습한다.'란 근성론을 기반으로 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남쪽 정면 공격은 밀림이 우거진 지형 특성상 포병의 진출이 제한돼 화력지원이 매우 곤란해지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2차 공격에서 미군의 이미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한 가와구치 소장은 이 점을 지적하며 '이런 정신나간 계획은 전멸을 불러올 뿐이다!' 하고 좀 더 합리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미군은 비행장에서 테니스나 치면서 놀고 있고[14] 가와구치 소장은 적에게 겁을 먹고 소극적 지휘를 한다.'고 대본영에 보고하였다. 결국 가와구치 소장은 본국으로 송환되고, 츠지 마사노부의 작전안에 따라 야간 반자이 돌격 위주로 실시된 3차 공격은 당연히 전멸로 끝났다.
태평양 전쟁 이후 작성된 미군의 문서에는 '과달카날 전투에선 가와구치 소장의 2차 공격만이 미군에게 실로 지대한 위협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멀리서 '돌격!'을 외치던 츠지 마사노부는 최전선에서 굶어죽는 병사들을 보자 '여기는 굶주림의 섬이다(あれは餓島だ)', '길가에는 텅 빈 반합을 손에 쥔 채로 굶어죽은 병사들이 무더기로 썩어가고 있다.'라고 대본영에 보고하면서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다. 뭔 생뚱맞은 소린가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이때 과달카날에 있었다. 즉 '''자기가 살아남으려면 황급히 후퇴해야 한다'''는 점을 귀신같이 깨달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약간 머리를 굴렸기 때문에 츠지 마사노부는 "철수하자!" 하고 자기 입으로 말한 적은 없다. 일단 과달카날의 참상을 자세히 보고해서 철수를 간접적으로 확실하게 암시했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철수라는 두 글자만은 죽어도 입에서 꺼내지 않았다. 이 와중에 대본영의 한 정보참모가 츠지에게 과달카날의 상황이 어떠냐고 묻자 "노몬한 때보다 더 어렵다. 철수할지 말지는 상부에서 결정하는 것이지만 성공의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는 게 참모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끝내 과달카날 전투는 완벽한 참패로 끝났고, 그 와중에 츠지 마사노부는 육사 동기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멍 때리다 제대로 된 후속 작전도 수립하지 못한 채 꼴사납게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후송되었다. 참모장교라서 키니네 정제를 보급받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계속 있다가는 죽게 생겼으니, 도망갈 이유를 만들고 싶어서 약을 안 먹고 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3.6. 중국버마에서


과달카날에서 귀환한 츠지 마사노부는 중국버마에서 복무했다. 중국에서는 장제스와 강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그 임무를 맡겠다고 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제안했으나 육군성/육군참모본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버마에서는 중국 윈난성 바오산시 텅충(騰沖)현과 북부 버마의 미치나 전역에서 작전지도에 종사했다.
텅충 및 텅충으로 가는 도로 중앙에 자리잡은 쑹산(松山)[15]에서는 구원군을 반드시 보내겠다고 약속하면서 철수를 막았고, 그 결과 일본군육군으로서는 드물게도 중국전선에서 옥쇄를 겪었다. 게다가 츠지 마사노부는 구원군을 보낼 의사도 없었고, 편성한 구원부대는 등충과 송산이 함락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미치나에서도 같은 지시를 내렸으나 미치나 수비대를 지휘한 미즈카미 겐조 소장은 결국 그 명령을 거부하고 수비대를 철수시킨 뒤 자결하였다. 이 사실을 안 츠지 마사노부가 미즈카미의 부관을 미친 듯이 구타하는 바람에 수비대인 제114 보병연대가 소속된 제56사단의 사단장이 직접 말려야 했다. 전략적으로 따지면 츠지 마사노부의 지시는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었다. 북 버마와 운남성 남부에서 일본군이 쫓겨나자 레도 공로가 완전히 개통, 방대한 물자가 이전의 항공수송과는 차원이 다른 수량으로 중국에게 넘어오면서 중국 주둔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밀려나갔다. 다만 츠지 마사노부의 역성으로 온 일본군의 악착같은 지연전 덕분에 너무 늦게 열렸다.[16]

