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colbgcolor=#94153e> '''김옥균
金玉均 | Kim Ok-kyun'''
[image][1]
'''출생'''
1851년 (철종 2년) 2월 23일
충청우도 공주부 공주군[2]
'''사망'''
1894년 (고종 31년) 3월 28일 (향년 43세)
장쑤 성 상하이
'''국적'''
조선
'''신장'''
155cm[3]
'''본관'''
안동 김씨 (安東)
'''별칭'''
자(字) 백온(伯溫), 호(號) 고균(古筠)
별호 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4]
'''종교'''
유교(성리학)
불교
'''저서'''
기화근사 (箕和近事)
치도약론 (治道略論)
갑신일록 (甲申日錄: 手記)[5]
'''직업'''
문신, 정치가, 서예가, 시인
'''직책'''
1872년 문과 알성시(謁聖試)[6]
1874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1882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1883년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7]
1883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1883년 호조 참판(戶曹參判)
판서(判書)서리(署理)[8]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역적으로 지정[9]
1. 소개
2. 일생
3. 평가 및 형상화
4. 기타
4.1. 친손자 해프닝
5.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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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되어야 한다."'''

김옥균, 서재필의 회고 중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김옥균의 묘비명[10]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출생.[11] 서구 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개화파가 되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이에 국외로 도피했지만 홍종우에 의해 피살되었다.

2. 일생


'''1894년 3월'''
안동 김씨 김병기[12]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포부가 대단했던지 을 보고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개인의 영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과 알성시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개화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 승려 이동인[13] 등을 만나 개화 사상을 배우게 되고 고종의 매제 박영효, 서재필과도 친구가 된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17만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프랑스식 개혁을 주장했다. 일본으로 직접 건너간 김옥균은 청불전쟁으로의 동향을 미리 살펴보는 일본 정부한테 300만원의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 했지만 차관 교섭 자체에 실패했다. 차관 교섭 실패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급진 개화파는 동력을 상실하고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불을 내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와중에 수구파로 전향한 옛 동지 민영익도 다쳐 정동 미국 공사관으로 후송된다. 김옥균은 스스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라 개혁을 공표한다.
하지만 조선 국경에 원세개청나라군 1,500여 명이 들이닥친다. 이를 막아야 할 일본군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지원 약속을 어겼다. 급히 몸을 피한 개화파들은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에 올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김옥균은 개명망명 생활을 한다. 이때 정변에 적극 가담한 김옥균의 형제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14] 양아버지 김병기도 연좌제로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고 사약을 받을 뻔했지만 김옥균을 파양해 연을 끊는 형식으로 유배형과 사약은 면했으나 감옥에 수감되어 옥사한다.[15] 안동 김씨 문중은 균 자 항렬을 전부 규 자로 바꿔야 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일본인으로 지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김옥균을 가만두지 않고 죽이려 했고 일본에 2번이나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인 지운영을 몰래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지운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된다.
청일 양국은 김옥균의 신병 문제로 계속 부딪혔으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신변 보호를 이유로 오가사와라 섬, 홋카이도 옆 낙도 등에 보냈다가 풀어준다.
그런데 와신상담의 한을 감추려고 멍청한 척을 하는 옛 위인들의 고사를 따른건지 아니면 마음이 허해서 그랬는지, 이 시기부터 난잡한 여성 관계와 유흥을 시작한다. 망명 직후 기거하며 신세를 지던 '야마구치 신타로' 집의 모친과 관계를 맺어 임신시켰고 온천과 여관을 오가며 홍등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오타루에서 사귄 일본 기생을 데려다 동거에 들어가 살림을 차린 뒤에 한량처럼 먹고 놀았다. 이때 동지이자 절친한 후배 박영효가 김옥균을 보고 사람이 변했다며 저런 인간을 믿었던 내가 멍청했다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찬란한 여명에서의 묘사
1894년 당시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이홍장의 양자)의 설득에 넘어가 윤치호 등을 대동하고 청나라로 건너갔다.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해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이홍장에게 설파하자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회동 약속 하루 전인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낮잠을 자던 김옥균은 수구당 민영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김옥균은 프랑스 유학파이며 갑신정변 때 죽은 동지 홍영식의 친척인 홍종우를 의심하지 않고 곁에 두었었다. 암살 당시 김옥균은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으며[16] 홍종우가 꺼내 쏜 권총에 3발을 맞고 절명했다고 보고됐다.[17]
홍종우는 암살 직후 도주하다가 출동한 청국 경찰에 일단 체포되지만 조선과 청 정부 간에 협의로[18] 방부제 대용의 페인트를 덕지덕지 칠한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국내 송환되었고 조정에서 포상과 함께 공직에 등용된다. 김옥균의 시신은 송환 직후 양화진 백사장에서 거열되어 찢겨진 후 목만 따로 효수돼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써갈겨진 천이 붙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전근대적이고 잔혹한 처리에 대해 조선 국내에서 상식 있는 사람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컸으며[19] 일본 내의 여론도 들끓어[20] 조선은 희망이 없고 우리가 개화시켜야 할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여론몰이에 이용됐다.김옥균의 목이 매달려있는 사진이므로 혐짤주의[* 이 사진은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김옥균 사망 직후의 해설 장면에서 쓰였다.]
나중에 김옥균의 머리는 어느 일본인이 수습해 도쿄의 한 묻었다. 하쿠산역 인근에 위치한 절 뒤뜰에는 높이 3m 이상의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상단이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 얇고 높은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무덤은 양자[21]가 머리에서 머리카락만 가지고 와서 따로 묻은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복권되나 아관파천 후 다시 취소됐고 1910년 6월 경술국치로 인해 순종황제가 망국 후 이왕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다시 복권돼 정1품 대방보국 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달(忠達).

