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YMCA 야구단

 


[image]
1911년 평양 선천 등지로 원정경기에 앞서 찍은 사진. 사진 앞줄 오른쪽 부터 필립 질레트 선교사, 이정옥, 남승익, 송충근, 박영근, 김영제, 김완혁, 아래 허성. 그 위에 김영환, 현동진, 현홍운, 김유, 장용승.
[image]
1910년. 컬러복원한 사진이다.
'''YMCA'''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황성 YMCA 야구단'''
皇城基督敎靑年會 野球團
'''창단'''
1904년[1](120주년)
'''해체'''
1913년(111주년)
'''운영주체'''
황성[2]기독교청년회[3]
'''창립자'''
필립 질레트
'''주요선수'''
유영탁(투수), 허성(포수)
1. 개요
2. 역사
2.1. 연표
2.2. 1904년 : 황성 YMCA 야구단 창단
2.3.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
2.4. 1913년 : 탄압 그리고 해체
3. 재창단
4. 의의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황성 YMCA가 다른 팀을 꺾는 것은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져야만 뉴스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한국야구사》


1904년 황성 YMCA지부에서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단'''. 그리고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해외원정을 떠난 팀.

2. 역사



2.1. 연표


  • 1904년 황성 YMCA야구단 창단
  • 1906년 3월 덕어학교와 시합
  • 1906~1909년 여러 학교 야구부와의 시합을 치루며 연전연승을 기록
  • 1909년 7월 일본유학생팀 '대한흥학회 운동부'와 시합
  • 1909~1911년 지방 원정 경기(개성, 평양 등)
  • 1912년 11월 일본으로 해외 원정 경기를 위해 떠남
  • 1913년 6월 질레트 강제 추방, 허성 등 주요 멤버 유학으로 야구단 해체

2.2. 1904년 : 황성 YMCA 야구단 창단


1904년에 창단되었지만 그사이에 기록된 기록은 질레트 보고서 뿐이며, 처음으로 황성 YMCA 야구단이 언급된 자료는 1930년 4월 2일자 동아일보 "조선 야구사"라는 기사이다.[4]

"1904년에 야구가 도입되어 상대할편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그저 볼을 던지고 받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황성 YMCA 초대 총무로 한국에 재직중이었던 필립 질레트는 당시 YMCA 임시건물이었던 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미군들이 캐치볼을 하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조선인들을 보고 "조선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야구를 희망하는 이들을 모아 만든 야구팀이 바로 황성 YMCA 야구단이었다. 그러나 초기 사정은 매우 열악했는데 1906년 2월 11일에 열린 덕어학교와 훈련원 공원[5]에서 가진 한반도 첫 공식 야구경기를 소개하는 기사에서는 "운동복은 무명고의적삼에 짚신을 신었고 배트를 둘러매고 볼을 친것은 사실이나, 글러브가 없어 외야수는 손으로 공을 잡아야 했다. 배트는 단 한개를 돌려가면서 사용했다.[6]"라고 나와 있으며 흙이 거칠어 슬라이딩도 하기 힘들었고 관람석이 따로 없어서 구경꾼들은 경기장 안에 들어와 파울볼에 맞아 다치는 경우도 발생할 정도였다.
[image]
1910년 황성 YMCA 야구단과 한성학교간의 야구경기.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야구사진이다.[7]
선수들 또한 야구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라 엉성하기 그지 없었고 규칙도 현재와는 달랐는데 타자옆에 잘뛰는 주자를 배치해 타자가 타격을 하면 타자대신 1루로 전력질주 했고 포수가 공을 포구하지 못하도록 타자가 양다리를 벌려 홈플레이트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날 가진 덕어학교(德語學校)[8]와 펼친 경기에서는 첫날에는 1, 2, 3경기에서는 덕어학교가 승리, 둘쨋날 1, 2경기도 모두 덕어학교가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황성 YMCA 창단이후 대한민국의 야구는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image]

야구경기는 연중 계속 되는데 1달에 보통 6~9경기가 열렸다. 심지어 12월에도 3경기가 있었다.

『질레트 보고서』, 1911년

그러나 이때까지만해도 야구팀으로써의 모습이 갖춰지지 못했는데 황성 YMCA 야구단이 비로소 "야구팀"으로써 면모를 가지게 된데에는 1909년, 재일교포 선수들로 이루어진 동경유학생야구단과의 경기에서 였다. 그들이 입은 유니폼과 그간 몰랐던 번트등의 야구규칙등 선진 야구 문물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10년에 황성 YMCA 야구단복과 야구 용품등을 구입해 진짜 야구팀 다워진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황성 YMCA야구단은 조선 최고의 야구팀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당시 휘문의숙이 황성 YMCA에게 숱하게 깨지다가 1911년 11월 12일에 17:8로 감격의 첫승을 거둔 것이 기사화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image]
황성 YMCA 에이스 유용탁.
1912년, 황성 YMCA 야구단은 그해 귀국한 동경유학생야구단과 연합팀을 꾸려 일본인으로 구성된 야구팀들과 경기를 가지기 시작했다. 에이스 유영탁을 앞세운 황성 YMCA 야구단은 동양협회야구단, 동양척식주식회사, 성남구락부, 그리고 한반도 최강이라 불리던 조선은행까지 격파하며 경성에 위치했던 일본 야구팀들을 상대로 모두 승리를 거둔 첫번째 야구팀이 되었다. 그들의 적수는 더이상 한반도에 없었던 것이었고 황성 YMCA 야구단은 일본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2.3.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