3.7. 패전 후의 행적


방콕에서 마지막 패전 소식을 들은 뒤 처음에는 죽으려고 작정했으나, 끝내 '''아시아 속에서 민족의 재건을 위해서는 오히려 살아남아 아시아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승려로 변장해서 잠적했다. 그런데 1946년 9월에 태국의 라마 8세가 의문의 총기 폭발 사건으로 죽었는데 탈출을 위해 츠지 마사노부가 관여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이 주장은 라마 9세의 협조를 받아 사건을 조사한 윌리엄 스티븐슨이 <혁명>이라는 에서 주장했다.
다만 츠지 마사노부가 쓴 <잠행 3천리>에선 이미 1945년에 태국을 탈출했고, 라마 8세가 죽은 시점에는 중국에 있었으니, 중국에 있던 사람방콕으로 돌아와서 라마 8세를 살해했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끝내 라마 8세의 죽음은 의문사로 남았다.
중국으로 건너간 츠지 마사노부는 황당하게도 연합국 소속 중국 국민당 정부가 숨겨줬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 정부 근무자 신분까지 받았다. 장제스의 특무기관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을 과거에 츠지 마사노부가 도와줬다고 하여 중국 국민당 정권이 그에게 친근감이 있어서였다. 장제스 본인도 자기 어머니가 병사했을 때 츠지 마사노부가 위령제를 해줘서 츠지 마사노부에게 대단한 호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전범 재판이 좀 잦아들 때까지 조용히 지내다가,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이 불리해지자 1948년 상하이를 거쳐서 일본으로 귀국, 다시 잠적한다. 이후 전우회나 사찰, 우익단체 등에 숨어 지내고 광부 활동을 전전했다. 1949년에는 야쿠자 대부이자 거물 정치깡패였던 고다마 요시오의 집에 의탁했다.
그러다 1950년에 전범 시효가 풀리자마자 그 사이의 도주생활을 무슨 자랑거리인 마냥 쓴 자서전 <잠행 3천 리>를 발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은 솔직하게 적었다고 한다. 당시 국민당에서 츠지 마사노부가 한 행동이 CIA의 감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후 기밀이 풀린 문서와 대조하여 확인함으로써 증명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츠지는 이 책으로 큰 돈을 벌었고 이 돈을 선거자금으로 삼아 정계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3.8. 정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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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는 나름대로 수완이 있어서 흑룡회 잔당 등 휘하 단체를 이끌고 나름 정계의 실력자로 발돋움했다. 일본 정치사에 자민당극우파가 집권했다면 한 자리 크게 차지할 만한 인물이었다.
전범시효가 끝나자 츠지 마사노부는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 '제3차 세계 대전 미국 필부론(必負論)'[17]을 주장하며 '주일 미군의 완전 철수'를 떠들고 다녔다. GHQ는 이런 츠지 마사노부를 추방[18]을 통해 잡으려고 했으나, 점령 기간이 다 끝나간 데다가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별다른 적극적 조치를 않고 내버려 두었다.
추방령마저 끝난 1952년에는 이시카와에서 중의원으로 당선했다. 이때 구 일본군인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플러스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시바시 단잔 내각 당시에는 이집트나세르, 유고티토, 중국저우언라이, 인도자와할랄 네루, 소련주코프와 회담하는 등 나름 중견 거물 정치가에 올라 신나는 생활을 보낸다. 과거 할힌골 전투에서 자신을 먹인 주코프를 만난 츠지 마사노부는 머지 않아 주코프흐루시초프권력투쟁에 들어가리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결국 주코프흐루시초프에게 숙청된다.
1953년 10월 17일에는 독도 문제에 관한 일본 쪽 최고이론가인 외무성 사무관 가와카미 겐조와 함께 독도 해안에 불법적으로 침입하기도 했다. 한국 광복에 도움을 줬다는(...) 무타구치 등과 다르게 분명하게 한국에 여러번 해를 준 자인 셈이다.
4선 의원으로 활동하던 1959년 기시 노부스케에게 공격받고 자민당에서 제명당했다. 이후 전국구 일본 참의원으로 전환해 다시 당선되었다.