3. 평가 및 형상화


매우 영민하고 시세를 잘 파악하는 개혁적인 인물이었지만, '''일본을 과하게 믿었다는 점'''을 실패의 요인으로 평할 수 있다.[22]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나[23][24][25]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독립협회에서 친일적인 인사가 나온 점, 백성의 지지가 없는 그들만의 개혁 때문에 여러가지로 한계를 가진 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더군다나 한때 본인이 원수처럼 여겼던 청의 이홍장을 만나 복권을 꾀하자는 말에 낚인 것도 그를 평가 절하하는 요소로 꼽고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인사들 중 이상재, 남궁억처럼 독립운동가가 된 사례로 있는 만큼 일부 인사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고 독립 협회와 개화파를 무조건 친일파로 규정하는건 부당하다. 더구나 독립 협회와 대립한 황국 협회에서도 민영기 같은 친일파가 나왔다. 또한 김옥균 본인이 일본과 손잡긴 했어도 매국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고 청과 접촉한 것도 국익을 위해서 노력한 것으로 비춰질 여지도 있기에 마냥 평가절하할만한 요소는 아닌 면도 있다.
한편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처치하기가 곤란해지는 인물이라 언제 조선에 넘겨질지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김옥균이 청을 통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위험 가능성이 있으니 위험이 확실한 지대로 피신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발상일 따름이다.[26] 오히려 김옥균이 일본을 떠나 청과 교섭을 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김옥균에게 일본은 그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이용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언제든지 손잡을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는걸 잘 보여준다.
여하튼 넓은 의미의 친일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한국에서는 친일파 = 매국노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일본에게 이용당했지만 '''매국을 한게 아니라서'''[27] 친일파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흔히 같은 개혁 동지인 박영효와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우로 오인되지만, 사실은 정변 실패 이후 둘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졌고 김옥균이 일본 망명 생활 중 주색잡기로 소일하는 자세를 보는 박영효는 그를 무척 싫어했다. 훗날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적이다. 외교술뿐만 아니라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이 없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다."[28]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거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 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 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

