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康成'''
[image]'''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어: 川端 康成, かわばた やすなり)
'''국적'''
일본 [image]
'''출생'''
1899년 6월 14일, 일본 제국 오사카부 오사카시 텐진바시
'''사망'''
1972년 4월 16일 (향년 72년 308일), 일본 가나가와현 즈시시
'''직업'''
소설가
'''학력'''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
1. 개요
2. 생애
3. 작가로서의 삶
5. 생의 마감
6. 기타
7. 작품


1. 개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설국 中-'''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아주 유명했으며, 설국 등의 유명한 작품들을 통해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 생애


가와바타는 1899년 오사카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2살과 4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고, 그 후 조부모에게 맡겨졌으나 7세 때 조모가 죽게 된다. 10세 때는 다른 친척에게 맡겨진 누이까지 죽고, 15세 때는 결국 조부까지 세상을 뜨게 되면서 외롭게 자랐다. 15세까지 친족 다섯 명이 죽어서 이로 인해 장례식의 명인(葬式の名人)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을 정도... 어릴 때 친구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생기면 온가족이 모인 분위기가 부러워서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었고, 병든 조부 뿐인 적막한 집에 돌아갈때면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소설가를 꿈꾸었고,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예 잡지 등에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이후 가와바타 작품의 주요한 정조를 이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재학 시절,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하던 15살 소녀 이토 하츠요와 결혼 약속을 하였으나, 돌연 이토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파혼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잠적하면서 그의 첫사랑은 실연으로 끝나게 된다.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토는 자신을 맡아 기르던 절의 주지에게 강간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파혼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토 하츠요는 가와바타의 '이즈의 무희'등을 비롯해 작품 속 여성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에 이 두 사람의 파혼 당시 주고받은 편지가 공개되기도 했다. #국내 기사
가와바타는 소설가 이외에도 신문기자, 아쿠타가와 상 선정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조국 일본은 전쟁을 벌였다가 졌고, 사회는 격변을 겪었으나, 가와바타의 작품은 폭설에 뒤덮인 산골 마을처럼 세상사와는 무관한 듯 보였다.
노벨상을 받고 일본 펜클럽 회장을 지냈으며 세계 각국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명망을 얻은 74세의 가와바타는 1972년 4월 16일 가스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자살 원인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하다. 가와바타가 자살하기 2년 전, 가와바타를 스승처럼 따르던 미시마 유키오[1]할복자살한 데 따른 충격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출처 : 경향신문

3. 작가로서의 삶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작가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로, 「케이한신보(京阪新報)」에 자신의 단가를 올리면서부터이다. 일본문학의 흐름에서 반자연주의 문학의 한 학파로 유명한 신사조파[2]에 들어가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라는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신사조의 동인으로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있다.
그 후 1930년대 성행하였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반대하며, 순문학 계통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문학사조 중 하나인 '신감각파'의 대표 작가로서 활동한다.[3] 참고로 신감각파는 그간 자연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등에서 보였던 사실성 중시보다는 문장 자체의 감각적 표현에 치중하였던 문학사조이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故園)」, 「석일(원제: 夕日)」 등의 작품으로 키쿠치 칸 상을 수상한다.
다시 미시마 유키오가 나오지만 가와바타의 추천으로 등단한 미시마는 평화헌법 반대, 천황제 회귀를 주장한 극우파였고, 가와바타는 겉으론 정치와 무관하게 보였다. 그러나 둘 다 일본 특유의 미의식에 집착한 완벽주의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TV드라마의 대본을 집필한적도 있는데 NHK 연속 TV 소설 1965년 작인 타마유리의 집필을 맡았다. 그러나 해당 작품은 '''테이프 전체가 다른 프로그램을 찍는데 재활용되어서'''(...)[4] 현재 영상으로 볼수있는것은 단 한편도 없으며 단지 남아있는 대본이나 신문기사, 사진자료를 통해 어떻게 방영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다.

