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석
車京石
1880년 ~ 1936년
차경석(車京石)은 '''보천교''' 교주로 종교인 겸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윤홍(輪洪)이며, 자(字)는 경석(京石)이다. 호는 차월곡(車月谷)이며 차천자(車天子)로도 알려져 있다. 월곡은 스승인 증산 강일순이 지어주었다.
차월곡은 전북 고창군(高敞郡) 부안면 호암리에서 아버지 차치구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 1888년 20세에 차경석은 고창을 떠나 부친의 고향인 정읍 대흥리로 이주하였다.
차경석은 동학의 접주였던 아버지 차치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93년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는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기를 설득하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명분을 내세우는 조건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참여하기로 하였다. [3] 차경석도 아버지를 따라 동학 농민군에 들어가 전장을 누볐다. 차경석은 동학에 몸담고 있다가 처음으로 들고일어난 것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선 고부 봉기였다. 1894 2월,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가 전봉준을 비롯한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최경선(崔景善) 등 20인방(幇)과 함께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4] [5] 1894년 4월 하순, 차경석은 전봉준이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할 것을 알리자 아버지와 함께 약 3,000여 명의 농민군과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위해 세차게 일어섰다. [6]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과 함께 차경석은 탐관오리의 척결과 불평등한 여러 상황들의 개선을 요구하며 황토현에서도 관군에 저항하였다. 1894년 9월,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와 함께 2차 동학농민운동 참여하였으며, 이때 일본의 국내 내정간섭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1894년 11월 차월곡은 동학농민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세성산 전투 참여하였으나 싸웠지만 37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크게 패하였다. [7]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나아가 이인 전투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을 도와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와 함께 우금치로 후퇴하였다. 이두황은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뒤쫓아 왔으며, 우금치 전투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동학 농민군은 1만여 명 중 500여 명이 살아남아 다시 일어서기 힘들 만큼 크게 졌다. 1894년 12월 차경석은 차치구가 이끄는 농민군과 원평•태인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하자 전봉준과 함께 순창 피노리에서 피신할 때 아버지와 함께 끝까지 보좌하였다. [8] [9]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6~27쪽] 차경석은 차치구와 함께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과 헤어져 정읍 고향으로 왔으며, 아버지 차치구는 정읍 국사봉 토굴에 숨어 지내다가 관군에 잡혀 분살형을 당했다. [10] [11] [12] [13]
당시 15세였던 차경석은 형장을 찾아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한 후, 유골을 내장사에 뿌렸다. [14]
1894년 동학농민군이 진압되자, 일부 동학농민군은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종교(동학)를 영국 종교(영학)로 위장한 영학당을 조직하였다. 차경석도 영학당에 들어가 영학당 사건(흥덕 봉기)에 적극 가담하였다. [15]
1899년 5월 차경석은 흥덕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개최하고, 5월 27일 고부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로 봉기한 뒤 흥덕·무장의 군아(郡衙)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차경석은 곧 정읍 고창 등에서 봉기한 영학계 사건에 연루 체포되었다가 사형 직전 집행 사령의 호의로 석방되었다. 학계에서는 영학당 사건을 동학농민운동의 재발로 보고 있다. [16]
1904년 동학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는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였다. 그 후 대동회는 진보회(進步會)로 바뀌어 이용구가 실무를 맡았다. 진보회를 도운 것이 일진회였다. 1904년 가을, 손병희가 주도한 동학부흥운동(復興運動)인 갑진개혁운동을 추진하였다. 차경석은 소위 '갑진개화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 운동이 진보회를 거쳐 일진회로 통합되자 그 초기 조직활동 및 대정부 투쟁에서 전라남북도 순회관이 되어 일진회의 실세로 자리하였다. 1904년 겨울 일진회 지부사무소 개설과정에서 관찰사와 빚은 큰 소요, 1905년 2월 전주 아전과 일진회원 간의 큰 분쟁 등에서 월곡은 최고 간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는 시간단위로 일본 영사관에 보고되었다.
이 사태를 진압할 위치에 있던 육군 전주 진위대의 책임자였던 백남신이나 김병욱 등이 증산에게 그 해결방안에 대하여 문의하였기 때문에 그는 증산도문에 일찍부터 잘 알려진 존재였다. [17] [18] [* 상생문화연구소 (2013년 6월 27일), "차경석"
1905년 12월에 이용구의 일진회 세력이 친일로 치닫자 손병희는 이용구와 결별하고 천도교를 세웠다. 이때 차경석은 일진회를 탈퇴하고, 손병희를 따랐다.
1906년 9월 차경석은 손병희가 동학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진보회 사위사태를 연출하고 정치투쟁으로만 일관하고, 이용구를 출교하면서 막대한 비용을 낭비하였으며, 중앙총무를 짓는다고 전국의 동학교도의 돈을 털자 불만을 품고 손병희와 갈등하였다. 이에 차경석은 손병희를 떠났다. [19]
1907년 5월 28세 때 차경석은 전북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 장터에서 증산 강일순 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날 차경석은 전주에 송사를 치르러 가는 길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특별했다. 1907년 증산 강일순은 설레며 김형렬에게 "이 길이 길행이라. 한 사람을 만나려 함이니 장차 네게 알리리라."라고 말했다. 증산 강일순이 차경석을 천지공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쓸 것을 예정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20]
7척 장신에 눈빛이 매서웠던 차경석은 증산 강일순을 만나고 그의 인품에 한눈에 반한다. 증산 차경석은 장터에서 차경석에게 닭국을 건네는데 그 국에 우연히 벌이 떨어졌다. 차경석은 "혹시 흉한 징조가 아닙니까"라고 묻자 증산 강일순은 길조라며 '''"벌은 규모가 있다"'''며 앞으로 차경석이 규모 있는 교단을 이끌 것임을 예견했다. 이후 증산 강일순은 차경석을 만난 뒤 처음으로 대님을 맸다. 당시 대님을 매면 양반을 뜻했는데, 대님을 맨 강일순은 차경석을 만나고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비로소 당신을 알아본 인물을 만났다는 뜻이다. 차경석은 증산과의 만남 이후 그의 제자가 되어 증산도문에 들어갔다. [21] [22]
1908년 증산 강일순은 월곡의 이종누이인 고판례를 수부(首婦)로 하고 결혼을 하였으며, 정읍 대흥리 월곡의 집을 포정소(布政所)로 정하였다. [24] 증산, 상량공사(上樑公事)를 할 때 차경석에게 백목(白木)을 더 가져오게 해 공사를 마치며 '너는 접주(接主)가 되라, 나는 접사(接司)가 되리라'라고 말하였다. [25] 1908년 증산은 병부(兵部, 장군도수)를 차경석에게 맡겼으며, 1909년 증산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차경석은 김형렬, 박공우, 김자현 등과 함께 증산의 시신을 구릿골, 뒷산 장태날 기슭에 묘에 묻고 장례를 치렀다. 1909년 증산이 1월 3일 교의 대통을 차경석에게 전수한 후 차경석은 일의(一意) 교화를 선포하였다. 이날은 보천교에서 교통수수(敎統授受)일로 1916년에 정해졌다. [26]
차경석은 증산의 교통을 받아 교단을 꾸려나가면서 새로운 교리를 세우기보다는 증산을 신앙대상으로 삼았다. 차경석은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담당하고 이치복(李致福) 등과 함께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11년 고 수부인 고판례가 도통 이후 ‘선도교[27] ’란 이름으로 포교의 문을 열고 이적을 보이자 증산도문이 다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8] [29] 고판례가 문도들의 규합에 나서자 월곡은 그 중심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인심이 수부에게 몰리는 것을 경계한 차경석은 신도들이 고 수부에게 접근하는 일을 막아 점차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점차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 상생문화연구소 (2013년 6월 27일), "차경석"
1914년 차경석은 교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어 나가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이에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주도권을 잡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916년 차경석은 교단의 교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5년에 교단은 남자교인 511명, 여자교인 27명 등 총538명, 포교소 5곳으로 크게 발전했다. 차경석의 탁월한 교단의 조직 관리 능력으로 급속도로 교인이 늘어나 교세가 불어난 것이다. [30]
결국 고판례는 1918년 강응칠(姜應七) 등 일부 교인을 데리고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 교당을 세우고 ‘태을교’라는 명칭으로 교단을 세워 떠났다. 1918년은 차월곡이 교단의 일인자가 된 해였다.