그래도 옛 정은 남아 있었던 듯, 김옥균이 홍종우와 함께 청으로 건너갈 때 박영효가 홍종우는 위험하다면서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옥균은 박영효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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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의 개>의 김옥균. 밑의 그림의 안경 쓴 남자는 박영효.)
왠지 일본에서는 혁명가적인 인물로 높이 평가 받는 것 같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옥균을 일본에서 보호했던 자가 바로 일본 개화의 아버지이자 현재도 일본 역사상 손꼽히는 위인에 들어가는 '''후쿠자와 유키치'''이며, 김옥균의 조국을 위한 행동이 어찌 되었건 결과론적으로 그의 행동은 모두 일본에 득이 되었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나쁘게 서술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제국주의적 사상만 빼면 후쿠자와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기도 했고.
사실 김옥균과 관련한 문학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일본으로, 1890년대부터 김옥균과 관련한 창작이 활발하였다. 이는 김옥균이 일본에 처음으로 온 정치 망명객 제1호인 점과, 그의 상하이에서 맞이한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일본 제국의 팽창과 아시아주의와 관련한 일본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경향과 다른 특이한 작품을 꼽자면, 아키타 우자쿠가 발표한 희곡 <김옥균의 죽음(金玉均の死)>(1920년)이 있다. 이는 같은해 7월 김동환이 번역하여 『창조』지에 게재되었다. 여기서 김옥균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범부로 그려지고, 정치적인 허무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일본 신극 운동을 주도하던 오사나이 가오루의 희곡 <김옥균(金玉均)>(1926년)이 있다. 이는 김옥균의 <갑신일록>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며, 김옥균을 시대에 맞서는 개혁자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 정부와 근대화를 막는 전통과 관습을 비판했다.[29]
이와 달리, 한국의 경우에는 1928년 김진구[30]의 희곡 <대무대의 붕괴>[31]가 사실상 처음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작가의 성향상[32] 아시아주의에 동조하는, 친일적인 색채가 엿보인다. 이후 1930년대에는 주로 민족 수난사의 하나로 김옥균이 다루어졌으며, 대체적으로 비운의 인물로 그려진다.
이와 달리, 김기진은 <심야의 태양>(1934년, 이후 <청년 김옥균>으로 이름 변경)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KAPF 멤버였던 김기진은, 이 소설에서 김옥균을 실패한 혁명가로 묘사하며, 혁명은 민심을 읽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1940년대에는 주로 친일적인 작품 속에서 오족협화나 대동아공영권의 '선구자'로 자주 등장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박영효의 친일극 <김옥균의 죽음>(1944년).
한편, 야스히코 요시카즈왕도의 개에선 아예 김옥균을 존경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33],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이야기>에서도 등장. 이 만화에 등장하는 조선 측 인물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의 김옥균 무덤보다 일본의 김옥균 무덤이 더 정비가 잘 되어 있으며, [34] 김옥균 연구 모임이라는 일종의 팬클럽도 존재한다.[36] 일부에서는 김옥균을 조선의 사이고 다카모리로 보는 정도인데, 당연한 이치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강력하게 김옥균 미화 사업을 벌일 정도였다. 몰락한 김옥균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총독과 식사를 한다거나 김옥균 처의 수기가 연재되거나 했다.[37]
친일 문학 작품으로 망명하려는 김옥균이 조선 관헌에게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일본 선장이 나와서 총을 들이대면서 묄렌도르프 일당에게 호통쳐서 위기를 넘기는 단편도 있다.[38]
일본 웹등에서 김옥균 이름을 쳐보면 김옥균을 높이 쳐주는 포스팅이나 게시글 등도 종종 발견된다. 그런 곳에서 그에게 붙는 칭호는 혁명가,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 애매한 '풍운아' 라는 표현을 즐겨쓰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이런 고평가는 그가 '''일본을 모범으로 삼고 일본식 개화를 통해''' 한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잘 나가는 일본을 따르려고 한 그를 혜안이 있는 자로서 칭송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후원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였으니... 여기서 한 발짝 더 잘못 나가면 '''식민 사관'''과도 접점이 있는 만큼 일본의 김옥균에 대한 높은 평가는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강점기 시절, 일본이 김옥균을 영웅시한 사례를 참고하자. 그렇다고 일본이 띄워줬다는 이유로 평가 절하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해야 하니...
일본은 김옥균의 죽음을 반청 감정의 고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김옥균은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관계없이) 거의 일본인이었고 사건이 일어난 호텔이 일본인 소유였다는 점을 들어 김옥균 암살 사건을 일본 주권의 침해로 받아들였고, 김옥균 시신 처리를 통해 조선과 청을 상종할 수 없는 야만적인 국가라고 선전하였다. 이렇게 고조된 반청 감정은 후일 청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걸 보고 위에 서술된 왕도의 개에서는 정작 김옥균이 도움을 구할 때는 아무도 없다가 그가 죽자 일본이 태도를 정 반대로 바꿔 죽음을 이용하고 배신하였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제도에 오랫동안 귀양 보내는 등 푸대접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호들갑떤 게 맞긴 하다.
조선의 근대화 수레바퀴를 빠르게 앞으로 당겨놓길 원했던 그의 뜻과는 달리, 갑신정변 시점에 잠시 존재했던 개혁의 흐름은 실패와 동시에 오히려 몇 보 후퇴하고 말았다. 갑신정변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고종과,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에게 당한 수구파, 온건 개화파가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더욱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에서 박은숙 씨가 저술한 김옥균 평전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를 두고 김기협 씨와 박은숙 씨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김기협의 서평 박은숙의 반론 격렬한 김옥균까인 김기협도 문제지만 박은숙도 지나치게 김옥균을 고평가하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게다가 그녀는 김홍집을 지나치게 까면서 김옥균을 견줘 찬양하고 있다.
대체역사 웹툰인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 되어 고종의 오른팔로서 활약한다.

