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문고등학교 야구부
1. 연혁
1.1. 조선 대표 야구부
1907년에 휘문의숙 시절에 야구부가 생겼고, 기록을 믿는다면 해체되지 않고 꾸준히 역사를 이어온 한국 최고(最古)의 팀이다.[3] 김찬호, 현두섭, 이선규를 중심으로 구성된 초대 야구부는 창단 2년째가 되던 1911년에 당대 최강의 조선인 야구인팀이었던 황성 YMCA 야구단과 맞싸워 승리한 기록이 신문에 나오기도 했으며, 1923년에는 조선예선을 뚫고 제9회 고시엔 본선을 진출하기도 했다.
1회전에서 인천상고를 상대로 6:1 대승을 거둔 휘문고보는 준결승에서 용산고를 상대로 5:1로 승리, 결승전에서 경성중을 상대로 10:1 대승을 거두며 고시엔에 진출했다.제9회 고시엔 조선예선 라인업
박석윤(朴錫胤, 감독) 및 민병길(閔丙吉, 유격수 겸 감독), 이경구(李鯨九 좌익수), 김정식(金貞植, 포수), 김종세(金鍾世, 투수), 왕명구(王命求, 3루수), 심운영 (沈雲榮, 2루수), 유재춘(柳再春, 중견수), 김종윤(金宗允, 1루수), 이순재(李橓宰, 우익수)[4]
제 9회 고시엔 본선에 진출한 휘문고보는 1회는 부전승, 2회전에서는 만주대표 다롄상업고등학교를 9:4로 격파하고 8강에 진출했지만 케이진(京津)지구[5] 예선을 뚫고 올라온 리츠메이칸 중학교[6] 에 7:5로 아쉽게 패배했는데[7] 이때 휘문고보가 거둔 8강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학교가 고시엔에서 거둔 최고기록'''이다.[8] 그러나 이 기록이 야구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당시 감독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써 활약했던 박석윤이었기 때문이다.제9회 고시엔 출전 라인업
박석윤(朴錫胤, 감독) 정인규(鄭麟奎, 유격수 겸 감독), 왕명구(王命求 3루수), 김정식(金貞植 포수 겸 중견수), 김광수(金廣洙 중견수), 김종세(金鍾世, 투수), 이경구(李鯨九 좌익수), 심운영(沈雲榮 2루수), 김종윤 (金宗允 1루수), 유재춘(柳再春 중견수 겸 포수), 이순재(李橓宰, 우익수)
1928년, 제3회 4구락부연맹전에서 9월 12일에 가진 배재구락부와의 경기에서는 선발투수 한기준이 22k를 기록하며 한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우기도했으며[9] 1935년 6월 22일 연전구장에서 휘문고보의 투수 송재경이 배재고를 상대로 7이닝[10] 5사사구 1실책으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대한민국 야구사 처음으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해 내기도 했다.
1.2. 암흑기
그러나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이고(...) 해방 이후에는 야구부 자체가 존속하는게 신기할 정도로 성적을 내지 못했다. 물론 간간히 4강권에는 들 수 있는 저력을 가진 팀이었지만, 하다못해 준우승이라도 하면 뭔가 좀 투자의 의욕도 생길텐데, 준우승도 할 수 없게 결승 자체를 진출을 못하니 고교야구의 붐업이 시작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그리고 프로가 생기는 1980년대까지 휘문고 야구부는 존재감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1958년에 휘문고 강남규가 서울공고를 상대로 '''한국야구사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는 것은 위안거리.
