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슈사이

 


일본의 유명 바둑 가문인 혼인보 가문의 마지막 당주이자, 일본 전통바둑 최후의 명인.
정식 표기는 '''제21세 혼인보 슈사이'''(第二十一世本因坊秀哉).[1] 본명은 다무라 호쥬(田村保壽).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가려 했으나 선교사의 죽음으로 실패하고 어느 사찰에 들어가 바둑 공부를 하며 주지스님의 바둑 상대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다. 이후 일본 망명 중인 김옥균과 알게 되었고 김옥균이 19세 혼인보 슈에이와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슈에이에게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슈에이는 다무라를 탐탁지 않아했지만 그와 테스트 대국을 두어보고는 문하로 받아들임과 함께 단번에 四단 면장을 수여했다. 이후 김옥균이 오가사와라 제도에 유배당했을 때 그는 당시 배로 몇 주가 걸리는 거리를 직접 찾아가 함께 바둑을 두기도 했을 만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1908년 혼인보 가문의 당주가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급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당주 자리를 놓고 문하의 양대 실력자인 다무라와 가리가네 준이치(雁金準一)가 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다무라는 여기서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혼인보 가문의 21세 당주가 될 수 있었다. 이후 혼인보 가문의 전통에 따라 슈사이(秀哉)로 불리게 되었다.
1914년에는 명인 칭호를 얻었는데 이 무렵 전통바둑의 최고 권위인 고도코로(碁所)가 일본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1924년에는 재벌 오쿠라의 주도로 일본기원이 창설되며 현대바둑의 시대가 열렸는데 슈사이는 이를 지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일본기원이 창설되자 슈사이의 라이벌인 가리가네가 이에 대항하여 다른 단체를 만들고 슈사이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둘의 대결은 20일 동안 계속되었고 요미우리 신문에 기보가 연재될 정도로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2] 결과는 슈사이의 불계승으로 끝났다.
1933년에는 요미우리 신문 주최로 일본 바둑 선수권 우승자 우칭위안[3]과 환갑 기념 대국을 펼쳤는데,[4] 여기서 우칭위안이 3의 3에 첫 착점을 하고, 이어서 화점, 천원으로 이어지는 포석을 시도하자 격노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첫 착점은 무조건 소목(3의 4)에 하는 게 관례였데, 우칭위안의 착점은 전통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5] 그러나 이 대국은 슈사이의 2집 승리로 끝났다.
다만 이 기념 대국이 벌어질 당시에는 중간에 대국을 쉬고 다시 재개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오직 선배 기사에게만 있었다. 따라서 슈사이는 자신이 원할 때마다 봉수를 할 수 있었고, 3개월 동안 총 13번 봉수를 했다. 게다가 1948년에 우칭위안의 스승이자 당시 일본기원 이사장이었던 세고에 겐사쿠가 슈사이와 우칭위안의 1933년 기념 대국에 대해 "당시 슈사이는 그의 제자인 마에다 노부아키가 발견해낸 묘수 덕분에 이겼다."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6] 발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대국 기간에 슈사이의 제자들이 공동연구를 하던 도중 마에다 노부아키가 묘수를 발견해냈는데, 슈사이는 이 묘수를 통해 위기를 타개해 내고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서 이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마에다 노부아키는 "우리들이 공동연구를 할 때 스승님이 종종 예고 없이 들어와서 문간에 서서 지켜보곤 했지만 자신이 직접 스승님에게 묘수에 대해서 조언을 한 적은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말년에는 기존 방식의 세습을 포기하고 '가장 강한 프로기사에게 혼인보 명칭을 수여하자'고 천명했고, 마이니치신문에서 현대 종합기전을 만든다고하자 가문의 이름을 쓰도록 허락해 '''혼인보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1938년에는 기타니 미노루와 은퇴 대국을 했는데, 제한 시간은 각자 40시간이었고 반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대국은 슈사이의 5집 패배로 끝났다. 당시 이 대국의 관전기자로서 관전기를 신문에 기고하였던 가와바타 야스나리[7] 이 대국을 모티브로 명인(名人)이라는 소설을 써냈다.

[1] 한글 표기로는 '슈샤이'라고도 한다.[2] 이 기보 연재가 신문 바둑의 효시라고도 한다.[3] 세고에 겐사쿠의 제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조훈현 사범과는 사형제 지간이기도 하다.[4] 우칭위안이 흑을 쥔 정선(定先) 대국이었으며, 제한 시간은 각자 24시간이었다. 참고로 이 대국 당시 슈사이는 59세, 우칭위안은 20세였다.[5] 그리고 우칭위안과 기타니 미노루가 제시한 이 신포석을 계기로 일본 바둑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소위 '''신포석 혁명'''이었다.[6] 사실 그 이전부터 유사한 내용의 소문이 꾸준히 돌았다고 한다.[7] 바둑광으로 유명하며, 일본의 여러 프로 기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특히 조훈현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와 친분이 깊었기 때문에, 일본 바둑 유학 시절에 가와바타를 실제로 만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