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第三步兵師團'''
'''The 3rd Infantry Division'''
[image]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 필사즉생 골육지정'''
'''창설일'''
<colbgcolor=#fff>1947년 12월 1일[1]
'''상징명칭'''
'''백골부대(白骨部隊)'''
'''소속'''
[image]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image] 제5군단
'''규모'''
사단
'''역할'''
철원군 지역 일대 수색 및 경계
'''사단장'''
[image] 소장 손식(육사 47기)
'''위치'''
강원도 철원군

1. 개요
2. 상세
3. 부대 마크
5. 예하부대
5.1. 사단 직할대
5.2. 제18보병여단 진백골[2]
5.3. 제22보병여단 혜산진[3]
5.4. 제23보병여단 38선 최초돌파 맹호
6. 과거부대
7. 출신인물
7.2. 장교/부사관
7.3. 병
8. 기타
8.1. 근무환경
8.2. 사단가
8.3. 부대구호
9. 사건사고
10. 여담

'''보병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보병사단(이하 "사단"이라 한다)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image]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국군 육군 제5군단 예하 제3보병사단. 상징명칭은 백골(白骨)부대. 주로 철원에 위치하여 최전방 GOP, GP를 지키는 철책사단.
메이커 사단답게, 이곳의 사단장이 되면 3스타를 넘어 4스타도 노릴 수 있을 정도이다.

2. 상세


1947년 12월 1일 조선경비대 제5, 6, 9연대[4]를 근간으로 부산광역시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의 8개 초기사단 중 하나. 이응준 보병대령을 초대 여단장으로 조선경비대 '제3보병여단'으로 창설되었으며, 1949년 5월 12일 최덕신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하여 '제3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5]
18연대(진백골연대)[6]는 자원입대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부대였다. 따라서 극도의 반공성향과 전투적 기질을 자랑했고,[7] 자신들의 철모 좌우에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라는 의미로 백골(白骨)마크를 그려넣었다고 한다.
하여간 이 때문에 "백골부대" 명칭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으며,[8] 이 와중에 3보병사단의 별명은 "사자부대" 였는데, 6.25 전쟁 이후 여력이 생기자 보다 전투적인 명칭을 원하는 사단장의 의향에 따라 "백골부대"가 사단의 공식 명칭이 되었고, 18연대 역시 자신들이 원조 백골이라는 의미로 명칭을 진백골로 바꾸었다.
6.25 전쟁 발발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전투에 참여해왔고, 특히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삼팔선을 돌파해(사단 예하 23연대 10중대) 현재 국군의 날의 유래가 되었다. 이때 3사단장이 참군인으로 이름 높은 이종찬이었다. 이종찬은 1950년 11월 12일에 최석 준장으로 사단장이 취임할 때까지 3사단장직에 있었다. 그러나 1951년 그 유명한 현리 전투에서 부대원 2/3가 전사, 실종당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9]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당시 3사단 사단장이 전장병 외출 및 귀가 통제 조치를 하여 전쟁이 터지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휴전 후에는 1973년 3월 7일 전방에서 군사분계선 푯말 보수작업을 실시하던 중 인민군 육군 초소에서 총격을 가하자, 사단장 박정인 장군의 지휘로 예하 71포병대대가 도발을 가한 인민군 초소를 제압하고, 부대원들을 구출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전투는 휴전 이후에 전방에서 발생한 30여 건의 북한군 침투에 가장 성공적, 모범적으로 대응한 '완전작전'의 사례로 손꼽힌다. 매년 3월 7일에는 3.7 완전작전 선봉대대 영내에서 기념행사를 실시한다.[10]
6.25 전쟁 때부터 백골부대로 불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전쟁당시에는 백골부대가 아니라 사자부대(獅子部隊)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1]
현재는 제5군단 예하 사단으로 중부전선 철원 지역에서 제6보병사단과 함께 GOP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아래에는 국군 최초의 기갑여단인 제1기갑여단과 국군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제5포병여단 있으며, 대한민국 육군을 대표하는 메이커 사단이다.
전통적으로 해골을 좋아하는지라, 자체행사나 내부 구조물, 현판 등에는 무수히 많은 해골(…)을 그려넣고 있다. 예를 들면 아래의 사진.
[image]
47번 국도를 타고 포천시 이동면에서 철원군 서면으로 넘어가면 만날 수 있는 조형물. 43번 국도 문혜리에서 와수리로 가는 길에도 있다.[12] 사단사령부 입구에도 당연히 있다.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이등병들에게 주는 술도 '''백골주'''라고 부른다. 해골모양 잔에 술을 담아서 백골주(…).[13] 경례구호도 다른 부대와 달리 '''"백골!"''' 이라고 한다. 1972년까지 경례구호가 "돌격"이었는데, 제25대 박정인 사단장이 '살아 국가에 충성하고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자'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백골"로 변경하였다.
의외로 회관이름은 삼성회관인데 삼성회관 옆에 영외 PX인 삼성마트가 있다. 진백골연대의 회관 이름이 백골회관이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으며, 근시일 내 사단 사령부가 경기도로 이전할 계획이다.[14]