1.3. 영광의 시대
휘문고가 깨어난 것은 1989년 봉황기로 고교 최고의 강타자로 대회에서 홈런 8개를 날린 박정혁의 원맨쇼를 앞세워 창단 첫 결승 진출에 성공한 것이 시초였다. 훗날 구타로 팔꿈치를 다쳐 선수생명을 잃고, 다시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비운의 천재타자는 팀의 결승까지는 이끌었으나, 결승전에서 위재영이 이끌던 동산고에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이 때 1학년으로 팀의 마운드를 책임지던 임선동은 고교 최고의 투수가 되나 그와 비교되던 조성민과 달리 팀의 우승을 이끌지는 못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휘문고의 한을 풀어준 인물은 김선우였다. 김선우는 1994년 청룡기 결승에서 장충고 상대로 투수로는 승리를, 타자로는 홈런을 날리며 마침내 창단 87년만의 첫 우승을 선사했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휘문고는 일약 고교야구의 패권자로 도약해 손지환, 박용택, 유재웅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바탕으로 1995년 대통령배 준우승, 1996년 대통령배와 청룡기 2관왕에 성공했다.
그러나 거침없던 휘문고의 기세는 초고교급 유격수였던 손지환의 진로를 둘러싸고 LG 트윈스와 연세대가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면서 꼬이게 되었다. 연세대 행을 확정지었던 손지환이 LG로 막판 방향을 틀면서 대학 야구계가 휘문고 선수들의 진학을 보이콧하기로 했고[11] 진학이 우려되었던 저학년 유망주들이 대거 전학을 가면서 휘문고 야구부의 전성기는 어이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 때 전학을 간 선수들이 김동건, 허준 같은 선수들로 1999년 춘천고의 청룡기 준우승의 주역들이었다.
다행히 휘문고는 2001년 지석훈과 우규민, 정병희의 활약으로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하며 반등에 성공했다. 그 뒤 다시 침체기를 가졌지만, 2010년 임찬규의 활약으로 대통령배 우승에 성공하며 다시금 살아났고, 2014년에는 2학년 에이스 정동현과 3학년 박동철의 활약으로 봉황대기 우승에 성공하며, 4개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한 팀이 되었다.[12]
2016년 봉황대기에서 2년 만에 결승에 진출해 군산상고를 연장 13회 접전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13] 하마터면 우승이 무산될뻔한 해프닝이 있었는데. 무사 만루에서 김재경의 끝내기 안타가 나왔지만 너무 흥분한 선수들이 3루 주자가 홈플레이트를 밟기도 전에 그라운드에 난입했고, 그 중 한 선수가 3루 주자에 걸려 넘어졌다. 3루 주자는 직후 홈플레이트를 밟기는 했지만 상대팀인 군산상고가 강하게 어필했고, 어필이 받아들여져 수비방해로 3루 주자가 아웃 처리되었다. 휘문고는 1사 만루로 경기가 속개된 직후 고명규의 희생플라이로 겨우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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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아웃 장면.
2019년에는 대통령배 8강에 올랐고, 봉황대기에는 주축 투수인 이민호가 청소년대표팀에 차출된 가운데에서도 4강에 올랐다. 8월 23일 성남고를 준결승전에서 이기면, 경남고 - 강릉고 준결승전 승자와 결승전에서 만난다. 준결승전에서 성남고를 이기면서 먼저 끝난 준결승전 승자인 강릉고를 만나게 되었다. 결승전에서는 강릉고와 연장 접전끝에 7:6으로 승리하며 3년만에 통산 세 번째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74회 봉황대기에서 우승하면서 2010년대에서만 우승 3번을 기록하면서 2010년대 봉황대기 최다 우승팀이 되었으며, 공교롭게도 전면드래프트에서 1차지명이 다시 부활하던 해인 2014년 이후에만 3번 우승을 차지하였다.
2020년에는 청룡기 32강전에서 광주동성고에 3-11 7회 콜드게임패를 당했다. 협회장기 32강전에서 2020년 황금사자기 우승팀 김해고를 7-5로 꺾고 16강전에 진출했으나 경북고에 0-7 8회 콜드게임패를 당했다.[14]
2. 야구대제전
- 역대전적 : 4승 4패(부전승 1승 포함)
- 최고기록 : 4강 (2014 야구대제전)
제2회 야구대제전에서는 1회전 부전승 후 신일고등학교를 상대로 14:1, 5회 콜드게임을 기록한 대전고등학교와 만나게 되었는데 좌완 김현재가 완투하며 3:2로 8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부산고등학교와 만난 8강에서 초반에 4:0으로 앞서나가다 6회 만루상황에서 조성옥(당시 동아대)이 주자를 모두 쓸어담는 싹슬이 2루타를 기록하며 동점을 기록했고 9회말에 부산고등학교 대타 장상철에게 끝내기 안타를 얻어 맞으며 아쉬운 패배를 기록했다.