차경석이 이끄는 교단이 날로 교세가 확장되자, 일제는 대중의 구심점이 되어 항거할 것을 염려해 감시하기 시작했다. 교단 내에서 차경석은 신도들에게 고발당하는 등 내부의 분쟁도 끊임없이 생겨났다. 1914년에는 조선의 독립과 황제 등극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고발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31] 차경석은 일제의 감시의 눈이 좁혀 오자 1916년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밀리에 포교에 나섰다. [32] 1917년 모친 회갑연을 핑계로 방주들을 모아 회의를 한 뒤 교세 확장으로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고향을 떠나 다시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1918년 포교 활동 중 국권회복을 내걸고 전라북도 제주도 법정사에 교도 30여 명을 모아 일제 세력들과 무장투쟁할 것을 연설하였으며, 이때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 김연일 등과 항일운동을 모의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법정사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차경석이 교주로 있는 보천교의 항일투쟁은 전국적으로 증산도 신도 검거 선풍을 불러왔다.
일제는 차경석을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1921년에 일제로부터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하였다.[33]
1919년에서 1923년 사이 보천교에는 수백만 교인이 모였는데, 일제는 보천교를 식민지 종교통제정책의 본보기로 삼아 심한 탄압을 계속 해 나갔다. 일제는 법령상 불교, 기독교, 신도 이외의 종교를 모두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했으며, 친일파를 양성하여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분열책을 지속해 나갔다. 1919년 60방주 조직 이후 5~6개월 동안 교인의 수는 100만 명에서 600만 명에 이르렀다. 보천교의 교세는 부침이 컸지만 한때는 한반도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큰 종교단체였다.[34] 엄청난 교인의 수는 일제 총독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일본 헌병의 보천교인에 대한 수색과 검거는 극에 달했다. 경찰은 보천교를 기미년 ‘3·1 운동’을 다시 일으키려는 음모단체로 보았다. 1920년 1월에 경상북도 청송에서 방주 권태호(權泰鎬)에 의해 60방주 조직이 누설되었고, 이 사건으로 교인 3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교도 수십 명이 죽임을 당하고 700여 명이 기소되고 도망 다닌 교도는 3만 여 명에 달했다.[35]
1921년 1월~8월까지 보천교 교인 대규모 검거선풍이 또다시 일었다. 경찰은 교인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까지 만들었다. 전국에서 수개월 사이에 이상호, 김홍규 등 교단의 주요 간부와 일반 교인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것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전국 최대 규모의 검거였다. 이로 인해 일부 간부들의 배교행위가 속출하였으며, ‘보천교(普天敎)’라는 명칭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보천교 입장에서는 교단이 공개되어 공개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일제 입장에서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생각한 보천교와 교주인 차경석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36] , [37]
일제는 차경석을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하는 단체의 우두머리로 생각하여, 보천교 조직을 파악해내고, 이를 해체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펼쳐나갔다. 이에 대한 기사는 1921년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잘 나온다. 특히 1921년 8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태을교인의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조선이 독립되기를 기도하다 발각'됐으며, 8월 25일 기사에는 서석주라는 자가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자금 삼백 여 원을 모았다가 고소당했고, 강원도의 이주범 등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발각돼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10월 29일 기사에는 '십만 원의 독립자금'이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이러한 기사는 일제가 엄청난 교세를 확보한 차경석과 보천교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경찰은 차경석과 보천교를 끊임없이 감시하다가 보천교 본소에 상주해가며 감시와 감찰을 벌였고, 집회 때마다 경찰을 증파해서 감시하였다. 1922년 보천교의 집회를 감시하던 경찰과 교인 및 집회에 참가했던 주민들이 결국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권총으로 교인 한 명을 죽이고, 또한 부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민중들의 보천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높아진 반면, 총독부의 보천교에 대한 무력화 공작이 적극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됐다.
차경석은 날로 커지는 교세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전남 순천에 장기동(張基東)의 도움으로 교당을 짓고, '태을교'의 본소로 삼았으며, [38] 선도교(仙道敎),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정식 교명을 사용하였다. [39] 1914년부터 수도에 힘쓰던 차경석은 조금씩 교인들에게 신망을 얻었으며,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다. 1915년에는 교인이 총 538명에 이르고, 포교소가 5곳으로 늘어났다. 1916년에는 보천교의 첫 교단 조직인 24방위에 해당하는 24방주(方主)를 임명하여 조직 구성의 첫 틀을 마련했다. 이해에 증산 강일순이 교통을 전해준 1909년 1월 3일을 교통수수(敎統授受)일로 정하고 기념하였다.
