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1. 개요
2. 세습 바둑가문 혼인보
2.1. 역대 세습 혼인보
3. 프로바둑대회 혼인보
3.1. 영세 칭호


1. 개요


'''本因坊'''
일본바둑가문. 현대에는 일본의 프로바둑대회로 변모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일본어 발음으로는 '혼인보' / 한자 독음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본인방'인데 한국에서는 둘 다 혼용해서 사용하는 편이다.

2. 세습 바둑가문 혼인보


전근대 일본의 4대 바둑가문 중 하나. 시조는 센고쿠 시대 말의 스님이자 바둑 명인이었던 닛카이(日海)인데, '혼인보'는 그가 수행하던 잣코지(寂光寺)라는 절의 암자(庵子) 이름이다. 바둑팬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그의 명성을 듣고 초빙하여 5점 접바둑을 두는데도 이기지 못하자 그를 '명인'으로 인정한 것이 명인이라는 호칭의 시초라고도 한다.[1] 그는 노부나가의 죽음과도 간접적 연관이 있다고 한다. 혼노지(本能寺)에 머물던 노부나가가 닛카이와 다른 바둑 고수[2]를 초청하여 바둑을 두게 했는데 그 바둑에서 '3'라는 진기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관전하던 노부나가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고, 이들이 혼노지를 떠난 그날 밤 아케치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켜 노부나가는 자살하고 말았다.[3]
[image]
혼인보 산사의 영정.
노부나가의 사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바둑 스승을 한 닛카이는, 1603년 막부가 있는 에도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혼인보 가문을 개창하고 '''혼인보 산사'''(本因坊 算砂(ほんいんぼう さんさ)가 되었다. 다만 스님이었던 산사는 종파의 계율에 따라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 중 특히 뛰어난 사람을 양자로 삼는 식으로 가문을 이어나갔고 이는 이후 혼인보 가문의 전통이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바둑계의 최고수 닛카이에게 녹봉을 지급했다. 이는 후에 공식적인 관직 '고도코로'의 시작이다. 최초의 명인인 산사는 1623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인으로 인정받은, 혹은 임명받거나 쟁취한 기사는 막부에서 내린 관직인 기소(碁所,고도코로)에 취임할 수 있었다. 고도코로는 많은 녹봉을 받았으며, 기사의 단위(段位) 결정, 면장 발급, 중요 대국의 기획, 바둑계의 크고 작은 일 결정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고도코로에 임명되기 위해 혼인보, 이노우에(井上), 야스이(安井), 하야시(林) 네 가문이 300여 년간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이 그대로 일본 바둑의 역사가 되었다.
초대 혼인보인 산사가 세운 전통은 가문의 마지막까지 계속 이어져서, 가문의 당주는 혈연이 아닌 가장 뛰어난 실력자에게 계승되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은 아토메(跡目)로 불렸는데, 아토메로 지명된 사람 중 일찍 죽는 등의 이유로 실제 혼인보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1862년 후계자로 정해졌던 슈사쿠가 콜레라로 사망하고, 곧이어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의 지원이 끊어지자, 가문 자체가 궁핍해져 후계자를 찾기 어려워졌다. 14세 혼인보 슈와가 1873년 죽자 장남 슈에츠가 15세로 가문을 이어 처음으로 혈연으로 혼인보가 이어졌지만, 가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상을 일으켜, 슈와의 3남 슈겐이 16세로 가문을 이었으나 이도 그릇이 아니라, 다른 가문의 양자로 갔던 차남 슈에이가 17세 혼인보가 된다. 이후 1886년 잠시 무라세 슈호가 18세 혼인보가 되지만[4] 죽자 다시 슈에이가 이를 이었고, 1907년 죽자 슈겐이 다시 잇는 등 혼란이 쭈욱 이어졌다.
마지막 당주는 21세 혼인보 슈사이(秀哉, 1874-1940)이다.[5] 그는 1914년 명인의 칭호를 얻었는데 정부가 고도코로를 폐지했고, 1924년에는 재벌 오쿠라 기시지로의 주도로 일본기원이 설립되며 현대적 프로바둑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이를 지지하고 뒤에서 지원했다. 그는 현대 프로바둑이 성립된 후, '혼인보'라는 이름을 당대 최고수에게 주어야 한다고 천명하며[6] 혼인보를 바둑가문에서 일본기원이 개최하는 바둑대회로 개편하도록 했다. 이로써 혼인보 가문은 그 역사를 끝마치고, '''혼인보센'''(本因坊戰, 본인방전)이라는 최초의 현대기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7]
전국시대를 다룬 태합입지전5에 혼인보 산사가 등장한다. 다른 능력치는 바닥인데 바둑 명인인 것을 반영한 듯한 지모80과 군학3, 산술4, 예법3의 능력치가 인상적. 변설도 1이라도 있기 때문에 산술4와 맞물려 군자금 셔틀로 유용하다. 군학이 3이지만 통솔이 또 16으로 바닥이기 때문에 전장에 내보내는 건 조금 무리가 따른다.
일본 만화 히카루의 바둑의 등장인물 후지와라노 사이가 혼인보와 관련이 매우 많다는 설정이라 서브컬처 팬들에겐 제법 익숙한 단어다. 어느 소년의 소년의 몸에 깃들어 대리바둑을 두면서 14세 혼인보 슈와의 제자로 들어가게 만들어 에도 시대 바둑계를 말 그대로 평정했는데, 이 소년이 바로 위에도 언급된 전설적인 기사 슈사쿠(秀策) / 어린 시절 이름 토라지로(虎次郎)라는 설정. 작중에선 슈사쿠를 전설적인 천재 기사로 자주 언급하며, 혼인보전 타이틀 보유자인 원로기사 구와바라는 토라지로의 성씨인 구와바라를 그대로 반영한 오마주이다.