3. 부대 마크


[image]
이 이미지는 해골마크가 빠져있던 시절의 구형 부대마크인데 오류가 있다. 아래 두 개의 별이 상단의 별과 같이 양 다리가 아래로 향해있는데 원래는 별의 꼭짓점이 삼각형의 꼭짓점을 향해 있어야 한다. 문서 상단의 현 부대마크를 보면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이 이미지가 디씨 백골갤 자동짤방으로 있던 시절에 이미지를 수정해야 한다고 건의글이 꽤나 올라갔으나 알바가 무관심한 탓인지(...) 바뀌지 않았다.
[image]
이 때의 부대마크는 은근히 육군본부의 부대마크를 닮아서 전투복에 원색마크로 오바로크를 치던 시절에는 멀리서 보면 헷갈리기도 했다. 큰 차이점은 가운데에 큰 별이 있으면 육군본부 부대마크, 없으면 제3보병사단 부대마크였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육본 마크는 하단 두개의 별이 상단 별과 같이 정위치 되어있지만 백골부대는 상술한바와 같이 별의 꼭짓점이 삼각형의 꼭짓점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외곽 삼각형의 삼변의 중간 지점이 육군본부 마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지만, 백골부대의 경우는 쐐기 문양으로 끊겨 있다. 끊긴 부분끼리 이어보면 역삼각형이 나온다. 삼각형 안에 이렇게 역삼각형을 만들면 위와 양 옆에 삼각형이 3개 생긴다.
하지만 전반적인 부대마크 디자인이 상당히 비슷하고 중앙의 별표만으로는 구별이 잘 되지 않았고, 이 때문인지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전투복에 오바로크 치는 부대마크가 위장색 마크로 변경되면서 같은 파랑 원색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위장색에서 색상배열의 차이를 두어, 검정색 계열의 바탕을 사용하는 육군본부 마크와 달리 연두색 계열의 바탕을 사용해서 원색마크와 상당한 차이점을 두었다.
해골마크가 민간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부대 이미지에 타격이 생긴다는 이유로 부대마크에 넣지 않았다.[15] 애초에 전투복 상의에 부착하는 연대 비표에 해골마크가 들어가는데 부대마크에 넣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 다소 디테일한 해골이 들어가 사단마크 치고는 복잡한 모양인 탓에[16] 단순화 과정에서 빠졌다는 게 정설이다.
부대 측에서도 해골마크를 '죽을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산다'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정신, '죽을 수는 있어도 패할 수는 없다'는 수사불패(雖死不敗)의 정신을 담는 것으로 정의하는 등 상당히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실제로도 부대를 거쳐 간 지휘관이나 장병들이 북한과 대치하는 최전방의 부대임에도 부대마크가 용맹성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며 개선을 요구하는 건의를 꾸준히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덕분인지 몰라도 2012년 12월 3일부터 부대마크에 다시 해골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육군본부 마크와 완전 구별이 가능해져서 위장색 마크도 기존 연두색 바탕에서 육군본부 마크와 동일한 검정색 바탕으로 바뀌었다.
연대 비표 때문에 육군본부 독극물 처리부대나 화생방부대로 오인받기도 한다. 실제로 DC인사이드 백골부대 갤러리에 가보면 23연대 병사는 육군본부 독극물처리부대로 포병연대 병사는 육군본부 폭발물처리반으로 오인받았었다고 한다.

