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홍연흠'''
'''洪演欽'''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대가(大可)
'''본관'''
부림 홍씨[1]
'''출생'''
1885년 5월 21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
(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2]
'''사망'''
1970년 11월 22일[3] (향년 86세)
'''묘소'''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지심이재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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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홍영우는 그의 7촌 아저씨, 즉 재종숙(再從叔)이며, 채희각은 그의 처조카이다.[4]

2. 생애


홍연흠은 1885년 5월 21일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대율동(현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서 아버지 홍장우(洪章佑)와 어머니 전주 최씨 최달식(崔達植)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음력 7월 27일, 홍재훈(洪在燻)·이원봉(李遠鳳)의 권유로 군위군 부계면 동산동 홍정수(洪定修)의 집에서 홍석우(洪奭佑)·이기식(李基植)과 함께 일심동체임을 서약한 후, 흠치교에 8인조의 교도로 가입하고 홍재훈에게 치성비 20원을 기부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4일 대구지검에 이송되었으며#,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제령 제7호, 즉 정치범 처벌령 위반 및 사기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다만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징역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고#, 곧 상고하였으나 11월 30일 상고를 취하하여# 안동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2일 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70년 11월 22일 별세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대율파-종(宗)파 25세 흠(欽) 항렬.[2] 인근의 남산리·동산리와 함께 부림 홍씨 집성촌이다. 홍창식 전 육군고등군사법원장과 독립유공자 홍목·홍영우·홍창흠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부림홍씨세보 상권 대율파 332쪽에는 3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홍연흠의 부인은 인천 채씨로 채귀해(蔡龜海)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