4. 기타


  • 바둑을 매우 좋아하고 잘 두었다고 하며, 그가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당시, 일본의 혼인보 슈에이가 김옥균과 함께 3개월 간 바둑을 두며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슈에이와 6점 접바둑을 두어 김옥균이 이긴 기보가 존재한다. 기보로 추정하는 김옥균의 기력은 바둑 아마추어 3단 ~ 4단 정도라고 한다.관련칼럼1관련 칼럼2
  • 도박 실력도 상당했던 것 같다. 과거보러 가던 중 하인이 투전으로 날린 돈을 그날 밤 노름꾼들에게 달려가 투전판을 휩쓸어 되찾아왔단 얘기도 있다.
  • 의외로 포경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1883년 고종으로부터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겸 '포경사(捕鯨使)'로 임명받아 울릉도 개척 겸 포경 산업 전반을 관할했기 때문이다. 다만 갑신정변으로 그게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포경과 관련된 이권은 열강들에게 넘어갔지만 말이다.
  • 김옥균은 조선에서 최초로 영어를 접하고 배웠던 몇 안 되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39]. 젊은 시절 윤치호에게도 영어를 열심히 배우라고 권했던 것도 김옥균이었다.
  • 일본에서 세계사 수업 시간에 김옥균의 이름이 나오면 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름이 金玉[40] 인데 일본어에서 긴타마(金玉)는 고환이므로(…).
  • 아무래도 한국 인터넷 등에서도 혁신적인 사고 방식을 지녔던 인물로 평가받은 탓인지, 현대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넷 유머인 한국에 태어났으면의 주인공(?)으로 등장, 천재들을 환생시켜 줘도 되려 그들을 망쳐놓는 한국의 현실에 절망하는 역할로 나오기도 한다(...).
  • 옛날 전제정치(專制政治) 아래서는 자칫 잘못하면 역적(逆賊)으로 몰리기도 일쑤였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族譜)에서 빼어 버리기도 했고 또 항렬자도 바꾸기도 했다. 저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동자들의 경우가 그랬다.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泳植)·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開化黨)의 혁명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41] 서광범(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

4.1. 친손자 해프닝


한때 자신을 '김옥균의 친손자'라고 사칭하는 남자가 나타난 적이 있다. 1934년 2월, 18세의 한 소년이 자살극을 벌이다가 종로경찰서로 오게 된다. 어눌한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김옥균의 손자, '김원세'라고 설명한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한국어를 배웠지만 어눌하다는 것. 할아버지가 김옥균이라는 사실을 듣고 조선 땅에 오게 되었는데, 돈이 떨어져서 상하이 조계촌의 조선인과 상하이 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김옥균의 친척들이 직접 와서 확인하였으며, 김옥균과 관련하여 상당히 자세하고 정확한 내용을 진술해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로마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이 악기점을 하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로써 전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이에 종로경찰서는 이탈리아와 상하이에 신원 조회를 요청했고, 그러자 그의 행방이 갑자기 묘연해진다.
그리곤 며칠 뒤 또 자살 소동을 벌이는 소년이 발견된다. 이 소년은 자신을 상하이 출신의 '이영태'라고 소개하며, 고국이 그리워 누이와 함께 조선으로 오던 중 만주에서 마적들에게 가족을 잃고 흘러흘러 조선에 왔다고 진술한다. 신원 조회 과정에서 이 소년이 앞서 '김원세'라고 자칭한 인물과 동일인임을 확인되고, 그의 거짓말이 들통난다. 사실은 강원도 암자의 중으로 산사 생활이 지겨워서 이와 같은 행동을 저질렀다고.