1917년 차경석의 모친 밀양 박씨 회갑연을 기화로 24방주와 주요 간부를 모아 놓고 북도(北道) 재무책임자인 북집리(北執理)에 김홍규, 남도 재무책임자인 남집리에 채규철(蔡奎喆)을 각각 임명하여 천지에 고천(告天)하게 하여 그들에게 교재(敎財)를 부탁했다.[40] 이어 차경석은 김홍규, 문정삼에게 교단의 일을 부탁하고, 도피의 길을 택해 비밀포교에 나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수만 명의 교도를 모이게 하였다.[41] [42]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이 마무리된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니던 차경석은 1919년에 피신처인 강원도 울진군에서 채규일과 김홍규를 불러 종전의 24방주제를 다시 확대하여 60방주제를 만들어 보천교의 내부조직을 완성하였다.[43] 그 후 입교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3년 만에 간부만 55만 7천 7백 명에 달하는 비밀 조직을 이루었다. 당시 월곡은 간부를 임명할 때 교첩과 상아인장을 주었는데, 이것은 월곡이 천자로 등극하면 새 왕조의 관직 임명장과 직결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 상생문화연구소 (2013년 6월 27일), "차경석"
보천교의 교세 확장은 더욱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불러왔는데, 이러는 가운데 1918년에는 보천교인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차경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돌다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의 김연일과 만났으며, 1918년 9월 19일 제주도 법정사(法井寺)에 교도 약 30명을 소집하여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교도는 우선 도내 거주의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인 상민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1918년 10월 6일 밤 김연일은 보천교 신도와 제주도 주민 등 700여 명과 법정사항일운동을 벌였다. 김연일 등은 제주 성내를 돌며 전선을 절단하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전소시켰다. [44] [45]
차경석은 보천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은 전체 독립운동 지원자금의 50%가 넘는다. 그는 1920년에 3·1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임규에게 5만 원(지금의 약 50억 원)을 보내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임규는 이 돈을 나용균(羅容均)을 통해 임시정부에 보내어 보천교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조달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하였다. 임규는 당시 보천교 진정원의 형평사장(衡平司長)이라는 간부였다. 이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의 보천교 측 회원이었다.[46]
1920년 4월(음) 보천교인(태을교인) 조준호(趙俊浩) 사건(강원도의 태을교도 독립단원 검거의 건)이 발생했다. 조준호 등은 4월에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다.'고 하며 신도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또 강원도 이천경찰서에서도 태을교도 14명을 검거하였는데, 원래 倚天敎 교도였던 김문하가 排日사상을 갖고 1920년 12월 5일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으며 태을교도의 수령 차경석은 올해 중에 황제가 된다.'고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1921년 차경석은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에 보천교 대표 2명을 파견하였다.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는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조직된 외교 지원 단체로 원래 명칭은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한 밑에 있었다.
1922년 차경석은 고려공산당에서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 여운형, 김철, 김상덕, 나용균, 정광호, 장덕수 등을 파견하는데, 자금을 지원하였다. 자금은 최팔용, 장덕수 두 사람에게 건네주어 당시 제3차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에게 전해주게 하였는데, 당시 1만원(지금의 10억 원)을 지원하였다.[47]
1923년 차경석은 2월 상해에서 열린 한민족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간부들을 파견하였다. 참가한 100명의 대표자 중에는 보천교 대표로 보천교 진정원이었던 배홍길(裵洪吉)과 김종철(金種喆), 보천교 청년당 강일(姜逸) 등 3인이 공식적으로 참가하였다. 특히 강일은 1923년 7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입단하여 김원봉의 지시로 군자금을 모집 임무를 수행하였다.[48]
차경석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 대한 지원도 꾸준히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23년 7월 만주 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의 밀사 참모 유정근(兪政根) 검거 후 김좌진과 보천교 간부와의 연락 상황을 발견한 뒤 알려졌다.[49] 차경석은 1924년 9월 김좌진 장군 만주별동대(滿洲別動隊)에 군자금 2만 원을 제공하였다. [50]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으로 일본은 대대적으로 만주에 병력을 투입한 일본 때문에 군자금을 공급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 전투 준비를 못 하는 상태에 처했지만 차경석에게서 받은 2만여 원으로 부하를 소집하여 일본에 맞서 무력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51]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은 차경석이 교주로 있는 보천교의 지원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1920년 9월에 보천교도(태을교도)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이해 12월에는 보천교도(태을교도)들이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며 성금을 걷는 일이 발각되었다.[52] 이러는 가운데 1921년 차경석은 경상남도 함양 황석산(皇石山)에서 하늘에 고하는 고천제를 지냈다.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단의 교주가 되는 동시에 '시국(時國)'이라는 나라의 황제의 지위에 등극함을 하늘에 고한 것이다. 보화는 '조화를 널리 세상에 편다.'는 뜻이다. 고천제에서 차경석은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칭하고 개국연호를 만들어 발표했다.
고천제는 당시 민중들에게는 일제 지배하에 있던 우리나라에 나라의 이름을 선포하고 자존심을 세워준 사건이었다. 고천제를 통해 민중들에게는 1924년 갑자년에 황제가 등극한다는 '천자등극설'이 널리 퍼졌다.
차경석이 고천제를 통해 교단에 대한 교명을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교주에 취임한 것은 보천교의 창립사에 있어서도 포교기구와 행정기구의 조직 강화라는 중대한 의의가 있는 동시에 보천교가 종교에서 정치의 장으로 옮아감을 의미한다.[53] 교단의 제문에 나라 이름이 등장하고, 그 나라 이름을 '시(時)'라고 규정한 것에서부터 보천교 운동의 목적이 종교를 통한 사회구원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차경석은 일본에 넘어간 한양 대신 전라도 정읍을 조선의 바탕으로 삼고 이곳에 십일전이라는 궁궐을 지었다. 십일전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보다 2배 넓고 웅장 호화로웠다.
차경석은 일본에 넘어간 한양 대신 전라도 정읍을 조선의 바탕으로 삼고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칭하고 개국연호를 만들었다. 새 나라의 궁궐인 십일전을 지었는데, 1925년 기공 이후 4년 만에 완공되었다. 십일전은 즉 十(십) 자와 一(일) 자를 합치면 토(土) 자가 되고, 토전은 곧 이 땅의 주인이 정사(政事)를 펴 나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땅과 무극(無極)을 상징한 십(十)과 하늘과 태극을 상징한 일(一)을 적용하여 붙인 이름이다. 차경석은 60방주 중에서 중앙격인 토주(土主)였기 때문에 궁전을 의당 토전(土殿)이라 했다.
역학적으로 보면 십(十)은 역학에서 보는 음(陰)의 최종수(最終數)이고, 일(一)은 양(陽)의 시초(始初)가 되는 수(數)이므로 십일(十一)이라는 수는 음양의 시종(始終)을 뜻한다. 십일전(十一殿)에는 태극수 1과 무극수 10을 합한 11의 조화로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조화사상이 들어있다. 조화사상은 최제우의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십일전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더 컸고, 전형적인 궁궐건축양식을 따랐다. 대지 1만여 평, 건평 350평에 높이 99척, 제탑(祭塔) 3개, 4대 문루를 갖추었다. 1만여 평 대지 위에는 정화당(井華堂)∙총령원(總領院)∙총정원(總正院)∙태화헌(泰和軒)∙연진원(硏眞院) 등 45동의 크고 작은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갈 때부터 나오기까지 1시간 이상이 걸렸는데, 공사비용만 150만 원이 들었다. [54]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의 재목을 군산항을 통해 끌어다 사용하고, 기와는 청자기와의 전통을 재현하여 청색으로, 또 십일전에는 황기와까지 중국에서 도공을 불러 제조하였다. [55] 황색은 흙의 정색(正色)으로 천자의 제위를 상징하여 중국 황제만 쓸 수 있었다. 이렇게 공들인 십일전은 '한반도에서 독립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로 차천자의 천자 등극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때 6백만 신도들을 이끌며 교세를 떨치던 보천교는 모종의 세력으로부터 친일행각을 벌인다는 모함을 받았고, 차경석이 암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철저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십일전의 본전은 해체되어 조계사 대웅전으로, 일부 건물은 내장사와 동대문으로, 청기와는 조선총독부 관저 건물의 기와가 되었고, 이후 경무대 건물을 윤보선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라고 부르는 전통이 생겨났다.[56]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 동학농민군 대장의 슬로건은 보국안민이었다. 차경석의 슬로건은 경세제민이었다. 세상을 경제로서 일으켜 백성을 모두 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차경석은 보천교를 통해 출판사업,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다. 직접 기업을 경영하거나 민족의 교육에 힘써 실력양성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23년 1월에는 시대일보사에 출자를 승낙하였다. 1923년에 보광사라는 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활자 인쇄물인 《보광(普光)》잡지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종교·문화와 예술 부문을 다루었다. 1923년 12월에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를 보광사에서 발간하였는데,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하는 한편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벌여나갔다. 보천교 교단에서는 자작회(自作會) 만들어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가하였다. [57] [58]
1924년에는 최남선이 운영했던 일간지 ‘시대일보사’를 인수하였다. 이것은 보천교를 맹렬히 비판하고 친일행각을 벌인 《동아일보》와 맞서기 위한 대책이기도 하였다.[59]
1924. 9월에는 본소의 노동자 편의를 주기 위하여 기산조합 자치단체를 결성했다. 기산조합은 자급자족의 경제공동체로 교인들의 단체 노동을 통해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합에서는 직업 소개, 물품 매매 소개, 조합원의 상호 재난 구호 사업을 벌여나갓다. 각 교도는 푸른 옷을 입고, 직물공장, 염색공장, 농기구공장, 유리공장, 옥공장 등에서 수공업에 참여하였다.