4. 노벨문학상 수상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7년작 설국을 대표작으로 하여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설국은 가와바타 미의식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서, 12년을 창작에 힘써 온 결과물의 첫 문장은 매우 유명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5]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이 문장은 작가 본인이 니가타현에 머물면서 퇴고 끝에 쓴 문장이다. 지금도 각종 문장론에 관한 서적이나 다양한 패러디에도 사용되는 아주 유명한 문구이다. 노벨상 수상평에서는 설국을 두고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라 평가할 정도였다. 스웨덴 아카데미의 공개에 의하면, 이미 가와바타는 7년 전인 1961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서 결정되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번역의 힘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표작인 그의 설국은 당시 서양에서 유명한 일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거에 의해 영문으로 처음 번역이 되었다.[6] 설국이 널리 알려지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이 영문판 때문이다.''' 일본어로도 애매한 야스나리의 작품을 적절하게 서구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 번안한 셈. 의역을 중시하는 번역을 하다보니, 원문과는 다른 구성(하나로 된 구성을 2부작으로 바꿈.)이나 문체를 선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텍스트가 서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작가 자신의 필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영문판을 구해 읽어볼 것. 물론 이 과정 중에서 오역이 드러났지만, 원문의 향취를 서구적인 감각으로 번안한 데에는 사이덴스티거의 공이 크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의 전통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일본문학 특유의 감각적이고 현세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고 하였는데, 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소감을 발표할 때도 잘 드러났다. 일반적으로는 모두가 연미복을 입었겠지만, 그는 일본 정부가 수여한 훈장을 단 하카마를 입고 와서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내용은 일본인의 미적 감수성의 역사와 그에 대한 고전 시가들을 인용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와카라든지, 일본 최초의 선승(禪僧)으로 알려진 '도겐'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소설에도 선(禪)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같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일본의 특수성을 마치 자신의 것인 마냥 이용해 일본 대표 작가로 군림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오에가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유명하기에, 오에는 가와바타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를 했을 수 있다. 그래서 오에 켄자부로가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했을 때 강연의 제목은 바로 <애매한 나와 일본>이었다. 또한 가와바타와는 다르게 그의 강연 언어는 영어였다. 그의 정치적 스탠스에 걸맞게 강연 내용은 "일본이 아시아인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전쟁 중의 잔학행위를 책임져야 한다. 위험스럽고 기괴한 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평화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와바타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에는 압박감으로 인해 많은 작품을 쓰지는 못했다고 알려진다.
일본 내부의 평가에서, 가와바타는 20세기 제일의 일본인 작가 혹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최고 작가라고 단정하기 힘들다는 시각도 있다. 훌륭한 작가이지만 넘버원이라는 보편적 평가는 받지 못했다고 보기도 한다. 영어 번역이 매우 훌륭했고 일본 전통의 미의식이 담긴 주제 등이 당시 서양의 취향에 부합하는 등 여러 모로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생의 마감


알려진 대로 가스에 의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이에 대해 사고사라는 의견과 함께 의견이 분분하다.
자살설로는 1. 아끼던 제자 미시마 유키오자살, 2. 노벨문학상 수상 후 창작에 대한 압박감과 창작의욕 감소, 3. 좋아하던 가정부의 퇴직[7] 등이 있다. 일단 반박측에서는 1은 시대가 너무 떨어져 있으며, 2는 평론가들의 해석일 뿐 증명이 없으며, 3은 주관적이며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반박하였다.
반면 가와바타 일본 팬클럽 회장으로 있을 때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코지로(芹沢光治良)는, 추도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川端康成の死)」에서 자살은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의 증언에서 가와바타가 자살했음을 암시해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는 것이다.[8] 그리고 유서가 없었다는 점, 작가들이 흔히 복용하는 수면제를 항시 복용 중이었으며, 자주 조작하지 않는 스토브 사용의 미숙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그의 사인은 일종의 마인지 이상하게 그와 엮인 이들은 자살로 죽은 경우가 많다. 그가 수상하는 것을 계속 거부, 혹평하던 다자이 오사무도 자살,[9] 그의 제자인 미시마도 자살, 문학인은 아니지만 가와바타의 절친이자 일본 바둑계의 거성이며 조훈현의 스승인 세고에 켄사쿠 九단도 자살로 83년의 생을 마쳤다.
아마도, 아래 항목에 나와 있는 작품 잠자는 미녀의 집이 왜 가와바타가 자살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듯하다.

6. 기타


바둑광으로 유명했으며, 실제로 여러 프로기사들과 친분을 맺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바둑유학 중이던 조훈현도 생전의 가와바타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9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

7. 작품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10]
설국(雪国)
고도(古都)
천우학(千羽鶴)
산소리(山の音)
여자라는 것(女であること)
명인(名人)
이즈의 여로(伊豆の旅)
무희(舞姫)
잠자는 미녀의 집


[1] 미시마 유키오와의 인연은 미시마 유키오가 처음으로 작품을 냈을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심사위원으로서 그의 작품을 호평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미시마 유키오가 데뷔하게 되었으니,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이 자살할 때까지 평생 그를 스승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2] 투고하는 잡지가 신사조라서 신사조파라고 한다. 이지파(理知派)라고도 하며, 말 그대로 지식과 이성에 근거하여 작품을 쓰려고 했던 파이다. 다이쇼~쇼와 초기에는 동인잡지를 중심으로 한 창작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이다.[3] 또 다른 사람은 요코미츠 리이치이다.[4] 유럽권에서는 TV프로그램이 문화유산으로 일찌감치 간주되어서 일찍 보존된 편이지만, 일본이나 한국, 여타 제3세계 국가에서는 TV프로그램이 문화유산이라는 관념이 없었던데다가 '''비디오 테이프 가격이 비싸다보니''', 테이프를 한번만 쓰는것이 아까워서 비디오 테이프를 한번만 쓰지 않고 수십번에 걸쳐서 재활용하는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본 방송계에서는 1970년대 초반, 한국 방송계에서는 1980년대 초중반까지 이런 관념이 남아있기 때문에 당대 TV프로그램이 녹화된 자료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다.[5] 2018년 민음사판 번역.[6] 이 번역을 시작으로 사이덴스티거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비롯한 일본 문학 작품들을 다수 번역한다.[7] 이는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도 각색되었으나 유가족의 소송 후 절판으로 합의를 보았다.[8] 가와바타 자신도 그 해 가을에 개최된 국제 펜클럽 대회의 준비에서 책임자로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9]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가 죽은 건 야스나리가 노벨상 받기 훨씬 전인 1948년의 일이다.[10] JR 히가시니혼의 특급열차 오도리코가 이 소설에서 이름을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