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전투
1. 개요
6.25 전쟁 시기, 1951년 2월 펼쳐진 중공군 3차 공세에서 한국군 제8보병사단이 중공군 13병단의 공격에 궤멸당한 전투.
2. 전투 전 상황
1951년 1월, 유엔군은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명령에 의거해 북쪽으로의 반격을 개시, 중공군이 물러난 지역을 접수하며 순조롭게 전진 중이었다. 그러던 중 2월에 들어와 횡성과 지평리 일대에서 전선을 정리하기 위한 반격 작전인 라운드업 작전이 개시, 한국군 3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북으로 전진해 나갔다. 한데 점차 적의 저항이 강해지며 진격이 무뎌지기 시작하면서 횡성과 지평리 두 곳에 돌출된 전선을 형성했고, 이렇게 진격이 무뎌진 미군과 한국군을 노리고 중공군의 대공세, 이른바 중공군 3차 공세가 펼쳐지게 된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의 공세를 격파하기 위해 골몰하던 중,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진격한 유엔군 병력이 톡 튀어나온 걸 보자 이들을 잡아먹기 좋은 절호의 먹이로 판단했다. 당시 펑더화이는 라운드업 작전으로 돌출된 지평리 일대의 미군과 횡성 일대의 한국군을 놓고 어느 쪽이 격파하기 더 좋은 먹잇감인지 골몰했고, 횡성과 지평리중 어느 쪽을 우선할지에 대해 중공군 수뇌부 내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결국 횡성 일대의 한국군이 머릿수는 더 많아도 약체란 점 때문에 횡성이 우선 목표가 되었으며, 중공군은 횡성 일대에서 돌출된 한국군 8사단을 격파해 커다란 구멍을 만든 후 유엔군의 측후방을 유린하는 공격작전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중공군 공세의 가장 첫 목표는 한국군 8사단이 되었다.
당시 횡성 일대에 있던 한국군은 공격작전 중이라 제대로 된 방어진지를 마련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공세를 우선하다 보니 부대간에 촘촘한 방어선조차 꾸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한국군 8사단은 사단 예하 부대 사이에 빈틈이 많이 생겨 있을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단과도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왼쪽, 오른쪽, 옆구리까지 비워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작전계획 상 제대로 된 예비대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캄캄한 밤이나 새벽을 틈타 홍천 방면에서 연결되는 산악 능선을 타고 이미 다수의 중공군 병력이 횡성 일대에 잠입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중공군의 공세가 몰아쳤다.
3. 전투
1951년 2월 11일 밤, 중공군 40군 42군 66군은 8사단을 향해 쓰나미처럼 몰아닥쳤다. 8사단이 만들어둔 부대 간격 간격마다 중공군이 파고들어갔고, 빈틈을 따라 깊숙이 내달린 중공군은 곳곳에서 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며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대대도, 연대도, 사단도 전혀 지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된지 몇 시간만에 8사단은 완벽하게 마비상태에 빠졌다.
조직으로서 움직이지 못한 채 고립된 8사단 병력들은 무질서하게 후퇴를 시작했으나 곳곳에서 퇴로를 차단한 중공군에 의해 후퇴 도중에 격파되고 말았다. 8사단의 전방 부대가 궤멸되면서 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던 미군 지원병력과 한국군 포병대도 그대로 포위망에 갇혔고,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중화기와 중장비를 전부 버린 끝에 겨우 몸만 건질 수 있었다.
2월 13일, 중공군의 공세 시작 후 대략 하루만에 8사단은 궤멸되었다. 살아 돌아온 뒤 차후 다시 전투 투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 8사단 병력은 3000여명 정도. 그 중에서도 태반은 애초 후방인 사단본부에 있던 병력으로, 사단 전방에 있던 8사단 예하 3개 연대는 대부분이 전사, 포로 혹은 부상으로 전투서열에서 빠짐에 따라 소멸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4. 결과
8사단을 격파하면서 만들어낸 돌파구를 통해 중공군은 공세를 계속 했고, 한국군 3사단과 5사단도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중공군은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갔으나 미 제 2사단에 의하여 지평리에서 저지, 그 동력을 잃고 공세를 중단해야만 했다.
8사단이 붕괴되어 무질서하게 패주하자, 중공군의 공세에 방어선을 뚫린 후방의 한국군 포병과 미군도 장비를 버리고 급히 퇴각하였다. 이 와중에 네덜란드 대대가 유일한 퇴각로인 횡성교를 24시간 동안 사수하였기에 그나마 살아남은 한국군과 미군이 전멸하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대대는 54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지휘관인 마리뉘스 덴 아우던 대령이 전사하였는데, 이는 한국전쟁 중 천안 전투때와 마찬가지로 야전지휘관이 전장에 뛰어들어 전사한 사례이다. 이들이 아군 병력의 전멸을 막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횡성교를 지켜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8사단 병력은 사단 작전명령에 따라 후방으로 이동하여 재편성 과정에 들어갔다. 또한 원주 - 문막 도로와 원주 - 제천 도로 상에 낙오병 수집소를 설치하여 후퇴 과정에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였다. 이 전투 덕분에 네덜란드군 참전기념비는 횡성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5. 기타
리지웨이는 이후 자서전에서 횡성 전투를 두고 ‘한국인의 유전자에 중국인에 대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라고 했는데, 이는 그 때까지 한국군의 무능한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저리 써놨다고 한다. 오늘날 시점으로 본다면 유전자 운운한 건 인종차별적 발언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당시는 잘하든 못하든 거기서 어떤 인종적 특징이 있다고 여기던 시대였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횡성 전투를 두고 미군이 일부러 한국군을 돌출시켜서 미끼로 쓴 건 아닌가 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8사단 측에서 적정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그냥 진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건의하였지만 미 10군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가 그냥 씹고 계속 진격하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고, 횡성에서 한국군이 궤멸되었지만 그렇게 생긴 빈틈으로 파고든 중공군을 결국 지평리에서 저지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중공군 3차 공세를 저지시켰기 때문.
한데 중공군의 반격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 치고는 횡성에서 8사단의 준비 태세 자체가 꽤나 졸렬했다. 거기다 당시 상황에서 전방으로 돌출된 부대는 횡성 일대의 한국군만이 아니라 지평리 일대의 미군도 마찬가지였으며, 중공군 수뇌부도 지평리를 노릴지 횡성을 노릴지 고심하다 횡성을 선택했다. 즉 한국군만 돌출시켜 미끼로 썼다고 보기엔 지평리에 돌출된 미군 때문에 무리가 있는 것.
퇴각로를 사수하여 한국군과 미군의 전멸을 막아낸 네덜란드군의 활약을 기념하여 네덜란드군참전기념비가 강원도 횡성의 횡성참전기념공원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