3.9. 최후


1961년에 츠지 마사노부는 동남아 시찰을 명목으로 일본 참의원에 40일 휴가를 제출하고, 호치민을 만나겠다면서 4월 4일 일본을 훌쩍 떠난다. 그런데 5월 중순이 되어도 안 돌아오자 가족이 조사를 의뢰했고, 이후 츠지 마사노부가 불교 승려로 변장하여 홀홀단신 라오스 북부 고원으로 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까지는 확실하지만 '''이후 츠지 마사노부의 행적을 아무도 모른다.'''
당시 한참 격화되던 베트남전과 관련해서, 츠지 마사노부가 자신의 반공 의용군을 결성할 목적으로 여행 갔다가 소련이나 중국의 손에 죽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일단 츠지 마사노부는 싱가포르에서 중국인 견제를 외치며 벌인 중국인 학살에 기여했기에 중국에선 죽일 놈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러나 단순히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심지어는 살아서 호치민의 막료, 중동의 막료, CIA고문단 등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츠지의 실종 1년 뒤, 산케이 신문 기자 노다 마모루가 동남아시아 현장에서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파테트라오 군과 접촉하다 7월 무렵 하노이로 향한 뒤 실종되었다는 제보를 들었다고 한다. 노다는 직접 북베트남으로 들어가서 츠지 마사노부의 행방을 쫒으려고 했지만 입국 비자가 나지 않아 그 시점에서 취재를 끝냈다.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 정도의 유명 인물을 소련이나 중국이 무작정 죽였을 가능성은 낮다.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그런 인물은 죽이기보다는 살려서 쓰거나 일본 정부와의 협상 카드로 써 먹어야 더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실종된 시점에선 그래도 엄연히 일국의 정치인이기도 했고 말이다. 게다가 츠지 마사노부는 필요하다면 상대가 적이라도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따라서 츠지 마사노부가 죽었다면, 이는 누군가가 그의 존재를 모르고 죽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 다음은 츠지 개인이나 구일본군의 만행에 원한을 품은 현지인의 복수다. 현재는 라오스 반군들의 손에 죽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라오스 파테트라오 반군과 동행한 중국계 종군기자는 아무래도 츠지 마사노부가 승복으로 변장한 것 때문에 스파이로 오해받아 총살당한 듯하다고 증언했다. 이것도 확실하게 확인하고 한 증언이 아니라 '이랬다.' 하는 정도고 파테트라오 안에서도 츠지 마사노부의 생사를 끝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예하 부대병사들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스파이로 의심한 사람을 죽인 다음 파묻으면 게릴라전이 한창인 전장에서는 그대로 자연 속에서 썩어가기 쉽고, 심지어 살해 당사자들조차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츠지 마사노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끝끝내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후 동경가정재판소에서 1968년 7월 20일을 츠지 마사노부의 사망일로 선고했고,[19] 1979년에는 고향에 그의 덕(...)을 표창하는 동상을 세웠다.

4. 평가: 위선자이자 간신배


'''"상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도하기 일쑤다."'''

'''"지휘관의 명령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독단 전횡을 저지른다."'''