5. 참고 항목




[1] 위 사진은 1882년 3차 수신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김옥균이 일본 스즈키 사진관에서 촬영한 모습이다.[2] 일설에 의하면 외가가 있는 회덕군(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에서 태어났다고 주장되나 이를 뒷받침할 다른 근거는 없다.[3] 출처 상하이에서 김옥균의 사체를 검사한 보고서에서 김옥균의 키는 155cm라고 적었다.[4] 족보에 왜 이렇게 시호를 정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집안보다 나라를 먼저 걱정하였기에 '충'이라 하였고, 이치에 밝았기 때문에 '달'이라고 시호를 내렸다."[5] "일본식 한문체" 등이 섞여있어 위작이라는 주장이 있음[6] 장원급제[7]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 삼림 및 광산 개발을 위해 신설한 관직[8] 장관 대리[9] 고종 21년 10월 21일 승정원의 상소 및 사간원, 사헌부의 상소 등 고종 24년 까지 김옥균에 대한 처벌 상소가 올라왔다.[10] 박영효 혹은 유길준이 썼다고 한다.[11] 유해가 묻힌 무덤은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에 있다.[12] 안동 김씨의 세도가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金炳'冀')와는 다른 인물이다. 김옥균의 양부는 김병기(金炳'基')로 김좌근의 조카에 해당한다.[13] 개화 승려로 유명하지만 임종국의 저서 '실록 친일파'에 의하면 원래는 정식 승려도 아니었고 일본 불교와 접하면서 승려가 된 인물로 현재에는 일본 밀정으로 취급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창씨개명 제1호'로 일본식 이름은 아사노 도진.[14] 아버지 김병태(金炳台)와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음독 자살했다. 그나마 아내 정경부인 기계 유씨 유치상(兪致庠)의 딸과 김옥균의 딸은 살아남았으나 관노가 되고 만다.[15] 김병기의 경우 허직이 이번 일과는 무관하니 사면해달라고 상소를 올렸음에도 고종은 거부했고 결국 수감된지 7년만에 감옥에서 옥사한다.[16] 실제로는 자고 있었다.[17]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 [image][18] 조선에서 청국에 엄청난 뇌물을 썼다.[19] 왜냐면 당시 조선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반역죄 소급 적용에 대해 영조 대부터 문제가 제기되었고 정조 때 성문화되어 폐지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옥균의 사지를 찢고 목을 효수한 것은 근대적 법 체계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의 실정법상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하지만 김옥균에게 맺힌 게 많았던 조선 조정의 보수파 관료, 민씨 척족들이 대명률에 역도는 능지처사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식자층의 반발은 당연했다.[20] 김옥균을 홀대하고 추방하자고 말한 일본인들조차 지나쳤다고 비난했다.[21] 일본인 여자 사이에서 낳은 친자라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22] 그의 일생 단락만 봐도 '''박영효를 너무 믿었다, 홍종우를 너무 믿었다''' 하는 게 나오는 걸 보면 영민한 것과는 별개로 호구 기질이 있었던 모양(...).[23] 일본의 지원이 떨어지자 청나라의 반격으로 실패한다. 게다가 그가 일본에 있을 당시 그의 후견인 중 하나가 자그마치 정한론의 거물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극우파의 원조인 도야마 미쓰루(정한론의 배후. 흔히 한자를 그대로 읽은 '''두산 만'''으로 흔히 알려졌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도야마에게 발탁된 조선인 중 하나가 야인시대에 나오는 하야시(선우영빈)이다.[24] 김옥균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한 것 때문에 일각에서는 갑신정변이 일본의 공작이었고 김옥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물론 설득력없는 주장이긴 하지만, 일본의 지원이 없어지면서 금방 몰락해버린 김옥균의 행보 때문에 그런 주장이 나올만도 하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한성 조약과 톈진 조약을 통해 조선이 이래저래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은 사실이므로 판단은 각자가 할 몫이다.[25]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극우적 태도가 갑신정변의 실패를 계기로 나타났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적어도 후쿠자와의 탈아론이나 정한론의 경우 갑신정변이 실패 후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더라도, 김옥균이 생전이나 갑신정변 당시에 후쿠자와의 그런 태도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머물던 김옥균이 후쿠자와와의 대화 후 '저 분이 저렇게 변하다니.' 하고 그의 변화를 한탄하는 연출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26] 김옥균이 일신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일단 미국처럼 조선 정부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망명을 떠났을 것이다. 