4. 신병교육대



'''제3보병사단 신병교육대 (백골신병교육대)'''
'''第三步兵師團 新兵敎育隊 (白骨新兵敎育隊)'''
'''The 3rd Infantry Division Recruit Training Center ("White Skull" Boot Camp)'''

'''위치'''
강원도 철원군 서면 자등리 402


5. 예하부대




5.1. 사단 직할대


과거 1992년 5월 22일 야음을 틈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월경하여 침투한 적 3명에 대해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수색대대를 투입하여 전원 사살한 작전이 있는데 5.22 완전작전이라 한다. (정규전 제외하고 최초 을지무공훈장을 배출한 작전)
  • 제3전차대대
  • 공병대대
  • 정비대대
  • 보급수송대대
  • 정보통신대대
  • 의무근무대
  • 군사경찰대
  • 화생방지원대
  • 방공중대
  • 보충중대

5.2. 제18보병여단 진백골[17]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진백골1대대
  • 아리랑2대대
  • 백혼3대대


5.3. 제22보병여단 혜산진[18]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불사조1대대
  • 이한림2대대
  • 야성마3대대


5.4. 제23보병여단 38선 최초돌파 맹호


  • 여단본부
  • 군수지원대대
  • 비호1대대(신병교육대)
  • 백호2대대
  • 청호3대대(38선 최선봉 돌파 대대)


5.5. 포병여단 왕벌


  • 여단본부
  • 제11포병대대(대한민국 국군 창설 후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하나)
  • 제71포병대대(3.7완전작전 포병대대 사단 내에서는 11포병대대 때문에 콩라인 취급을 받는경우가 많다.)
  • 제72포병대대
  • 제635포병대대


6. 과거부대


  • 제26기계화보병여단[19]
  • [20]

7. 출신인물



7.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3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최덕신
중장 예편

제1군단장
[21]
00대
채원개
준장 예편

사단장

00대
이응준
중장 예편
일본육사 26기
사단장

00대
김백일
중장 추서

사단장
[22]
00대
유승렬
소장 예편
일본육사 26기
사단장

00대
이준식


사단장

00대
김석원
소장 예편
일본육사 27기
사단장

00대
이종찬
중장 예편
일본육사 49기
사단장
[23]
00대
최석
중장 예편

사단장

00대
백남권


사단장

00대
임선하


사단장

12대
김종오
대장 예편

사단장
[24]
00대
신응균
중장 예편
일본육사 53기
사단장

00대
김상복


사단장

00대
정래혁
중장 예편
육사 7기
사단장

00대
김상복


사단장

00대
장우주


사단장

00대
조혁환


사단장

00대
유은국


사단장

00대
최철


사단장

00대
박정인
준장 예편
육사 6기
사단장
[25]
00대
권익겸


사단장

00대
오철


사단장

00대
박세직
소장 예편
육사 12기
사단장
[26]
00대
박영일

육사 23기
사단장

00대
안충준

육사 25기
사단장

00대
박흥근

육사 26기
사단장

40대
이성규

육사 28기
사단장

41대
고기원

육사 29기
사단장

42대
박수근

3사 4기
사단장

43대
김종해

육사 32기
사단장

'''44대'''
'''김요환'''
대장 예편
육사 34기

[27]
45대
유영조


사단장

46대
신원식
중장 예편
육사 37기
수도방위사령관
[28]
47대
윤완선

육사 38기
사단장

'''48대'''
'''김운용'''
대장 예편
육사 40기
지상작전사령관
[29]
'''49대'''
'''남영신'''
대장
학군사관
육군참모총장
[30]
50대
김현종
중장
육사 44기
제5군단장
[31]
51대
신상균

