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홍순의'''
'''洪順義'''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남양 홍씨
<color=#fff> '''출생'''
1890년 2월 2일
황해도 은율현 북상면 전가락동·후가락동[1][2]
(현 황해남도 은률군 낙천리)
<color=#fff> '''사망'''
1959년 9월 3일
강원도 홍천군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종교'''
천도교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순의는 1890년 2월 2일 황해도 은율현 북상면 전가락동·후가락동(현 황해남도 은률군 낙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1 운동 직전 천도교 황해도 교구 내에서 오영창(吳榮昌)·이경섭(李景燮)·방찬두(方燦斗)·한동익(韓東益) 등과 함께 천도교의 조직,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4월 5일 은율군에서 천도교구 천일기념식(天日記念式)을 이용, 수백명의 군중을 만세시위에 동원,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이후 1933년 9월 천도교 교주 박인호가 축왜독립(逐倭獨立)의 방법으로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비밀리에 시행·전개하자, 홍순의는 황해도내에 기도문을 작성·배부하여 교도들을 지도하였다. 또한 1937년 8월 최준모·한순회(韓順會)·김재계(金在桂)·김경함(金庚咸) 등과 더불어 중일전쟁 발발을 호기로 판단,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특별희사금이라는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여 비밀리 324원을 모금, 전달하였다.
한편, 같은해 12월 20일 특별기도 실시를 협의하고 일제관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기도문구를 위장하여 황해도내 교도에게 교시, 격려했다. 그러나 1938년 2월 17일 밀고에 의해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과 제령 제7호 위반으로 해주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일경이 중일전쟁 수행상 사건을 확대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덕분에 구속된 지 70일 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하다 1959년 9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홍순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은율군 북부면 가락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2] 인근의 간담리와 함께 남양 홍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