[image]
뒷줄 왼쪽부터 김전(중견), 빵모쓴사람[9], 허성(포수), 김일(1루), 유용탁(투수), 변봉현, 현홍운(3루).
아랫줄 왼쪽부터 김영제, 김연호, 김춘식(좌익), 이규정(2루), 김영환이다.[출처]

"日本을 征服한다"는 決心으로 그젊은사람의피는 끌엇다.

일본을 정복한다는 결심으로 선수들의 피는 끓었다.

『동아일보』 조선야구사. 1930년 4월 2일.

1912년 11월 일본에 도착한 그들은 7경기를 가질 계획이었으며, 대망의 첫경기는 11월 2일에 와세다대학 야구부[10]와 도츠카 야구장에서 벌인 경기였다. 이날 경기에는 29타수 1안타 18에러를 기록하며 23:0으로 완패를 당했으며, 그후 6경기를 더 치뤘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1월 2일
와세다대학 야구부
0:23
패배
11월 4일
에바라 중학 야구부
1:9
패배
11월 6일
아자부 중학 야구부
2:2
무승부
11월 7일
세소쿠 중학 야구부
10:5
승리
11월 8일
아자부 중학야구부
3:7
패배
11월 9일
메이지대학 야구부
1:11
패배
11월 11일
도지샤 대학 야구부
0:11
패배
7전 1승 1무 5패를 기록했지만 그간의 수준차이를 생각하면 상당히 선방한 결과였고[11] 이때 습득한 선진야구는 이후 한국 야구계에 큰 힘이 된다. 다만 이때 일본인들에게 졌다는 것이 분해 귀국할때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몰래 들어왔다는 카더라가 전해져 오고 있다.

2.4. 1913년 : 탄압 그리고 해체


1913년 6월, 일제의 자작극인 105인 사건이 벌어져서 무고한 조선인들이 잡혀갔으며, 이를 본 질레트는 이 사건을 영국의 세계선교사위원회를 통해 전세계에 알리려고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물거품 되었고 강제추방되게 되었다. 거기다 주축선수였던 허성을 비롯한 주력 멤버들이 해외유학길을 오르며 빈껍데기 야구팀이 되어버렸고 "청년회관팀"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긴 했지만 이전의 강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리고 YMCA 황성지부가 일본연맹에 예속되면서 야구팀이 해체된다.

3. 재창단


2011년 YMCA 야구단이 재창단 되었다. 서울 YMCA지부에서 만들었으며 9월 25일 불암사 야구단과의 공식 첫경기를 시작으로 사회인야구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4. 의의


[image]
1911년, 한성학교와의 경기후

야구선수들에게서 프린스턴대예일대의 정신을 찾아볼수 있다. 사람들을 계몽하고 격려하는 것이 상류층의 의무라고 여긴다.

『질레트 보고서』, 1911년

황성 YMCA 야구단은 한국에 야구를 뿌리내리게 한 야구팀이자 경성내 일본 야구팀을 꺾으면서 조선인들에게 조선인도 할수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었던 팀이었다. 일본을 상대로 스포츠팀들이 승리를 거두며 조선인들의 울분을 토해내던 시절이었기에 황성 YMCA 야구단은 일본팀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를 또하나의 전쟁처럼 바라보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전국으로 야구가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일본에서 배워온 선진 야구와 해체이후 선수들이 야구선수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며 한국야구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의 전국체전이 된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리게 된 것도 이들이 야구를 알리고 야구를 퍼트림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image]
1923년에 창단된 1912 야구팀. 일본원정에 참여했던 허성이 만든 야구단으로 1912년 일본원정을 기리며 팀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기존에는 1905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2011년에 대한야구협회에서 조사결과 1904년으로 1년 앞당겨 졌다고 밝혔다.[2] 대한제국서울의 별칭으로, 황제가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황성신문의 황성도 같은 뜻.[3] 현 서울YMCA.[4] 현재 대부분의 황성 야구단의 정보와 초기 한국야구사 연구에는 이 기사를 주로 참조한다. 아래 내용도 대부분이 이쪽이 출처.[5] 서울특별시 을지로에 위치한 공원.[6] 당시 배트의 가격은 1원 50전으로 쌀 한가마니의 가격인 3원의 절반에 달했고, 글러브의 경우에는 5원 50전으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7] 참고로 포수는 허성, 타석에 들어선 이는 이영복.[8] 1898년에 세워진 독일어 학교.[9] 이사람은 선수가 아니다.[출처] 1912년 11월 2일 아사히 신문[10] 참고로 이팀은 1905년에 미국원정을 통해 야구기술을 습득한 팀이었다.[11] 질레트도 보고서에서 대학야구에서는 참패했지만 중학야구에서는 선전을 거뒀다.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