1924년 차경석은 문정삼과 임경호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날로 감시가 심해지고 압박을 가하는 일본에 보천교의 취지를 전하고 일본정부의 이해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문정삼, 임경호는 "보천교의 교강(敎綱)인 인의(仁義)의 도덕을 숭상하고 상생(相生)을 주의로 한 대동단결(大同團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리고 '대동(大同)'이야말로 전 인류가 대동단화(大同團和) 하는 것이라고 일본에 전달하였다. ‘대동단화’는 강증산의 핵심 사상 중 하나로 보천교의 종지 중 하나이다. 이에 일제는 보천교가 일본인과 대동단화할 수 있는 것으로써 '광구단' 조직을 요구하였다. 차경석은 보천교의 취지나 목적에 부합한 '시국대동단'을 채택하였다.
시국대동단에서 시국강연회 실시했는데, 일제에 매수된 임경호와 문정삼은 조선총독부에 순응하는 내용으로 강연회를 하여 지식인과 민중들의 지탄을 받았다. 학계에서는 교단유지를 위해서였다고 본다. [60]
1926년 조선총독의 방문에 이어, 192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사리 사부로(淺利三郎)가 보천교를 방문하였다. 식민정책에 대한 보천교의 협조를 기대하는 방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가며 보천교를 농락하였고 당시 지식인들의 보천교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61]
1929년 3월 15일 신축성전 내 삼광영 봉안식 거행하려 했으나 정음경찰서에서 허가하지 않았으며, 1936년 3월에 차경석은 이영호에게 『보천교연혁사』 편찬 지시하였다. 이해 3월 10일 차경석은 일제의 암살로 의심되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사후 철저히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62]
1936년 6월 6일 주요 간부 24인을 연행해 보천교 해산, 신건축 포기, 삭발 등을 강요하였다. 경찰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허락 없이 십일전 내 개금된 성상과 제기, 신앙대상인 삼광영(三光影) 벽화와 도금된 제단 등을 뜯어갔다. 같은 해 6월 15일 정읍경찰서 소속 경찰 수 십 명이 난입, 중앙 본소 시설물들을 철거해갔다.
정읍경찰서에서 보천교의 중앙본소 건축물들을 경매하려 하자 정읍의 유지들이 '보천교 건물은 역사상 일대생광(一大生光)인즉 이곳에 대학교와 병원을 세우자.'며 경매에 참여하려 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보천교의 씨앗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 상징물들의 존재를 목적으로 백만 원에 낙찰을 원한다고 한들 낙찰을 반대하겠다.'며 관련 경매를 반대하였다. 경매에 앞서 경찰은 유령단체인 '보천교재산처리위원회'로 하여금 재산포기 각서를 쓰도록 하였다. 십일전을 두고서 경매에 들어갔으나 어느 누구도 경매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일본인 에도 나가지로(江戶長次郞)가 경매가의 절반인 500원에 십일전을 낙찰받았다.
십일전의 건축 비용은 50만 원인데 비해 경매가는 터무니없었다. 에노 나가지로는 경찰의 하수인이었으며 그 대금 500원도 경찰로 넘어갔다는 점으로 미루어, 십일전 경매는 정상적인 경매가 아닌 압수였다. 일본인이 낙찰받은 십일전을 조선 불교계가 사들여 서울로 이축하니, 현 조계사(曹溪寺) 대웅전(大雄殿)이다. [63]
1880년 ~ 1936년
1. 개요
차경석(車京石)은 '''보천교''' 교주로 종교인 겸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윤홍(輪洪)이며, 자(字)는 경석(京石)이다. 호는 차월곡(車月谷)이며 차천자(車天子)로도 알려져 있다. 월곡은 스승인 증산 강일순이 지어주었다.
2. 동학에 입문
차월곡은 전북 고창군(高敞郡) 부안면 호암리에서 아버지 차치구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 1888년 20세에 차경석은 고창을 떠나 부친의 고향인 정읍 대흥리로 이주하였다.
차경석은 동학의 접주였던 아버지 차치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93년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는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기를 설득하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명분을 내세우는 조건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참여하기로 하였다. [3] 차경석도 아버지를 따라 동학 농민군에 들어가 전장을 누볐다. 차경석은 동학에 몸담고 있다가 처음으로 들고일어난 것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선 고부 봉기였다. 1894 2월,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가 전봉준을 비롯한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최경선(崔景善) 등 20인방(幇)과 함께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4] [5] 1894년 4월 하순, 차경석은 전봉준이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할 것을 알리자 아버지와 함께 약 3,000여 명의 농민군과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위해 세차게 일어섰다. [6]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과 함께 차경석은 탐관오리의 척결과 불평등한 여러 상황들의 개선을 요구하며 황토현에서도 관군에 저항하였다. 1894년 9월,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와 함께 2차 동학농민운동 참여하였으며, 이때 일본의 국내 내정간섭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1894년 11월 차월곡은 동학농민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세성산 전투 참여하였으나 싸웠지만 37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크게 패하였다. [7]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나아가 이인 전투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을 도와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와 함께 우금치로 후퇴하였다. 이두황은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뒤쫓아 왔으며, 우금치 전투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동학 농민군은 1만여 명 중 500여 명이 살아남아 다시 일어서기 힘들 만큼 크게 졌다. 1894년 12월 차경석은 차치구가 이끄는 농민군과 원평•태인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하자 전봉준과 함께 순창 피노리에서 피신할 때 아버지와 함께 끝까지 보좌하였다. [8] [9]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6~27쪽] 차경석은 차치구와 함께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과 헤어져 정읍 고향으로 왔으며, 아버지 차치구는 정읍 국사봉 토굴에 숨어 지내다가 관군에 잡혀 분살형을 당했다. [10] [11] [12] [13]
당시 15세였던 차경석은 형장을 찾아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한 후, 유골을 내장사에 뿌렸다. [14]
1894년 동학농민군이 진압되자, 일부 동학농민군은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종교(동학)를 영국 종교(영학)로 위장한 영학당을 조직하였다. 차경석도 영학당에 들어가 영학당 사건(흥덕 봉기)에 적극 가담하였다. [15]
1899년 5월 차경석은 흥덕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개최하고, 5월 27일 고부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로 봉기한 뒤 흥덕·무장의 군아(郡衙)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차경석은 곧 정읍 고창 등에서 봉기한 영학계 사건에 연루 체포되었다가 사형 직전 집행 사령의 호의로 석방되었다. 학계에서는 영학당 사건을 동학농민운동의 재발로 보고 있다. [16]
1904년 동학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는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였다. 그 후 대동회는 진보회(進步會)로 바뀌어 이용구가 실무를 맡았다. 진보회를 도운 것이 일진회였다. 1904년 가을, 손병희가 주도한 동학부흥운동(復興運動)인 갑진개혁운동을 추진하였다. 차경석은 소위 '갑진개화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 운동이 진보회를 거쳐 일진회로 통합되자 그 초기 조직활동 및 대정부 투쟁에서 전라남북도 순회관이 되어 일진회의 실세로 자리하였다. 1904년 겨울 일진회 지부사무소 개설과정에서 관찰사와 빚은 큰 소요, 1905년 2월 전주 아전과 일진회원 간의 큰 분쟁 등에서 월곡은 최고 간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는 시간단위로 일본 영사관에 보고되었다.