태평양 전쟁 당시 동료 장교들과 상관들은 츠지 마사노부를 이렇게 혹평했다.
인터넷에선 흔히 희화화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삼대오물 같은 그냥 멍청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높으신 분들과 달리 굉장히 위험하고 사악했다.
사실 츠지 마사노부는 삼대오물삼간사우가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완전한 똥별은 아니었으며 전후에 정치적으로 성공했다는 것 때문'이다. 별 것 아닌 듯하지만,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어느 정도 능력과 인망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츠지 마사노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뻘질로 불리한 측면도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 더해서 츠지 마사노부는 무타구치 렌야처럼 전쟁터에서 기생집을 차리는 등 개인적인 행실마저 개판인 건 아니었다. 따라서 적어도 자기 고향에서는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로 평판이 그럭저럭 좋았다. 일본 전체를 보자면 평판이 나쁘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간사하고 부지런한 부류인데, 이런 부류는 군대에서 '''신속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이 양반이 일본군 기준으로 볼 때 멍청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좋은 머리를 일본군의 승리에 쓰기보단 철저히 자기 보신 위주로 써먹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냥 멍청한 것보다 더 악질이다.
더군다나 삼대오물은 장성인 데 반해, 츠지는 최종 계급이 대좌다. 대좌는 대령이니 결국 '''일개 영관급 장교 주제에 악명은 장관급 장교와 맞먹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도조 히데키는 '장래에 국군의 요직을 충분히 떠받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는데, 그 도조 히데키무타구치 렌야 따위를 심복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도조 히데키는 매우 신임했으며 치치지마 식인 사건으로 유명한 다치바나 요시오와 꽤 친했다고 한다. 거기에 미얀마의 도살자 기무라 헤이타로와도 친했으며 삼대오물이나 마토바 스에오[20]와는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그야말로 유유상종인데 당시 일본군의 장교 장군들은 그렇게 인맥이 얽혔다.
이런 막장 행보와는 달리 의외로 츠지 마사노부 개인의 평가는 꽤 높다. 깔끔한 용모에 친절하고 심지 곧은 성격이며, 검소한 생활과 언제나 타의 모범인 행동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상관의 비리사실을 잡아내어 자신의 작전안을 관철시키는데 써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말이 나올 만큼 츠지 마사노부의 작전안은 마구잡이로 통과되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가 작전을 입안하고, 뒤에 자신이 그 작전을 평가할 만큼 막나갔다.
하지만 초급장교 코스를 밟으며 중대장으로 있을 땐 부대원들이 그를 처럼 숭배했다는 일화가 있고, 훈련 중 낙오한 중대원을 둘러업고, 대신 소총을 들며 돌격한 일화도 있다. 심지어 자신이 복무한 부대에서 병영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동기 생활관을 도입했고 실제로 효과를 봤다고 한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늘 전선에서 현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할힌골 전투 직전 당시 관동군 참모부가 참모들에게 적정시찰을 지시하면 츠지 마사노부의 보고가 가장 세밀했고, 흑룡강 부근의 조사 임무를 맡자 직접 헤엄쳐 조사했다(...). 일선 병사들에게도 자주 나타나 병사들의 생활 고충을 듣고 사치를 부리는 부하 장교들을 벌하는 등 모범적인 장교로 행동했다.
원래 일본군에서 참모는 전선시찰을 잘 안 하는 편이었는데, 정작 일본군이 근대화의 모범으로서 채택한 독일 육군에서는 참모에게 되도록 전선 상황을 실제로 파악하라고 주문한다. 원래 독일군 교리가 양면전쟁의 불리함을 작전적 우월함으로 극복한다는 주의에서 나왔으니 전선현장에서 전세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조짐을 철저히 장악하라는 뜻에서 한 이야기고, 또한 독일군은 지휘관보다도 참모의 능력에 기대는 바가 크다. 그런데 중간 간부를 매우 중시하는 일본문화독일군참모 제도가 들어오면서 참모장교의 권위가 극단적으로 높아지자 참모의 전선시찰 기피로 나타났다. 사실 같은 참모 중시라도 독일군일본군처럼 참모 개인이 조직을 휘저음은 당연히 금기시한다.
이런 상황에서 츠지 마사노부는 예외로 전장시찰을 직접 나가고 부상도 여러 번 입었다. 본인도 '자신의 몸에는 소련, 미국, 영국, 중국이 다 들어있다.'고도 말했다. 그래서인지 야전부대에서 그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또한 25군의 직속 상관이던 참모장 이케타니 한지로는 '''"일반병들을 잘 대해주니 최전선의 사단 참모로 굴리면 딱이다."''' 하고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실제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부사관이나 위관 정도에서 제대하고 정치인을 했으면 전설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츠지의 저런 긍정적인 행동들도 연기라는 의혹이 강하게 드는 점들이 있는데, 츠지가 직접 전선시찰을 하고 구체적으로 보고서 올린 대로 작전을 짜고 전투를 했다가 할힌골서 여러 번 망한 적도 있었다고 하고, 과달카날에서 굶어서 힘없이 누워 있는 병사들 조롱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니 뭐... 흑룡강을 진짜 헤엄쳐서 조사한 게 아니라 하지도 않아 놓고 보고서만 다 한 양 작성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는게 저런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츠지 마사노부는 얼마나 당시 일제 사회가 막장이었는지 증명하는 반례이다. 그는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여러가지로 흉악한 범죄들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별 문제 없이 정계에 진출하여 성공했다. 이러한 결과에서 이 인간무타쿠치 ,스기야마 등등보다 훨씬 영악했음을 알 수 있다. 차라리 삼대오물 멤버들은 그냥 무능함으로 자신이 속한 군대에만 막대한 피해를 줬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간악한 술수를 부려 모든 이들에게 피해를 끼쳤다.
작가인 한도 가즈토시는 무타구치와 츠지를 모두 면담하였는데 '무타구치 렌야는 그래도 자기 책임은 인정하고 변명이라도 했지만, 츠지 마사노부는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츠지 마사노부의 행적에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츠지의 개인사만 보면 매우 유능해서 그 어떤 사지에 투입되고도 살아남았고 처벌은 커녕 영전했으며 전후에 정계 진출까지 해냈다. 하지만 그가 살아간 일본이란 국가의 현대사와 그가 소속되었던 일본군에게는 다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야말로 개인의 영달에 충실한 사악한 인물이었다. 그가 말아먹은 전투 때문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네 뭐네 우스개거리지만, 알고 보면 실로 흉악한 인간. 장성정치인도 아니고, 일개 좌관 참모인 주제에 그 때문에 죽은 사람은 외국인이든 자국민이든 직접 간접적으로 합치면 모두 수십만 명이다. 그래서인지 종전 뒤 만들어 2005년 공개한 CIA 극비문서에서는 츠지 마사노부를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남자'''라고 평가했다.
대전차총검술도 이 사람이 창안한 것이다.