육사 45기
사단장

52대
손식

육사 47기
사단장


7.2. 장교/부사관


  • 채명신 - 한국전쟁 당시 22연대 연대장과 사단참모장으로 있었다.
  • 정승화 -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총장. 현리 전투 당시에 23연대 예하 대대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었다.
  • 이원계 - (?~1950.12), 한국전쟁 초기 북진시기의 진백골연대 6중대장. 계급은 대위, 사후 소령으로 추서. 6중대는 북진 당시 함경북도 부령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대장 포함 중대원 전원(후방으로 후송된 1명 제외)이 옥쇄하고 말았다. 2010년대 중반 즈음 진백골연대의 모 소초의 이름이 이분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당시 6중대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고 최수용 옹(2011년 별세)은 울산에 추모관을 건립하고 6중대원들의 위령제를 지냈다. 현재 6중대의 위령제는 2014년부터 철원에서 열리고 있다. [32]
  • 박한기 - 학군 21기 출신으로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이다. 소위시절 23연대 3대대에서 소대장을 역임하였으며, 중위 시절 같은 대대에서 훈련 및 작전항공장교와 정보장교를 역임했다.
  • 김승겸 - 육사 42기 출신으로 현재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다. 대위 시절이던 1992년 5월 22일, 야음을 틈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한 무장공비 3명을 차단 및 수색, 교전을 통해 전원 사살한 5.22 완전작전(위에 설명한 은하계곡 대침투작전)에서 전초13중대장으로서 큰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소령 진급 후에는 사단 예하 대대 작전장교를 역임했다.
  • 이철원 - 육사 42기 출신으로 현역 대령이다. 파병부대 아라우부대의 부대장이었었다. 지난 2011년경에는 3사단 참모장으로 있었고, 그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캐슬린 스티븐스와 35년 만에 해후하였다. 1976년 이 대령은 예산중 1학년이었고, 캐슬린 대사는 그 학교 영어교사였다.
  • 최진규 - 학사 9기 출신으로 현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이다. 대령시절 사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 김종민 -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재 사법위원회 보좌관으로 6.25 전쟁 당시 정승화가 있었던 18연대에서 중대장, 대대장으로 복무. 6.25전쟁 참전기 '대전쟁' 집필.
  • 정철재 - 3사 23기 출신으로 현제 제2군단장이다. 대령시절 18연대장을 역임했다.
  • 강건작 - 육사 45기 출신으로 현재 청와대 국방개혁비서관이다. 대령시절 22연대장을 역임했다.
  • 신희현 - 학군 27기 출신으로 현 제2신속대응사단장이다. 대령시절 예하 연대장을 역임했다.
  • 정덕성 - 학군 29기 출신으로 현 제12보병사단장이다. 대위시절 18연대 1대대에서 중대장을 역임했다.
  • 노경희 - 여군 36기 출신으로 진급 후 부사단장을 역임했다.
  • 오금손 - 독립운동가 오수암의 외동딸이자 한국전쟁 당시 간호장교로 복무했던 백골부대의 전설적인 전쟁영웅.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의 국군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의 수발을 들던 중, 기습해온 조선인민군 병사 11명과 맞닥뜨리자 개인무장인 M1 카빈으로 대응하여 6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패퇴시켜 살아서는 받기 힘든 2계급 특진을 받아 대위로 진급했다. 이후 K고지 전투 중 전우들과 함께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전역.

7.3. 병


  • 건일
  • 겔부 - 꾸나꼬무이야기 작가. 22연대에서 복무했었다.
  • 권지용 - 2018년 2월 27일 3사단 신병교육대로 입대하여 11포병대대에서 복무했다.[33][34]
  • 김원기 - 前 프로게이머. 혜산진연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했었다.
  • 김선웅 - 코미디언, 혜산진연대에서 행정병 및 CCTV병으로 근무 하였다.
  • 김정현 - 21살입대하여 3사단 조교로 복무했다고 한다. 기사
  • 김칸비 - 18연대에서 복무했었다.
  • 박영진 - 포병연대 예하대대에선 PX병으로 복무했었다.
  • 씨드락 - 오인용 소속 애니메이터. 박격포병으로 복무.
  • 양동근 - 사단본부 군악대 출신. 이후 국방홍보원으로 전출갔다가 그곳에서 전역.
  • 이규형 - 영화감독. 영화 DMZ, 비무장지대에서 자신의 경험을 영화화 하였다고 밝힘. 3사단 작전과 행정병이었으나 수색중대로 전출.
  • 이시언 - 신병교육대 조교로 복무. 주호민과 신교대 동기라고 한다.
  • 이준혁 - 연예병사로 물의를 일으켰다가 23연대로 전출.
  • 이종윤 - 목사, 신학자. 18연대 3대대에서 군종병으로 복무했으며, 자신이 복무한 부대에 벧엘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개척했다. 학보병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귀휴했다고 한다.
  • 임영웅
  • 장동민 - 22연대에서 복무했었다. 베스트 댓글 참고.
  • 주원 - 2017년 5월 16일 3사단 신병교육대로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1등상으로 받았고 수료 후 조교로 복무했다.
  • 주호민 - 신병 훈련만 여기서 받고, 운전병 교육 후엔 육군 제101보병여단에 배치됐다.
  • 진용진 - 유튜버. 이 글을 보면 진용진의 전투복에 노란색 패치가 붙어있는데, 노란색 패치가 3사단 예하 연대 중에서도 22연대를 의미한다. 또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영상에서 '백골'이라는 사람이 남긴 댓글에 따르면, 진용진은 정확하게 따지면 3사단 22연대 3대대 본부중대 출신이었다.
  • 박호두 - 유튜버. 3사단 22연대 출신이다.
  • 우주하마 - 유튜버 겸 트위치 스트리머. 군대리아 먹방중 본인의 경례구호가 백골이라고 밝힘.
  • 나원탁

