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우(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홍영우'''
'''洪泳佑'''

[image]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부림 홍씨[1]
'''출생'''
1890년 2월 5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
(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2]
'''사망'''
1959년 11월 23일 (향년 69세)
'''묘소'''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가호리 동림마을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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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홍연흠은 그의 7촌 조카, 즉 재종질(再從姪)이며, 홍창흠은 그의 9촌 조카, 즉 삼종질(三從姪)이다.

2. 생애


홍영우는 1890년 2월 5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서 아버지 남서헌(南棲軒) 홍기수(洪箕修)와 어머니 현풍 곽씨 곽종우(郭鍾瑀)의 딸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음력 7월경, 1924년이면 조선이 독립된다는 홍재훈(洪在燻)의 권유로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 8인조에 가입하여 치성비 50원을 납부하였으며, 보천교 충청·경상도책으로서 이기식(李基植) 외 여러 명에게 입교를 권유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었으며#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정치범처벌령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구류 200일 포함)을 언도받았다.# 홍영우는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3부에서 다만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징역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다.#
그는 재차 상고하였으나 11월 30일 상고를 취하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2일에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9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대율파-종(宗)파 24세 우(佑) 항렬.[2] 인근의 남산리·동산리와 함께 부림 홍씨 집성촌이다. 홍창식 전 육군고등군사법원장과 독립유공자 홍목·홍연흠·홍창흠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