제3회 야구대제전에서는 전주고등학교와 1회전에서 만나 차준섭의 완투를 앞세워 5:1로 승리, 2회전에서는 대구고등학교와 만나 차준섭의 완투를 앞세워 4:3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부산상업고등학교와 만난 8강전에서 노상수와 임윤섭에게 합작 4피안타 완봉을 당하며 5:0으로 패배 8강에서 탈락했다.
2013 야구대제전에서는 조별예선에서 탈락했고 2014 야구대제전에서는 개성고등학교(3:0), 경북고등학교(5:3)를 차례대로 꺾고 4강에 진출했으나 홈그라운드였던 마산용마고에게 4:0으로 패배했다.
2015 야구대제전에서는 신일고등학교를 11:7로 꺾고 8강에 진출했지만 경남고등학교에 4:0으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3. 기타
- 2014년 11월 18일에 마리아노 리베라가 방한한후 재능기부의 일환으로 휘문고등학교를 방문했다.
- 서울고 야구부와 마찬가지로 입시비리 커넥션 의혹을 받고 있다. 서울고는 4할타자 홍승우가 대학진학을 못하고 재수생으로 전락한 데 비해 여긴 실력 미달인 선수를 특정대학으로 입학시켰다고. 정확한 선수 이름은 댓글 보면 된다.관련 기사 결국 해당 감독은 휘문고를 우승시켰지만 옷을 벗게 되었다.[15]
- 한국 야구계 역사상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3개 학교[16] 중 하나다. 1958년 5월 22일에 열린 청룡기 서울 예선에서서울공고를 상대로 강남규가 고교야구 첫 퍼펙트를 기록했고, 1972년 3월 27일에 열린 대통령배 서울 예선에서 송범섭이 경동고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다.
- 휘문고를 상징하는 손가락 제스쳐가 있다. 휘문을 W를 손모양으로 만드는 것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왜 피스하는거야?"라고 생각할수도. 2016 KBO 신인드래프트당시 이정후가 1차지명자들 포토타임 당시 이 제스쳐를 취하며 야갤러들과 혀갤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 야구부 출신 중에 독특한 이력의 주인공으로 전형필이 있다. 출처 일제강점기 시절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내고, 각종 학술 가치가 높은 유물들을 일제의 손에서 지켜내며 한국사 연구에 엄청난 공을 기여했던 그 간송 전형필 선생이 맞다. 휘문고 재학시절 야구부장으로 재직했는데, 축구부장 박정휘, 미술부장 이마동과 함께 친하게 지내서 삼총사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여담으로 박정휘는 축구선수 및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하고 이마동은 홍익대학교에서 미술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자기 적성과 맞게 직업을 가졌는데 전형필은 야구와 관련 없는 교육자 겸 문화재 수집가로 활동하게 된다. 사실 교육자로써 그리고 대한민국의 유물들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학자로써 대한민국 역사학에 엄청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야구계로서는 아쉬운 부분이지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 야구선수가 되지 않은 것이 더 큰 축복이긴 하다.
- 체육 시간에 일반 학생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는데, 야구장이 없고 운동장을 같이 쓰는 사정상 축구하다가 가끔 공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 2020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이민호가 서울권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LG 트윈스의 1차지명을 받음에 따라, 4년연속 1차지명자를 배출하였다. 게다가 3년연속 서울권 전체 1순위를 배출하였다.