5. 창작물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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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지팡구에도 나오는데 역시나 여기서도 근성론을 부르짖는다. 미래에서 온 미라이 선원들의 말을 믿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공을 세워 역사를 바꿔 영웅이 되려 하나 현실은 시궁창. 때문에 미라이 선원들에게 속았다며 길길이 날뛰다가 책임지고 자살하겠다고 한다. 이에 부하가 설득하자 갑자기 정신승리하더니 살겠다고 해 설득한 부하까지 당황케 만든다. 또한 '물량이 제한적인데 반해 인간의 정신력은 무한하다', '필승의 신념이야말로 우리 야마토 민족의 최대 무기'라는 병맛 넘치는 대사를 한다. 그런데 쿠사카가 츠지 마사노부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며 "그 필승의 신념으로 이 총알을 피한다면 무한한 정신의 능력을 인정하겠다."라고 하자 바로 버로우탄다. 이후에는 개심하여 병맛짓을 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모에 전차학교에서도 잠깐이지만 과달카날에서의 츠지 마사노부를 까니 일본 안에서도 평가가 나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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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히코 요시카즈무지갯빛 트로츠키에도 등장. 실제 역사가 잘 고증되어 병맛 넘치는 호전광이자 악역으로 나온다. 막판에 할힌골 전투를 획책했다가 처참하게 박살난다.
카미카제 특공대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카미 시게노리(神重德)는 해군판 츠지 마사노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격이나 행적 등이 비슷하다.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도 악당으로 등장.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호응하여 소련 영토를 침공해 초반에는 승승장구하는 듯하나 결국 연전연패한다. 마침 무다구치 렌야임팔 작전까지 더해져 일본 육군은 무려 74%의 손실율을 달성. 거기다 마사노부가 소련을 침공할 때 일본은 미국과 휴전협정을 위한 회담중이었다. 침공사실을 알게 된 루즈벨트는 격노하여 돌아가버리고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해 그를 제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이래저래 민폐 갑.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독일이 미국 측에게 일본군의 정보를 제공할 때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독일 측 요원인 발터 셸렌베르크가 과달카날 전역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현재 과달카날에는 일본군 총사령부(대본영)에서 파견온 특별 참모가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자, 미국 측 인사인 대사관 주재무관은 '정말 유능하고 위험한 인물이니 어떻게든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군요?'라고 질문한다. 이에 츠지 마사노부의 실상을 상세하게 말해주며 절대 해치면 안 된다고 말해주자 무관은 어떻게 그런 자가 고위장교가 될 수 있냐며 그야말로 이뭐병의 반응을 보인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 단역으로 등장한다. 하노이까지 밀려난 상태에서 추태를 보이는 기무라 헤이타로 옆에서 근성론만을 부르짖는다. 그러던 와중에, 급습한 베트민에게 사이좋게 사로잡힌다.