이 사태를 진압할 위치에 있던 육군 전주 진위대의 책임자였던 백남신이나 김병욱 등이 증산에게 그 해결방안에 대하여 문의하였기 때문에 그는 증산도문에 일찍부터 잘 알려진 존재였다. [17] [18] [* 상생문화연구소 (2013년 6월 27일), "차경석"
1905년 12월에 이용구의 일진회 세력이 친일로 치닫자 손병희는 이용구와 결별하고 천도교를 세웠다. 이때 차경석은 일진회를 탈퇴하고, 손병희를 따랐다.
1906년 9월 차경석은 손병희가 동학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진보회 사위사태를 연출하고 정치투쟁으로만 일관하고, 이용구를 출교하면서 막대한 비용을 낭비하였으며, 중앙총무를 짓는다고 전국의 동학교도의 돈을 털자 불만을 품고 손병희와 갈등하였다. 이에 차경석은 손병희를 떠났다. [19]
3. 서로를 알아본 강증산과의 만남
1907년 5월 28세 때 차경석은 전북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 장터에서 증산 강일순 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날 차경석은 전주에 송사를 치르러 가는 길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특별했다. 1907년 증산 강일순은 설레며 김형렬에게 "이 길이 길행이라. 한 사람을 만나려 함이니 장차 네게 알리리라."라고 말했다. 증산 강일순이 차경석을 천지공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쓸 것을 예정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20]
7척 장신에 눈빛이 매서웠던 차경석은 증산 강일순을 만나고 그의 인품에 한눈에 반한다. 증산 차경석은 장터에서 차경석에게 닭국을 건네는데 그 국에 우연히 벌이 떨어졌다. 차경석은 "혹시 흉한 징조가 아닙니까"라고 묻자 증산 강일순은 길조라며 '''"벌은 규모가 있다"'''며 앞으로 차경석이 규모 있는 교단을 이끌 것임을 예견했다. 이후 증산 강일순은 차경석을 만난 뒤 처음으로 대님을 맸다. 당시 대님을 매면 양반을 뜻했는데, 대님을 맨 강일순은 차경석을 만나고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비로소 당신을 알아본 인물을 만났다는 뜻이다. 차경석은 증산과의 만남 이후 그의 제자가 되어 증산도문에 들어갔다. [21] [22]
4. 보천교[23] 의 전신인 태을교에서 일인자가 되다
1908년 증산 강일순은 월곡의 이종누이인 고판례를 수부(首婦)로 하고 결혼을 하였으며, 정읍 대흥리 월곡의 집을 포정소(布政所)로 정하였다. [24] 증산, 상량공사(上樑公事)를 할 때 차경석에게 백목(白木)을 더 가져오게 해 공사를 마치며 '너는 접주(接主)가 되라, 나는 접사(接司)가 되리라'라고 말하였다. [25] 1908년 증산은 병부(兵部, 장군도수)를 차경석에게 맡겼으며, 1909년 증산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차경석은 김형렬, 박공우, 김자현 등과 함께 증산의 시신을 구릿골, 뒷산 장태날 기슭에 묘에 묻고 장례를 치렀다. 1909년 증산이 1월 3일 교의 대통을 차경석에게 전수한 후 차경석은 일의(一意) 교화를 선포하였다. 이날은 보천교에서 교통수수(敎統授受)일로 1916년에 정해졌다. [26]
차경석은 증산의 교통을 받아 교단을 꾸려나가면서 새로운 교리를 세우기보다는 증산을 신앙대상으로 삼았다. 차경석은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담당하고 이치복(李致福) 등과 함께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11년 고 수부인 고판례가 도통 이후 ‘선도교[27] ’란 이름으로 포교의 문을 열고 이적을 보이자 증산도문이 다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8] [29] 고판례가 문도들의 규합에 나서자 월곡은 그 중심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인심이 수부에게 몰리는 것을 경계한 차경석은 신도들이 고 수부에게 접근하는 일을 막아 점차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점차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 상생문화연구소 (2013년 6월 27일), "차경석"
1914년 차경석은 교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갖추어 나가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이에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주도권을 잡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916년 차경석은 교단의 교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5년에 교단은 남자교인 511명, 여자교인 27명 등 총538명, 포교소 5곳으로 크게 발전했다. 차경석의 탁월한 교단의 조직 관리 능력으로 급속도로 교인이 늘어나 교세가 불어난 것이다. [30]
결국 고판례는 1918년 강응칠(姜應七) 등 일부 교인을 데리고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 교당을 세우고 ‘태을교’라는 명칭으로 교단을 세워 떠났다. 1918년은 차월곡이 교단의 일인자가 된 해였다.
5. 일제의 감시와 분열책
차경석이 이끄는 교단이 날로 교세가 확장되자, 일제는 대중의 구심점이 되어 항거할 것을 염려해 감시하기 시작했다. 교단 내에서 차경석은 신도들에게 고발당하는 등 내부의 분쟁도 끊임없이 생겨났다. 1914년에는 조선의 독립과 황제 등극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고발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31] 차경석은 일제의 감시의 눈이 좁혀 오자 1916년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밀리에 포교에 나섰다. [32] 1917년 모친 회갑연을 핑계로 방주들을 모아 회의를 한 뒤 교세 확장으로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고향을 떠나 다시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1918년 포교 활동 중 국권회복을 내걸고 전라북도 제주도 법정사에 교도 30여 명을 모아 일제 세력들과 무장투쟁할 것을 연설하였으며, 이때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 김연일 등과 항일운동을 모의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법정사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차경석이 교주로 있는 보천교의 항일투쟁은 전국적으로 증산도 신도 검거 선풍을 불러왔다.