4. 사건사고
- 2017년 에이스 안우진이 동기 셋과 함께 후배 선수들을 폭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물쩍 넘어가는 모양새가 되었고 안우진은 국제대회 3년 출전 정지라는 징계에 그쳤다.[17] 이마저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서 내린 징계라 프로 입단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심지어 SBS의 후속 보도를 통해 휘문고등학교 야구부 3학년 학부모들이 1, 2학년 학부모들을 꾀어 '자발적으로' 탄원서를 작성하게 했으며 내부 고발자 색출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5. 출신 인물[18]
[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2] 나무위키에 등재된 선수만. 졸업 연도 순. 흑역사는 취소선 처리.[3] (기록이 맞다는 전제하에) 1905년에 창설된 한성고교, 인천고에 이어 3번째로 창설된 야구부.[4] 출처 : 한국야구사.[5] 교토부+시가현[6] 여담으로 리츠메이칸 중학교(현 리츠메이칸 고등학교)는 준결승에서 그해 우승팀인 효고현 대표 코요 중학교(현 코요가쿠인 고등학교)에 패배했다. 참고로 코요가쿠인은 고시엔에서 가까운 간사이 최고의 명문고 중 하나며, 2003년 이전의 휘문고처럼 고등학생들이 사복을 입고 다닌다.[7] 이때 다롄상업고와의 경기에서 주전 포수 김정식이 다친 것이 치명타였다.[8] 부산상고, 경성중, 대구상고, 선린상고, 인천고등이 고시엔 본선에 참가한적이 있지만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일부 조선인 선수가 포함된 학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고등학교들도 8강에는 오르지 못했기에 대한민국 고교야구팀중 유일하게 8강에 올라간 팀이 휘문고 야구부다.[9] 1975년 6월 28일 철도고등학교의 선발투수 이진우가 22k를 기록하며 타이기록을 이룬다. 여담으로 KBO 리그 한경기 최다 탈삼진은 류현진의 17K.[10] 13:0으로 승리하면서 7회 콜드게임으로 처리되었다.[11] 실제로 이렇게까지 가지는 않았다. 1993년 말 김재현과 이호준이 고졸 연고 선수 계약 마감일(11월 15일)을 전후해 프로로 방향을 돌리자, 대학에 가등록한 선수가 프로로 방향을 돌릴 경우 대학 팀들이 해당 고교 선수들을 5년 동안 받지 않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아마야구에서 제 발목을 도끼질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아 실질적인 효력은 없었고, 1997년 아마야구 일선 지도자 자리가 프로 출신들에게 전면 개방되면서 사실상 폐지되었다.[12] 여담으로 박동철은 그 전까지 방어율 10점대에 통산 4경기 등판한 듣보였고, 2학년때 1이닝 무실점, 3학년 때 3이닝 3실점, 0이닝 1실점, 0이닝 4실점(...)으로 평자가 핵폭발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봉황대기에서 배재고를 상대로 5이닝 노히트라는 기적적인 활약을 했고, 이 한 경기가 인생경기가 되어 연세대학교에 진학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연세대 진학 이후 1경기도 나오지 못하고 2018년 야구부 명단에서 사라졌다. 군 입대 혹은 야구 포기인듯.[13] 같은 날 프로야구에서는 휘문 출신의 두산 베어스의 허준혁과 LG 트윈스의 임찬규가 승리 투수가 되었고, 특히 LG-SK전에서는 역시 휘문 출신의 박용택이 결승타를 날리며 휘문고 학생들과 교우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14] 코로나 19로 인해 청룡기/황금사자기 출전팀을 먼저 추첨으로 결정했고, 그 후에 대통령배/협회장기 출전팀을 추첨으로 결정하여 황금사자기와 대통령배에는 출전하지 않았다.[15] 여담으로 이명섭 감독은 이전에도 춘천고 야구부를 청룡기 준우승까지 시켰으나 2000년에 비리문제에 연루되어 사임했던 경력이 있다. 실력은 있지만...[16] 경상중, 선린중, 휘문고[17] 그쳤다라고 표현했지만 대한체육회 규정에 따르면 3년 이상 국제대회 출전 정지 징계를 받게 되면 영원히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한다.[18] 나무위키에 등재된 선수만. 졸업 연도 순. 흑역사는 취소선 처리.[19] 원래는 포수였지만 kt 입단 후 투수 전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