서광범이 그러했듯 말이다.[27] 김옥균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실패했다는 게 문제지만, 온건 개화를 지향하려는 명성황후 민씨의 일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28] 사실 박영효가 이런 말 한게 김옥균과는 달리 본인은 조선으로의 복귀를 위한 노력을 했다. 개화 상소를 올린다든가 일본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어떻게 보면 합법적으로 복귀해서 개화 정책을 펴나갈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결과 김옥균이 죽은 해 8월 본인은 조선으로 돌아와 사면되었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다.[29] 정확하게는 김옥균과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와서 당대 일본 정부와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30] 1896년생의 극작가, 야담가. 1930년대부터 노골적인 친일성향을 보였으며 이 때문에 흑역사로 낙인찍혀 해방후 철저히 잊혀진 탓에, 언제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31] 대무대는 김옥균이 구상한 미래로, 아시아주의에 맞닿아 있다.[32]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 우익 인사들과 친교를 쌓았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을 반죽하여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3] 혁명 실패와 몰락의 과정에서 주인공의 처지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김옥균 본인도 나름 비중있는 인물로 나오며, 조선의 혁명가로 일부 고관들은 이제 한물 간 인물로 보고 있지만, 민중들에게는 인기가 있으며 사람은 괜찮은 인물로 묘사된다. 글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일본 기생집에서 이름을 대면 공짜로 해주려 하는 묘사가 있으며, 카츠 카이슈는 "인물은 인물이지만, 솔직해서 일을 그르칠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박영효고종황제가 좀 없어보이게 나오고, 명성황후가 대놓고 흑막처럼 나온 것과는 대조적. 여담이지만 해당작에서는 지나가는 언급으로 흥선대원군 역시 뛰어나다고 언급된다.[34] 도쿄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그런데 묘소 관리비를 몇 년 째 아무도 내질 않아서(…) 철거될 뻔했는데, 이걸 알게 된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황급히 체납분을 내서 철거되는 일을 막았다고 한다.[35] 관동대지진 진상 규명 등의 활동을 펼쳤다.[36] 재일 한국인 교수인 금병동[35]에 의하면,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부터 일본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인들 반응으로 김옥균이라는 인물은 '매우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물'로 그렸다고...[37] 춘사 나운규도 김옥균 전기 영화를 만들었는데 어른의 사정으로 삭제가 많았다.[38] 민족 문제 연구소가 꼽은 친일 작품이기는 하지만 한국 위키나 이곳저곳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츠치 선장이 김옥균의 망명을 도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쪽을 보면 그냥 내려주면 죽는데 인도적인 측면에서 숨기고 거짓말을 한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는 그가 망명 후 저술한 <갑신일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제로 인도적인 차원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이 일화는 위의 왕도의 개에서는 김옥균이 일본인을 믿지 못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데 쓰인다. 한국인은 친일 문학으로, 일본인은 당시의 일본을 비판하는데 쓴 소재라는 걸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39] 일본에서 알파벳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40] 참고로 일본에서 20세기 이전의 한국사 관련 인물들의 인명은 한자로 표기하고, 이후에 출생한 인물들은 가타카나로 쓴다.(예: キム・ヨナ) 한국에서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중국인의 인명을 한국식 독음과 중국식 원음의 표기로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41] 갑신정변에 가담한 박영효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영(泳)자가 승(勝)자로 바뀌었다는 일부 근거없는 풍문이 나도는데, 반남박씨 족보 乙酉譜(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다. 즉,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근 60년 전에 이미 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미(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