일제는 차경석을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1921년에 일제로부터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하였다.[33]
1919년에서 1923년 사이 보천교에는 수백만 교인이 모였는데, 일제는 보천교를 식민지 종교통제정책의 본보기로 삼아 심한 탄압을 계속 해 나갔다. 일제는 법령상 불교, 기독교, 신도 이외의 종교를 모두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했으며, 친일파를 양성하여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분열책을 지속해 나갔다. 1919년 60방주 조직 이후 5~6개월 동안 교인의 수는 100만 명에서 600만 명에 이르렀다. 보천교의 교세는 부침이 컸지만 한때는 한반도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큰 종교단체였다.[34] 엄청난 교인의 수는 일제 총독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일본 헌병의 보천교인에 대한 수색과 검거는 극에 달했다. 경찰은 보천교를 기미년 ‘3·1 운동’을 다시 일으키려는 음모단체로 보았다. 1920년 1월에 경상북도 청송에서 방주 권태호(權泰鎬)에 의해 60방주 조직이 누설되었고, 이 사건으로 교인 3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교도 수십 명이 죽임을 당하고 700여 명이 기소되고 도망 다닌 교도는 3만 여 명에 달했다.[35]
1921년 1월~8월까지 보천교 교인 대규모 검거선풍이 또다시 일었다. 경찰은 교인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까지 만들었다. 전국에서 수개월 사이에 이상호, 김홍규 등 교단의 주요 간부와 일반 교인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것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전국 최대 규모의 검거였다. 이로 인해 일부 간부들의 배교행위가 속출하였으며, ‘보천교(普天敎)’라는 명칭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보천교 입장에서는 교단이 공개되어 공개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일제 입장에서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생각한 보천교와 교주인 차경석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36] , [37]
일제는 차경석을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하는 단체의 우두머리로 생각하여, 보천교 조직을 파악해내고, 이를 해체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펼쳐나갔다. 이에 대한 기사는 1921년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잘 나온다. 특히 1921년 8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태을교인의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조선이 독립되기를 기도하다 발각'됐으며, 8월 25일 기사에는 서석주라는 자가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자금 삼백 여 원을 모았다가 고소당했고, 강원도의 이주범 등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발각돼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10월 29일 기사에는 '십만 원의 독립자금'이라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이러한 기사는 일제가 엄청난 교세를 확보한 차경석과 보천교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경찰은 차경석과 보천교를 끊임없이 감시하다가 보천교 본소에 상주해가며 감시와 감찰을 벌였고, 집회 때마다 경찰을 증파해서 감시하였다. 1922년 보천교의 집회를 감시하던 경찰과 교인 및 집회에 참가했던 주민들이 결국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권총으로 교인 한 명을 죽이고, 또한 부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민중들의 보천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높아진 반면, 총독부의 보천교에 대한 무력화 공작이 적극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됐다.
6. 보천교 내부 조직 체계를 완성
차경석은 날로 커지는 교세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전남 순천에 장기동(張基東)의 도움으로 교당을 짓고, '태을교'의 본소로 삼았으며, [38] 선도교(仙道敎),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정식 교명을 사용하였다. [39] 1914년부터 수도에 힘쓰던 차경석은 조금씩 교인들에게 신망을 얻었으며, 교단을 크게 발전시켰다. 1915년에는 교인이 총 538명에 이르고, 포교소가 5곳으로 늘어났다. 1916년에는 보천교의 첫 교단 조직인 24방위에 해당하는 24방주(方主)를 임명하여 조직 구성의 첫 틀을 마련했다. 이해에 증산 강일순이 교통을 전해준 1909년 1월 3일을 교통수수(敎統授受)일로 정하고 기념하였다.
1917년 차경석의 모친 밀양 박씨 회갑연을 기화로 24방주와 주요 간부를 모아 놓고 북도(北道) 재무책임자인 북집리(北執理)에 김홍규, 남도 재무책임자인 남집리에 채규철(蔡奎喆)을 각각 임명하여 천지에 고천(告天)하게 하여 그들에게 교재(敎財)를 부탁했다.[40] 이어 차경석은 김홍규, 문정삼에게 교단의 일을 부탁하고, 도피의 길을 택해 비밀포교에 나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수만 명의 교도를 모이게 하였다.[41] [42]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이 마무리된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니던 차경석은 1919년에 피신처인 강원도 울진군에서 채규일과 김홍규를 불러 종전의 24방주제를 다시 확대하여 60방주제를 만들어 보천교의 내부조직을 완성하였다.[43] 그 후 입교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3년 만에 간부만 55만 7천 7백 명에 달하는 비밀 조직을 이루었다. 당시 월곡은 간부를 임명할 때 교첩과 상아인장을 주었는데, 이것은 월곡이 천자로 등극하면 새 왕조의 관직 임명장과 직결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 상생문화연구소 (2013년 6월 27일), "차경석"
7. 항일운동과 독립운동
보천교의 교세 확장은 더욱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불러왔는데, 이러는 가운데 1918년에는 보천교인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차경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돌다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의 김연일과 만났으며, 1918년 9월 19일 제주도 법정사(法井寺)에 교도 약 30명을 소집하여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교도는 우선 도내 거주의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인 상민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1918년 10월 6일 밤 김연일은 보천교 신도와 제주도 주민 등 700여 명과 법정사항일운동을 벌였다. 김연일 등은 제주 성내를 돌며 전선을 절단하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전소시켰다. [44] [45]
차경석은 보천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은 전체 독립운동 지원자금의 50%가 넘는다. 그는 1920년에 3·1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임규에게 5만 원(지금의 약 50억 원)을 보내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임규는 이 돈을 나용균(羅容均)을 통해 임시정부에 보내어 보천교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조달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하였다. 임규는 당시 보천교 진정원의 형평사장(衡平司長)이라는 간부였다. 이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의 보천교 측 회원이었다.[46]
1920년 4월(음) 보천교인(태을교인) 조준호(趙俊浩) 사건(강원도의 태을교도 독립단원 검거의 건)이 발생했다. 조준호 등은 4월에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다.'고 하며 신도들을 비밀리에 모았다. 또 강원도 이천경찰서에서도 태을교도 14명을 검거하였는데, 원래 倚天敎 교도였던 김문하가 排日사상을 갖고 1920년 12월 5일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으며 태을교도의 수령 차경석은 올해 중에 황제가 된다.'고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1921년 차경석은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에 보천교 대표 2명을 파견하였다.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는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조직된 외교 지원 단체로 원래 명칭은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한 밑에 있었다.