8. 기타



8.1. 근무환경


아무래도 별명도 그렇고, 부대 이미지가 상당히 험악해서인지(…) 갓 입소한 장정들에겐 빡센 부대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306보충대 같은 곳에서 훈련소와 자대를 통보받을 때, 모 장정이 "훈련소 3사단, 자대 3사단!" 소리를 듣게 되면 옆에 같이 있던 다른 장정들이 모두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심지어는 애도를 표하는 경우도........
그도 그럴 것이, 306보충대에서 충원하는 병력은 제3야전군사령부 예하 부대들로 배치되었는데, 3사단의 경우 이들 중 가장 빡센 지형조건에서 주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전방 경계부대라 군기를 강하게 잡는데다 무릎과 허리도 많이 망가지고, 복귀하면 훈련 때문에 할건 또 짜증나게 많고, 부대 전통때문에 다른 육군 보병사단보다 훨씬 전투적인 자세를 요구하며 그렇다고 내무생활이 편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 빡세다는 지형조건이라는 것도 과거 제3야전군 예하의 경기도 쪽 사단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그래봤자 진짜 강원도 중동부전선의 산악지대에 비하면야(…). 바로 옆 사단인 15사단과 비교해봐도 상당히 완만한 지형이다. 철원이 상당힌 넓은 평야지대인데 화천과 경계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 15사단이 담당하는 섹터가 이 험준한 산악지형이 시작되는 철원과 화천의 경계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동부전선 보다 더 춥다. 철원이 남한 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기도하다. 실제로 한파가 몰아치는 해에는 철원이 동시베리아보다 더 춥기도 하다.[35]
MBC 주말 예능프로그램인 일밤의 병영체험 예능 코너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해군 제2함대 다음 부대로 선정되어 12월 10일부터 5박 6일간 촬영을 하였으며 물론 시기가 시기인 만큼 혹한기 훈련도 실시하였다. 이후 진짜 사나이 300의 부대들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의외로 외출/외박시 가볼 만한 명승지가 많다. 도피안사, 직탕폭포[36], 임꺽정 바위 등. 그러니 외출/외박시 PC방만 가지 말고 명승지 좀 돌아보자. 언제 이런 곳에 들러보겠나.
일반인들은 겉으로만 보이는 해골과 관련된 이미지만 보고 빡세다고 생각하지만 철원-포천 지역이 강원도와 경기도 사이에 넓게 펼쳐진 분지 평야지대[37]다 보니 산악지대에 위치한 부대나 훈련량이 장난 아닌 기계화부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편한 부대에 속한다. 험준하다는 것도 3군예하의 경기도쪽 사단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철원이 15사단이 관할하는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3군관할인지라 주로 경기도쪽 전방사단들과 비교해서 그런듯하다. 같은 강원도 철원지역의 바로 옆 사단인 15사단에 비하면 훨씬 지형이 평탄하다고 할 수 있다. 15사단이 관할하는 철원과 화천의 경계지점부터 험준한 산악지형이 시작된다. 직할대, 18연대, 22연대, 23연대, 포병연대 중 18연대와 22연대는 GOP를 담당하는 부대인데 18연대는 담당 작전지역 중 일부구간의 지형이 강원도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하며[38] 심지어 22연대의 담당구역 중 절반 정도는 넓찍한 평야지역이다.[39]
2011년 때려잡자 김정일 구호가 북으로 유출되면서 한동안 북한이 완전히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당연히 북에선 게거품을 물며 책임자 처벌하라, 괴뢰당국의 호전광들은 광란의 댓가를 치룰 것이다! 라고 패악을 부려댔다. 입만 열면 남한 대통령들을 비방하고 서울 불바다에 갖은 협박질을 하는 놈들이 저러니 웃긴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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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히칸 스타일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강조하고 있다. 일명 백골컷(백골형두상)이라고 하며, 윗머리 9mm, 옆머리 1mm이다. 사단-연대-대대를 거치면서 계속 압박이 들어오고 간부들부터 머리가 잘려나가서 단기복무 간부 및 말년 병을 제외하고는[40] 병, 간부 할 것 없이 사이좋게 빠박이로 생활하는 수준. 윗머리를 좀 더 기르게 해줘야지 솔직히 윗머리 너무나 짧아서 멋도 안 나고 호구 같았었다. 정작 저걸 시킨 사단장은 백골컷을 안 했다고.