2.1. 역대 세습 혼인보



기사
단위
명인
기소
1세
혼인보 산사(本因坊算砂)
1대 명인
2세
혼인보 산에츠(本因坊算悦)
七단
3세
혼인보 도에츠(本因坊道悦)
八단
4세
혼인보 도사쿠(本因坊道策)
4대 명인
2대 기소
5세
혼인보 도치(本因坊道知)
6대 명인
4대 기소
6세
혼인보 치하쿠(本因坊知伯)
六단
7세
혼인보 슈하쿠(本因坊秀伯)
六단
8세
혼인보 하쿠겐(本因坊伯元)
六단
9세
혼인보 사츠겐(本因坊察元)
7대 명인
5대 기소
10세
혼인보 레츠겐(本因坊烈元)
八단
11세
혼인보 겐조(本因坊元丈)
八단
12세
혼인보 조와(本因坊丈和)
8대 명인
6대 기소
13세
혼인보 조사쿠(本因坊丈策)
七단
14세
혼인보 슈와(本因坊秀和)
八단
15세
혼인보 슈에츠(本因坊秀悦)
六단
16세
혼인보 슈겐(本因坊秀元)
六단
17세
혼인보 슈에이(本因坊秀栄)
9대 명인[8]
18세
혼인보 슈호(本因坊秀甫)
八단
19세
혼인보 슈에이(本因坊秀栄)
20세
혼인보 슈겐(本因坊秀元)
21세
혼인보 슈사이(本因坊秀哉)
10대 명인
  • 명인의 단위는 모두 九단.
  • 19세 슈에이, 20세 슈겐은 재임.
  • 2대 명인은 나카무라 도세키(中村道碩), 3대 명인이자 초대 기소는 야스이(安井)가(家) 2세 야스이 산치(安井算知) 그리고 5대 명인이자 3대 기소는 이노우에(井上)가(家) 4세 이노우에 도세츠 인세키(井上道節因碩).

3. 프로바둑대회 혼인보



3.1. 영세 칭호


  • 혼인보전을 5연패 이상 또는 통산 10회 이상 획득한 기사에게는 세습 가문 시절과 비슷하게 00세 혼인보 XX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있다.

칭호
본명
연승경력
기타
22세
슈가쿠(秀格)
다카가와 가쿠
1952~1960(9연패)

23세
에이쥬(栄寿)
사카타 에이오
1961~1967(7연패)

24세
슈호(秀芳)
이시다 요시오
1971~1975(5연패)

25세
치쿤(治勲)
조치훈
1989~1998(10연패)
예외적으로 본명 사용, 81,82년 우승 포함 총 12회 우승[9]
26세
몬유(文裕)
이야마 유타
2012~2020(9연패, 진행 중)
文은 문수보살(文殊菩薩), 裕는 이름 유타(裕太)에서 따왔다.

[1] 노부나가보다 훨씬 어리다 - 1559년에 태어나서 1582년20대였다. 게다가 노부나가를 처음 만났을 때는 10대.[2] 이름은 카기오 리겐(鹿鹽利賢). 참고로 히카루의 바둑 외전인 '혼노지 불타오르다'에서 신도우 히카루가 맡았다.[3] 실제로 이 때의 기보라는 게 남아있긴 한데, 여기서는 3패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서 전설이 거짓인지 기보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연구가 계속되면서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기보가 위작이라는 설이 우세하다.[4] 그가 혼인보가 되는 과정은 너무 길어서 항목이 따로 필요하다.[5] 그가 혼인보 가문에 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슈에이와 절친했던 김옥균이다. 슈에이는 김옥균이 오가사와라 제도에 유배되었을 때 배를 타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6] 그 이유는 앞 대목에서 논한 혼란상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7] 이후 1960년대에 '명인전'이라는 이름의 기전도 생겨났다. 명인전 참조.[8] 죽기 1년 전인 1906년에 명인으로 추대됐는데, 당시에는 일본 정부가 고도코로를 폐지한데다, 달리 명인으로 추대해줄 단체도 없었기 때문에 바둑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추대한 것이다.[9] 조치훈 외에 본인방전을 우승한 한국계 기사로는 1999년 '''조치훈을 꺾고 우승한''' 조선진 九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