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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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목은 1920년 7월 15일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서 아버지 홍형원(洪亨元)[4] 과 어머니 영천 이씨 이춘근(李春根)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오오모리(大森)구 미나미센조쿠(南千束)정에 거주했다.
그는 고학으로 도쿄부립제7중학교(東京府立第七中學校)[5] 를 졸업할 쯤에 학우와 함께 히타치 제작소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받고 취업에 실패하였다. 이때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을 실감하였으며, 그 뒤 주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병약한 신체로 학업을 이어나가기가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에도 차질이 생기는 등 여러 악재에 시달렸다.[6]
그러던 중 그는 우선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것을 결심하고 고지마치구(麴町區) 구단상(九段上) 소재 코난(興南)학원에 입학하여 베트남어를 공부하던 중, 우연히 당시 베트남어 교사로 근무하던 베트남인 응오 반 민(Ngô Văn Minh, 吳文盟)에게서 베트남 민족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해 들었다. 또 응오 반 민 역시 베트남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애국지사인 것을 알게 되자,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베트남 민족운동의 연구에 몰두하여 그 투쟁 경력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조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를 포섭하고 그 중심이 될 만한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스승으로부터 입수한 베트남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의 저서 몇 권을 참고하여, 베트남 독립운동의 상황을 내용으로 한 책을 '大山幸伸'이라는 가명으로《印度支那動乱四十年史(인도차이나 동란 40년사)》[7][8] 를 간행하고 이를 학생 및 지식층에 배포하여 독자를 규합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에 1943년 1월경 이 책을 간다구(神田區) 소재 군사교육출판사(軍事教育社)를 통해서 출판하여 일본 전역의 서점에 판매하고, 그해 11월 하순 약 2백부씩을 간다구 소재 조선인 식당인 흥아(興亞)식당·산해장(山海莊) 식당 등에서 조선인 손님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동지를 물색하여 마침내 大村松市·김정웅(金正雄)·豊山久雄 등을 동지로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홍목은 이들을 자신의 숙소 등지에서 종종 만나서 서로 민족적 열의를 드러내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운동 방침을 의논하고 동지 획득 및 포섭에 힘썼다.
이들이 의논한 사항과 독립운동 방침은 다음과 같다.
- 《인도차이나 동란 40년사》를 통해 베트남인의 독립운동 상황을 배우고 이에 따라 민족운동의 방침과 전술·전략을 본받아 앞으로 조선독립을 전개해야 할 것임.
- 이번 태평양전쟁에서는, 가까운 장래에 결국 일본이 패전할 것이며, 우리 조선민족은 일치단결하여 그 기회를 틈타 일제히 궐기하고 단번에 독립을 완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청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먼저 나서서 독립운동에 정진하여야 한다.
- 조선인의 징병제도는 조국독립을 위해서 이용되어야 한다.
- 조선독립은 타국의 원조를 받지 않고 어디까지나 조선민족 자력에 의해서 행해져서 다른 나라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 동지 획득 및 포섭에 중점을 두고 올해(1943년) 7월 중에 500명을 목표로 하여, 동경을 중심으로 한 각 지방 및 국내에 활동을 전개할 것.
- 동지는 질적으로 우수한 자를 선택하고 그리고 넓은 범위(학생·징용공·관리·노동자·소학생 등)로 획득·포섭하여 각기 위치해있는 지위를 이용할 것.
- 동지의 조직은 소집단으로 하고 4명의 동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밑에 종적 또는 횡적 연락 조직을 설치할 것.
- 일본을 패전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징용공을 동지로 포섭하고 이들을 조직화하여 감산(減産)운동을 전개할 것, 또 재일동포들에게 암매매(闇賣買)를 장려하여 일본의 경제를 교란하도록 지도할 것.
- 조선인의 계몽 및 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하기 위하여 우리말의 보급 및 조선사 연구에 힘쓸 것.
- 조선 독립운동은 시국에 대해 정확하게 전망하는 전제 하에 그 방침을 정하여야 하므로, 사회 정세 등에 관하여 면밀히 연구·검토할 것.
- 조국광복의 수단·방법은, 일본이 패전 위기에 직면할 무렵, 동지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일본정부에 독립을 요구하고 만일 불응할 경우에는 온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협력을 정지하고 폭력에 의하여 조선으로부터 일본세력을 축출하고 조선독립을 쟁취할 것.
- 조선독립은 태평양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완성하고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될 경우에는 조선은 독립국가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하도록 목표를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
결국 홍목을 비롯한 관계자 4명은 1944년 4월 1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11월 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관할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1945년 3월 미 육군 항공대의 도쿄 대공습에 의해 경찰서가 파괴되면서 감독이 소홀해진 틈을 타 지하방공호를 탈출하여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귀국하였으며, 1982년 1월 18일 별세하였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대율파-서면(西面)파 25세.[2] 인근의 남산리·동산리와 함께 부림 홍씨 집성촌이다. 홍창식 전 육군고등군사법원장과 독립유공자 홍연흠·홍영우·홍창흠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출생지인 대율리 910번지는 부림 홍씨 애연당종중의 소재지이기도 하다.[4] 초명은 홍향우(洪享佑).[5] 현 도쿄도립스미다가와 고등학교(東京都立墨田川高等學校).[6] 그러나 부림홍씨세보 상권 대율파 575쪽을 보면, 고쓰 쓰네요시(郷津常吉)의 딸인 고쓰 치하루(郷津千春)가 그의 부인으로 기재되어 있어 결국 성혼한 듯하다.[7] 부록에 '학생독서조사표'라고 하여 학적 및 주소, 성명, 애독 희망서적, 기타 출판물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는 우편엽서 1매를 첨부하였음.[8] 현재도 일본의 고서방과 일본 국립 국회도서관 등에 책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