8.2. 사단가


1절.
돌격명령 내리면 비호와 같이
적을 쳐 무찌르는 조국의 방패
백골혼 이어받아 죽음을 겁내지 않고
조국통일[41] 선봉에서 싸워 이겼다
2절
조국산천 울리는 우리의 함성
승리의 깃발들고 전진 또 전진
오랑캐 무찌르고 보무도 당당하게
화랑의 후예들이 싸워 이겼다
후렴
우리는 백골이 되어도 싸워서 이기는
무적의 정예란다 우리 3사단

8.3. 부대구호


먼저 경례구호는 다른 부대와 달리 '''"백골!"''' 이라고 한다. 전군 유일한 구호 경례다. 1972년까지 경례구호가 "돌격"이었는데, 제25대 박정인 사단장이 '살아 국가에 충성하고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자'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현재의 경례구호인 "백골"로 변경하였다.

살아도 백골(白骨)! 죽어도 백골(白骨)! 필사즉생(必死卽生) 골육지정(骨肉之精)! 백골! 백골! 파이팅!

일명 백골구호. 사단 정식구호다.
그리고 부대 정문이나 그 인근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등에 대한 거친 격문들이 쓰여진 플래카드가 달려 있고 부대에 따라서는 연병장같은 부대시설에도 걸려있다. 아예 김씨 삼부자 사진을 영정마냥 검은 테두리 쳐서 걸어두는 부대도 있고 대치중인 북한군 부대의 지휘관들의 사진도 살생부로 걸어놓은 부대도 있다.
대적관 구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멸북통일 최선봉 천하무적 백골사단

쳐부수자 북괴군 때려잡자 김정은

김정은은 미친개 몽둥이가 약!(3회 반복)

부관참시 김일성 김정일 능지처참 김정은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42]

을 박자!(3회 반복)

위의 구호는 김정일 사망 이후에 변경된 버전이고 대적관 구호의 초창기 버전은 다음과 같았다.

'멸북통일! 최선봉! 천하무적! 백골사단!

쳐부수자! 북괴군! 때려잡자! 김부자!

김부자는! 미친개! 몽둥이가 약! 약! 약!

부관참시! 김일성! 능지처참! 김정일! 김정은!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 박자! 박자!(포병연대만 북괴군의! 가슴팍에! 포탄을! 박자! 박자! 박자!)

'''빡센 부대는 구호 역시 강력하다.'''
이는 대적관(對敵觀) 구호라고 하며 식사시간 때 취사장 앞에서 이 구호를 외치고 입장해야 한다. 위 구호는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자 바뀐 구호다. 2010년 12월에 최초로 제정되었는데 만들어질 당시에는 '멸북통일 최선봉 천하무적 백골사단, 쳐부수자 북괴군 때려잡자 김부자, 김부자는 미친개 몽둥이가 약!(3회 반복), 부관참시 김일성 능지처참 김정일! 김정은!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3회 반복. 단. 포병연대는 총칼 대신에 포탄이다.) 였다.
근데 이러한 백골부대의 부대 내부구호가 2013년 3월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에는 한미 연례 연합군사훈련 '키 리졸브'가 진행 중이었다. 이에 북한과 국내 종북세력들은 '최고존엄 모독' 운운하면서 맹비난을 퍼부었고, 자신들의 관영 TV에 이명박 당시 대통령국방장관, 합참의장 이름을 붙인 허수아비 표적에 사격을 가하는 선전영상을 내보냈다.
하지만 2018년 4월 이후, 북한과의 평화무드로 인하여 '''대적관 구호가 폐지'''되었다. 아무리 주적이라지만 너무 노골적인 멘트라 거부감이 들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폐지했다는 게 잘했다는 의견과 한편으로는 통일이 된 거도 아닌데 장병들에게 사기와 3사단 소속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주는 구호가 없어졌다는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천하무적 백골 구호는 다음과 같으며 주로 분·소대 이동시 쓰인다. 인솔자가 묻고 나머지 인원들이 대답하여 주고받는 형태.
아래에있는 진격구호와 함께 2009년 12월에 만들어졌었다.

천하무적 백골! / 천하무적 백골!

천!하!무저~억! 백골! / 천!하!무저~억! 백골!

삼팔선 최초 돌파부대는? / 이십삼연대!

혜산진까지 돌격부대는? / 이십이연대!

최북단 부령[43]

진격부대는? / 십팔연대!

적에게 가장 무서운 포병은? / 백골포병연대!

천!하!무저~억! 백골! / 천!하!무저~억! 백골

진격구호 역시 천하무적 백골과 마찬가지로 주고 받는 형태이며 다음과 같다.

우리 선배들이 지켜낸 자유 / 우리가 지켜 물려준다

우리 조국땅을 침범한 놈은 / 한 방에 날려버려

오늘은 걷고 내일은 뛰고 / 백두산 까지 진격

살아도! / 백골!