1922년 차경석은 고려공산당에서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 여운형, 김철, 김상덕, 나용균, 정광호, 장덕수 등을 파견하는데, 자금을 지원하였다. 자금은 최팔용, 장덕수 두 사람에게 건네주어 당시 제3차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에게 전해주게 하였는데, 당시 1만원(지금의 10억 원)을 지원하였다.[47]
1923년 차경석은 2월 상해에서 열린 한민족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간부들을 파견하였다. 참가한 100명의 대표자 중에는 보천교 대표로 보천교 진정원이었던 배홍길(裵洪吉)과 김종철(金種喆), 보천교 청년당 강일(姜逸) 등 3인이 공식적으로 참가하였다. 특히 강일은 1923년 7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입단하여 김원봉의 지시로 군자금을 모집 임무를 수행하였다.[48]
차경석은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 대한 지원도 꾸준히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23년 7월 만주 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의 밀사 참모 유정근(兪政根) 검거 후 김좌진과 보천교 간부와의 연락 상황을 발견한 뒤 알려졌다.[49] 차경석은 1924년 9월 김좌진 장군 만주별동대(滿洲別動隊)에 군자금 2만 원을 제공하였다. [50]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으로 일본은 대대적으로 만주에 병력을 투입한 일본 때문에 군자금을 공급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 전투 준비를 못 하는 상태에 처했지만 차경석에게서 받은 2만여 원으로 부하를 소집하여 일본에 맞서 무력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51]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은 차경석이 교주로 있는 보천교의 지원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8. 스스로 독립국임을 선포
1920년 9월에 보천교도(태을교도)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이해 12월에는 보천교도(태을교도)들이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며 성금을 걷는 일이 발각되었다.[52] 이러는 가운데 1921년 차경석은 경상남도 함양 황석산(皇石山)에서 하늘에 고하는 고천제를 지냈다.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단의 교주가 되는 동시에 '시국(時國)'이라는 나라의 황제의 지위에 등극함을 하늘에 고한 것이다. 보화는 '조화를 널리 세상에 편다.'는 뜻이다. 고천제에서 차경석은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칭하고 개국연호를 만들어 발표했다.
고천제는 당시 민중들에게는 일제 지배하에 있던 우리나라에 나라의 이름을 선포하고 자존심을 세워준 사건이었다. 고천제를 통해 민중들에게는 1924년 갑자년에 황제가 등극한다는 '천자등극설'이 널리 퍼졌다.
차경석이 고천제를 통해 교단에 대한 교명을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교주에 취임한 것은 보천교의 창립사에 있어서도 포교기구와 행정기구의 조직 강화라는 중대한 의의가 있는 동시에 보천교가 종교에서 정치의 장으로 옮아감을 의미한다.[53] 교단의 제문에 나라 이름이 등장하고, 그 나라 이름을 '시(時)'라고 규정한 것에서부터 보천교 운동의 목적이 종교를 통한 사회구원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차경석은 일본에 넘어간 한양 대신 전라도 정읍을 조선의 바탕으로 삼고 이곳에 십일전이라는 궁궐을 지었다. 십일전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보다 2배 넓고 웅장 호화로웠다.
9. 십일전(十一殿) 완공
차경석은 일본에 넘어간 한양 대신 전라도 정읍을 조선의 바탕으로 삼고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칭하고 개국연호를 만들었다. 새 나라의 궁궐인 십일전을 지었는데, 1925년 기공 이후 4년 만에 완공되었다. 십일전은 즉 十(십) 자와 一(일) 자를 합치면 토(土) 자가 되고, 토전은 곧 이 땅의 주인이 정사(政事)를 펴 나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땅과 무극(無極)을 상징한 십(十)과 하늘과 태극을 상징한 일(一)을 적용하여 붙인 이름이다. 차경석은 60방주 중에서 중앙격인 토주(土主)였기 때문에 궁전을 의당 토전(土殿)이라 했다.
역학적으로 보면 십(十)은 역학에서 보는 음(陰)의 최종수(最終數)이고, 일(一)은 양(陽)의 시초(始初)가 되는 수(數)이므로 십일(十一)이라는 수는 음양의 시종(始終)을 뜻한다. 십일전(十一殿)에는 태극수 1과 무극수 10을 합한 11의 조화로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조화사상이 들어있다. 조화사상은 최제우의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십일전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더 컸고, 전형적인 궁궐건축양식을 따랐다. 대지 1만여 평, 건평 350평에 높이 99척, 제탑(祭塔) 3개, 4대 문루를 갖추었다. 1만여 평 대지 위에는 정화당(井華堂)∙총령원(總領院)∙총정원(總正院)∙태화헌(泰和軒)∙연진원(硏眞院) 등 45동의 크고 작은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갈 때부터 나오기까지 1시간 이상이 걸렸는데, 공사비용만 150만 원이 들었다. [54]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의 재목을 군산항을 통해 끌어다 사용하고, 기와는 청자기와의 전통을 재현하여 청색으로, 또 십일전에는 황기와까지 중국에서 도공을 불러 제조하였다. [55] 황색은 흙의 정색(正色)으로 천자의 제위를 상징하여 중국 황제만 쓸 수 있었다. 이렇게 공들인 십일전은 '한반도에서 독립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로 차천자의 천자 등극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때 6백만 신도들을 이끌며 교세를 떨치던 보천교는 모종의 세력으로부터 친일행각을 벌인다는 모함을 받았고, 차경석이 암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철저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십일전의 본전은 해체되어 조계사 대웅전으로, 일부 건물은 내장사와 동대문으로, 청기와는 조선총독부 관저 건물의 기와가 되었고, 이후 경무대 건물을 윤보선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라고 부르는 전통이 생겨났다.[56]
10. 경세제민과 문화운동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 동학농민군 대장의 슬로건은 보국안민이었다. 차경석의 슬로건은 경세제민이었다. 세상을 경제로서 일으켜 백성을 모두 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차경석은 보천교를 통해 출판사업,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다. 직접 기업을 경영하거나 민족의 교육에 힘써 실력양성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23년 1월에는 시대일보사에 출자를 승낙하였다. 1923년에 보광사라는 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활자 인쇄물인 《보광(普光)》잡지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종교·문화와 예술 부문을 다루었다. 1923년 12월에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를 보광사에서 발간하였는데,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하는 한편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벌여나갔다. 보천교 교단에서는 자작회(自作會) 만들어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가하였다. [57] [58]
1924년에는 최남선이 운영했던 일간지 ‘시대일보사’를 인수하였다. 이것은 보천교를 맹렬히 비판하고 친일행각을 벌인 《동아일보》와 맞서기 위한 대책이기도 하였다.[59]
1924. 9월에는 본소의 노동자 편의를 주기 위하여 기산조합 자치단체를 결성했다. 기산조합은 자급자족의 경제공동체로 교인들의 단체 노동을 통해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조합에서는 직업 소개, 물품 매매 소개, 조합원의 상호 재난 구호 사업을 벌여나갓다. 각 교도는 푸른 옷을 입고, 직물공장, 염색공장, 농기구공장, 유리공장, 옥공장 등에서 수공업에 참여하였다.
11. 시국대동단과 친일 오해
1924년 차경석은 문정삼과 임경호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날로 감시가 심해지고 압박을 가하는 일본에 보천교의 취지를 전하고 일본정부의 이해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문정삼, 임경호는 "보천교의 교강(敎綱)인 인의(仁義)의 도덕을 숭상하고 상생(相生)을 주의로 한 대동단결(大同團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리고 '대동(大同)'이야말로 전 인류가 대동단화(大同團和) 하는 것이라고 일본에 전달하였다. ‘대동단화’는 강증산의 핵심 사상 중 하나로 보천교의 종지 중 하나이다. 이에 일제는 보천교가 일본인과 대동단화할 수 있는 것으로써 '광구단' 조직을 요구하였다. 차경석은 보천교의 취지나 목적에 부합한 '시국대동단'을 채택하였다.