[1] 하지만 본인의 언동을 보면, 진정으로 오족협화를 신봉했는지 의심스럽다.[2] 이마무라 히토시 같이 아예 1등을 하는 덕장도 있었다. 성적이 인간성을 담보하지 않음을 증명한 허다한 사례의 한 가지라 하겠다.[3] 이러다가 다카히토에게도 까였다. 중위였던 다카히토가 이 발언을 듣고는 '그럼 적들도 정신력이 강하다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그럴 일 없다고 횡설수설했다. 참고로 이때 츠지의 계급은 소좌였다.[4] 당연히 츠지 마사노부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할힌골 전투 뒤의 관동군은 전투를 지속할 전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소련이 추가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은 까닭은 할힌골이 원래 몽골 땅인데다, 다가오는 동유럽에서의 전투를 준비해야 해서였다. 실제로 할힌골 전투가 끝난 다음날인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에는 소련 역시 폴란드를 공격했다.[5] 감투(敢鬪)란 우리말에도, 일본어에도 있는 한잣말로 '과감하게 싸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감투정신이란 감투(승진)를 얻기 위해 싸우는 정신이란 뜻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전투에 임하는 정신이란 뜻이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투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별 쓰잘데기 없는 것에다 투혼 운운했으니 문제. [6] 물론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는 제외다. 이 사람은 쇼와 덴노의 바로 밑 동생이라(...) 그야말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찌질이.[7] 어처구니없게도 할힌골 전투의 패배 원인을 조사한 보고서에서 패배 원인 분석을 통해 나온 결론 중에 '참모의 독단적인 오만함을 버리라'라는 충고가 있었는데, 누가 봐도 츠지를 디스한 것이지만 보고서를 올린 참모는 좌천되고 츠지는 승진했다. 이딴 식이니 삼간사우삼대오물만 남지(...).[8] 정략에 매몰되지도 않고, 젊은 사람의 패기에 현실감각을 잃지도 않는 나이대를 찾다보니 30대 인물들이 뽑혔다.[9] 1910-1940. 메이지 덴노의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의 아들로 태어나 화족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와 결혼하였다. 1940년 몽골 장자커우에서 육군포병대위로 복무하다가 전투기 날개에 다리가 잘리는 사고로 사망하였다. 1959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10] 나가히사-사치코 부부는 1남 1녀를 보았다. 아들 미치히사(道久)가 아버지의 왕 칭호를 계승했으나, 패전 이후 칭호를 박탈당하였다. 딸 하츠코(肇子)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로 물망에 올랐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한 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11] 이런 식으로 요식행위를 했던 건이 또 있다.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행한 워게임에서도 지는 결과가 나오자 어거지로 결과를 번복하고 '안 맞았다 치고', '이긴다 치고' 작전을 밀어부쳤는데, 알다시피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는 망했어요. 역시 일본 해군은 강해 참고.[12] 물론 이 장군은 '''"과연 남자로다!"'''라고 극찬했다.[13] 나중에 기무라 헤이타로의 비밀명령으로 밝혀졌다.[14] 병사들이 휴식시간에 스포츠를 즐기며 쉬는 건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고작 테니스 좀 쳤다고 미군의 군기가 빠졌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이 놈이 휘하 병사들을 어떻게 다뤘을지는 (...) 그리고 무엇보다도 츠치가 올린 '미군은 테니스나 친다.'는 보고가 사실이기나 한지부터 의문이다.[15] 일본에서는 현지 소수민족의 발음을 음차한 라모(拉孟)로 부른다.[16] 참고로 미즈카미 겐조 소장에 대한 평가가 특이하게 버마에서 포로로 잡힌 종군위안부들의 심문 기록에도 나온다. 다른 장교들과 달리 책임감이 강하고 선하며 휘하의 부하들을 배려하는 훌륭한 군인이며 그리고 '1번도' 위안소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17] 미국이 3차대전에서 반드시 진다는 뜻.[18] GHQ가 구 일본 정치인이나 전쟁 협력 사업가, 우익세력 등이 공직에 몸담지 못하게 하려고 입안한 것.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으로 일본 사회를 도로 우경화할 필요를 느끼자 GHQ는 추방령을 철회하고 거꾸로 좌파 민주 인사를 탄압하는 '레드 퍼지' 정책을 폈고, '추방령'에서 '레드 퍼지'로 급선회했음을 '역코스'라고 한다.[19] 정확히 말하면 실종 선고. 보통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하면 시신을 못 찾아 사망 신고가 불가능한데, 이때는 어쩔 수 없이 실종 선고를 해서 사망했다고 일단 간주한다. 참고로 한국에선 실종신고 후 5년 동안 생사확인이 되지 않으면 법원에서 사망으로 처리한다.[20]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의 행동대장.[21] 여기 나오는 병사들의 대사는 '''"케엑! 귀신(오니) 츠지!"''' 사실상 츠지의 존재 자체가 병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