죽어도! / 백골!

필사즉생! / 골육지정! 백골! 백골! 파이팅!


9. 사건사고



10. 여담


국방부 제작 영화 크레파스의 무대가 된 곳이다. 또한 1990년대 회고풍 청춘영화인 1999, 면회도 작중 인물이 이 사단에 복무한다는 설정이라서 이 부대와 관련된 촬영지가 많다.
[1] 전신인 조선경비대 3여단의 창설일 기준이며 지금의 사단으로의 승격은 1949년 5월 12일. 사단 내에서도 5월 12일을 기준으로 창설기념식을 한다.[2] 한국전 당시 수도사단 소속으로 활약했으나, 원산 입성 이후 흥남 철수 과정에서 26연대와 배를 바꿔타는 바람에 3사단 소속이 되었다. 또한 서북청년회 병사들이 부대 내에 상당했고, 죽어서도 공산당과 싸우겠다며 백골 명칭을 쓰는 게 곧 부대 명칭이 되었다. 다만 휴전 이후 사단 이름을 보다 전투적으로 바꾸겠다는 사단장의 의지에 힘입어 백골이 사단 명칭이 되면서 이들은 원조 백골이라는 뜻으로 명칭을 진백골로 바꾸었다.[3] 원래는 쌍둘연대였는데 진격로 중 최북단에 위치한 함경남도 혜산진(현 량강도 혜산시)까지 갔다고 해서 바꿨다.[4] 이 초기배치 연대는 현재는 전부 다른 사단 예하부대이다. 단, 6연대의 경우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해체 후 22연대로 재창설되었다.[5] 그래서 승격일을 사단창설 기념일로 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중앙동에 창설기념비가 있다.[6] 6.25 전쟁 초기에는 수도사단 소속이었다. 흥남 철수작전 기간 중, 당시 3사단 26연대와 배를 바꿔타서 3사단으로 예속 전환되었다. 26연대는 수도사단 예속으로 변경[7] 사실 서북청년회 문서에 나오듯이, 이들과 연관되었다는 것 자체는 실제론 3사단에겐 썩 달가운 일은 아니다. 그나마 3사단에 입대한 이들은 정상적으로 자원입대를 해 군대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군인으로서 복무했던 반면, 다른 회원들은 민간의 신분으로 반공이라는 명분 하에 제주 4.3 사건 등 여러 폭행, 살인, 고문, 테러 사건들에 가담하였다. 이는 부대의 역사에 있어서 치부라고 할 수 있다.[8] 참고로 채명신 장군의 백골병단은 또다른 월남자들이 같은 동기로 자칭한 것 외엔 공통점이 없다.[9] 그런데 부대 역사 배울 때는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배운다.[10] 이 일이 있은 후 박정인 사단장은 보직해임되었는데, 그 이유는 박정인이 이 작전 이후에 북한군을 골탕 먹이려고 사단 모든 차량을 DMZ까지 진출시킨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일로 북한은 전시동원령까지 선포하였고, 여차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그것을 군단장이나 야전군사령관 허락없이 사단장 "단독"으로 한 것이다. 사실 DMZ로 군 병력을 보내는 것은 UN군사령부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당시에는 평시 작전통제권도 대한민국 국군이 단독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술한 규정들을 다 무시하고 실시한 것이다. 아무리 실제병력이 없었다고 해도, 군차량도 결국 군 병력의 일부이므로 이는 명백한 지휘통제 위반이다.[11] 6.25 전쟁 당시 3사단은 제2913부대로도 불렸다. 정승화 총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흥남철수 이후 3사단으로 18연대가 오자 사단장이 이제부터 우리 사단은 백골부대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상술했듯 공식으로 바뀐 건 휴전 후 여력이 생겼을 때다.[12] 네이버나 카카오 로드뷰에서는 이 조형물도 군사시설의 일부로 간주되어서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있다.[13] 물론 잔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맛스타였지만 2011년 1월 1일부로 생생가득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혹은 그냥 맹물[14] 다만 철원군 주민들이 수입 감소를 이유로 반발하고 나섰다.[15] 또는 육영수 여사가 부대마크를 보고 섬뜩하다고 해서 바뀌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16] 다른 사단마크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데 해골이 들어간 탓에 은근히 복잡하다. 게다가 9와의 연관성을 억지로라도 잡은 9사단과는 달리 해골과 3의 연관성이 없는 것도 한몫 했다. [17] 한국전 당시 수도사단 소속으로 활약했으나, 원산 입성 이후 흥남 철수 과정에서 26연대와 배를 바꿔타는 바람에 3사단 소속이 되었다. 