시국대동단에서 시국강연회 실시했는데, 일제에 매수된 임경호와 문정삼은 조선총독부에 순응하는 내용으로 강연회를 하여 지식인과 민중들의 지탄을 받았다. 학계에서는 교단유지를 위해서였다고 본다. [60]
12. 사후
1926년 조선총독의 방문에 이어, 192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사리 사부로(淺利三郎)가 보천교를 방문하였다. 식민정책에 대한 보천교의 협조를 기대하는 방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가며 보천교를 농락하였고 당시 지식인들의 보천교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61]
1929년 3월 15일 신축성전 내 삼광영 봉안식 거행하려 했으나 정음경찰서에서 허가하지 않았으며, 1936년 3월에 차경석은 이영호에게 『보천교연혁사』 편찬 지시하였다. 이해 3월 10일 차경석은 일제의 암살로 의심되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사후 철저히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62]
1936년 6월 6일 주요 간부 24인을 연행해 보천교 해산, 신건축 포기, 삭발 등을 강요하였다. 경찰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허락 없이 십일전 내 개금된 성상과 제기, 신앙대상인 삼광영(三光影) 벽화와 도금된 제단 등을 뜯어갔다. 같은 해 6월 15일 정읍경찰서 소속 경찰 수 십 명이 난입, 중앙 본소 시설물들을 철거해갔다.
정읍경찰서에서 보천교의 중앙본소 건축물들을 경매하려 하자 정읍의 유지들이 '보천교 건물은 역사상 일대생광(一大生光)인즉 이곳에 대학교와 병원을 세우자.'며 경매에 참여하려 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보천교의 씨앗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 상징물들의 존재를 목적으로 백만 원에 낙찰을 원한다고 한들 낙찰을 반대하겠다.'며 관련 경매를 반대하였다. 경매에 앞서 경찰은 유령단체인 '보천교재산처리위원회'로 하여금 재산포기 각서를 쓰도록 하였다. 십일전을 두고서 경매에 들어갔으나 어느 누구도 경매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일본인 에도 나가지로(江戶長次郞)가 경매가의 절반인 500원에 십일전을 낙찰받았다.
십일전의 건축 비용은 50만 원인데 비해 경매가는 터무니없었다. 에노 나가지로는 경찰의 하수인이었으며 그 대금 500원도 경찰로 넘어갔다는 점으로 미루어, 십일전 경매는 정상적인 경매가 아닌 압수였다. 일본인이 낙찰받은 십일전을 조선 불교계가 사들여 서울로 이축하니, 현 조계사(曹溪寺) 대웅전(大雄殿)이다. [63]
13. 관련 문서
[1] '보천교'란 교명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은 1922년부터이다. 『보천교연혁사』에 의하면 포교 원년을 1909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증산이 '화천(化天)'한 해이다. 즉 증산의 사후 차경석이 교통을 이어 받아 보천교가 창립되었다고 본다. 보천교란 교명이 생기기 이전에는 '태을교(太乙敎), 선도교(仙道敎), 훔치교, 천자교(天子敎) 등으로 불렸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보천교로 통일하여 기술한다.[2] 《동아일보》(1924년 12월 18일). 월곡의 차남은 부안면(扶安面) 연기동에서 태어났다고 함.[3]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박사논문(1992) 6쪽[4] 김재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후천개벽운동과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66~67쪽[5] 안원전, 『증산도(하)』 (대원출판사, 1991) 274쪽[6]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18[7]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5~26쪽[8]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7쪽[9]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180쪽[10]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2쪽~25쪽[11]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2) 6쪽[12]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127쪽[13]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김영사, 2008)[14] 차길진, 『일간스포츠』 2018년 12월 18일 「차길진의 갓모닝」 '내장사 기도’[15]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36쪽[16]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2쪽, 66쪽[17]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1쪽[18]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13쪽[19] 안원전, 『증산도』(대원출판사, 1991), 281~282쪽[20]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85, 170쪽.[21] 차길진, 『일간스포츠』 2011년 11월 24일 「차길진의 갓모닝」 ‘차경석’[22]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13쪽[23] '보천교'란 교명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은 1922년부터이다. 『보천교연혁사』에 의하면 포교 원년을 1909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증산이 '화천(化天)'한 해이다. 즉 증산의 사후 차경석이 교통을 이어 받아 보천교가 창립되었다고 본다. 보천교란 교명이 생기기 이전에는 '태을교(太乙敎), 선도교(仙道敎), 훔치교, 천자교(天子敎) 등으로 불렸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보천교로 통일하여 기술한다.[24]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2쪽, 266쪽[25]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65쪽[26]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85, 168쪽.[27] 선도교 또는 태을교로 불린다. 이때의 태을교는 1918년 고판례가 김제에 새로 교당을 짓고 이름 지은 태을교와 구분된다. 후에 김형렬도 태을교란 이름으로 교단을 만들어 교주가 되었다.[28]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88쪽[29]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85, 171쪽.[30]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13쪽[31]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8쪽.[32]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50쪽[33]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장신 《일제하의 요시찰과 『倭政時代人物史料』 제11호》(역사문제연구소, 2003), 146~147쪽.[34] 남창희 《보천교의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남창희 저, 학술대회자료집, 2016) 99~100쪽.[35] 박종렬 《차천자의 꿈》(박종렬 저, 1996.2, 장문산) 134쪽.[36] 박종렬 《차천자의 꿈》(박종렬 저, 2001, 장문산) 101~106쪽.[37] 이정립 《증산교사》(이정립 저, 증산교본부,1977) 90쪽.[38]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13쪽[39]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0쪽[40] 안원전 《증산도》(안원전 저, 1991, 대원출판사) 708쪽.[41] 박종렬 《차천자의 꿈》(박종렬 저, 1996.2, 장문산) 98~99쪽.[42]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김철수 저, 2017, 상생출판) 59~64쪽.[43]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34쪽.[44] 김철수《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45] 김재영《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1쪽[46]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안후상 저, 학술대회자료집, 2016) 69쪽.[47] https://web.archive.org/web/20180618130001/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4&levelId=tg_004_2100&ganada=&pageUnit=10[48]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안후상 저, 2016, 학술대회자료집) [49]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김철수 저,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6쪽.[50]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김철수 저,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5쪽.[51] (亞細亞局第3課關機授제32743號)[52] 《동아일보》(1921. 4. 30) [53] 황선명 《잃어버린 코뮨》(황선명 저, 학술대회자료집, 2000)[54]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1쪽 [55] https://www.whoim.kr/detail.php?number=67708&thread=54r07 [56] 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잃어버린 차천자의 꿈> 2015.06.02 [57]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5쪽[58] 『보광』 창간호, 1923. 10월 23일. 60쪽.[59] 김재영, 《동학 이후 증산계열의 민족운동》(김재영 저, 학술대회, 2016) 40쪽.[60] 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차경석> 2011. 11. 24. [61]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2017, 491쪽~496쪽 [62] 『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차천자의 비밀’ 2019. 7. 5일 자[63]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527쪽~5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