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갱
1. 개요
직역한 이름인 '새벽 종 국'에서 알수 있듯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 먹는 국'이라는 뜻이며, 배추속, 콩나물, 쇠갈빗대, 해삼, 전복, 버섯 따위를 된장 푼 물에 종일 푹 고아 만든 해장국이다. 해삼과 전복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한 등급 더 업그레이드된 곰탕 또는 해장국이라고 보면 되며, 《해동죽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는 '''한국사 최초의 배달음식이자 야식'''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입소문과 함께 남한산성 근처에 효종갱을 재현하며 판매하는 식당들도 생겨났다.
2. 역사
효종갱이 등장하는 문헌은 1925년 최영년(崔永年)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이다.
효종갱은 남한산성 일대인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인근에 위치한 갱촌에서 국을 끓여 한양 사대문 안으로 배달을 했다고 전해지며, 국이 배달하는 동안 식지 않게 솜에 싸서 보냈다고 한다. 음식 재료가 호화롭고, 배달을 시켰다고 하면 품삯도 추가적으로 들어갈테니 상당한 고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도 주로 사대부들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다른 주장으로는 경주시에서 한양까지 파발로 배달을 했다고하는데, 근거가 매우 미약하다. 조선 중기냐 후기냐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어느쪽이든 경주시에서 한양까지 파발로 달린다고해도 이틀 이상 걸리는 거리이다. 그것도 가장 비상시 최대 속도로 파발이 달렸을때의 이야기. 그런 먼 거리를 국단지를 매고, 또 쏟거나 파손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가며 한양까지 하루만에 도착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현대 시대의 고속도로와 자동차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서울에서 경주까지는 최소 4시간 이상 소요되며, 진공포장을 한 음식물이 아닌 이상 음식을 배달하기는 꽤 어려운 환경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경주 지역에서 한양으로 물화를 보낼 때는 말이 아니라 운하를 통한 배를 주로 사용했으므로 말로 배달시켰다는 주장은 더더욱 현실성이 떨어진다.[1]
3. 기타
효종갱의 유명세를 알 수 있는 이야기도 있는데 1851년(철종 3년)에 영의정을 지낸 안동김씨 세도가 김흥근이 효종갱의 명성을 듣고 언젠가 한번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어느 날, 전날 한잔 걸치고 일어나 망건 차림으로 새벽 일찍 와서 효종갱을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술이 덜 깼는지 돈을 미처 챙기지 못했고 졸지에 먹튀가 되어 곤욕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옆에서 한그릇 걸치고 일어난 한 봇짐 상인이 '이분 얼굴이나 행색을 보아하니 글 좀 꽤 읽은 선비 분 같다'고 옹호해주며 대금을 치러주었다. 호의에 감격한 김흥근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자의 통성명을 물어보며 몇 배로 갚으려 하자 상인은 '곤란한 사람을 보면 돕는게 도리요,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유유히 자기 갈길을 떠났다.
[1] 사실 남한산성에서 배달했다는 것도 믿기 힘들 정도인데 경주에서 배달이라니 현대에도 힘든 일이다. 더구나 조선은 환경조건상 도로교통이 발달하기 힘들었기에 더더욱 그렇다.