또한 서북청년회 병사들이 부대 내에 상당했고, 죽어서도 공산당과 싸우겠다며 백골 명칭을 쓰는 게 곧 부대 명칭이 되었다. 다만 휴전 이후 사단 이름을 보다 전투적으로 바꾸겠다는 사단장의 의지에 힘입어 백골이 사단 명칭이 되면서 이들은 원조 백골이라는 뜻으로 명칭을 진백골로 바꾸었다.[18] 원래는 쌍둘연대였는데 진격로 중 최북단에 위치한 함경남도 혜산진(현 량강도 혜산시)까지 갔다고 해서 바꿨다.[19] 흥남 철수 과정에서 18연대와 배를 바꿔탔는데, 이 때문에 두 배의 목적지를 바꿀 수 없어 수도사단과 연대를 맞바꿨다.[20] 2019년 2월 28일 해체되었다.[21] 동백림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내쳐진 후 천도교 교령이 되었고 한국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활동을 벌이다가 월북한다. 11사단장 재직 당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주범이다.[22] 6.25 전쟁 당시 군단장으로 3.8도선을 최초 돌파했다. 흥남철수를 주도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친일파로 지정됐다.[23] 38선 돌파당시 사단장. 참군인으로 유명한 군인. 김백일과 같이 2009년 정부에 의해 친일파로 지정됐다.[24] 8대 합참의장. 15대 육군참모총장. 6사단장으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3사단장으로 현리전투에서는 대패한다. 이후 9사단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승한다.[25] 1973년 사단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북한의 대남도발에 포병 대응사격을 지시했었다. 2016년 2월 3일 향년 89세로 별세.[26] 12.12 군사반란 당시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하나회의 핵심 인물임에도 최전방 사단장이었기에 쿠데타에 가담할 수가 없었다. 이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김영삼 정부 출범 때 화를 면할 수 있었다.[27]육군참모총장, 제2작전사령관[28]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대적관 구호를 만들었다.[29] 사단장, 2군단장 역임. 前 제3야전군사령관. 합참시절 아덴만작전 기획. 처제가 중견탤런트 윤현숙인 줄 알았으나 처의 8촌 여동생이다. 김운용 대장의 장인과 윤현숙의 아버지는 동명이인인데 둘의 관계는 6촌 관계이고 김운용의 장인은 윤용남 전 합참의장과는 동갑내기 사촌 관계이자 육사동기(육사19기)이다.[30] 사단장 재임시절 백골컷 탄생의 장본인. '''비육사 출신 최초의 특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31] 사단장 역임 후 국방개혁비서관으로 영전하였다가 2019년 11월 8일 중장으로 진급하였는데 진급 후에도 6개월간 국방개혁비서관으로 있다가 직속상관인 제5군단장에 취임하였으며, 취임 다음날 자신의 후임 사단장이었던 신상균 소장의 이취임식을 주관하였다.[32] 관련기사# [33] 조교로 뽑혔다는 루머가 있었으나, 평범한 군생활을 하고싶다는 본인 의사에 따라 포병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34] 사실은 조교로 지원했다가 문신 때문에 조교에서 떨어졌다는 말도 있다.[35] 상황실에서 겨울에 새벽근무하다가 뉴스의 아침 날씨를 보면 분명 훨씬 북쪽인 블라디보스토크보다 추운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36] 번지점프도 가능하다.[37] 철원이 산으로 유명한 강원도에서 뜬금없이 양질의 쌀로 유명한 지역임을 생각해보자. 다만 담당하는 GOP 섹터 만큼은 험준한 걸로 유명하다.[38] 하지만 철원의 강설량은 강원도 지역 못지않으며 추위로는 강원도 일부 지역도 한 수 접어줄 정도이다. 단지 근무를 서는 섹터의 일부 지형만 편하게 되어있을 뿐이다.[39] 편한 섹터도 22연대가 18연대보다 덜 주목받는 이유에 포함되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주 침공로로 예상되는 평야지역도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40] 자대에 따라서 말년은 물론이고 제대 하루 전날에도 밀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41] 연평도 포격 사태이후 대적관 구호 생성과 함께 '조국통일'에서 '멸북통일'으로 바뀌었었다. 2018년 7월 1일부터 다시 '조국통일로 바뀌었다.[42] 포병연대는 종특상 '총안구에 포탄'으로 대체했다.[43] 함경북도 부령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